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 지나서도, 석양이 저물 무렵 차량의 창밖 저 멀리의 이동식 격리벽을 바라볼 때마다 그때를 떠올린다.
주황빛 석양이 격리벽을 비추며 서서히 벽 전체를 물들이는 모습은, 마치 핫케이크에 뿌린 시럽 같다.
온갖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다, 그 유일하게 느긋해질 수 있던 순간이 내 삶에 어떤 의미였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내가 얼마나 운 좋고 행복한지를 전혀 깨닫지 못했다.
모든 것이 세월에 따라 변해 가면서, 과거의 얼굴들도 점점 흐려지고 멀어져 갔다.
그녀와 작별할 때, 차마 묻지 못한 것이 있다. 물어봤자 아무 의미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는 여전히 그때의 나일지 몰라도, 그녀는 더는 그때의 그녀가 아니다.
그래도 난 누구도 원망할 수 없다. 10년 전, 결국 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전술지휘관, 이중난수 中






“카리…….”


무애한 세상에 울타리 쳐봤자 부질없다는 말도 있지만.
하늘과 땅의 경계 따위도 걷다보면, 지나가보면 이미 스쳐온 그 자리에 남겨져있다는 소리도 있지만.


“……카리나.”


하나의 존재에 이렇게나 큰 거리감을 느껴야 한다는 건, 역시 불합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네.”


망설이고 망설인 내 호명에 눈앞의 주황머리 여성이 단답했다.


눈은 차량 밖을 쫓고 있다. 푸른 바다 같은 눈에는 황량하고 외로운 사막만이 비치는데도, 여성은 갈증 따위 느껴지지
도 않는다는 듯 커피를 입에 대지 않았다.


더 이상 자유분방한 모습은 없다. 앞머리에 걸치고 있던 선글라스와 안경. 걸음걸이마다 춤을 추듯 흔들리던 사이드
테일. 미니스커트, 정비용 외투, 전술장갑. 그 모든 것들을 포함해서 쾌활한 부분도, 붙임성이 많던 귀여운 부분도, 모
두 한때는 바다였던 사막에 버려진 것처럼 찾을 수가 없다.


“……이틀 뒤면 도착해.”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머리를 모아 묶는 리본의 색은 여전히 붉은 색이다.
그런데도 그 날카로운 눈썹 사이, 앞머리가 내려와 이따금씩 그 차가운 표정 위에 눈 둘 곳을 마련해준다.
그런데도, 그러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 어딘가에 내가 알던 카린의 모습이 남아있다.
바로 앞에 있으면서도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둔 것 같은 아득하고 답답한 기분이, 어찌할 도리도 없이 날 초조하게 만든
다.


“마중 나올 사람은 있어?”


“리바씨가 나올 거예요.”


“그래?”


그리고 그 초조함의 끝에 서게 되면 겹쳐보던 이미지가 사라진다.


1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카리나조차 더 이상 카린이 아니다.


유혹하듯 살짝 골을 드러내던 와이셔츠 위로는 붉은 넥타이가 단정하게 매어져있다. 스무 살은 넘었어도 살짝 앳된
기가 남아있던 여자 아이는 더 없이 성숙한 미녀로 변했다. 비군사 역량 관리국 소속의 국가 공무관. 그 호칭과 직위
에 전혀 누가 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그저 지난 세월을 손으로 훑기만 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았다.


“혹시 호위가 필요하면…….”


꽃봉오리가 꽃이 되는 건 당연하다.
그 당연함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어느새 이렇게나 변한 걸까, 하고 만다.
어느새 귀여움과 예쁨을 넘어서서 아름답다는 느낌마저 들게 하는 걸까.
어느새 이렇게나 훌륭한 사람이 되어서 내 앞에 서 있는 걸까.
어느새, 또 어느새. 어느새 이렇게나.


“필요 없어요.”


이렇게나 내가 너를 실망시켰던 걸까.


“……응.”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일 얘기나 다시 해볼까?”


“……그러죠.”


5분이라는 휴식 시간 동안 한 것이라곤 곱씹고 곱씹다 내뱉어낸 말 몇 마디와 머나먼 거리감의 재확인뿐이었다.







“‘화내는 게 귀엽다’ 라는 평가 말이야. 보는 입장에선 즐겁지만 역시 당사자한텐 실례인 법이지.”


팔락팔락 넘어가는 종이 소리 사이로 아직 식지 않은 커피의 향기가 풍겨왔다.


