사람이 사람에게 반하는 데엔 보통 큰 이유가 없다.


그냥 외모를 보고 한눈에 반하는 건 흔한 일이고, 그 사람의 됨됨이나 성품이 마음에 들어 호감을 가졌다가 그게 연심으로 변모하는 일도 많다. 좀 불건전한 사례로는 키스를 잘한다던가, 밤일을 잘해서 반했다, 하는 것도 있고…… 미치광이가 아닌가? 하는 사례로는 뺨 맞고 나서 ‘나한테 함부로 한 건 네가 처음이야’ 하는 대사와 함께 정분이 나는 경우가 있다고들 한다.


중세 유럽의 왕과 왕비가 그렇게 눈이 맞아서 금슬 좋은 부부가 됐다는 소리도 있었는데, 일단 실제 사례가 있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는 것 같다. 물론 난 그 신빙성이 두렵지만.


“물자 목록은 대강 파악 끝났어요. 요구 보급품들도 사유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니, 아마 2주 안에 보급될 겁니다.”


카린이 뭘 보고 나에게 반했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방독면은 굳이 필요해요?”


“G03 구역에 유황광산이 있어. 광산 내부 움직임이 신경 쓰여서 조사해봐야 할 것 같거든.”


내가 카린에게 반했던 점? 솔직히 외모를 아예 보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처음 봤을 때부터 귀여운 아이라고 생각했으니 자연스레 호감은 갖고 있었지. 하지만 그 작은 호감이 연심으로 자라나는 것엔 생각보다 거창한 이유가 필요하진 않았다.


보는 사람도 즐거워지는 활달한 성격, 붙임성 있던 귀여운 부분, 그러면서도 때때로 인형들을 상대로 보여주는 어른스러운 포용력이 매력적이었다. 그 포용력은 특히 다른 부분에서도 발휘되기도 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좀 미안하다 싶은 게 많았다.


화장실, 야외 한 구석, 책상 아래…… 아무래도 피 끓는 나이인데다 업무 스트레스도 과중했으니 한 번 터질 때는 뒷일 생각 없이 막질렀다 싶은 게 많았다. 그리고 당시의 카린이 나보다 어렸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그 정도의 너그러움을 보여준 건 새삼 돌이켜봐도 대단했다.


아니면 본인도 즐겼던 걸지도 모르고.


“예전보다 안 좋아졌다곤 해도 단원들 소체 성능이 그렇게 떨어지진 않잖아요?”


그리고 이런 부분이 매력적이었다. 착실하게 일하는 성실함.


“없어서 문제 생기는 것보다는 낫거든. 사소한 것도 지원 받을 수 있을 때 확실하게 챙기는 게 좋고.”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없는, 동시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철저히 일에 대한 얘기만 하는 태도.


이야기 나누는 것만 본다면 전날은 고사하고 바로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조차도 상상하기 힘들다.


“꼼꼼해지셨네요.”


“예전이랑 비교하면 아무래도 신경 안 쓰던 부분까지 신경써줘야 하니까.”


“…….”


이런 사무적인 태도를 보고 내가 서운해 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오산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오히려 이런 공사구분 철저한 부분이 안심되었다.


적당히 안면과 친분이 있는 지인. 어느 정도 사정 봐가며 융통성을 발휘해줄 수 있는 중간 다리. 그 역할로써 카리나는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공적인 부분에서 쓸데없이 사적인 모습을 보여 인사 변경이라도 초래된다면 가뜩이나 열악한 상황에 곤란해지는 건 이쪽이다.


보는 눈이 없을 때 예전처럼 엉덩이 정도는 슬쩍 더듬어보고 싶지만…… 괜히 제 역할 해내며 열심히 하고 있는 카리나에게 경박한 짓을 하는 것도 그렇겠지. 무례한 짓이기도 하고.


“뭐 어쨌든 물자랑 보급 상태는 이걸로 됐어요.”


“수고했어.”


어쨌든 그게 내가 카린에게 홀딱 반한 두 번째 요소였다.


“이제 차량이랑 드론 쪽도 확인해보고 싶은데, 안내해주시겠어요?”


그리고 그 사실을 곱씹고 있다 보면, 역시 내가 마음속에 갖고 있던 믿음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재차 확신할 수 있었다.


“…….”


“…….”


사람이 이미 반한 사람에게 두 번씩 반하는 일도 있다고.


그렇게 같은 사람에게 두 번씩 반했다면, 역시 세 번씩 반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고.


“……지휘관.”


“응.”


“계속 얼굴만 쳐다보지 말고 빨리 안내해주세요.”


“미안. 잠깐 기절했어.”


카린은 내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듯, 사람을 바보처럼 보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뭐 실제로도 큰 의미는 없었다. 별 뜻 없는 헛소리였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흘러가는 영양가 없는 말 사이에서 갑작스런 부정맥이라도 발병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내해줄게. 커브, 마무리 부탁해.”


“Aye, Aye Sir~.”


타인의 것이던 자신의 것이던 죽음은 인간에게 큰 충격을 준다.


카린이 돌아서며 나를 올려다본 순간, 나는 그 한 순간 심장이 멎었다는 걸 느꼈다.


그 한 순간의 정지가, 그 한 순간의 죽음이 몸 안을 헤집은 다음 빠져나갔다.


아, 이거 진짜 큰일이었다.


어쩌면 나는 카린에게 세 번째로 반해버렸을지도 몰랐다.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난 아무 저항도 불가능한 상황에 혼자 내던져져 있었다.


나는 그 난관을 이해하지 못했었고, 결국 자력으로 벗어나지도 못했다.


