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는 죄송하다는 말만 하는 사람이 됐다.

  오후 트레이닝을 마치고 부리나케 트레이너실로 들어오자마자 울리는 전화벨 소리, 하루를 끝내는 신호이면서 동시에 괴로운 시간을 알려주는 사이렌이 됐다.

  두 손으로 핸드폰을 감싸쥔 채, 몸을 살짝 수그리며 전화를 받는 모습은 애처롭기가 그지없다.

  “네, 네, 트레이닝 진행 상황은 큰 문제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심려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지고 남자는 맥이 풀린듯 뒷머리를 거칠게 헝클어뜨리며 소파에 몸을 뉘였다.

  푸대접을 받는 자신에 대한 고민은 둘째치고 육체적인 피로 때문에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네, 네 거리다 긴장이 끊어지고 눈을 뜨면서 시계를 확인하면 잠깐 기절했단 사실만 깨달을뿐.

  잠을 마음대로 잘 수 없다. 수험 생활 때도 이것보단 마음이 편했을 터인데 최근 일어난 일들은 흡사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듯이 괴롭혔다.
  잠깐이나마 수면을 취한 덕인지 머리 속은 조금 맑아졌다. 잠깐 병원에 가서 수면제 처방이라도 받아볼까도 생각했었는데 그렇게 되면 방금까지 전화를 걸어온 쪽에서 알아차리니 포기했다.
  병원 한 번 다녀오는 것조차 꼬투리가 잡힐거 같아 차마 쓰러지지는 못하고 앉은 채로 끙끙 앓기만 했다.
  제 딴에는 조심하는 행동이겠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꽤 한심한 짓이다.

  첫 전속 계약, 명문가의 영애를 맡는 행운까지 겹치니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형편좋은 생각이지만 지금까지 해온 것이 있는데 최근의 부진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받는 일은 없을거라 자부했다.

  창문을 통해 밖을 보면 지평선 가까이는 보라빛, 하늘은 남빛으로 빛난다.
  겨울 날씨는 차갑고 눈이 감기지 않는 밤은 계속되지만 버티지 못할만한 일도 아니다.
  한숨을 푹 쉬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 = =

  “하…”
  “미안해. 시리우스, 내가 착각 한거 같아…”
  “너… 아니, 됐다… 그래도 조금 웃겼어?”

  웃긴다는 말이 무색하게 날카로운 눈매의 우마무스메는 팔짱을 낀 채, 자신의 트레이너를 노려봤다.
  그는 떨리는 손끝으로 스마트폰을 조작해 시설 사용 계획표를 확인하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내일이었네. 하하...”
  “웃을 일이 아니라고, 이제 뭐 할 건데?”
  “요즘 너도 제대로 쉬지 못했는데…”
  “못했는데?”

  시리우스 심볼리는 체육복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숨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위협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그녀는 매번 남자가 숨을 급하게 들이키며 몸을 빼는 우스운 모양새를 좋아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처음에 그 태도가 답답해서 화를 냈던 것과 천양지차다.

  “같이 외출이라도 할까 싶어서, 비품 채워야 할 것도 있고…”
  “하, 뭐… 됐나. 어울려 줘야지.”
  “다행이다… 트레이닝 끝나면 매번 어디로 가버리니까. 말할 기회가 없었어.”
  “섭섭했어?”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트레이너의 어깨에 팔을 걸었다.
  그는 시선을 피하려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다른 쪽 손으로 트레이너의 턱을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살짝 찡그린듯한 눈이 그녀 입장에선 조금 거슬렸지만 어떤 기특한 말을 할지 궁금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아, 그냥 걱정했었어. 요즘은 전화하면 받지 않고 문자도 답장을 거의 안보내니까 어떻게 지내는지 잘 몰라서…”
  “신경쓰지마, 지금은 혼자 처리할 일이 있어. 때가 되면 말할거고”
  “…정말 무슨 일 없는 거 맞지?”
  “우리 퍼피쨩, 주인님이 걱정돼서 제대로 잠도 못잤나봐?”
  “아, 정말… 괜히 걱정했네.”

  대답을 들은 트레이너는 그 자리에서 쪼그려 앉은 채, 손으로 뒷목을 문질렀다.
  요즘 의견이 잘 맞지 않으니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맥이 풀리는 대답이다.

