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챈역으로 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손님을 백미러로 힐끗 쳐다보던 택시기사는 고개를 갸우뚱 하곤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

그러다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출때면 다시금 흘끔거리면서 ‘어디서 본거 같은데…’ 중얼거렸고. 

그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는 배우였다.

경력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개성이 살아있는 미모와 뛰어난 연기력, 좋은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 등.

배우로써 가질 수 있는 거의 모든 장점을 갖춘 덕에 데뷔한지 몇년 되지 않았음에도 주목받는 유망주.


비록 본인이 유명 하다기 보단, 맡았던 배역이 알려진 것에 가까웠으나.

십 수년을 활동해도 무명으로 사라진 이가 수두룩 한 곳이 바로 연예계였기에.

짧은 경력사이 유명한 배역을 여럿 남긴 그녀의 존재감은 충분히 뚜렷했다.


그렇지만 이정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배역보단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누구나 인정할 명배우로 남고싶다는 꿈에 비하면 

지금의 자신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번에 들어온 작품은 로맨스였다. 

처음으로 도전하는 장르에다, 그리 유명한 감독의 작품도 아니었으며.

시나리오나 배역도 크게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어떤 장르든 소화 할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은 마음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낯선 장르의 낯선 배역을 맡게 되었지만 그녀는 자신을 믿었다. 

이것도 할 수 있을거라고, 이번 작품 역시 자신의 성공적인 커리어로 당당히 남길 것이라고.

다짐을 마친 그녀는 시트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그녀를 실은 택시가 차분하게 도로를 달렸다. 







‘후…놓칠뻔 했네’


버스가 떠나기 직전에 간신히 맞춰 온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카드를 찍었다. 


그는 배우였다.

아역 배우로 시작해 경력만 따지면 20년에 가깝지만 주연은 커녕 조연으로 성공한 작품도 없는 반 무명.


외모나 연기력이 밀리는 것은 아니었으나 선구안이 부족한 걸까, 운이 안 따라주는 걸까. 이상하리만치 인지도가 낮았다.


그나마 쌓은 경력 덕에 여러 감독, 배우들과 연은 있어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할 정도가 되는 건 다행이었지만 속으론 한숨이 나왔다.


처음 연기에 발을 들일때만 해도 누구나 기억할 명배우로 남게 되리라 다짐했건만.


지금의 자신은 사람이 붐비는 버스를 마스크 하나 없이 타고다녀도 알아보는 사람 없고 단역들만 맡아가며 간신히 입에 풀칠하는 신세니.


그래도 이번에 들어온건 오랜만의 주연이었다. 

유명한 감독의 작품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배역 이름조차 없는 단역만 맡은 그에겐 이나마도 반가웠다. 


‘후순 이랬나…. 여주 배우가.’


하지만 내심 신경 쓰이는 부분은 있었다.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는, 무명 배우인 본인과 달리 

일찍이 화려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기대주였기에 


그녀와 투톱 주연으로 나서게 된 점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연예계에선 인지도가 신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는 생각을 한숨으로 마무리 지었다.

이런 한탄도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그저 지금은 이런 비루한 배우라도 믿고 주역을 맡긴 감독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인 스태프.

그리고 상대 배우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현재 맡게 된 일에 최선을 다하자 다짐하며 눈을 감았다. 


그를 실은 버스가 요란스레 도로를 가로질렀다.

 ------------------------------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모니터로부터 눈을 돌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대본을 몇 시간째 들여다 봐도 몰입이 되지 않는다.

처음 제안을 받아 대강의 시나리오를 들었을 때만 해도 충분히 할만하다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생전 처음 도전해보는 로맨스 장르라 아직 적응이 안되는 탓인지

아니면 그간 맡아온 배역들과도, 그녀 자신의 성격과도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배역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학창시절엔 연기공부를 하고, 성인이 된 후엔 바로 데뷔해 활동하느라 이성과 연을 쌓은 경험이 없는 탓인지.


원인을 파악하려 애쓸수록 지끈거리기만 할 뿐인 머리를 두 손으로 부여잡은 그녀가 의자에 힘없이 늘어졌다.


‘잘 할 수 있을까? 이러다 촬영때 까지 캐릭터 해석도 못한다면…’


그 순간 머릿속에 온갖 장면들이 스쳐지나갔다.


‘하반기 개봉작… 주연배우 발연기 논란…’ 

‘충무로의 대형신인으로 불리던 후순, 알고보니 거품?’ 


늘어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연예계가 얼핏 보기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어디서든 영광을 얻는 자리처럼 보여도 

실상은 전쟁터였다.


약간의 실수로도 사지까지 물어뜯기고, 터무니 없는 조소와 멸시에 파묻히며

간신히 헤쳐나올때면 자신이 있던 곳엔 다른 누군가가 대신하고 있는 치열한 곳.

