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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는 만나지 않은 걸로 하자. 내일도 렉스 군 앞에서 나쁜 놈 모드 전개로 나타날 테니까 실수하지 말아줘."


"응, 알았어."


"고마워. 그럼 안녕."




 결국 나는 미노의 잠꼬대 내용을 렉스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마지막 미노의 미소를 보고 조금 신뢰할 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무엇보다 렉스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애초에 미노와 관련된 것만으로도 엄청 혼날 것 같은데, 간호까지 해줬다고 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진심으로 화난 렉스는 무서운 법이다.




 나와 미노는 남남이다. 앞으로도 렉스의 적으로 대할 것이다. 그게 가장 무난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동등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 ...모두들 나한테 아첨을 하거나 공격적이거나 둘 중 하나라서."




 헤어지며 그런 말을 쓸쓸하게 중얼거린 미노. 동정심을 사려 한 건지, 아니면 진심에서 흘러나온 말인지는 모르겠다.




"그럼 이만."


"다시 만날 일도 없겠지."




 그 말을 시작으로 나는 그녀와 시선을 끊었다.




 미노가 떠난 후 나도 일어나 그녀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늘의 일은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하자.






 깊은 밤, 인적 없는 넓은 공간. 턱, 하고 짐을 내려놓고 나는 훈련소 한가운데에서 검을 정면으로 겨눴다.




 나는 조금 전 그녀와의 대화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며 무심히 검을 내리쳤다. ...정치 이야기는 잘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진심으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전해졌다.




 그 여자는 악인으로 분류될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입 밖에 냈듯이 그녀는 과거에 몇 번이고 악랄한 수단을 써서 다른 사람을 속이고 국익으로 삼았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그것은 이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 데 필요한 일이고, 백성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모두가 꺼리는 더러운 일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은 걸까. 무엇이 악인 걸까. 국익을 위해 스스로 악인이 되는 행위는 사실은 선행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어려운 걸 생각하고 고민하고 파고들어 나아간 그 길 끝에 미노 장군이나 엠마 같은 사람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문관들이 보는 세상은 분명 내가 보는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일 것이다.




"...하아.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은 안 하는 게 좋겠어."




 그러니 나도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말자. 애초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검을 휘둘러 적을 베는 일뿐이다.




 단순한 얘기다. 사람에겐 적성이 있다. 이런저런 까다로운 두뇌 노동은 엠마나 미노에게 맡기고, "적을 쓰러뜨린다"는 힘든 일은 나나 렉스가 하면 된다.




 나는 그냥 검만 휘두르기만 하면 된다.




 가상의 렉스의 검을 피하고, 다리 움직임만으로 허리춤에 파고들어 급소를 한 방. 이런, 방금 동작에는 헛점이 많았다. 집중해라.




 다시 해보자. 반 걸음 짧게 오른발을 앞으로 내딛고 체중 이동을 수평으로 정확하게. 검의 잔신을 의식하고 적에게서 절대 시선을 떼지 마.




 아아. 검은 역시 깊구나. 더욱더, 깊이. 더욱더, 집중하자.




 좀 더, 좀 더 .......






















































"...그래서 그대로 밤새 검을 휘둘렀단 말이야?"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벌써 아침이라는 게 놀라운데. 아직 조금밖에 수련을 안 한 것 같아."


"거짓말 하지 마, 땀범벅이잖아! 얼른 몸 씻고 침대에서 자고 와. 지금 적이 오면 어쩔 셈이야!"


"어? 아니 난 전혀 안 피곤한데. 아니 오히려 눈이 번쩍 뜨여서 엄청 좋은 느낌인데."


"그건 밤샘해서 하이가 된 거라고! 얼른 자러 가! 바보!"




 ...... 누가 바보야.zzz......




"여기서 자지 마 이 멍청아!"


"응? 자는 게 아니라 나는 졸리지 않아... zzz"


"앗, 차가워! 기대지 마 플라체. 나까지 흠뻑 젖잖아."


"zzz... zzz... 렉스... 죽여 버린다..."


"우워... 이거 내가 데리고 가야 하는 거야?"




 왠지 갑자기 졸음이 밀려와서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어... zzz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검을─




"...아, 이거 옷을 갈아입혀야 하는 것도 나인가?"




 작열하는 아침 햇살이 나의 자유를 앗아간다. 명랑한 새들의 지저귐이 기분 좋은 미적지근한 잠을 연출한다.




 이건 참을 수 없다. 나는 딱딱하고 차가운 갑옷에 몸을 감싸고 그대로 천천히 렉스에게 몸을 맡기고 정신을 잃었다.