“너희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


카린은 그걸로 업무 종료였다.


마침 차량 정비반에 있던 레나가 같이 안내를 해준 다음 -워낙 붙임성 좋은 성격이라 카린이 좀 딱딱하게 굴어도 대화는 잘 이끌어나갔다.- 리바는 요새 어떻게 지내냐면서 그쪽 이야기도 좀 해달라는 핑계로 데려가 버렸다.


가는 김에 같이 갔으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내 업무는 남아있었다.


평소대로 들어온 의뢰를 확인하고, 장비와 유지보수에 필요한 예산을 편성한 다음,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안내 자체도 사실 메이링이 해야 할 일이었지만, 이번 보급은 요청한 사람이 나여서 대신 나섰다.


“그로자, 캐롤릭. 부탁할게.”


그래서 내가 지금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였다.


“오늘만 내 업무 대신 해줘.”


“…….”


“…….”


일단 캐롤릭의 반응은 환상적이었다. 대놓고 혀를 차고 싶은 표정으로, ‘안 그래도 네메시스 때문에 짜증나는데 왜 너까지 나한테 이러느냐’ 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로자는…… 코로 한숨을 내쉬며 ‘이 남자를 어떻게 하지’ 하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적개심은 누가봐도 그로자 쪽이 적었지만, 왜인지 그로자의 반응이 더 뼈아팠다.


“……일단 사유부터 물어봐도 될까? 지휘관.”


“메이링이 과로사 직전이야.”


한숨이 두통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그보다 더 마음이 아팠다. 세상 어느 부족한 상사가 부하에게서 저런반응을 이끌어낸단 말인가. 누군지 몰라도 그 사람은 상사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게 철저히 남의 이야기고 내 이야기만 아니었다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이 이상 뭘 부탁할 여건이 안 돼. 시찰 뜨기 전부터 관리국 맞을 준비한답시고 매일 같이 야근하던 애였는데, 요 며칠 카리…… 관리국 분이 오고 난 후부터는 야근도 모자라서 카페인까지 빨아대고 있어.”


“그래서 우리더러 짬을 때리시겠다?”


신랄하게 한마디 내뱉는 캐롤릭. 하지만 나한테도 변론…… 이 아니라 변명은 있었다.


“베프리는 하는 짓이 방정맞아서 안심이 안 돼. 커브랑 페리티아는 메이링처럼 다른 할 일이 많고, 조용히 진행시키고 싶은 일인 만큼 일 벌려놓을 것 같은 레나는 꺼려져. 네메시스는…….”


차마 말할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내 말흐림에 화가 났는지, 아니면 네메시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했는지, 캐롤릭은 끝끝내 혀를 차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마음이 아프다.


“지휘관. 일단 한 가지 정정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물은 사유는 왜 ‘우리한테’ 부탁을 하느냐가 아니야.


‘왜 그런 부탁을 하느냐’ 쪽이지.”


“그건…….”


“카리나 때문이야?”


이젠 심장이 아팠다. 정곡을 찔려서. 아니면 진짜로 부정맥이거나.


“……응.”


“데이트?”


“그렇게 거창한 건 아냐. 그냥 저녁이나 같이 먹고, 영화나 한 편 보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와인이나 한 병 깔 생각이었다.


“해결 봤어?”


“뭐 어떻게든.”


서류에 쪽지를 끼워뒀으니 못 보진 않을 것이다. 다른 약속도 없으니 분명 오겠지.


“확답이 나온 거야?”


“…….”


그러다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지휘관?”


어제는 품에 안았고, 오늘 아침엔 마지못해 서로 입을 맞추었다.


조금 거리를 두려 하긴 했지만 나는 카린이 그걸로 마음을 풀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우리 둘이 자연히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확답이 있었나? 확답은 없었다.


‘여, 역시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지휘관님…….’


유일하게 있었던 대답은 부정뿐이었다. 그 이외엔 무엇도 대답이 될 수는 없었다. 카린은 얼버무리고 회피하기만 했을 뿐, 긍정적인 것에만 한정시킨다면 제대로 된 대답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것을 자각하자 적잖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얼마나 경솔하게 행동한 걸까? 얼마나 경솔하게 일이 전부 끝났다고 생각해, 멋대로 카린을 취하려 했던 걸까.


“확답은 없었어.”


“…….”


“오히려 거절당한 것 같기도 한데…… 뭐, 그래도…… 아주 가능성이 없다고는…….”


“…….”


“없다고는…….”


나는 왜 변명을 하고 있는 거지.


“하, 나도 참 무슨 생각을…….”


“지휘관.”


“…….”


“지휘관?”


“……듣고 있어.”


5초 뒤, 하극상이 벌어졌다.


“잠깐 가까이 와볼래?”


“왜?”


그야 뭐 상사인 지휘관이 이런 한심한 모습만 보여준다면, 나라도 멱살을 잡고 한 대 패고 싶긴 하겠지.


하지만 그 행위의 실행 주체자가 캐롤릭이 아니라 그로자였다는 게 상당히 의외였다.


“……?!”


놀라서 비명도 못 질렀다. 멱살이 아니라 목덜미를 낚아채듯 확 휘어잡고 끌어당기는 그 박력에, 도리어 캐롤릭이 깜짝 놀라 토끼처럼 눈을 땡그랗게 떴다.


“지휘관. 사생활적으로 좀 민감한 질문이 될 수도 있어. 대답할 수 있어?”


킁킁, 작게 들려오는 코 울리는 소리.


“어제 카리나랑 잤어?”


“…….”


대답 못했다.


“대장, 지금 뭐하는 거야?”


“지휘관한테 체취가 남아있어.”