  시리우스 심볼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상황을 음미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반응이다.
  반항아들의 리더 격인 존재라 말하지만 어른들은 대수롭지 않게 대장놀이에 심취했거니 웃어넘긴다.
다시 말해, 그녀의 위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몇몇 인물들은 다르게 생각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리고 그녀의 트레이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몇몇 어른 중에 하나였다.
  아니, 오히려 애태우고 안달복달하고 때로는 속을 태우는 사람이라면 오직 그밖에 없지 않을까.

  시리우스 심볼리는 그런 반응을 꽤나 즐겼다.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는건 정말 행복한 일이니까.
  놀리는 행동도 유치하게 보일지언정 그녀에게 있어선 이만한 즐거움이 없다.

  “아무튼 괜찮다니 다행이다. 난 트레이너실에 잠깐 들렀다 갈테니까 10분 후에 교직원용 주차장에서 만나자.”
  “그래, 늦지 말고 빠릿하게 주인님께 오라고, 퍼피쨩”
  “후우…”

  트레이너는 약한 한숨을 뱉으며 마른 세수를 하다가 이내 몸을 돌려 트레이너실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는 살짝 거북한 느낌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피곤함에 그런건지 아니면 살짝 짜증이 난건지는 몰라도 표정은 밝지 않았다.

= = =

  오후 시간대의 상점가에는 트레센에서 온 사람들이 꽤 많다.
  시리우스 심볼리처럼 트레이너와 외출을 나온듯한 학생도 있고 아예 팀 단위로 와서 대규모 비품 구매 겸 휴식 목적으로 몰려다니는 경우도 보인다.

  지금까지 시리우스 심볼리와 그녀의 트레이너는 트레센 주변의 상점가에 들를만한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따로 다니는 경우은 많아도 둘이 함께 상점가를 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동선이 다른 문제보단 개인적인 용무로 트레이너와 같이 다니는 상황이 뭔가 낯이 간지러웠다.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학원 분위기가 트레이너와 담당이 이성이면 그런게 있지 않는가.
  트레이너 입장에서는 시큰둥하게 생각할 이야기지만 한창 때의 애들은 온갖 호들갑을 떠니 그녀도 영향을 아예 받지않을 수 없다.
 
  따르는 애들 중에서도 그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들끼리 트레이너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 온갖 망상을 주저리주저리 대놓고 말하는 일도 있는데 한편으론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지만 낯이 간지러운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상점가에 조성된 휴식 공간에서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트레이너를 기다렸다.
  전속 트레이너가 비품으로 살건 뭐이리 많은건지, 탁자 위에는 짐들이 한가득이다.

  “시리우스, 오래 기다렸어? 줄이 조금 길더라.”
  “상관없어. 어떤 대접을 해올지 기다리는 것도 나름의 즐거움이니까.”
  “하하… 별로 대단한건 아닌데. 유행하니까 사 본거야.”

  남자는 짐을 아래로 내려놓고 이어서 음료 두 잔과 종이봉투를 올려놓았다.
  봉투에 인쇄된 상표가 어떤건지 안다. 학원 내의 유행을 모조리 꿰는 수준은 아니지만 발이 넓으니 그래도 남들보단 좀 빠르게 알아챈다.

  “당근 고로케잖아.”
  “아, 먹은 적 있었어?”
  “아니, 소문으로 들은 거야. 후하게 쳐서 70점 정도 주지. 분발하라고 퍼피쨩.”

  애매한 점수에 트레이너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용물을 건네줬다.
  그렇게 말 한 마디 없이 컵 내려놓는 소리, 바삭거리는 소리가 좌우로 왕복하며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야.”
  “어, 어? 왜?”
  “할 말 있는거 아니었나?”
  “…”
  “옆에서 계속 무슨 말을 할듯 말듯 안절부절못하는데. 보는 놈 입장에선 답답해 죽겠어?”

  그는 빨대를 짓씹는 행동을 멈추고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이윽고 컵을 내려놓으며 첫마디를 꺼내는데 맞은편의 상대는 그걸 듣자마자 미소를 거두면서 표정을 구겼다.