"감기 걸리겠는데 이대로는.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




 웬지 머리 위에서 들리는 묘하게 달콤한 변명을 흘려들으며...


































 창밖에서 던져진 종이 쪼가리를 주워 들고 거기에 적힌 글자를 훑어본다. 그건 그녀의 일과 중 하나였다.




"잠복 명령이네."




 그녀가 마왕군의 움직임을 읽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과연. ...여전히 일 처리가 빠르네. 역시 박쥐 마족."




 책략, 모략은 식은 죽 먹기다. 미노 장군의 정치력은 결코 인간에게만 통하는 게 아니다.




 자신을 위해서, 혹은 마족 간의 권력 다툼을 위해서 인간 쪽과 내통하여 편의를 도모하려 하는 약삭빠른 마족 배신자들도 있다.




 그런 인족에게 편리한 "마족"을 미노가 이용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런 명령이 내려졌다는 건 다음 마왕군 공격 목표는 요새군. 제법 머리 좋은 자도 있구나."




 미노는 인족과 내통한 스파이에게 협상을 걸어 마왕의 명령 내용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 하고 싶다면 그녀는 마왕군에 대해 항상 선수를 둘 수 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다 미래 예지하다간 배신자 스파이의 존재가 들통날 거야. 요새는 클라리스에게 맡기고 원군은 보내지 않는 걸로 하자. 그럼 다음 수는... 응, 결정."




 적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데는 불확실한 직감이 필요 없다.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정보전에서 이기고 확실해 보이는 정보를 골라 행동한다. 그것이 대장군 미노의 싸움 방식이었다.




 전쟁이란 육탄전이 아니다. 군사들의 읽기 싸움도 아니다. 전쟁이란 결국엔 정치전이다.




 무관들은 정치전의 말 중 한 종류일 뿐이다.




"그렇다면 바로 렉스에게 일을 맡겨야겠네. ...좋아, 얼굴을 내밀어 볼까."




 거대한 나라를 그림자에서 지탱하는 젊은 책략가 미노. 그녀의 명철한 두뇌는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최선을 이끌어낸다.




 그녀는 항상 두려워하고 있다. 자신이 내린 답이 옳은 것인지,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건지. 올바른 답은 아마 수백 년 후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판단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면서도 결코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실패를 두려워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실패일지라도 최선일지라도 행동을 계속한다. 그것이 그녀의 자존심이었다.




 천한 놈이라고 욕먹을 각오도 되어 있다. 정치전에서 읽기에 져서 나라를 멸망시킨 전범으로 100대까지 회자될 각오도 있다. 지금 현재 나라를 지킬 정치적 수완을 가진 자는 그녀뿐이다.




 그녀가 안 한다면 누가 하겠는가.




 이윽고 그녀의 발걸음이 렉스가 묵고 있는 여관 앞에서 멈춘다. 어제 그는 의뢰가 있으면 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방문한다 해도 투덜거릴 이유는 없다.




"...실례할게! 렉스, 갑자기 미안하지만 너에게 일을 의뢰─"




 그 가냘픈 어깨에 왕국의 백성들 목숨과 삶을 짊어지고 미노 대장군은 적대하는 최강의 검사 렉스의 방으로 밀고 들어갔다.


























"......zzz"


"앗."




 타이밍이 좋았던 걸까, 나빴던 걸까.




 검성 렉스는 아무도 없는 실내에서 정신을 잃은 여성 플라체의 옷을 벗기는 중이었다.




"......"


"......"




 미노의 얼굴이 웃는 얼굴 그대로 새파랗게 질렸다. 성범죄 현장을 목격하고 생각보다 동요한 모양이다.




"면간..."


"아니야. 아니, 정말로 아니라고."


"동의한 것처럼 보이진 않는데..."


"아니 그야 이 녀석이 자고 있으니까."


"기절한 여자를... 허락도 없이... 이렇게 멍청해 보이는 애를..."




 미노 장군은 영문도 모른 채 검성 렉스의 치명적인 약점을 파악해버렸다. 물론 미노 장군이 특별히 노린 것은 아니었다.




"이... 여자의 적, 강간마..."


"그러니까 오해라고 하잖아! 너는 또 무슨 용건으로 온 거야? 남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실례 아냐!"


"아니 그게, 내가 나쁜 사람이라 그쪽으로는..."


"그렇구나, 너 나쁜 사람이었지... 이 악마 같으니라고!"


"지금의 너한테 비난받을 이유는 없을 거 같은데!?"




 미노를 욕하는 렉스의 눈앞에는 납작한 가슴을 드러낸 여검사가 곤히 잠들어 있다. 어떻게 봐도 강간범과 그 피해자다.