캐롤릭이 만류했지만, 처음부터 그리 강하게 잡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머지않아 멱살을 잡은 손아귀의 힘이 풀렸고, 스르륵 빠져나온 와이셔츠에는 약간의 구김만 남았다.


“여자는 말이야.”


진지한 눈으로 말하는 그로자.


“남자랑 다르게 이성관계에 있어선 더 없이 계산적이거든.”


“……뭐?”


“애초에 자기 앞날에 도움이 안 되는 남자는 붙잡지도 않아. 잠깐 붙잡아도 빨아먹을 거 다 빨아먹고 손절을 치고 말지. 그리고 적어도 내가 아는 지휘관은 절대 그런 무능한 부류라고는 말 못해.”


젤린스키와 훈작사의 평가 이후로, 날 고평가하는 말이 저렇게나 불안한 적이 있었던가.


“남자가 자기 침대 위로 여자 하나 불러들이려고 장난 아니게 인내심을 발휘하는 건 알아. 하지만 그런만큼 여자가 침대 위에 올라가고 난 후부터 남자 하나 휘어잡겠다고 얼마나 인내심을 발휘하는 지도 알아.”


다리를 꼬며 팔짱을 끼는 그 여유에 대장의 관록과 연륜이 묻어났다.


그리고 그 관록과 연륜만큼이나, 내 절망이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질문하긴 했지만 대답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이 이상 잔혹한 전망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니까 카리나가 어떻다,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으로 단정 지을 순 없어. 그냥 하나만 말해둘게.”


하지만 그로자는 가차 없었다.


조금의 연민도 없이 냉정하게 현실을 들이밀고는.


“아무리 인내심을 발휘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한테 그렇게까지는 못해.”


“…….”


상자에서 희망 하나 남겨주듯, 아주 약간의 여지만을 남겨주었다.


“물론 지휘관의 위치를 생각하면 미인계 같은 걸 쓰려고 할 수는 있겠지. 거절했다는 걸 보면 오히려 밀당 같은 걸 시도해서 아예 자기한테 목을 매게 만들려고 하는 걸 수도 있어. 하지만 왜?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물론 관리국 입장에서야 어떻게든 목줄 하나 더 채워놓고 싶어 하겠지. 대놓고 비협조적으로 나올 일은 없다고 해도 지휘관은 이미 루련에서 뛰쳐나온 전례가 있으니까.”


‘하지만 카리나는?’ 답답한지 목 부분의 카라를 살짝 당기며 그로자가 의문을 말했다.


“그 당찬 아가씨 입장에서 그런 걸 받아들일까? 싸우고 헤어졌다고는 해도 한 때는 사랑했던 사람인데, 같이 목숨 걸고 수라장까지 헤쳐 온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속인 다음 매춘부 마냥 감정팔이 몸팔이 해서 목줄을 잡아 놔라? 말도 안 돼. 그 관리국조차도 옛 사장님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어. 자기 딸 같은 여자를 매춘부 마냥 쓰라고 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로자, 네가 말한 대로라면…….”


“그래, 차라리 사위 들이려고 하는 거면 말이 되지. 근데 개 취급하는 거랑 가족 취급하는 건 별개의 문제 아닐까?”


“…….”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돌이켜 보니 연기하는 것 같았다거나, 진심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은 있었어?”


“……아니.”


그런 것도 없었다.


“그럼 반대는? 누가 봐도 진심으로 느껴질 법한 부분은?”


그로자의 말에 순간적으로 내가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쳐지나가며 한 순간의 이미지를 상기시켜냈다.


‘그럼 그 목걸이는 뭔데?’


머리카락으로 물이 흐르고, 쇄골에 고인 다음, 고이다 못해 흐른 것이 사슬을 휘감아 떨어진다.


그 끝에 반지 하나가 메여있었다.


“사욕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지휘관이 그런 건 생각도 못할 정도였으면 애초에 계산적인 부분은 없었을 가능성이 커. 거절한 건 공적인 자기 입장도 있고, 괜히 지휘관 발목 잡기 싫어서 밀어내려한 걸 수도 있지.”


‘만에 하나 사욕이라고 한들 어때?’ 잊고 있었던 무책임한 듯한 말이 다시 한 번 나왔다.


“지휘관도 공무관 여친 하나 두면 아쉬울 건 없잖아?”


“야…….”


“연인 관계도 어떻게 보면 다 그런 식이야, 지휘관.”


“…….”


“너무 앓지 마.”


정말이지 무신경하다.


뭐 그런 걸로 심각해지냐고 말하는 것만 같은 무신경함.


“근데 대장은 남자 사귀어본 적도 없잖아.”


“……그렇지.”


뭐 그래도 괜찮지 않았을까.


되려 고민한 내가 바보 같아졌다.


“고마워.”


적어도 그 무신경한 마무리에, 마음이 편해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지휘관. 그 대리 업무 말인데…….”


“후회와 미련, 꽃잎들.”


““…….””


“강을 따라서, 호수를 따라서 떠내려 온다…….”


데자뷰? 이 전개 바로 어제도 본 것 같은데 기분탓일까?


“……지나가다가 누가 말 좀 전해달래서 왔다는데.”


아, 그래도 다행이다. 캐롤릭이 여기 있어서.


“누가?”


“손잡이를 보고 칼끝을. 뿌리를 보고 나무를. 강물을 보고…….”


“공무관 아가씨.”


그게 왜 그렇게 해석되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모르겠다는 것에서 멈추고 그 이상 생각을 이어나가진 않았다. 머리만 아프니까.


“그래서 카린…… 카리나가 뭐라고 말했는데?”