  “해외원정 프로그램, 반려하는게 낫다고 생각해.”
  “…너, 앞으로 할 말을 잘 골라라.”
  “지금은 안된다고 생각해.”
  “지난 번, 국화상에서의 10착이 네 근거라면… 앞으로 네 지시는 듣지 않겠어. 주인한테 이빨을 드러낸 대가가 뭔지 알고 싶나?”
  “그게 아냐.”
  “그럼 납득시켜 보든가. 날 실망시키지 마.”
  “심볼리 루돌프…”

  호적수의 이름을 듣자마자 시리우스 심볼리의 표정은 험악하게 바뀌기 시작했다.
  상대를 때려죽일듯한 눈빛으로 트레이너의 멱살을 잡았다. 그럼에도 그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눈을 피하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시리우스, 해외원정을 나서는 이유가 그녀가 되어선 안 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호승심이나 경쟁심 따위가 아닌 집착 때문이라면…”
  “주둥아리 안닫아?”
  “가문 안에서 너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서 잘 알진 못하지만 지금까지 넌…”
  “꺼져, 못들어주겠다.”

  시리우스는 신경질적으로 상대를 밀어내며 옷깃을 놓았다. 그 바람에 트레이너는 원치않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 멍멍이한테 어울리는 꼴이네.”

  짧은 조소를 뱉은 후,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걸어나갔다.
  남자는 주저앉은 채, 망연하게 떠나는 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개 취급 받는게 처음은 아니니까…”

  그는 고개를 떨구며 괜찮다고 되뇌었지만 목소리는 흐릿하고 표정은 천을 씌운듯 그림자로 덮여 알 수가 없었다.
  혼잣말은 의미없이 저녁놀에 섞여들어간다.

  누가 죽든 누군가와 다투든 트레이너로서 할 일이 있기에 대충 짐들을 수습하고 차를 세워둔 곳으로 발걸음을 터덜터덜 옮겼다.
  주차장에 도착해 차 문에 키를 꽂으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의 양어깨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놀라 고개를 돌린 트레이너는 괴한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짧은 탄성을 내지르고 상대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세상이 넓다 해도 타지에서 고향 사람을 보는 우연은 생각보다 적지 않다.
  타지에 살면 고향 이야기는 어떤 다른 주제보다도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법이라 특별한 주제가 없어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서로의 근황으로 시작한 대화는 가지를 뻗어 동네의 누가 결혼을 했느니, 사고를 당했느니, 이러쿵저러쿵하며 두서없이 진행됐다.

  “다시 생각해도 너, 진짜 독한거 같다. 우리 동네에서 중앙 들어간 사람, 지금도 너말곤 없어.”
  “아니, 그런 이야기는 됐고 네 부모님은 잘 계셔? 요즘 전화 못드려서 미안하다고 좀 전해주라.”
  “직접 해. 안그래도 걱정하시는데 전화 좀 자주 걸어. 중앙 다닌다고 비싼 척 좀 하지말고, 여기 친아들 냅두고 네가 걱정 다 받아가면 효도도 나보다 더 하는게 맞지 않냐.”
  “그건 좀 봐주라…”

  트럭 옆면에 몸을 기댄 남자는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이내 담배 연기를 가볍게 뱉고 그는 고개를 살짝 들어올리며 눈을 감았다.
  분위기를 잔뜩 잡는듯한 행동에 트레이너는 피식 웃으며 고향 친구를 향해 말을 이어갔다.

  “넌 뭔 일로 여기 왔어? 거리도 좀 되는데”
  “그냥 와봤다…”
  “휴가? 아니면 짤렸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근데 너, 트레이너 할만하냐?”
  “왜 물어보는데?”
  “화났냐? 궁금해서 그런건데.”
  “그럭저럭 할만하다. 됐어?”
  “야.”
  “왜?”
  “방금 다 봤다. 너, 왜 그러고 사냐? 친엄마 피해서 어렵게 중앙 트레이너까지 됐는데 그딴 취급 받아야겠냐?”

  땅거미가 진 어스름한 하늘에 담배 연기 한 줄기만이 힘없이 올라간다.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한동안 서로를 노려보다 담뱃재가 툭 떨어지는 것을 기점으로 친구가 입을 열었다.