“뭐 그 당사자가 없어서 하는 말인데, 예전에 봤던 ‘모두의 보급관 카리나씨’는 화내고 삐쳐도 귀여웠다고 생각해. 보
석 조금 쥐어주거나, 맛있는 야식 같은 거 만들어다주면 못이기는 척하면서 용서해주고 그랬거든.”


그 목소리에서도 커피향이 났던 것 같다. ‘덕분에 G36이랑 스프링필드가 매번 고생이었지.’ 향기만큼이나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하나는 쓴 소리하고, 하나는 곤란해 하면서도 웃으면서 부탁한 거 들어주고.’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
는 묘하게 씁쓸하면서도 신랄한 말들이었다. ‘기억하지?’


“지휘관.”


“…….”


“대체 카리나한테 뭘 한 거야?”


힐난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순수한 호기심에서 물어보는 말투였다.
그리고 난 침묵했다. 그다지 연관 없는 제 3자에게 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한테든 사정은 있다고 생각해.”


팔락. 검토를 끝낸 서류가 쑥 시야에 들어왔다.
서류를 받아들며 시선을 피하던 머리를 들어 올렸지만, 말하는 본인은 어디까지나 지나가는 말로 입에 담는 것이라
는 듯, 나를 보지 않았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였잖아.”


“그로자, 카리나랑 나는……”


“장갑 같은 거, 끼지도 않던 사람이 갑자기 껴봤자 티나.”


왼손에 힘이 들어갔다.
피가 통하지 않는 약지가 살짝 얼얼하다.


“주제넘었다면 미안해, 지휘관.”


“…….”


“그래도 나는 뭘 하든 지금보다는 낫다고 생각해.”


“내가 어떻게 보여?”


그런 질문은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여자 하나 눈앞에 두고도 어찌 해야 될지 몰라서 안절부절대고 있는 바보처럼 보이네.”


하지만 즉답에 가깝게 나온 대답을 이미 들어버린 이상, 듣지 않는 것이 나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어떻게든 해결 봐.”


“어떻게?”


“말 그대로. 어떻게든.”


“…….”


“몇 번이고 같은 짓을 반복하고 후회하는 게 좋은 거라면 말리진 않을게.”


무책임한 조언에 무신경한 응원이다.
하지만 그로자답다면 그로자다운 대답일까.


“고마워.”


딴에는 걱정되어 해준 것 같은 오지랖 넓은 말들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렀다.


“떠내려가는 흐름 속, 빛무리가 모이고 새 생명이 돋아난다.”


“…….”


“…….”


……그래서.


“꺼져가는 불씨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빛이라면 기꺼워하며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순리.”


네메시스, 언제 온 거지?


“그, 그래. 언제 왔니?”


“새벽과 밤사이의 노을…… 경계의 부존재…….”


곁눈질로 그로자를 훑어도 그로자는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이었다.
저 정도로 난색을 표하는 걸 보면 역시 그로자도 뭔 소린지 모르는 것 같다.

아니면 아무 생각 없거나.


“무슨 용무로 왔어?”


그렇다면 결국 믿을 건 캐롤릭인데…… 아무래도 같이 안 온 것 같다.


“양, 혹은 늑대. 길 잃은 방랑자…… 길을 구한다.”


“…….”


멀쩡한 대답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들을수록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다.
길 잃은 방랑자가 무슨 소리일까. 작전 나간 누군가가 복귀를 하지 않았다는 소린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복귀자는
내가 점호까지 불러가며 다 체크하는데 몰래 나간 게 아니라면 그럴 일은 없다.


“지휘관.”


그럼 설마 아모스의 경로에 뭔가 문제라도 있었나.


“지휘관.”


“……어, 어어. 듣고 있어.”


어느새 문간에 선 그로자가 문득 나를 불렀다.


“카리나…….”


갑자기 웬 카리나?


“그 얘긴 나중에 하자. 일단 가서 캐롤릭 좀 불러올래?”


“아니, 그게 아니고…….”


“아 맞아. 굳이 부를 필요는 없겠네. 호출하면 되니까.”


“지휘관?”


“지휘실에서 알린다, 급한 상황이니 호명한 사람 당장 지휘실로 오도록.”


난 좀 더 배려심을 기르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여전하시네요.”


“캐롤…….”


기내 방송으로 울려대던 내 말이 헛숨을 타고 방점을 찍었다.


“인형들 상대하기 어려워하시는 거.”


지금이 몇 시였더라. 저녁밥은 먹었으니 아마 7시는 넘었겠지. 메이링은 정비실로 보냈고, 이후엔 계속 그로자랑 둘이서 서류 작업을 했으니 아마 9시 정도 되었을 거다.


개인 시간 가지고 있을 인형을 멋대로 막 부르려했던 대가가 이런 걸까?