그런 곳에서 이제야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몸으로 오점을 남긴다는건, 연예인으로써 죽겠다는것과 다를바 없었다.


‘그건 절대 안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본다. 

단기간에 배역에 몰입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 계속해서 되냬이던 끝에 겨우 하나가 떠올랐다.


‘맞아… 그 방법이라면 혹시...’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생각을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든 후 바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어쩌면, 지금의 막막한 상황을 타개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으며.


-안녕하세요 후붕씨, 혹시 이번주 시간 괜찮으세요?

 같이 연기 맞춰보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으시면 말씀해주세요.-


------------------------------ 







“조금만 쉬었다 할까요?”


“네, 좋아요”


그녀가 떠올린 방법은 대본 속 ‘후진’ 과 같은 환경에 놓여 보는 것이었다. 

배우가 배역에 완전히 동화되는 이른바 ‘메소드 연기’


마침 이번 작품은 합이 중요한 만큼, 그걸 빌미로 접근하면 후붕과 자주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둘이 있다 보면 분명 친밀감도 높아질테니


‘후진’이 ‘후붕’의 매력을 찾아 호감을 느끼듯 자신도 그의 매력을 알아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연애 감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근데… 잘 모르겠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직업 특성상 외모가 뛰어난 사람은 주변에 차고 넘쳤다.


그들과 같이 일 하면서 못느꼈던 감정을

그들에 비하면 약간 애매한 축에 속하는 후붕에게서 쉽게 느낄리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촬영 까지는 여유가 충분하니까, 계속해서 접점을 만들면 분명 효과가 있으리라. 


그렇게 영화 속 ‘후진’의 성격을 흉내내며 머릿속에 연기 생각만을 품은 채 대화를 하던 중

처음 배우 일에 발을 들인 얘기가 나왔다.


“와, 그럼 저한테 완전 대선배시네요?”


“에이, 데뷔만 빠르지 작품 수는 후순씨랑 크게 차이 없어요.

중간에 연극이나, 뮤지컬 쪽으로 빠지기도 해서...

후순씨는 어쩌다 배우 하시게 됐어요?“


“아, 저는...”


그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기억이 펼쳐지듯 수 놓였다.

처음으로 배우에 관심을 갖게되고, 목표삼게 되었던 시절.


“아, 혹시 불편하시면 안 해주셔도 돼요.”


생각에 잠기느라 바로 대답하지 못한 그녀의 태도에 그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그녀는 단지 기억을 되짚고 있었을 뿐이었기에

잠시 말을 가다듬은 후, 그때의 장면을 그에게 공유했다.


“아니에요, 말씀 드릴게요. 열살 때 였어요. 티비에서…”


사실 특별한 계기랄 것은 없었다. 

어린 그녀는 단지 만화가 보고싶다는 이유로 티비를 키고 채널을 돌리다.

화면에 스친 어느 한 장면에서

뚝. 손을 멈췄다.


다름아닌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서럽게 우는 모습.

처음엔 단지 왜 우는 건지 궁금해져 잠시 멈춰섰을 뿐이었지만

잠시 후엔 리모컨도 내려놓은 채 집중해서 보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그녀 역시 남자아이를 따라 눈물을 흘리며

티비를 향해 힘내라는 말도 건네고

보려던 만화도 잊은 채 끝까지 시청했다.


그것이 처음 접한 드라마였고

동시에 배우라는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였다.


자신이 남자아이의 연기에 빠져 몰입하게 되었듯, 그녀 역시 누군가의 마음을 울리고 싶어졌고

그 때 가졌던 사소한 꿈이 계속 이어져 명배우가 되고 싶다는 확실한 목표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뭐, 그렇게 됐어요. 그 드라마, 저 한텐 정말 인상 깊었거든요. 

부모님을 졸라 다시보기를 결제 해 달라 떼 쓰기도 했고

30화 정도 되는걸 각각 10번씩은 봤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점차 뚜렷한 목표로 세워나가던 시절, 생각만 해도 즐거웠고 가슴이 뛰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자꾸만 피어나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어 입꼬리를 잔뜩 올린 채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응? 왜 그러세요?”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그의 얼굴은 심각해 보일만큼 굳어있었다. 


“응? 아… 아니에요! 저도 그런 경험 있었거든요…”


의아해진 그녀의 질문에 대답할 때 잠시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지만

대답한 후엔 금방 굳었고 그 위론 식은땀까지 흘렸다.


“죄송해요,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렇게 안절부절 못하던 그는 말을 내던지듯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푹 숙인 채 뛰어갔다.


그런 그를 수상쩍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슬그머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거 내 데뷔작이잖아’


간신히 화장실 거울 앞까지 달려온 후에야 그는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있는 대로 시뻘게져 있는 얼굴.

