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로 대공령에 당도한 첫날 밤. 하필이면 누이와 만났다. 

 

누가 봐도 코르티잔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드레스를 입고 술 냄새를 풍기는 그녀는 내가 알던 ‘레이웨이 오즈마’가 아니었다.

 

그리고 메타트론과 아스트라이오스가 섞인 마기라니.

 

몇 번이고 대공과 몸을 섞다 아이를 밴 그녀의 모습을 상상하니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우를 팔아서 얻은 게 겨우 그것뿐입니까, 누이.”

 

그녀의 시야에서 벗어난 후, 그리 읊조릴 수밖에 없었다.

 

대공 밑에서 호의호식이라도 할 줄 알았거늘.

 

오늘 본 누이의 모습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이래서 복수할 의미가 있을까.

 

나는 의수로 대체된 오른주먹을 쥐었다.

 

의수가 찢어져 마력이 흘러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손이 망가지기 전까지는 복수해야겠지. 내가 아닌 라리에트 황제를 위해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나는 아스트라이오스 왕국의 기사단장이 아닌 메타트론 황제의 사냥개에 불과하다.

 

대공을 죽이기 전까지는, 아니 자신의 호위기사였던 이계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치우기 전까지 황제는 나를 풀어주지 않을 것이다.

 

낮에 다 내린 줄 알았던 눈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춥군.”

 

나는 장갑으로 의수를 덮고, 내 잠자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오늘 모인 용병들은 들으시오. 그대들은 대공비 전하의 장례 행렬을 호위하게 될 것이오. 검사들은 전위에, 창사들은 중위에, 궁수와 척후는 후위에 서게 될 것이니 자신의 자리를 잘 숙지해 두도록 하시오.

 

그리고 지금부터 대공비 전하의 관을 들 지원자를 받도록 하겠소이다.”

 

갑자기 용병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보통 귀족 망자, 특히 귀부인의 관을 묘지까지 옮기는 이들은 그녀의 가문과 남편의 가문을 막론하고 그 안에서 고르고 골라진 남성 귀족들이다.

 

귀부인의 가문에 마땅한 장정이 없을 때는 남편의 영지 기사단에게 파발을 보내, 귀족 출신 기사들 중에서 관을 들 이를 선발한다.

 

그마저도 없을 때는 영지의 온 귀족 중에서 관 들 자들을 선발하고.

 

용병들 중에서 관 옮기는 자를 모집한다는 것은, 라파엘로의 귀족 중 카트라 저하의 관을 들 이가 아무도 없다는 의미였다.

 

“반역자의 관을 들다니 이런 불명예가.”

 

“아무리 우리가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용병이라도 반역자와는 엮일 수 없소이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용병들의 항의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용병들을 이 자리에 모은 용병단의 행정원은 쩔쩔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도 관을 들지 않는다면 장례식을 치룰 수가 없소! 단장님께서도 대공비 전하의 관을 드는 이들에게는 보수를 두 배 쳐준다고 했소이다!

 

지원자가 없으면 제비를 뽑을 것이니 그리 아시오!”

 

“이건 폭거다!”

 

“고작 두 배의 보수로 반역자와 엮이라고? 이 의뢰, 포기하겠소!”

 

“나도 그만두겠소이다! 어쩐지 누구의 호위라고도 안 알려 주더라니!”

 

의뢰를 포기하는 용병들이 속출했다.

 

“진정하시오!”

 

“진정? 너 같으면 반역자의 장례 호위를 맡고도 진정할 수 있단 말이냐?”

 

성질 급한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행정원을 노리기 시작했다.

 

곧 장례 행렬이 난장판이 될 것을 짐작한 로드가 착잡한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윈드, 우리도 포기하세. 아무리 우리가 하루살이 용병이라도 돈보다 목숨이 중요하지 않은가.”

 

피식.

 

나는 그런 로드 앞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저하는 죽어서도 평안할 수 없구나.

 

관을 들어 줄 이조차 없는 장례라니.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지원하겠소.”