"...페니 장군에게 출두해서 죄를 뉘우치자 렉스. 내가 옆에 있어 줄게."


"개소리 마! 죄수 취급당하면 너의 좋은 말로 이용당할 뿐이잖아! 난 인정 안 해, 난 잘못한 게 없어!"


"우와, 꼴사납네..."


"그러니까 난 옷을 갈아입혀 주고 있었을 뿐이라고!"




 아우성치는 검성과 대장군. 미노도 이런 하찮은 약점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괜한 정보 수집을 하지 않아도 이것 하나로 렉스를 마음대로 협박할 수 있는 화젯거리겠지.




 그러니까 미노는 지금 진심으로 렉스를 경멸하고 있었다.




"이 녀석은 바보라서 밤새 검을 휘둘렀다고! 땀범벅이 되어서 자버렸단 말이야!"


"누구 보고 바보라는거야... zzz"


"왜 동료 여자애한테 옷 갈아입히는 걸 부탁하지 않은 거야? 너의 파티 멤버는 다 여자애들이잖아."


"어, 어 지금 걔들은 자리를 비웠고. 땀에 젖어서 감기에 걸리게 할 순 없고 마왕군도 다가오고 있는데!? 그래서 얼른 옷을 갈아입혀 주는 게..."


"...참고로 난 평생 감기에 걸린 적 없다고오... zzz"




 플라체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다. 정확히는 감기에 걸린 적이 있다는 걸 단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즉, 바보는...




"......"


"......


"...어때, 렉스... 내가 이겼네... 흥이야... zzz"




 그렇게 행복하게 반라로 자고 있는 소녀는 꿈나라 같은 잠꼬대를 늘어놓으며 자고 있다. 그 모습에 기가 죽어버린 미노는 조용히 플라체에게 시트를 덮어 재웠다.




 그녀에겐 할 일이 산더미다. 이 이상 플라체에 대해 언급하는 건 시간 낭비로 보였다.




"용건만 말할게. 렉스, 우리는 서쪽 숲 근처에 진을 칠거야 따라와 줘."


"하? 너가 출정한다고?"


"응. 페니 장군은 원정 중이고 멜로는 집단전의 비장의 무기라서 왕도성에서 내보낼 생각은 없어. 그러니 내가 직접 출정할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전력이 불안하니까 렉스도 따라와 줬으면 해."


"...어떤 의도로 출정하는 거지?"


"군사 기밀. ...말할 수 있는 선에서 알려주자면 요격 조우전이 될 거야."


"네가 직접 나간다는 건 그만큼 읽기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뭐, 싸움의 기본도 모르는 렉스 보다는... 자신 있지."




 번득, 의심스러운 눈빛을 발하는 미노 장군. 값을 매기듯이 그런 그녀를 노려보는 검성 렉스. 침을 흘리면서 "하 하 패배견 렉스... zzz."라고 잠꼬대로 지껄이는 여검사.




 현장에는 긴장된 기운이 감돌았다.




"쓸데없는 짓 하면 죽여 버릴 거니까 명심해."


"오, 무서워 무서워. 나는 소심한 사람이라고, 너무 무섭게 하지 말아 줘."


"목에 칼이 들어와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녀석이 무슨..."




 검성은 조용히 자고 있는 여검사의 뺨을 꼬집으며 뱉듯이 말했다.




"출발은 언제지?"


"모레 예정이야. 이쪽도 준비가 필요하니까."


"...급하군."


"응, 시간과의 싸움이니까."




 이걸로 미노 장군이 전할 말은 다 전한 셈이었다. 그녀는 로브를 휘날리며 렉스에게 등을 보였다.




"너의 활약을 기대할게, 검성."


"나를 따라오게 한 것을 후회하지 마."




 그런 대화를 마지막으로 미노 장군은 천천히 퇴실하며 ......










"미노 또만나~ 음냐 음냐"




 잠이 든 여검사로부터 가벼운 인사가 날아왔다.




"...이봐, 너희들 아는 사이냐?"


"에? 아, 아니 별로!"




 미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솟는다. 잠에 취한 플라체가 자신과의 관계를 폭로할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다.




"고생이 많구나~ 너도 ......zzz"


"무슨 소리야? 이거........"


"남의 꿈 이야기를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 애는 네 동료잖아? 너 쪽이 더 자세히 알겠지?"


"미노 가슴 말랑말랑해..."


"정말 무슨 얘기야!?"




 이렇게 해서 여검사 플라체는 곯아떨어진 채로 최강의 검성과 참모 대장군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렉스의 **는 작네 ......zzz"


"어, 보여 준 적 있어!?"


"봐버린 거라고!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