“황혼이 내릴 무렵 이슬이 저문다. 별들이 남몰래 흩뿌린 눈물이.”


“저녁에 만나자는 약속, 승낙했다는데.”


“그런가.”


설마 카린이 저렇게 말한 건 아니겠지.


“유실을 걱정하는 자, 풍화에 격노하는 자. 뿌리와 뿌리…….”


“……뭐?”


“한 포기 잡초…… 그 또한 흙 한줌을…….”


“돕긴 뭘 도와? 필요 없어! 넌 가서 니 할 일이나 하는 게 돕는 거라고!”


“멎어든 바람소리…… 흩날린 모래자국…….”


“대리 업무가 싫다고는 한 마디도 안했거든?!”


“어…… 그럼 해주는 거야?”


“그…….”


캐롤릭이 잠깐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귀찮고 짜증나는데 방금 전까지의 대화를 듣고서 모질게 거절할 수도 없고. 막상 하자니 또 네메시스가 귀찮게 엉겨 붙을 것 같아서 짜증나고.


“정 뭣하면 다른 인원들이라도 더 붙여줄게.”


“응? 지금 여유 있는 녀석이 더 있어?”


의외라는 듯 되묻는 그로자.


“베프리가 있잖아? 하는 짓은 못미더워도, 응원은 잘할 테니까…….”


“할 게! 할 테니까 이 이상 짐은 늘리지 마!”


해결 됐네.


“뭐, 그럼 부탁할게. 세 사람.”


“야 잠깐! 왜 셋이야!?”


“서로 싸우지 말고, 무리하지도 말고, 복잡한 서류나 결정내리기 어려운 건 따로 빼놓고. 할 수 있지?”


“아니 어째서 셋이냐니까!?”


“수고해줘. 내일 봐.”


“설마 네메시스까지 같이 하라는 건 아니지!? 야! 지휘관! 야!!”


그렇게 나는 부하직원들의 처절한…… 아니, 철저한 자기희생으로 카린과의 저녁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캐롤릭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모르겠다, 그런 건.


그로자에게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거창한 걸 준비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냥 카린이 좋아하는 걸 몇개 만들고, 같이 저녁 식사나 하면서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려 했을 뿐이었다.


물론 저녁 다음의 일을 기대하지 않은 건 아니다. 음흉하다고 해도 반박할 마음은 없다. 이미 세상이 반쯤


은 멸망했는데, 남자에게 음심마저 없었다면 인류는 진작 멸종했겠지.


하지만 시작부터 이렇게나 성욕에 불이 붙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


“…….”


정장 아닌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내가 가장 익숙하게 기억하고 있던 카린은 역시 재킷에 미니스커트 차림이었지만, 둘만 있을 때는 서로 조금씩은 편하게 입고서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었다.


서로에게 완전히 익숙해지고 난 다음에는 볼꼴 못 볼꼴 다 보여주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연애 초기에는 편하게 입어도 나름 코디에 신경 쓴다던가 했던 것 같다.


“……그냥 여기 계속 세워둘 거예요?”


“어, 아니. 들어와.”


그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처럼. 다리와 몸매 라인이 다 드러나는 스포츠 레깅스에 하얀 티셔츠 한 장을 입고, 부끄러워서 가디건 후드로 머리를 푸욱 눌러 쓴 것처럼.


“실례하겠습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얼마나 많이도 카린을 덮쳤었는지. 얼마나 앙앙대며 나에 대한 질책과 원망의 말을 내뱉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그 익숙한 모습을 볼 기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요리하고 있었어요?”


“응. 다했으니까 이제 먹기만 하면 돼.”


새삼 내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가 되새기고 만다.


“앉아 있어. 금방 내줄게.”


“……네.”


어쨌든 저녁은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딱딱한 태도를 고수하던 카린도 파스타 몇 입, 미트파이 몇 조각을 먹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먹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핫, 하는 느낌과 함께 머리를 흔들고 어떻게든 아무렇지 않은 척 하긴 했지만…… 다 들킨 마당에 별 소용은 없었던 것 같고.


“후식은 뭐 먹을래?”


“됐어요. 살찔 것 같아요.”


그래도 태도는 꽤 누그러들었던 것 같다.


“딸기치즈케이크 있는데.”


“……주세요.”


술이 또 의외로 효과적이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접대 받으면 곤란한데…….”


“싸구려 와인에 저녁 한 번 먹었다고 뭐라 하겠어?”


술 취향도 바뀌었는지 와인이라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예전에 IDW가 그랬었잖아, 창고에서.”


“아하하하- 맞네요. 그런 적도 있었죠?”


주는 족족 연거푸 받아먹던 카린은 오래 지나지 않아 취해버렸다.


“그래서 그때 웰로드랑 리엔필드가…….”


“네…….”


문제가 있었다면, 효과적이긴 했어도 결과물이 예상과는 달랐다는 점일까.


“그리고 또…….”


“…….”


“……?”


“…….”


“카린?”


서로간의 하잘 것 없는 일상이나 시시껄렁한 농담들, 그리고 10년 전의 추억들을 떠들며 피식피식 웃던 카린은 차츰 말수가 적어지더니 입을 다물어버렸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적은 없었다. 술에 취해도 카린은 헤실헤실 웃거나 애교를 부렸지, 울상 한 번 지은 적 없었다.


“그만해요.”


하다못해 고개 한 번 떨군 적, 조용히 잠에 든 적조차 없었다.


“지휘관.”


카린은…….


“저는 더 이상 카린이 아니에요.”


“…….”