부디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했기를, 기도한 그는 한숨을 삼켰다.


사실 그 작품은 데뷔작이라는 의의를 제외하면 좋은 기억은 없었다.

워낙 어릴 때 찍은 작품이라, 자신의 과장된 연기들이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데다가.


작품 자체도 시나리오와 연출도 엉망인 망작으로 낙인 찍혀

공중파 드라마였음에도 시청률 1%를 오가다 조기 종영을 당해, 

당시나 지금이나 그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간혹 회자되는 경우는, 케이블 예능 따위에서 과거 들추기를 통해 자신을 놀리기 위한 소재로 소비될 때 뿐이었기에.

이런 허접한 작품으로 데뷔를 했다는 사실이 가끔은 수치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근데 그걸 봤구나...’


게다가 단순한 시청을 넘어 그걸로 배우라는 꿈을 키웠다니.

내겐 지우고 싶은 한낱 기억 쪼가리에 불과한게 누군가에겐 꿈과 목표를 제시한 등대가 되었다니.

그렇게 꿈을 키운 사람이 지금은 모두의 주목과 인정을 받는 배우가 되다니.


‘참... 세상 별 일이 다 있네’


오래전엔 자신이 그녀에게 꿈과 목표를 제공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그녀와 같은 자리를 목표삼고 있구나.


‘뭐… 그건 후순씨가 잘 해서 그런거니까…’


씁쓸한 웃음을 삼킨 그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쏟아진 물줄기가 하수구로 빨려 들어가듯, 답답한 마음도 저렇게 간편하게 흘려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감상을 하며.

그다지 더럽혀 지지도 않은 손을 물줄기에 대고 한참을 문질렀다. 


그렇게 겨우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돌아왔다. 

내심 자신을 이상하게 보진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딱히 그런 기색은 없었다.


연기를 마저 맞추다 저녁이 되었을 때 그들은 카페를 나왔다.


“오늘 시간 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덕분에 정말 도움 된 것 같아요”


“에이, 아니에요. 저도 도움이 많이 된걸요. 다음에도 종종 이렇게 같이 맞춰 봐요.”


“아, 그리고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네?”


“다음 팬미팅은 좀 신경 써주세요”


그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팬미팅? 신경?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팬미팅을 할 만한 팬덤도 없는데 갑자기 팬미팅이라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그를 보던 그녀가 씩 웃었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켜 그에게 보여주었고.


“이게 뭐… 주연배우 후붕…? 어… 어?”


그가 입을 벌린 채 멈춰섰다.

그녀가 손을 흔들다, 미소를 남기곤 돌아서, 택시를 잡아 탈 때 까지.

택시가 떠난 후에야 움직인 입술은 외마디 탄식을 뱉었다.


“하… 하하! 참… 그새 검색하셨… 아하하...”


물밀듯이 몰아치는 부끄러움

그는 단지 머리를 감싸쥐며 헛웃음만을 연신 내뱉어댔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그가 머리를 싸매던 모습을 전부 지켜본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엔 장난기 어린 미소가  만면을 맴돌고 있었다.


‘조금… 귀엽네’

--------------------------------- 






“응?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당연히 좋죠. 어릴적 우상이랑 같이 식사중인걸, 팬으로써 이보다 더 좋은 순간이 어디 있어요?”


“켁…”


그는 고개를 돌린 채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야 겨우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기껏 입에 넣은 음식을 채 씹지도 못하고 삼키며 다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만 좀 보세요… 체 하겠어요.”


“어머, 지금 팬을 무시하시는 거에요? 후붕씨 너무한다.“


“아까부터 내내 놀리고 계신 후순씨가 더 너무해요.”


“아하하~ 알았어요. 그만 할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얼굴엔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일부러 보란듯이 입술을 삐죽거리던 그 마저, 결국엔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연기를 맞춘뒤로 한달쯤 지난 지금, 그들은 가벼운 장난쯤은 스스럼 없을 만큼 친해졌다.


전화나 문자로 잡담을 나누거나, 카페에 같이 가기도 하며

이따금 이렇게 같이 식사도 하는 사이.

물론 이 모든 만남은 그녀가 연기를 위해 끊임없이 접점을 만든 덕이었지만


‘푸훗, 후붕씨는 반응이 너무 재밌다니까?’


그에게 느끼는 친밀감은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

모든게 순조롭다. 배역와 작품에 대한 이해와 몰입은 마쳐두었다.

촬영일이 다가옴에도 어떠한 걱정이 없다.


“근데 참 신기해요, 저희가 이렇게 장난도 스스럼 없어질 만큼 친해진게.”


“네?”


“사실은요, 후순씨 같이 좀 대단하신 분이랑 일 하게 된 순간 부터 긴장했었거든요.