“……지통실에 잠깐 오류가 있었다. 아무 일 없으니 하던 대로 정비시간 갖도록. 이상.”


뒤늦게 엿본 그로자의 표정은 전에 없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어디 계신지 몰라서 지나가시던 분 하나 붙잡고 여쭤봤어요.”


“……?”


네메시스는 뭐 잘못된 거 있냐는 듯, 내 책망하는 시선에도 반응 하나 없었다.


하긴, 잘못한 건 없지.


그래도 원망스러운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무슨 일이야? 카리나.”


점심때로부터 몇 시간은 지났지만 카리나는 여전히 정장 차림이었다.


목의 단추가 하나 여며져 있지 않고 넥타이가 살짝 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흐트러짐과는 거리가 있는 차림새다. 단추가 풀어진 와이셔츠 아래 얇은 사슬로 엮어진 목걸이의 줄이 보였다.


“윗선에서 새로 지시가 내려와서요.”


손에 든 서류를 내보이며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카리나.


“양이 좀 많으니 의논해야 해요.”


“…….”


“단 둘이서 면담 좀 가질 수 있을까요? 지휘관.”










‘이만 퇴근할게.’ 하는 말에 담긴 의미는 직관적이다.


하지만 ‘과로는 하지 마.’ 하는 말에 담긴 의미는 무슨 의도로 던진 말인지 모르겠다.


‘본능이 없다면 새는 전서를 전하지 못한다.’ 이건 같은 언어로 말한 게 맞는 건지도 헷갈리지만 됐고.


“…….”


“…….”


퇴근 시간이 미뤄진 넓디넓은 지휘실 안은 조용했다.


장비 몇 개와 지휘패널만 홀로그램으로 가동되고 있을 뿐, 거의 대다수는 휴면 상태이거나 꺼져있다.


당직 부관 몇 명도 다른 정비반이나 보급 쪽에서 밤새 일 할 예정이고, 메이링조차 몇날며칠을 이어진 야근에 과로사 직전의 상태였으니…… 결국 오늘 야간 업무는 나랑 그로자 둘이서 지통실에 남아 업무를 볼 예정이었다.


“36번 섹터도 조사가 필요하단 소리네.”


그런데 어쩌다가 내가 카리나랑 둘이서 업무를 보고 있는 걸까.


“……그럼 이걸로 전부 된 거지?”


옛날 일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리폰 시절엔 야간작업한다고 둘이서 같이 철야하는 일도 잦았었지. 그러다보니 낮밤이 바뀌게 되는 일도 잦았고, 그 때문인지 카리나는 낮잠을 엄청 길게 자기도 했었고.


“그렇네요. 수고하셨어요.”


그러다가 눈이 맞는 날이 있었다.


“…….”


“…….”


뭔가 이상했다.


현재 시각 9시 30분. 커피 탄다고 5분 정도 낭비한 걸 생각하면, 논의거리는 10분도 안 되는 짧은 것들이었다. 그리중요한 일도 아니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더욱 짧아질 수도 있었다.


이 정도면 굳이 지금 와서 얘기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점심시간, 논의하던 곳에서 말해도 됐고, 그것도 아니라면 날짜가 바뀐 뒤 아침에 얘기해도 됐을 것이다.


새로 내려온 지시라서 어쩔 수 없이 지금 왔다?


“카리나.”


“…….”


“이 공문, 내려온 시간이…….”


문서 겉면에 대놓고 적혀있는 송신 시간은 오늘 오전의 시간이다.


“지휘관.”


하지만 내가 그걸 캐묻는 일은 없었다.


“그로자씨랑 제 얘기 했어요?”


커피 잔을 물고 들려온 싸늘한 한 마디에 난 얼음이 됐다.


똑같이 커피향이 나는데도, 분위기는 천지차이였다.


“…….”


처음에는 왜 자리에서 안 일어나지 싶었다.


할 이야기는 다 끝났으니 바로 나가버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러지 않았으니까.


커피를 다 마시고 나가려하나?


하지만 핸드드립도 아닌 인스턴트 커피를 저렇게나 음미할리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왜?


무슨 볼 일이 남았다고?


“‘그 얘긴 나중에 하자’면서요.”


“…….”


“지금 하면 되겠네요. 제가 왜요?”


아니, 그냥 모른 척일뿐이다.


“그냥 지나가던 이야기였어. 신경 쓸 필요 없어.”


카리나가 내게 하는 말도, 내가 카리나에게 하는 말도.


그리고 내가 내 자신에게 하는 말도, 전부 모른 척일뿐이다.