정적에 물드는 방안. 조용히 바닷속을 유영하는 디스플레이 속 해파리. 둥실둥실 조류를 따라 떠다니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다급해지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지나치게 많아지면 생태계 입장에서 좋을 건 없다지만, 솔직히 세계가 이 지경이 되고나면 저 많은 숫자조차도 묘한 안심을 주게 된다.


푸른 바닷속에서 흩날리는 하얀 눈발들은, 넓고 한없는 바닷속을 약간이나마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불가능해요. 아무리 예전으로 돌아가려고 해도 이젠 불가능해요.”


“…….”


“한 번 끝난 걸 아무 일 없었던 것 마냥 돌이킬 순 없어요.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라구요.”


옷은 흐트러져 있었다. 다리는 아무렇게나 뻗어놓고, 허벅지 위에서 와인잔을 가지런히 모아 잡고 있었다. 그 유리잔이 천천히 기울어지면, 조르륵. 몇 남지도 않은 와인 방울이 카펫을 빨갛게 적신다.


그리고 어디로 흘러내린들, 그저 투명하게 적실뿐인 눈물 한 방울이 카린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이제 절 놔줘요.”


아주 잠깐.


발밑이 무너졌다.


카펫이 바닥없는 늪으로 변해, 날 집어삼켰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위기 그 자체였던 것 같다.


태어나기 전부터 붕괴액이 터지고, 나는 그런 멸망한 세상에서 태어났고, 유년기 때는 3차 세계대전을 겪었지. 청년기 때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젊은 날에 건너온 사선의 수만 해도 열손가락이 부족했다.


그 사실을 자랑으로 여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딜 가든 끊이지 않고 들려왔던 사람들의 비명소리. 그런 것들을 술자리에 앉아 씹을 수는 없었다. 술안주로 삼기에는 지나치게 비린내 나는 안주들이었다.


‘지휘관님?’


내가 살아남은 건 내가 유능해서가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옆에 있어줘서, 순전히 그것 하나로 악운이 좋아 살아남았을 뿐이다.


디스트로이어가 지휘부를 폭파시켰을 때도 지휘패널은 멀쩡했었다. 특수작전사령부가 배신해 그리폰이 궤멸 당했을 때에도 내 옆에는 M870과 M82A1이 있었다. 하다못해 한참이 흘러 팔디스키 기지에서 열차가 파괴당했을 때조차도 내 곁에는 날 믿고 따라주는 부하들이 있었다.


‘…….’


하지만 그 곳엔 아무도 없었다. HK416과 UMP45가 구조하러 오기 전까지, 난 아무 저항도 불가능한 상황에 혼자 내던져져 있었다. 나는 그 난관을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자력으로 벗어나지도 못했다.


‘지휘관님…….’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표정은 숨길 수 있었다. 악몽 속에 젖어 허우적대다 식은땀을 두르고 깨어나도, 해가 떠있는 동안 그걸 알아차릴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마음에 병나는 것엔 약도 없다지만, 그걸 굳이 티내서 없는 약을 내놓으라고 닦달할 수도 없는 노릇.


‘고마워요.’


‘…….’


역시 카린에게 보급관은 어울리지 않았다. 피아노를 쳐도 어울렸을 테지만, 의사가 되어 아픈 사람을 어루만져주어도 좋았을 것이다.


잠 못 드는 밤. 악몽을 꾸고 불안정한 호흡을 필사적으로 가다듬는 밤. 카린이 그저 두 팔 벌려 안아주기만 해도 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 거창한 걸 해준 게 아니었는데도, 카린의 품에 안겨 서로 살을 맞대고 있노라면 지난 끔찍한 기억들이 전부 잊혀져갔다.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


그 날이 내가 카린에게 두 번째로 반한 날이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막 다루고 거칠게 안고 싶다는 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었다. 말로 장황하게 떠드는 재주가 없어서, 하지만 그런 만큼 가슴 속에서 안달 나듯 피어오르는 불꽃을 꺼뜨릴 방도조차 찾을 수 없어서, 나는 그렇게나 거칠게 카린을 안았다. 의지한다는 핑계로 동물처럼 범했고, 같이 낮잠을 잔답시고 동침했다가 새벽 2시에 깨어난 적도 있었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재우지 않은 적도 많다. 당연한 말이지만 엉덩이 좀 때린 것 빼고는 폭력 같은 걸 쓴 적은 추호도 없었지만, 모르는 사람이 봤었더라면 -물론 누군가가 봤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였겠지만- 내가 카린을 강간한다고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업무 중에는 자제 좀 해달라며 곤란한 얼굴을 하다가도 못내 허락해주던 너그러움. 남자는 한 번 하면 끝나는 거 아니었냐며 기겁하듯 울먹이던 표정. 몇 번씩 가버려 바닥을 흠뻑 적시고는, 제발 용서해달라고 울며 사정하던 모습까지.


그런 카린이 얼마나 귀여웠는지 일장연설로 떠든들 소용없다.


카린은 나에게 그런 존재였다.


카린한테도 내가 그런 존재였으면 싶었지만, 그건 너무 이기적인 거겠지.


“끝났다고 생각한 적 없어.”


“…….”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


하지만 이젠 이기적이어도 상관없었다. 나는 카리나를 끌어안았다. 카린이 아닌 카리나를 꽉 끌어안았다.


“잠깐이라고 생각했어. 잠시 사이가 틀어져서 못 만난다, 그렇게 낙관적으로만 생각했었어.”


이 향기, 이 감촉, 이 체온. 이 기억들을 잊고서 내가 어떻게 지난 10년을 살아온 걸까.


“미안해, 카리나.”