 혹시 제가 민페 끼치진 않을까, 말도 제대로 못 섞진 않을까,

 이렇게 대단한 사람과 투톱으로 나서긴 내가 너무 부족해 보이지 않나...

 그런데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아요."


당연하게도 그는, 그녀의 속내를 몰랐다.

그의 눈에 비친 그녀는, 자신 같은 무명 배우에게도 편견 없이 다가와 준 사람.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한 그녀는 컵에 담겨있던 물을 한 잔 마셨다.


그녀는 그와 진심으로 친해지고픈 생각은 없었다.

그저 연기를 위한 조건을 달성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

목적이 다분한 접근을 한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다.

이 순간 조차 연기로 소비하는 자신과 다르게, 순수한 친밀감으로 만남을 보내고 있다.

자신에게 필요하단 이유로 남의 마음을 이용해 먹고 있다니,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저려오는 양심의 파동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후붕씨"


"네?"


"어떻게 그런 찌질한 생각을..."


그의 목구멍을 넘어가던 물이 난데없는 기침을 타고 역류했다.

다행히 물은 뿜어져 나오기 직전 손에 의해 가로막혔지만, 정신은 이미 나간 것 같았다.


쓸데없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본인이 찌질하단 자책은 수도없이 해 보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남한테 직설적으로 듣게 될 줄이야.

난데없는 사실 확인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처럼 멍하니 있는 그를,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후붕씨는 본인을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 잘 모르겠는데…

제가 볼때 어떤 사람인지 말씀드려볼게요.


맡은 일에 책임감 강하시고, 어딜가나 예의바르시고, 인사성도 좋으세요.

웃으실때 청량감이 느껴져서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지고 절로 웃음이 나요.

발성이 딱 잡혀 잘 들리고, 발음도 정확한데, 목소리도 좋으셔서, 같이 있다보면 작은 화제라도 이어가며 대화하고 싶어요.


그리고 후붕씨 잘생겼어요. 키도 크고, 비율도 좋으시고.

그렇게 자신감 없을 만큼 매력없는 분 아니에요."


칭찬 세례를 마친 그녀는 가만히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건네준 말 들을 곱씹어보다, 부끄러움이 밀려든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씀 해 주셔서”


조금 감성적인 그였다.

별거 아닌 위로인줄 알면서, 그냥 인사치레로 해준 말인줄 알면서도

감동이 작게나마 물결치면 몸이 저절로 반응하곤 했다.

빨게진 얼굴이 조금이라도 덜 비치길 바라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겐 다행이게도, 그녀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방금 한 말은 어떠한 연기가 아닌 순전한 진심이었다.

그동안 ‘ㅎ진’의 마음으로 다가갔지만.

그래서 그의 면모들을 더욱 집중해서 보았으니까

여주인공이 연심을 느낄 만큼 괜찮은 남자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얘기해 준 것 뿐이었다.


그 뒤론 식사를 하는둥 마는둥, 각자가 품은 어색함 속에 자리가 마무리 되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녀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신이 꺼내려던 말이 이미 그녀의 입에서 나왔기에

그는 단지 미소만 보내며 손을 흔들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올렸던 팔만 내릴 뿐,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신호에 맞춰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는 뒷모습.

초록불이 깜빡거리고 있지만 달려간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을 때, 갑작스레 느껴지는 손동작에 놀란 그가 고개를 돌린 순간.


“내일도 저랑…”


하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이미 건너편에 다다랐고 신호등은 붉게 변했다.


‘됐어… 그냥 대본 맞춰서만 하자.’


생각을 굳힌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에 붙은 진흙처럼

걸을때마다 느껴지는

찐득한 미련을

털어내며.

--------------------------------------






-ㅋㅋㅋ 알겠어요, 그럼 영화관 앞에서 봬요!-


-네 알겠어요 ㅎㅎ~ 안녕히 주무세요 후붕씨!-


답장을 확인한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피식 웃었다.

살다보니 있기있는 여배우가 자신에게 먼저 영화를 보자니 별 일이 다 있다.

물론 데이트 신청같은게 아닌, 최근 인기인 로맨스 영화를 같이 분석하며 며칠 후 있을 촬영에 보태보자는 뜻이었지만.


‘연기에 참 진심이시라니까, 후순씨도’


얼마 전 동료 배우들과 시간을 보내던 중 그녀와 관련된 얘기가 나왔었다.

대부분은 칭찬이었다. 감독과 배우는 물론, 스태프와 단역 배우들한테도 예의를 차릴줄 알고

어디서나 대본을 들고다닐 정도로 열심히며, 몸에 상처가 남는 장면을 촬영할 땐 분장이 아닌 진짜로 몸에 상처를 낸 적 있을 만큼 자신이 맡는 역할에 진심을 다 한다고.


자신은 하나라도 들어볼까 싶은 칭찬들이 몇개나 나오는건지, 그간 느낀 친밀감에 잠시 가려졌던 그녀의 위치가 실감이 났다.