“…….”


직감으로 살아남은 나한테 있어서, 여자의 직감 같은 건 믿지 않는다는 말은 퍽이나 위선적이겠지.


하지만 이 지경까지 오니, 나라고 해도 그 직감이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한 어설픈 거짓말에 카리나는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느꼈는지,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며 나를 노려보았다.


“……알겠어요.”


비난 한 마디 없다.


폭언 한 마디조차도 없다.


역시 내가 끓인 커피 따위 음미할만한 게 아니었나보다. 카리나는 그 짧은 말 한 마디를 끝으로, 식은 커피를 전부 입에 털어 넣은 다음 꼬았던 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은 시간 실례 많았네요.”


“…….”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휘관.”










적의?


정말 그게 적의였을까?


아니, 보통 적의는 불신을 야기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차갑고 사무적일지언정, 카리나가 나를 불신하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카리나의 푸른 눈빛에 지나갔던 그건 뭐였을까?


‘몇 번이고 같은 짓을 반복하고 후회하는 게 좋은 거라면 말리진 않을게.’


문득 그로자가 해주었던 그 성의 없는 조언 한 마디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아니, 그건 어쩌면.










“…….”


“…….”


문 열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힐난하는 말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언제 자리에서 일어섰는지는 모르겠고, 언제 문 앞까지 달려온 건지도 몰랐지만.


“놔주세요.”


내가 왜 문 밖으로 나가려던 카리나의 손목을 잡았는지, 그것 하나만큼은 알 것 같았다.


“지휘관, 이런 무례한 행동은…….”


“미안해.”


말 한 마디가 하고 싶었다.


그저 아주 짧은 말 한 마디가 하고 싶었다.


“……당신은 저한테 사과할 이유가 없어요.”


대답으로 돌아오는 냉랭한 말 한 마디.


그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애초에 전 아무 기대도 안 했으니까요.”


“카리나, 나는…….”


역시 그 눈빛은 적의가 아니었다.


실망감.


마지막 기대조차 배반당했다는 더 없는 배신감의 표정이었다.


“단 하나 뿐인 약속조차도 그렇게 쉽게 져버리신 분이 이젠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저한테 뭘 기대했는데요? 제가 화낼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니면 울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착각은 접어주세요, 지휘관. 전 당신한테 더 이상 아무 기대도 안 해요.”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그 모습 속에서 상처로 남은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거짓말도, 사과도, 아무것도.


“이번엔 또 무슨 거짓말을 하실지, 이 이상 어떻게 자신을 포장하실 건지도 전혀 알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하다못해 너를 품에 안고 어루만지는 것조차도 나는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읏?”


그래서 난 널 품에 안았다.


거짓말을 하며, 사과를 했고, 끝없이 속으로 되뇌며 말했다.


“뭐, 뭐하는 겁니까? 이거 놓으세요.”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을 잘못 봤네요. 성추행인 거 알고 계신 거예요? 당장 안 놓으면 상부에 보고…… 으읍?!”


탓할 수 없었다.


따귀를 맞아도 할 말이 없었다.


성추행이라고 주장하더라도 무엇 하나 반박이 불가능했고, 어떻게 봐도 그것은 카리나의 입장에서 행할 수 있는 정당한 행동이었다.


“웁, 흐읏!”


카리나는 저항했다.


“큿!?”


입안에서 비릿한 쇳내와 짠맛이 감돌았다. 살며시 어루만진 입술 한 구석, 욱신거리는 고통이 피와 함께 배어나왔다.


“허억, 허억.”


끌어안고서 일방적으로 열정을 쏟아내는 행위는 의도가 어쨌든 폭력이었다.


그리고 나는, 말로써 카리나를 어찌할 자신이 없어서 폭력을 휘두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신, 진짜 최악이에요…….”


“…….”


부정할 여지없는, 최악의 인간.


“자, 잠까…… 으응!”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혀를 깨물어도, 가슴팍을 밀어내도, 나는 아랑곳 않았다.


호흡을 섞고, 입술을 뺏고, 온기를 강탈했다.


상처를 입고 곪아가는 마음에, 또 한 번 상처를 내었다.


“흣, 윽.”


손목을 잡힌 팔이 움찔움찔 떨었다. 작은 신음이 들려왔다. 등을 맞댄 벽을 타고 천천히 카리나가 무너져 내렸고, 숨이 멎으리만치 뜨거운 한숨을 끝으로 달콤한 거미줄 하나가 길게 늘어졌다.