지나치게 사무쳐, 이제는 둔감해진 외로움. 그 둔감해진 상처를 핥아주며 나는 또 한 번 카리나에게 용서를 구했다.


“좋아해.”


작은 떨림이 일었다.


팔이 천천히 등을 감쌌다.


“옛날의 카린, 지금의 카리나, 그리고 먼 훗날의 너. 그 모든 걸 통틀어서 네가 좋아.”


그 떨림이 흐느낌으로 변하는 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무 등걸을 껴안는 것 같은 어색함도 오래 가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좋아해.”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카리나는 한참을 울었고, 나는 다시 품에 안긴 카리나의 온기를 한참 동안이나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서로 입을 맞췄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모닥불에 기름을 끼얹듯, 서로가 서로를 향해 참아왔던 애정은 그대로 둑이 허물어지듯 서로에게 향했다.


알게 모르게 시작된 애정. 얼마 가지 않아 우리는 서로를 원하기 시작했다.









촉촉이 젖은 눈가에 눈물 한 방울이 매달린다.


파란 바다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파란 빗방울.


“으읏…….”


혀로 핥으니 카리나가 신음을 내며 한 쪽 눈을 감았다. 달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울고 있는데도 달콤한 맛이 났다.


“아아!”


“큿…….”


고통스러운 신음과 기쁨에 찬 비명. 젖지도 않은 여성에게 수컷을 집어넣는, 차마 하고 싶지는 않았던 폭력적인 행동.


하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카리나가 고집을 부렸다. 치사하고 비겁하게도 울먹이는 얼굴로, 마치 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또 자신을 버리고 떠날 거라고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넣어달라고 사정했다.


전희 후의 본방이 아닌, 삽입 후의 전희. 순전히 카리나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이 행위는, 남자 입장에서도 꽤나 고통스러운 감각이었다. 하지만 아파하며 등자락을 꽉 끌어안는 카리나의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런 불평 따위는 할 수도 없었다. 아파하면서도 더 없는 안심에 젖어 황홀해하는 표정을 보고 있자면, 그딴 불만은 따위로 취급하고 씹어 삼킬 수 있었다.


여태껏 내 멋대로 했으니, 한 번쯤 어울려준다고 얼마나 억울할까.


“다시…….”


내가 안고 있는 여자는 그렇게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다시 하나가 됐네요…….”


“……응.”


그리고 침묵이 시작됐다. 침대 위에 몸을 겹친 채 오도카니 앉아있는 남녀. 그 사이로 울려 퍼지는 심장소리에 묻혀 침묵이 시작됐다.


정박과 엇박을 메우는 어긋난 소리.


서로를 안고 있기에, 서로를 빗겨볼 수밖에 없는 시간.


“아…….”


허벅지 아래를 손으로 쓸자 카리나가 흠칫 떨며 간지러워했다. 엉덩이를 쓰다듬으니 부끄럽다는 듯, 귓가가 벌겋게 물들었다.


“아앙.”


그 귓바퀴를 식혀주려 입으로 살짝 무니 카리나가 교태부리며 몸을 뒤튼다. 혀를 넣고 핥으면 내 머리카락을 휘어잡으며 살짝 행복하게 웃다가, 다시 교성을 내뱉으며 느끼는데 여념이 없다.


그렇게 나는 카리나의 볼에 키스했다.


그렇게 나는 카리나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렇게 나는 카리나의 가슴을 물었고, 가슴 아래로 진한 숨을 내뱉었다.


“아…… 하아…….”


정박이 엇박이 된 건지, 엇박이 정박이 된 건지.


서로의 심장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어느 순간 일치해 똑같이 뛰는 걸 느끼고 만다.


그것을 자각하고 카리나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다. 그 일체감과 안심감에 느끼는 듯, 뱃속을 꽉꽉 조여대며 흠칫댄다.


“……된 것 같네?”


“……된 것 같네요.”


깨닫고 보니 이미 다리 사이는 꽤나 젖어있었다. 제대로 된 전희도, 애무도 없이. 그저 어린아이 장난 같은 속삭임으로 이루어진 결과물.


그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카리나가 시선을 피했다. 찌걱찌걱, 시험 삼아 가볍게 움직여본 물건에 무시 못할 쾌감이 달려, 나 또한 한순간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꺾일 뻔 했다는 건 비밀이었다.


“……움직일게.”


그래도 괜찮았다.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 제자리를 찾아 맞춰져가는 것 같았다.


“흐아앙!”


굶주렸던 몸, 오해했던 마음, 한 번 부서졌던 관계. 그 모든 것들을 진한 그리움과 추억을 밑거름 삼아 끼워 맞추고 기워낸다. 그렇게 끼워 맞춘 어긋난 조각들을 다시 한 번 부서져라 껴안는다.


그 무수한 반복 속에서 균열이 남는다. 짜 맞춘 조각들 사이로 금과 흉터가 남지만, 그 둔통 가득한 열상조차 이제는 기쁨이 된다.


“지, 휘관…… 앗, 지휘관!”


넘어갈 듯 허리를 젖히고 허덕이는 카리나. 치솟는 사정감을 필사적으로 누르며 그 가는 허리를 끌어안으니, 가슴에 내 숨이 닿는지 흠칫흠칫 쾌감에 빠진다. 잠깐의 숨고르기, 오르락내리락하며 부풀었다 꺼지는 젖가슴.


“아앗! 아! 꺄앗! 으응!”


제 버릇은 남 못주는 걸까. 거칠었다. 흔들리는 가슴을 움켜잡고, 한 번 내부를 찌를 때마다 돌리듯 거칠게 주물렀다. 자지러지는 카리나의 교성. 그 교성에 고통이 섞여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나는 손길을 누그러트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아파하라며 젖가슴을 쥐고, 내부를 파내듯 들쑤셨다.