하지만 유독 기억에 남던 얘기는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가 낯가림이 꽤 심하고, 사람간의 관계에 벽을 쌓는 성격이라는 점

같이 촬영까지 한 사이 중에서도 그녀와 꾸준히 연락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했다.


그 자리에선 잠자코 있었지만 속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 만날 때 부터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연락은 그녀가 먼저 했다.

이 정도로 적극적이었는데 사실 낯가림이 심하고 벽을 쌓는 성격이라니,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같은 소리를 했기에 분명 거짓말은 아닐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에게는 태도가 다른 그녀

어쩌면


‘설마 나를’


“푸흡”


참나,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인기있는 여배우가 무명배우를 좋아한다니


이젠 케이블의 3류 드라마에서도 나오지 않는 소재다.

잠깐이나마 이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 더 없이 부끄러웠다.

쓸데없는 생각은 집어치우자, 그는 스탠드의 불을 껐다.


‘그런거 아니지… 절대...’


그래, 정말로 그는 아닐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날 그녀와 영화를 보고 나온 뒤


“근데 후순씨, 요즘 들어 저 한테 자꾸 데이트 신청 하시는데

혹시 저 좋아하시는건 아니죠?“


이런 말을 건낼 수 있었다.

그저, 지나가듯 던진 농담에 불과했으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네?”


“저, 후붕씨 좋아하는데”


그래서, 지금이 조금 당황스럽다.


일단 먼저 나온 반응은 웃음이었다.

짖궂은 장난따위 넉살 좋게 받아치는 저 여유엔, 감탄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진짜로”


“네?”


그 이후의 반응엔 물음표가 섞여들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도로 지웠다.

어차피 장난일텐데 괜히 넘겨짚지 말자 여겼다.


“진짜에요.”


그러나,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코 앞까지 다가온 순간 머릿속의 물음표가 더 없이 거대해졌다.


설마? 진짜? 날? 좋아한다고?


왜?


웃음기가 싹 사라진다.

반면에 그녀는 한결같은 미소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흔들림 없는 동공과, 그윽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바라보는 시선과 내뱉은 말엔 어떠한 장난도 없음과 동시에

진지하게 답을 기다리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그도 어느정도의 호감은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외모를 가졌고, 얘기도 잘 통했으며, 최근엔 웬만한 친구보다 자주 만났으니까.

호감이 생기는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호감 정도였지 무작정 연인이 되고싶다는 욕망은 없었다.


‘… 거절하자.’


침을 꿀꺽 삼킨 그는 차분하게 할 말을 가다듬었다.

정중히 거절할 수 있는 단어들을 최대한 선별해

간신히 그럴듯한 문장을 만든 그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저…”


그러나 눈이 마주친 순간 기껏 만들었던 문장은 그대로 흐트러져버렸다.


한 두 번 본 것도 아니었다.

몇 번이고 마주했다.

방금 전 까지도 태연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차분하게 말을 내뱉을 수가 없다.


저 예쁜 얼굴에 시선이 조금이라도 닿으면

바늘에 찔린 풍선처럼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조금 전 열심히 만들었던 문장은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대신에 다른 문장이 저절로 맞춰지고 있었다.


어쩌지, 정말 어쩌지.

그는 기껏 움직였던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입을 열면 새로 떠오른 문장이 순식간에 뛰쳐나갈 것 같았다.


‘진짜 미치겠네...’


“푸훗, 후붕씨 대본 아직 덜 외우셨구나?”


“…네?”






치익, 후우


어느새 5개비.

치솟는 니코틴에 머리는 깨질 것 같았고, 불 붙는 타르에 목이 타는듯 했으며, 깊게 차오른 연기에 폐가 찢어질 것 같았지만 그는 어김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몸이 조금만 멀쩡해지려 하면 수치심이 머리 끝까지 치밀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나.


“후우… 하아…”


이런 노력에도 조금 전의 행동이 생각날 때면 사정없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깊은 한숨을 내뿜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한 행동은 그저 연기 연습이었다.

대본을 같이 보며 합을 맞출 때 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만나는 장소를 가고 배역의 행동을 따라하며 철저히 분석한 것이다.


방금의 고백 역시 대본 속 ‘후진’ 이 했을 때와 같은 장면을 따라한 것이나

자신은 그것도 모른 채 고백을 듣고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뒤늦게 그도 사실 알고 있었다며 둘러대긴 했지만

스스로가 듣기에도 어색한 변명을 그녀가 믿었을 것 같진 않다.


‘에휴… 이 등신같은 놈…’


담배를 꺼냈다.

이젠 하나 가지고는 부족한거 같다.

올해는 반드시 금연을 하기로 마음먹었건만.