삭막하던 푸른 바다에 눈물이 고였다. 몰아쉬는 숨 끝에 커피향이 났다. 새빨갛게 붉어진 카리나의 표정은 묘한 갈증에 차있었지만, 지우지 못한 진한 원망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어쩌면 과거의 관계조차도 끊어지는 게 아닐까.


불확실한 도박에 판돈을 거는 심정은 그저 두려움뿐이었다.


“아…….”


그러면서도 빼앗고 싶다는 본능은 망설임도 없는 걸까.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이미 전부 다 알고 있으면서도 두려운 마음에 끝없이 자문자답을 반복했다.


주저앉은 카리나의 어깨에 손이 닿았다. 자켓을 겨우 여미고 있는 단추 하나를 풀어버리고, 벌어진 앞섶에 손을 넣어 하얀 와이셔츠 위를 더듬었다.


겉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묵직하고도 부드러운 감각.


단 한꺼풀을 벗겨 와이셔츠가 드러났을 뿐인데도, 쉬이 볼 수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속옷을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읏, 으읏…….”


원망 섞인 눈빛은 서서히 두려움으로 물들어갔다. 가느다란 손이 손목을 잡았지만, 바들바들 떨리는 손은 밀어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떨쳐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카리나는 그 이상 저항하지 않았고, 순응이 아닌 포기를 선택한 채 눈을 감아버렸다.


“…….”


“…….”


바다에 밤이 찾아왔다.


맞물린 바다의 균열 사이에서 아른거리는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질식할 것 같은 죄책감이 속을 울렁이고, 자괴감과 뒤섞인 흥분이 점점 머릿속을 끓였다.


물러날 수 없었다.


“으…….”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며 와이셔츠 사이로 드러난 살결에 한숨을 흘려 넣었다. 쇄골에 키스할 때는 간지러웠는지 목을 움츠렸고, 가슴에 키스할 때는 잠깐이지만 입술 너머로 쿵쾅대는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몸을 섞을 때에도 이랬었던가.


야근이 일찍 끝났던 날, 당직이 없었던 지휘실.


넓은 기지에 인간은 단 둘이었고, 한창 때의 20대 남녀를 그렇게 오래 붙여뒀었으니, 결국 정분이 나는 건 늦든 빠르든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커피 한 잔의 시간을 나눈 후, 누구의 유혹으로 시작됐는지도 알 수 없이 소파 한 켠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탐했던 기억.


“…….”


기억났다. 내가 아니라 카린이 먼저 유혹했었다. 소파에 앉았을 때, 추가수당으로 받고 싶은 게 있다며, 내 정면에 서서 허벅지에 손을 올린 뒤 유혹했었다.


그랬던 주제에 카린은 굳어있었다. 스스로의 심장이 뛰는 것조차 억누르질 못해 안달이 난 채 나에게 매달렸었고,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해달라며 고집을 피웠었다.


일만 하느라 남자 경험은 없었던 아이.


그런 아이가 날 유혹했을 때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아으…….”


붉은 속옷을 끌어올리자 답답하게 숨겨져 있던 가슴이 출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약간 커졌나? 기억 속에서 매만지던 것과는 살짝 달라진 볼륨감에 위화감이 느껴졌다.


젖가슴을 가볍게 입에 물자 카리나는 괴로운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는다. 잊고 있었던 허덕임. 잊고 있었던 교성. 그 얼굴에서 잊고 있었던 카린의 얼굴이 떠오른다.


“하아, 하아.”


사랑스러웠다. 차가워졌어도, 성숙해졌어도, 이럴 때만큼은 감출 수 없는 그 연약함이 사랑스러웠다.


“힉……!”


하지만 아직은 받아들이기 힘든 걸까. 더 없이 익숙한 사랑스러움에 다시 입을 맞추기 위해 다가갔지만 카리나는 거부했다. 숨결이 가까이 다가오자 잡아먹히기라도 할세라 목을 움츠리며 얼굴을 피했다.


새삼스럽게 느껴야만 하는 거리감에, 숨결이 멎어버려 갈 자리를 잃는다.


“…….”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떡해야 다시 날 보게 만들 수 있는 걸까.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거라면 어떡하지.


“아…….”


무의미한 고민이었다. 불안하기만한 걱정이었다.


‘조급해하지 말자.’ 머리를 흔들어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전하자.’ 과거를 더듬어 올라가듯 상처 입은 마음을 어루만지며 역행한다.


갈 곳을 잃은 숨결은 애무라는 이름을 덮어쓰고 또 한 번 목덜미를 향했고, 10년 새에 한층 더 거칠어진 손은 검은 스타킹을 타고 무릎에서 허벅지로 올라갔다.


“지…… 휘관…….”










