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라리에트 메타트론.

   

나의 고향 아스트라이오스를 멸망시킨 원수의 딸.

   

나는 그녀를 기억한다.

   

경전 속 대천사, 메타트론처럼 새하얀 머리카락.

   

울면 금을 녹여 만든 물이 뚝뚝 흘러나올 것 같은 금안.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기사 뒤에 숨어 벌벌 떨던 보잘것없는 황녀.

   

메타트론 제국을 구하기 위한 전사로 간택받아 소환된 그 기사는, 내 검에 목이 베였다. 

   

그의 목이 땅으로 떨어질 때 겁에 질린 황녀의 얼굴은 볼만 했었지.

   

원수의 딸이 살려달라고 빌며 우는 모습이라니.

   

그때 느낀 희열은 아직도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허나 약했던, 비겁했던 황녀가 보위에 올라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하는 게 뭐냐고? 

   

내가 태경을 죽인 원수인 당신을 왜 살려준 줄 알아?”

   

“죽여. 그래도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당신네들의 반역자가 아닌가.

   

설마, 나도 그놈처럼 옆에 세워두고 사랑 노래라도 부르게 하고 싶나?

   

명예를 아는 기사로서 그런 짓은 사양하고 싶군.”

   

“닥쳐!”

   

콰앙-

   

라리에트가 팔걸이를 세게 쳤다. 

   

그를 모욕하자 크게 분노하다니.

   

메타트론 제국의 냉혹한 여제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설마 그자를 사랑하기라도 한 건가.

   

“너는 태경의 대체재조차 될 수 없어.

   

내가 짖으라면 짖고, 엎드리라면 엎드리고, 죽으라면 배라도 발랑 까야 하는 개새끼지.”

   

그녀는 친히 옥좌에서 벗어나 내 앞으로 걸어왔다. 

   

또각, 또각.

   

황제의 고귀한 걸음소리가 알 수 없는 공간에 울려 퍼졌다.

   

콰악-

   

그녀는 내 무릎 위에 얹은 누름돌을 발로 눌렀다. 

   

누름돌의 바닥이 뾰족한지라, 아릿한 통증이 허벅지에 퍼져나갔다.

   

“크윽.”

   

“주제를 알아.

   

네놈이 뭐길래 태경을 모욕하는 거야.”

   

라리에트는 한참동안 누름돌을 즈려밟았다.

   

선혈이 죄수복 바지를 붉게 물들이자, 그제야 분이 풀린 듯 옥좌에 돌아가 앉았다.

   

“아무래도 채찍으로 고분고분하게 만들어 줘야겠어. 

   

개새끼야, 내가 네놈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란다. 

   

똥개가 아니라 사냥개가 돼.

   

내가 물라는 놈만 물고, 내가 죽이라는 놈만 죽여.”

   

나는 쓴 웃음을 지었다. 

   

아스트라이오스의 재건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결국은 이건가.

   

기사의 명예도 이름도 잃고 메타트론의 개가 되어 평생을 기어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인가.

   

“거부권은 없겠지.”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허나 내가 내리는 명령은 네놈에게도 좋은 것이란다.

   

내가 죽이고 싶은 연놈들은 바로 아스트라이오스의 신흥 귀족들이거든.”

   

“뭐?”

   

제 손으로 거둔 아스트라이오스 출신 귀족들을 죽이겠다 하는 어이없는 선언.

   

라리에트 황제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였다는 말인가.

   

“벌레라도 쳐다보는 눈이구나.”

   

“그대가 아스트라이오스 출신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보위에 오른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들을 죽이겠다고? 그것도 그대의 반역자인 나를 이용해서?

   

버러지 취급을 참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군.”

   

“후후후.”

   

또 웃었다. 

   

매도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그녀의 얼굴은 내 심기를 어지럽혔다.

   

약했던 황녀가 어떻게 저리 성장했다는 말인가.

   

개새끼 따위의 심기가 불편해 봤자 뭘 할 수 있겠느냐만.

   

“개새끼야, 내가 원하는 것은 절대황권이란다.

   

다른 귀족들도 마찬가지고, 특히 아스트라이오스 출신 놈들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일조한 태경에게 죽은 후의 명예를 주는 것조차 막고 있어.

   

그것을 위해서는 내가 강한 황제가 되어야 하지.

   

황제는 제국의 평안을 위해 기꺼이 권력을 나눌 수 있지만, 인간 라리에트 메타트론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구나.”

   

“인간으로서의 욕망을 위해 날 이용하겠다는 건가.”

   

“태경의 이름에 금칠을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태경, 태경, 태경.

   

그 이름이 지긋지긋했다. 

   

그깟 평민이, 이계인이 뭐라고 그리 아낀다는 말인가.

   

그놈을 아끼는 마음으로 아스트라이오스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는 말인가?

   

물론 힘없는 황녀였던 그녀가 무엇을 할 수 있었냐고 반문할 수 있었지만, 나의 원망은, 나의 분노는 마지막 메타트론인 그녀에게 쏠려 있었다. 

   

“내 명령을 잘 따른다면 네 누이에게 복수할 수 있게 해 주마.”

   

“레이웨이 누님에게?”

   

순간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가족과 나라를 배반한 자에게 복수할 수 있다는 라리에트의 제안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설령 그녀가 원수의 딸이라 할지라도.

   

“할 거지?”

   

“……”

   

나는 침묵했다.

   

허나 그것은 암묵적인 동의였다. 

   

누이를 죽이지는 않더라도 묻고 싶었다. 

   

어째서 배신했냐고.

   

그리고 후회하게 하고 싶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라리에트는 만족한 듯 내 턱을 잡고 속삭였다. 

   

“주인님이라고 불러 보렴, 개새끼야.”

   

+++

   

 고개만 끄덕였을 뿐인데, 처우가 바뀌었다. 

   

상처를 치료받고, 

   

진짜는 아니지만 새로운 팔다리를 얻게 되었다.

   

다시 검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봤자 반역자에서 개새끼가 된 것이었다. 

   

개새끼가 되었다 한들 어떤가.

   

다시는 기사가 될 수 없다 한들 어떤가.

   

나는 살아 있다.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내 손으로 누이를 후회하게 만들 수 있다.

   

알량한 죄책감을 누이의 마음에 남겨 두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거울에 내 모습이 비쳤다. 

   

검었던 머리카락이 하얗게 새어 있었다. 

   

고문으로 받았던 고통 때문인가.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메타트론의 핏줄과 같은 색깔을 보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준비는 다 됐니?”

   

“주인님 오셨습니까.”

   

“그래. 주인님이란다.

   

첫 번째 임무란다. 대공을 죽여.

   

놈은 아스트라이오스의 마탑주였던 네놈의 누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그녀의 뒷배를 죽인다면, 네놈의 누이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