쌓여가는 자조의 말을 담배연기와 함께 내뱉으며, 그는 담배를 물었다.

 ------------------------------------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허겁지겁 불을 켜고, 거울 앞으로 뛰어가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치우자

홍조로 범벅이 된 발그레한 얼굴이 거울을 채운다.

그 발게진 볼을 어루만지던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거짓말 해서 미안해요…”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는 계속 보아도 질리지 않았고.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가슴이 떨렸고.

그의 따뜻한 성격은 한참을 곁에 있어도 마음이 편안했고.

그와 나누는 대화는 몇 시간을 주고 받아도 달콤하기만 했다.


그런 남자를 매일 같이 만났다.

반해야 한다는 다짐으로, 사랑을 느끼겠다는 일념으로.

장점에 집중하고, 접점을 찾아내고, 연락을 주고 받고, 여가 시간을 함께 했다.

단지 연기에 참고할 만큼의 감정에서 멈출리 없었다.


“하지만… 전 그냥 배우로써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거에요…

 진심으로 후붕씨에게 반할 줄은 몰랐…”


그녀는 자조의 말 조차 끝내지 못하고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아귀를 두드리는 심장은, 그녀의 자조를 변명으로 치부하듯, 사납게 박동하며 품은 감정을 하나씩 토해냈다.


“아, 아니야… 안된다고… 이러면 안돼…”


더 이상 연심의 조각들이 가만히 맞춰지도록 냅둘 수 없었다.

그녀는 옷도 벗지 않은 채 샤워기 앞으로 갔다.


제발 마음이 가라앉기를, 터질듯한 감정이 진정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달아오른 몸이 사그라 들도록 차가운 물줄기를 들이부었으나.

세찬 물세례를 맞으면서도 얼굴의 홍조는 떠나질 않았고.

가슴은 여전히 그를 품고 거세게 울렸다.


‘난 후붕에게 반하는 여주인공 후진이 아니야…

 그저 후붕씨와 호흡을 맞추는 배우 후순이야…’


깨문 입술에서 흐른 피가 물줄기에 섞여 바닥으로 사라진다.

---------------------------




“컷!”


촬영장의 분위기는 더 없이 좋다.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는 주연 배우들 덕분에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감독과 스태프는 물론, 조연과 엑스트라 배우들도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은 그러질 못했다.


“응? 후순씨 왜 그러세요?”


“네? 아, 아니에요…하하...”


촬영이 끝남과 동시에, 연인을 향한 따뜻한 눈빛이 사라진 그를, 너무도 애타게 아쉬워한 그녀는

그저 분위기를 망치지 않는 정도의 억지 웃음만 간신히 보냈다.


잠시 쉬는 시간, 그녀는 촬영장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그를 향한 마음이, 사랑하는 감정이, 도무지 사라지질 않는다.


아니, 사라질 수 없었다.


촬영이 시작되면 그는 남주인공이 되고, 그녀는 여주인공이 된다.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다 기어코 연인으로 발전하는 사이가 된다.


‘후붕’이 사랑하는 ‘후진’에게

그를 사랑하는 그녀에게

애정행각을 보인다.


가만히 냅둬도 한참은 지나야 꺼질 모닥불에 장작이 끊임없이 들어오는 셈이다.

대본대로만 가도 미칠 지경이거늘, 이따금 그가 애드립을 던지기라도 하면

그저 연기에 보탠 양념인걸 알면서도 심장은 두근거리고 얼굴은 달아오른다.


마른 세수를 하며, 다음 장면을 촬영하기 전 어떻게든 마음을 가다듬던 그녀의 눈에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감독에게 지시를 받고있는 저 배우는 촬영장에서 눈이 맞은 여배우와 벌써 2년째 연애중이다.

아직 기사화는 안됐지만, 동료 배우들에겐 청첩장을 돌린지 오래였다.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자, 전화로 애정 넘치는 대화를 나누는 원로배우가 보인다.

그녀는 30여년 전 부부 연기를 같이 하던 배우와 정말로 결혼해 화제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연예계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소문이 자자했다.


‘뭐 하는거지‘


문득 자신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 왜 명배우 되고 싶단 이유로 연애를 포기하려 한걸까.

까짓거 연애는 연애대로, 일은 일대로 잘 하면 되는거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어도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건 저 사람들이 걸어다니며 증명중이지 않은가.


방금전만 해도 터질것 같이 달아오르던 얼굴은 사그라 들고 거칠게 날뛰던 심장은 잠잠해졌다.


감정을 굳이 꼭꼭 감출 필요가 없어지니 한결 가벼워진다. 가까운 해답을 두고 한참을 빙빙 돌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웃음만 나온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후붕씨,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시나요?”

--------------------





“잠시만요.”


갑작스레 부르는 소리에, 그가 멈칫했다.