카린은 스타킹을 그렇게 선호하지 않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어디서 올이라도 나가버리면 신경이 쓰여서 불편하다고, 언젠가 카린이자기 입으로 말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선호하지 않는다고 해도 입어야 할 때는 있었다. 그리폰 내부에 연례행사가 있어서 제복을 입게 되었을 때, 그때 카린도 제복을 입으며 스타킹을 신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날 새벽 나는 평소보다 거칠게 카린을 범했다.


변명일 뿐이지만 스타킹의 감촉과 그 안에 감싸인 허벅지의 부드러움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남자를 미치게 하기 충분하다.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끝난 행사에서, 나는 술과 피로에 기진맥진해하면서도 부축해서 호텔방에 옮겨준 카린에 대한 정욕을 꺼트리지 못했다.


침대에 눕히고 제복만 벗겨준 뒤, 그대로 돌아서 나가려던 카린의 손목을 잡아 침대로 끌어당겼고, 그대로 덮쳤다.


“흐읏, 아앙.”


아니, 거짓말이다. 스타킹은 그저 핑계일 뿐이다.


커피향 대신 나던 달콤한 샴페인의 향기. 그 향기는 질투의 향기였을지도 모른다.


카린의 외모를 보고 이때다 싶어서 작업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카린은 그게 마냥 싫지는 않다는 듯 쑥스러워하면서도 헤헤 웃었고, 나는 카린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웃어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독점하고 싶은 사람이 다른사람의 눈에 들어오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나 거칠고 오래도록 범했던 것은. 어쩌면 좋아하는 이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원인이 되어 그랬었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의 이 행동도 그런 마음의 연장선인걸까? 10년 동안 다른 사람 품에 안겼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내 것도 아닌 카리나를 무리하게 덮치려 하는 건 아닐까?


“엉덩이 너무 만지지 마요…….”


한손 가득 들어오는 엉덩이와 허벅지를 마음 내키는 대로 주무르고 있자니 카리나가 불안한 목소리로 항의했다. 여전히 탄력이 넘치고 부드러운 살덩이. 가슴은 한참을 주물러도 그리 싫어하지 않았으면서, 유독 엉덩이만 만지면 카린은 심하게 부끄러워했었다.


“자, 잠깐. 뭐하는 거예요? 꺄악!?”


치마를 걷어 올리자 브라와 같은 색의 속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달라진 체취와 성숙해진 색향이 코를 스친다. 향수와 뒤섞인 진한 여자의 향기.


허벅지를 붙잡고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으니 카리나가 울먹였다.


“냄새는 왜 맡는 거예요 진짜…….”


하지만 그런 얼굴을 본다고 망설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되려 불에 기름 끼얹는 꼴이나 똑같았다고 말하고 싶다. 칭얼거리며 싫어하는 표정. 그것이 말로 다할 수 없이 가학적이었음을 나는 이 자리를 빌어 고한다.


“앙…….”


봉긋이 솟아오른 음순 부분을 입에 물자 카리나에게서 교성이 터졌다.


품위라고는 이제 티끌도 남아있지 않았다. 폭식하며 핥아대는 들개와 같은 추잡함. 타인이 아닌 내가 나 자신을 내려다봤어도 정이 뚝 떨어지는 모습일 것 같았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카리나는 그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것 같다.


“하악, 하악. 자, 자꾸 그런 곳에 얼굴…… 아아! 묻지…… 마앗…….”


속옷이 점점 타액에 젖어갔다. 코가 음핵을 스치고, 입술은 체취를 핥으며 속옷 위로 균열을 새겼다. 천 두 개를 사이에 둔만큼 직접적으로 핥는 것보다는 뜨겁게 몰아쉬는 숨결에 더 흥분하고 느끼지 않았을까? 어느덧 타액이 아닌 단내 나는 물기가 속옷을 더 진하게 적시기 시작했다. 나는 한계에 다다른 인내심을 애써 다독여야만 했다.


“드, 듣고 있어요? 읏!”


스타킹을 이로 물어 찢고, 한층 더 선명해진 붉은 속옷을 옆으로 걷어낸다.


카리나는 그 광경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자 당황하며 눈을 피했다.


“…….”


언제까지고 그렇게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흐윽!”


중지가 살덩이를 헤치고 파고들었다. 한순간 새어나오려던 비명을 억누른 카리나는 장미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가, 바로 눈앞의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고 굳어버렸다.


그 모습에서 한순간 예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처음 할 때 부끄럽다며 팔로 얼굴을 가리던 카린은, 키스해달라고 할 때 조차도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해 상당히 애를 먹였었다.