 

그녀의 유일한 행운은 이 자리에는 그녀를 은애했던 평민 용병 윈드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지원자가 나타나자, 행정원은 경전 속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부리나케 달려와 내 손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정말 감사하오! 본 단에서도 오늘 입은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오!”

 

스릉-

 

“이봐. 너 미쳤냐?”

 

정규 용병이 내 목에 검을 들이댔다.

 

잘 벼려진 검이지만 두렵지는 않았다. 

 

일이 잘못되어도 신하가 군주 가는 길을 따랐을 뿐이니.

 

“당신은 대공비 전하가 불쌍하지도 않소. 타향에서 죽음을 맞이했는데.”

 

“감히 반역자를 두둔해? 이 자리에서 네놈의 명줄을 끊어 주랴?”

 

정규 용병이 위협이 거세지자, 나는 로브의 망토를 벗어 아스트라이오스인 특유의 자색 눈을 드러냈다. 

 

“나는 아스트라이오스 출신이오.”

 

“뭣이?”

 

내 목에 검을 들이댔던 정규 용병은 물론 일일 용병들까지 얼어붙었다.

 

내가 출신을 밝히자, 화들짝 놀란 로드가 나를 끌고 가려 했다. 

 

물론 나는 그대로 끌려갈 생각이 없어 다리와 의족에 몸무게를 실었다. 

 

“윈드 이 친구야, 자네 뭘 먹었길래 이리 무거워! 어쨌든 거기까지 하게나! 다들 미안하오. 이 친구가 정신이 홰까닥 해서……”

 

“난 지극히 정상이야.”

 

“윈드!”

 

로드가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나는 용병들 앞에서 당당히 목소리를 냈다.

 

그나저나 나와 만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이리 위해주는지.

 

“로드, 나와 엮이기 싫으면 날 버리면 그만일세. 어차피 어제 만난 인연이지 않나.”

 

“동기가 죽는다는 데 가만히 보고 있을 놈이 세상에 어디 있나!”

 

나는 그를 쳐내고 용병들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이곳 메타트론에서는 반역자이지만, 카트라 대공비 전하는 아스트라이오스 왕국민들에게는 좋은 왕족이었소. 그러니 이렇게 부탁드리오.

 

제발 그분이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배웅하게 해 주시오.”

 

내가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로 무릎을 꿇으니, 정규 용병은 동정심이라도 생겼는지 검을 집어넣었다.

 

“흥, 아스트라이오스 출신이라니 봐줬다. 다음부터는 나대지 마라, 신참.”

 

“그 배려에 감사하오.”

 

내가 감사를 전하자, 정규 용병은 자기 무리를 데리고 나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소동이 진정되자, 행정원이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걸었다. 

 

“저, 윈드라고 하셨소?”

 

“그렇소.”

 

“아무래도 당신 말고는 지원자가 없을 것 같아 묻겠소. 혼자서 관을 들 수 있겠소?”

 

“어렸을 때부터 힘 하나는 자신 있었소이다.”

 

팔다리가 한쪽 씩 잘려서 힘이 약해졌을지라도, 나는 소드마스터였다.

 

썩어도 그랑 강의 준치, 라는 말이 있듯이 가녀린 카트라 저하의 시신이 들어 있는 관 하나는 들 수 있을 것이었다. 

 

“혼자서 이 무거운 관을 어떻게 드나, 이 친구야. 내가 돕겠네. 장정 둘이서라면 거뜬하겠지. 나도 지원하겠소.”

 

“오오, 정말 감사하오. 그대의 이름은?”

 

“로드요. 평민이라서 성은 없소이다.”

 

“윈드와 로드. 그 이름을 기억하겠소이다. 당신들이 우리 용병단을 구했소.”

 

“이정도야 뭘.”

 

로드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행정원의 비리비리한 등을 탁탁 쳐 댔다.

 

행정원은 그의 두툼한 손길에 한두 걸음 밀려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나는 카트라 저하의 관을 쓰다듬으며 로드를 노려보았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저자는 어째서 나에게 이리 잘 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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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삽화는 아스트라이오스 왕국이 멸망하기 전의 후붕상인데스.


이틀이나 안 와서 미안한 데스. 오로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