하지만 다가온 그녀가 휴지로 자신의 입 옆을 슬쩍 훔치고 가는 순간 헛웃음을 흘렸다.


“아 뭐에요... 묻었으면 그냥 말씀 해 주시지, 후순씨도 참.”


그저 넉살 좋게 웃어버린 그녀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휴지를 구겨 잽싸게 밑의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그녀의 얼굴이 빨게진건 취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잘생겼어’


분명 처음 약속을 잡았을 땐, 그가 자신에게 반하게 만들 생각이었는데

몇시간을 들여 샵에서 머리를 꾸미고, 메이크업을 하고, 옷도 신경썼는데

오는 길에 자신을 힐끗 거리는 시선이 유난히 많이 느껴져, 그도 빠지게 만들 수 있으리라 확신했는데


그렇게 잔뜩 무장했으면서, 그저 평소대로 온 그의 작은 웃음 한번에도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바보같이… 아까부터 말도 제대로 못 걸고’


부끄러움을 숨기면 좀 더 다가갈 수 있을까 싶어 술잔을 들면

안 그래도 잘생긴 얼굴이 세련되게 비치고, 안 그래도 부드럽던 목소리는 더 감미롭게 들리고.


“후순씨… 많이 취하신 것 같은데 괜찮아요?”


“네에… 조금… 아니, 괜찮아요”


안 그래도 좋은 성격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저 모습은, 묘하게 연인을 대하는 것 같아지고


’여기서 쓰러지면… 후붕씨가 나 막 안아서 들어주나…‘


별 이상한 생각이 든 탓에 괜히 더 부끄러워져선

결국 말 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악순환에 빠진다.


결국 진전 없이 자리가 끝났지만

한편으론 마음은 더 확실히 다잡힌다.

자신의 가슴은 오로지 그를 바라고 있다는 게 명확해졌다.

그리고 절대로, 이 감정을 포기할 수 없다.


’언젠가… 후붕씨도 날 좋아할 수 있게…‘


“있잖아요 후순 씨”


그녀의 고개가 태엽처럼 돌아간다.

마주한 그의 얼굴이 조금 수상했다.

눈을 살짝 피하고, 뺨이 조금 빨게진 상태.

어쩐지 익숙한 그 표정.


“힘들어 보이시는데… 잠깐 쉬었다 가실래요?”


그래, 촬영장에서 보이던 모습

그러니까, 연인인 '후진'을 바라보는 '후붕'의 얼굴

그 눈빛과 목소리가 지금 그녀를 향하고 있다.


'호, 혹시... 날...'


그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건 예정에 없는 시나리오다.

자신이 기회를 만들고, 다가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상 일엔 대본이 없는 거니까, 예상대로만 흘러가진 않으니까.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간다.

안 그래도 빨게져 있던 뺨은 토마토라도 된 듯 하다.


"아, 하아... 조금 어지러운데 그럼..."


"이 다음 장면이, 키스하는 모습이 그림자로 비치는 장면이었죠?"

-----------------------------------------






그녀의 손에 밀린 문이 세차게 벽을 때리고 튕겨져 나온다.

그 반동으로 억세게 닫힌 문을 뒤로한 채, 그녀는 신발도 벗지 못하고 현관 앞에 주저앉았다.


"우욱..."


화장실로 갈 힘도 잃은 그녀는, 그 자리에서 구토감을 해결했다.

한참을 쏟아낼수록 눈엔 눈물이 맺혀올랐다.

몸이 벌벌 떨려오고 가슴은 사무치게 아려온다.


'하하, 역시 후순씨 대단하세요. 설마 했는데 촬영 기간에도 이런 연습을...'


영화관에서 그녀가 의도를 밝혔던 날

그러니까, 그가 자신이 오해했음을 깨닫고 줄담배로 달래던 무렵

한 차례 부끄러움이 가시고 난 그는 그녀의 방법을 돌이켜보았다.


다크 나이트의 조커도,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도, 텍사스 전기톱 학살의 레더페이스도.

모두 그녀 처럼 일상 속에서도 몰입하는 노력 끝에 만들어진 캐릭터다.


이전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연기는 연기일 뿐이고 배우는 직업에 불과한데, 좀 지나쳐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어떠한가

자신과 비슷한 나잇대에 경력은 훨씬 짧으면서도 비교도 안되는 입지를 다지고 있다.

그저 재능의 유무 떄문이겠거니 하며 정신승리했지만, 사실은 이런 노력이 곁들여 졌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 만큼 노력하지도 않았으면서, 그저 부러워 하며 스스로를 한탄하는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 아닐까

그래, 이제부턴 나도 연기에 진심을 다 해보자


그때부터 그도 그녀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배역에 몰입해 왔다.

당연히 오늘 식사를 가진 자리에서도

그는 '후붕'으로써 그녀를 맞이했다.