지금은 어떨까? 여전히 부끄러우면 얼굴을 가릴까?


“앗, 으아…….”


결론부터 말하자면 카리나는 얼굴을 가리지 않았다.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긴 했지만, 움찔대며 떨기만 할 뿐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헥…… 아흐…… 으으…….”


하이힐을 벗겨낸 발끝이 천천히 바닥을 쓸며 뻗어나갔다.


중지와 약지로 질 내부를 왕복할 때마다 카리나는 교태를 남기며 몸부림쳤다.


찔꺽찔꺽, 수치스럽게 울려 퍼지며 떨어지는 물소리.


뿌리 부분이 걸릴 정도로 손가락을 깊숙이 넣으니, 음문이 손가락을 물고서 놓아주지 않는다. 탐하듯이 손가락을 삼키려고 드는 그 모습에, 문득 나는 카린의 성감대가 여전할까 싶어 손가락을 튕겨보았다.


“흐앗!? 자, 잠깐! 거긴……!”


그리고 속절없이 기뻐하는 카리나의 얼굴을 보며, 또 한 번 이 여자는 내가 알던 그 여자 아이가 맞다는 확신에 젖는다.


“흐앙! 지, 지휘관…… 아흑! 그만…… 거기는 하지…… 으아앗!”


쾌감에 젖어 울 것 같은 얼굴이 사랑스럽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깨를 잡고 품에 안겨드는 작은 몸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내친 김에 다리 아래에 손을 넣어 공주님처럼 들어 안으니, 깜짝 놀라며 나한테 안겨드는 게 어릴 때와 판박이다.


“저, 저기…….”


매번 이렇게 불안해했지만 하늘에 맹세코 떨어트리거나 한 적은 없었다. 벽에 등을 댄 채 카린이 내 목에 팔을 둘러 그 상태로 한 적은 있었다. 카린이 그렇게 무겁진 않았지만, 온몸이 가을의 날씨를 한여름으로 착각할 정도로 땀을 흘려댔던 건 기억한다. 언제 떨어질지 몰라 불안해하는 와중, 그 불안감이 흥분감으로 변모해 내 볼을 핥아대던 카린도 기억난다.


하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나는 겁 많던 그 시절로 돌아간 카리나를 안고서, 소파 위, 방금 전까지 작전에 대해서 면담하던 곳에 앉혔다.


“……?”


여전히 떨고 있으면서도 어리둥절해 하는 카리나. 뭘 하려는지 알지 못한 채 나를 빤히 바라보다, 눈높이가 서서히 아래로 향하는 것을 보고 경악 반, 질색 반의 표정으로 말했다.


“10년 사이 더 변태 같아졌어요.”


상대가 너라면 다 나처럼 될 것이다.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흣…….”


하이힐을 자주 신어야 했을 텐데도 발끝은 모난 곳 하나 없었다. 딱히 발페티시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입에 물고 키스하는 건 뭐가 됐든 예쁜 쪽이 더 좋다.


종아리는 잘빠져서 매끈하고, 허벅지 안 쪽 넓적다리는 입 맞추기 무섭게 떨어대며 예민하다. 등짝 위로 발이 내려오고, 이제는 가리는 것 하나 없는 음부가 물을 흘리며 향기로 유혹해댔다.


“히앙!”


음부를 입에 물었다. 허벅지 안쪽을 핥으며 키스하다가, 부끄러워 다리를 모으려는 걸 제지하고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혀끝이 아렸다. 주름을 파헤칠 땐 살짝 비린 맛이, 균열을 따라 타고 오를 때는 땀이 뒤섞인 짠맛이 났고, 그 끝에 다다라 음핵을 튕기면 마치 바이올린의 마지막 현을 튕기듯 카리나가 가볍게 절정하며 미약한 단맛을 안겨주었다.


기분이 좋아도 역시 이건 싫은 모양이다. 카리나는 내 머리칼을 휘어잡으며 어떻게든 떼어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키스로 다리가 풀린 와중에 절정이 자꾸 들이닥치니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는 듯 했다.


가벼운 절정에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핥다가 혀가 지치면 중지와 약지로 아래를 쑤셨고, 혀가 아픈 게 가시면 시선을 돌려 가슴을 입에 물었다.


그러다가 크게 절정을 맞이해 비명조차 되지 못한 교성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면, 실금이라도 하듯 애액이 터져나와 소파와 바닥을 적시면, 잠깐의 유예를 주며 카리나를 진정시켰다. 내가 굳이 안지 않아도 자기가 매달릴 곳을 찾아 나에게 기댈 정도였으니, 그 잠깐의 유예 시간이 나에겐 카리나를 마음대로 해도 좋을 또 다른 유희 시간이었다.