키스마크 새기듯 고통을 새기는 과정.


“윽……!”


그렇게 천장을 바라보던 카리나가 무의식적으로 허리를 놀렸다. 본능을 넘어선 관능적인 움직임. 그리고 관능을 넘어서서 천박하기까지 한 그 움직임이 향하는 곳은 오로지 쾌락뿐이다.


“하악, 하악, 좋아요?”


성큼, 불안한 목소리로 카리나가 물었다.


젖혀지던 머리를 바로 세우고, 목에 팔을 두르고 하는 질문이었다.


“지휘관, 님…… 하앗, 저, 좋아요?”


기분이 좋냐는 질문인지, 아니면 본인이 좋냐는 질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응.”


다만 어느 쪽이던 대답은 똑같았기에, 난 이중적인 말투를 담아 대답했다.


“나, 나도…… 아읏, 지휘, 관, 님…… 좋아…… 아앙!”


그 말도 분명 똑같았을 것이다.


“흐윽!? 으으으읏!!”


첫 번째 절정이 몸속을 떨었다. 팔, 가슴, 배, 이어지고 닿은 모든 곳에서 전해지는 떨림에, 작은 소름이 등골을 훑었다. 또 한 번 흘러내리는 푸르른 눈물. 그것을 위로하듯 난 카리나의 뺨을 천천히 핥았다. 카리나는 혀를 핼쭉 내민 채 숨을 몰아쉬다, 내 머리를 잡고 입을 맞췄다.


“후읍, 응, 우응.”


카리나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리려던 계획은 그걸로 무산됐다. 이성을 박살내는 애정표현에, 아플 정도로 커져있던 양물이 한층 더 분노했다.


“후읏……!”


입안에서 기쁜 듯한 비명이 울렸다. 쾌락에 녹아내리는 몸을 끌어안고, 살집 좋은 엉덩이를 받쳐 들고 세차게 허리를 움직였다.


“흡, 큿, 아앙!”


혓바닥 사이로 이어지던 타액이 공중을 날았다. 서로 이어져있는데도 멀어진 입술이 서운했는지, 카리나는 숨이 차서 허덕이는 와중에도 울상을 지었다. 우는 얼굴을 지워주기 위해 다시 입을 맞추면, 마치 사탕이라도 받은 아이처럼 눈물을 지우고 행복해한다.


뱃속을 찌르고 헤집는 미칠 것 같은 감각.


그 감각에 카리나는 세우고 있던 다리를 미끄러트렸다. 등 뒤로 뻗은 다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지더니, 이내 허리를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두 번째 절정이었다.


“아, 아아…… 아♥


그 다음은 단편적인 기억만 남아있었다.


철썩대며 살을 부딪는 감각, 기둥의 뿌리와 고환을 거쳐 애액이 흐르는 느낌, 거칠다며 우는 소리를 내는 카리나의 목소리와, 점점 치솟다 고무줄 끊기듯 한계를 탁 넘어버리던 사정감.


“안에……♥


아침에 있었던 성욕처리는 되려 욕구불만만 부추겼다는 걸 다시금 자각한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엎질러진 10년분의 정욕이 두려울 정도였다. 한 번 울컥할 때마다 카리나의 뱃속으로 정이 쏟아지는데, 차마 다 담지 못해 빼기도 전에 새어나올 정도의 양이었다.


20대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이렇게나 붙은 적도, 이렇게나 갈증을 느낀 적도 없었다.


“아아, 또…… 아앙!”


사정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다시 물건을 곧추세웠다. 아직 여운에 젖어 부르르 떨고 있는 카리나를 뒤로 넘어트리고, 팔다리에 구속된 몸을 움직여 퍽퍽 피스톤질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카리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저항할 힘도 없는 것 같았고, 굳이 그러고 싶지도 않아보였다. 카리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배시시 미소 짓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자신의 몸을 내어주었다.


“꺄으아앗, 아♥


두 번째 사정은 다섯 번째 절정과 함께 찾아왔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더운 숨과 타액을 흘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발정난 개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먼저 여운에서 벗어난 카리나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복수예요……♥


능숙하게 허리를 돌리고 방아를 찧는데 불안함이 느껴진 걸 보면, 남자의 본능이란 참 서글프고도 속물적인 것 같다. 그러다가도 그 행위에서 다른 남자의 그림자가 엿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면, 더 없는 안도감과 기쁨에 젖는 내가 원망스럽다.


세 번째 사정, 여덟 번째 절정.


“큿! 카린!”


“으응! 응츕…….”


입술과 턱을 따라, 하얀 젖가슴 위에 하얀 자국이 남는다.


기쁜 듯 입으로 전부 받아주는 네 번째이자 아홉 번째.


“이, 이 자세는 좀 무서운데요…….”


내 팔 하나에 의지해 어린 아이마냥 공중에 매달리고 불안해하는 카리나.


다섯, 열.


“하아, 하아.”


“……한 번 더.”


여섯…… 열셋…….


피로감에 눌린 이성이 점점 아득해져 가던 기분.


“…….”


“…….”









그 다음은 모르겠다. 그대로 탈진해서 실신했는지, 아니면 정말 아침이 올 때까지 서로를 범했는지.


카리나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아마 영원히 알 길은 없을 것이다.


다만 길고 긴 밤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남았다.