정말 얄궂은 일이다.

그녀가 연기 아닌 진심으로 다가갔을 때.

정작 그는 모든 진심을 연기로 받아들이게 됐다니.


당연히 그녀는 말 하려 했다.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정말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연기도, 연습도 아닌 진심이라고


'마, 맞아요... 촬영 중일 때 더... 주, 중요한걸요'


'역시 대단하세요! 아무튼 그 장면은 그냥 짧게만 지나가서, 여기까지만 해도 될 것 같아요.'


'아... 그렇죠... 그냥 짤막하게 나오니까... 그럼... 촬영때 봬요...'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진심없는 관계의 시작도 그녀였다.

그 사실을 알려버린것도 그녀였다.

모든 가능성을 손수 망가뜨린건 그녀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연기로 이해하게 됐을텐데

이제와 번복해 봤자, 마음이 돌아올리가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이나 친 미친 여자로 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잘 됐어... 연애는 무슨 연애야... 그냥... 연기나 잘..."


우우욱, 그녀의 입이 일을 벌인다.

게워내고, 게워내고, 게워내고

아무리 속을 게워내도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걸, 그의 목소리를 되새기는걸

도무지 멈출 수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현관 바닥엔 눈물이 더 흥건히 고였다.

그를 담고다닌 눈에서 흘러내린 탓일까

자국이 그의 얼굴을 닮았다.

—————————————————————






"일어나, 씨발년아"


얼얼하게 달아오른 뺨을 어루만질 새도 없이, 또 고함이 울린다.


"표정 한 번 좋아보이네?

키스하고, 끌어안고, 같이 자고

즐길거 다 즐겨서 기분 좋아?"


짝, 짜악, 짜아악.

쉴세없이 얻어맞는 와중에도 그녀의 표정은 전혀 일그러지지 않는다.

이까짓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하고 싶으면 맘대로 더 하라는 것 같다.


그렇게 10여분간 가득 채워진 따귀 소리가 멈출 무렵, 그녀는 또 다시 바닥에 널브러졌다.

뺨은 완전히 벌겋게 부어올랐고, 손톱에 스친 자국 사이론 피 까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그녀는 신음 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를 짓는다.


"푸흡... 푸흐흡..."


비명같은 웃음을 흘린 그녀가 일어나 화장대 쪽으로 걸어갔다.

거울에 비친 몰골, 처참하게 부어오른 한쪽 뺨과, 피에 번진 화장

피와 화장이 엉겨 묻은, 그녀의 오른손


"그거 알아...? 요즘 맨날 샵에서 머리 만지고, 메이크업 하고, 옷도 신중하게 고르는거.

후붕씨랑 사귀고 싶어서... 나 좀 만나줬으면 싶어서...


근데 무슨 짓을 해도 달라지질 않아.

너는 사랑받는데, 왜 나는 사랑받지 못할까?


내가 너랑 뭐가 다른데?

내가 너보다 모자란게 뭔데?

대체 무슨 차이가 있어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너를 바라볼때랑 다른걸까..."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리던 그녀는, 힘 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내던졌던, 휴대폰 쪽으로 손을 뻗었다.


화면을 켜 뒤적거린다.

그와 나누었던 문자들, 걸었던 통화 목록, 찍었던 사진들.

'후진'을 위해 수 없이 만들고 보낸 시간들.


눈물이 휴대폰 속 그의 얼굴로 떨어진다.


"며칠 뒤면 결혼식이야.

축하해, 결실을 맺는구나?

정말 행복하겠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그녀는 무릎을 감싸며 얼굴을 쳐박았다.

숙인 그녀의 뺨이 달아오른다.

결혼식이란 말에, 가슴이 뛴다.

————————————————————————






마지막 촬영날, 그녀는 그 어느때 보다 즐거운 표정으로 나타났다.

스타일리스트들에게 화장을 더 신경 써달라 부탁하고

코디들과 상의해 가장 완벽한 신부복을 마침내 찾아낸다.


촬영이 끝나 집에 돌아가면, 또 다시 자해를 할지도 모른다.

머리카락을 쥐어 뜯고, 팔다리를 내리 찍고, 얼굴을 그어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에겐, 그다지 상관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그를 사랑할 수 있으니까.

그가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니까.

그 어느때 보다, 우리는 아름답기 그지 없으니까.


이젠 이곳의 모두에게, 나아가 세상의 모두가 보증인이 될 것이다.

그와 자신은 사랑의 결실을 맺었음이, 영원처럼 남겨질 것이다.


너무도 행복한 이 순간

벅차 오르는 감격에 맥을 못 추며

그녀가 카메라를 바라본다.


“컷!”

----------------------






옆동네 올렸던건데, 후회물에 더 가까운 느낌이라 여기도 올려보는 거시야요
피드백 받으니 사정없이 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