엉덩이를 마구 주물러도 싫어하지 않는 시간. 목이나 가슴이 아닌 뺨에 키스를 해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간. 귀를 핥아도 간지러워하기만 할뿐 거부하지 않는 시간.


그렇게 카리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0분, 30분, 1시간. 체감상 질릴 정도로 오랜 시간동안 품에 안긴채 쾌락에 몸부림치다, 그냥 내 품에 안겨버렸다.


이쯤이면 되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


날 다시 받아들여줄 수 있을까? 끝끝내 카리나에겐 물어보지 못했던 질문.


“…….”


“…….”


마지막 유예가 끝났을 때, 난 그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으로 카리나의 입술을 훔치기 위해 천천히 카리나에게 다가갔고, 차마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카린은 언제나 격무에 시달렸었다.


과로에 야근에 잔업. 성인 남성도 힘들어 하는 전장의 틈바구니 속에서, 카린은 후방지원과 보급이라는 전쟁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해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녀린 아이를 격무에 던져놓고 방치했던 건 나였다. 죄책감이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쥐고서, 나는 카린을 나귀 부리듯 부려먹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하다며, 그저 보석 몇 개, 그저 값싼 애정 몇 개로 그 아이를 샀었다.


길을 걷다가 손을 맞잡았던 것. 손이 시리다고 하면 장갑을 벗기고 입김을 좀 불어넣어 주었던 것. 잠깐 짬이 나서 쉬는 시간이 왔을 때, 굳은살 박힌 거친 손이나 맞잡고 있게 했던 것.


그리고 손이 뻐근하다고 할 때면 손을 잡고 주물러주었던 것.


애정이라는 이름의 뒤에 숨어서 나는 카린을 이용했다. 고작 그 정도의 애정 뒤에 숨어서 나는 카린을 이용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카린은 불만 한 번 토한 적이 없었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내 표정 위로 카린은 언제나 기쁜표정을 지어주었다.


‘조금이라도 손의 뻐근함이 가셨으면 좋겠다.’ 그저 그런 기분 하나로 행했던 일이, 자꾸만 빚을 갚기 위한 행위로 변질되어 가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지만.


‘지휘관님은 손도 참 크시네요? 히히♥


그래도 카린의 손은 부드러웠다.


내 입술을 덮고 있는 카리나의 손이 여전히 따뜻하듯이, 그 옛날 카린이 어루만져주던 손길은 늘 부드러웠다.


“……나는.”


타자기 대신 피아노 건반을 두드릴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당신이 싫어요.”


나지막한 울음소리 대신 밝은 웃음소리였다면 좋았을 텐데, 이미 너무 늦어버린 걸까.


“난 당신이 너무 미워요…….”


비껴가지 않고 똑바로 향하는 시선 속에서, 굴러 떨어지는 이슬 한 방울이 볼 위로 반짝였다.


‘왜 거짓말 했어요?’


‘미안해.’


카리나의 팔을 잡았다.


‘왜 약속 안 지켰어요?’


‘미안해.’


잡고, 끌어당겼다.


‘왜 날 두고 갔어요.’


‘미안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품안에 폭 안겨드는 작은 몸.


‘절 사랑하긴 했어요?’


‘…….’


문득 새빨개진 귓불이 눈에 들어왔다.


저 귓불을 얼마나 만지고 핥았는지. 이 귓가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속삭였는지. 이제와서 일일이 새어보려 해도 일일이 기억나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어지간히도 죽고 못 살았던 게 아닐까. 조금만 보는 눈이 적어져도 입을 맞췄다. 행여 인형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서로 몸을 섞었다. 한때는 그게 그저 젊은 날의 치기라고 생각했었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그게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당연하다. 카린은 온갖 미사여구를 붙인 말들보다도, 그저 단순한 말 한마디를 더 좋아했었으니까.


‘사랑해.’


고르고 고르다가 전부 쳐내고 남겼던 순수한 한 마디 말.
수 없이 말했었지만 단 한 번도 가벼이 말한 적은 없었던 말.


“카린.”


“…….”


말 한 마디가 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어.”


“…….”


그저 이 짧은 말 한 마디가 하고 싶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 있었다.
좋은 소식은 그래도 최악의 인간이라는 칭호에서는 벗어났다는 것.
나쁜 소식은 내가 여자를 울려버린 최악의 남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입술 사이로 스며지는 카리나의 눈물은 이상할 만큼 맵고, 아픈 맛이 났다.





그 후 카린은 내 품 안에서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