그조차도 기다려온 세월과 비교하면 한 순간 스치고 지나간 부싯불에 불과했겠지만, 그렇다 해도 난 그 하룻밤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공백의 세월보다도 따스했던, 그 10년보다도 더 충실했던 하룻밤.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10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겠다. 잠은 잘 잤었나? 오늘 아침처럼 밥은 잘 먹었고, 하는 일은 즐거웠었나?


분명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후회하고, 어느 정도는 괴롭고 슬픈 날도 있었지만, 분명 나름대로 잘 이겨냈다고. 하루하루만 살자, 내일 걱정 말고 오늘만 생각하자. 그렇게 10년을 숨차듯 뛰어오며 보람차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얼마나 가소로운 자기기만이었는가.


“저는 좋아하는 게 없었어요.”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어제는 후회로 물들어있었고, 오늘은 막막함에 젖어있었으며, 내일은 걱정이 스며들어있었다. 시릴 정도로 푸른 바다는 없었고, 그저 끝없이 지평선을 메운 삭막한 사막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조차도 우중충한 회색빛만으로 이루어진 우울한 사막이었다는 걸, 나는 우둔하게도 카리나를 보고깨달았다.


“예전에 말씀드렸었던 거 아직 기억하시죠? 딱히 돈이 엄청 좋은 건 아니라고요. 그냥 별달리 좋은 게 없었던 것뿐이었다고요.”


카리나도 두려웠겠지. 자의든 타의든 언제 사람들이 떠날지 몰랐으니까. 또 언제 자신이 떠나야하게 될 지 몰랐으니까. 그래서 카린은 돈을 좋아했다. 속물적인 이유도 아닌 그런 슬픈 이유 하나로.


난 그런 아이를 홀로 버려두고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휘관님이 날 버리고 간 게 아니에요.”


“…….”


“내가 지휘관님을 져버린 거죠.”


아모스의 착륙 출입구 앞에 선 카리나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데도, 나는 카리나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해가 될 것 같았어요. 제가…… 혹여나 저라는 존재가 지휘관에게 걸림돌이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추방자 신세잖아요? 저 때문에 루련 관리국에 다시 매이기라도 한다면……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떨리는 호흡 속, 미세한 울먹임.


“미안해요, 지휘관님.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만나려고 한다면 조금 무리하더라도 어떻게든 만날 수 있었을 거예요. 크루거님도 말씀하셨거든요. 잠깐이라도 좋다면 만나게 해주겠다고. 제가 원하기만 한다면 소속도 어떻게든 옮길 수 있을 테니 말만 하라고요.”


카리나가 고개를 들었다. 차량의 천장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도 않는데, 짐짓 하늘을 보듯 행동했다.


“하지만 전 거절했어요. 만나고 싶지 않았어요. 다시 보기가 무서워서…… 앞에 서서 무슨 얼굴을 해야 할지, 날 그렇게 두고 간 사람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 전부가 겁이 나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요.”


텁. 조용히 개폐 레버를 잡는 부드러운 손.


“저한테 지휘관님을 탓할 자격 같은 건 없어요. 그냥 무서워서 남탓만 하면서 피한 거니까요. 그러니까 저는…….”


내가 그 자책을 그 이상 들을 필요는 없었다.


카리나도 그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


“…….”


손을 뻗어 레버를 잡고 있던 카리나의 왼손을 붙잡았다.


이 이상 덮지도, 묻을 필요도 없다는 걸 안다.


천천히 맞잡은 손. 똑같은 반지 두 개가 살짝 따스하게 반짝인다.


“이미 있었던 일을 없었던 셈 칠 수는 없겠지.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이젠 어려울 테니까.”


카리나를 10년 만에 다시 만났을 때, 내가 착각했던 것이 있다. 나는 가슴속이 먹먹해지는 이 기분을 막막함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푸른 눈을 보고 빠져들 것만 같아서, 망망대해에 구명선 하나 없이 표류한 것만 같이 덜컥 겁이 나버려서, 막연히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해.”


그 먹먹함이 외면했던 연정이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고백한다. ‘좋아하는 여자 하나 눈앞에 두고도 어찌해야 될지 몰라서 안절부절 대고 있는 바보.’ 그로자의 그 표현이 가감 하나 없이 사실이었다는 걸 인정한다.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어쩔 수 없다. 메마른 사막만 보고 있다 보면 바다가 그리워지면서도, 너무 큰 바다를 보면 덜컥 겁이 날테니까.


“그러니까…….”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돌아보며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울먹이는 카리나의 눈을 보고, 나는 그 이상 뭔가를 말할 수 없었다.


“…….”


“…….”


다행이었던 점은 카리나가 그 이상 뭔가를 말해주길 바라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서로 왼손을 맞잡은 채, 카리나는 눈을 감고 다가왔다.


대신 들어준 짐 때문에 오른팔로 껴안지 못한 게 아쉬웠다.


아쉬운 만큼 카리나가 내 품에 안겨들기를 바라며 나도 눈을 감았다.


“나는 당신이 싫어요.”


환청일까? 문득 그런 말이 들린 것 같았다.


“나는 당신이 세상 누구보다도 미워요.”


환청이 아니라고 해도, 이제 그런 말에 상처 입을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응.”


망무제애한 사막의 바다 속에서 유일했던 나만의 바다.


“잘 있어요, 지휘관님.”


“다음에 또 보자, 카린.”


그렇게 나의 바다는 떠났다.


푸른 단비 몇 방울을 흘리고, 기약만을 남긴 채.









“카린, 드디어 말할 수 있게 됐네? 지.휘.관.님?”


“…….”


“가길 잘했지?”


“……가길 잘했네요.”


“있을 때 잘해. 너무 늦어버리기 전에.”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뭘, 우리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