  “하… 그 뭐냐… 시발, 돈 때문에 트레이너 선택한거 우리 부모님도, 나도 아는데 네가 그런 취급 받는거 알면 우리 엄마 뒷목잡고 쓰러진다.”
  “네 부모님한테 효도하려면 돈 많이 벌어야지. 안그래?”
  “말 돌리지 마라. 우리 엄마가 너네 엄마 머리채까지 잡고 별 난리를 쳐서 널 우리집에 데려왔는데 너처럼 사는게 효도하는거냐?”
  “…”
  “너도 거기서 책임진게 있으니 바로 그만두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갈곳 없으면 나 다니는 곳에 소개도 가능하니까.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해봐.”
  “…고마워.”
  “나도, 우리 부모님도 널 가족이라 생각하거든? 남이 아니니까 혼자 앓지 말고 말 좀 해.”
  “…말하고 보니까 좀 부끄럽네. 손발 오그라들겠다. 아, 그리고 부모님한테 전화 꼭 해라. 제발, 나한테까지 잔소리 오니까.”

  친구는 말이 끝나자마자 바로 인상을 팍 쓰며 뒷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은 말이었던걸까.
  화답하듯이 트레이너는 쓴웃음을 지으며 작별인사를 꺼냈다.

  “시간만 애매하지 않았으면 같이 밥이라도 먹을까 했는데 아쉽네.”
  “됐어. 바쁜 놈 붙잡아서 내가 뭔 득을 보겠냐.”
  “숙소는 구했어?”
  “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가.”
  “미안, 먼저 간다.”
  “어, 가라.”

  친구는 길을 떠나는 트레이너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봤다.
  모습이 희미해지자 그는 트럭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담배꽁초를 플라스틱 컵에 휙 던졌다.
  바로 차의 시동을 걸지 않고 깍지낀 손을 뒷머리에 댄 채로 생각에 빠졌다.

  ‘그냥 말을 해야됐나…? 아니, 됐다. 걱정거리만 만드는건데.’

  짧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잡념을 털어냈다.
  방문 전에 간단한 선물이라도 사려고 상점가에 왔었는데 괜한 걱정만 챙겨가고 발걸음을 돌리게 됐다.
  짧은 넋두리를 뱉으며 차 키를 꽂아 돌렸다.

  “설마 뭔 일 생기겠냐…”

= = =

  그 뒤로 별일은 없었다.
  알고 지낸 시간이 어느정도 길어지면 오히려 화해하는게 더 어려워진다.
  다음 레이스를 위한 트레이닝은 계속 해야됐고 둘 모두 공사구분은 하는 편이라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트레이너는 다음날에 딱히 화해를 할거란 기대는 안했다.
  시리우스 심볼리는 좋게 말하면 심지가 굳었고 나쁘게 말하면 고집이 셌다.
  그래도 담당이라고 자기 말은 어느정도 들어주는건 고맙게 생각하지만 고집 센 사람이 누구 말을 들어준다는건 보통은 문자 그대로 귀만 열어놓겠단 뜻이다.

  “미안하다.”
  “뭐?”

  그래서인지 기대하지 않은 화해의 제스쳐에 의아함이 먼저 앞섰다.

  “무슨 일 있었어?”
  “섭섭한 소리를 하네. 나도 사과할 줄 아는 사람인데?”
  “어디 아파?”
  “안 아파. 그땐 화가 치밀어올라서 나답지 않았어. 머리가 좀 식으니 깨달았을 뿐이야.”
  “하…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내줘서 다행이다.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했는데.”

  사실은 거짓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처음부터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가 나진 않았다.
  한바탕 다툰 후, 시리우스는 내심 전전긍긍하며 떠나는 자신을 잡아주길 바랐는데 오히려 짐을 챙기고 혼자 떠나려는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방향을 돌려 거리를 두고 트레이너를 미행했다.

  분노는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 친구로 보이는 사람과의 대화를 목격하고 트레이너를 그만두라는 소리까지 들었을 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될 정도였다.
  어떻게 기숙사에 도착했는지 기억이 안날 정도로 얼이 빠져버려서 룸메이트로부터 평소에는 상상도 못할 걱정하는 소리까지 듣게 됐다.
  밤새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낑낑거리다 겨우 꺼낸 대책이 그것이었다.

  “흥, 꼬리를 말고 애처롭게 나만 바라보는 꼴이 불쌍해서 말이지…”
  “그렇게까지 보였어? 좀 부끄럽네.”
  “하여튼 어제 일은 없던 일이다? 해외원정 건은 연말까지 생각을 정리할테니까. 앞으로는 언급도 하지마.”
  “시리우스, 고마워. 그것도 모르고 조바심만 내버렸네. 널 믿을게.”
  “별걸 다 고맙다고 하네. 당연히 날 믿어야지. 그보다 내 트레이닝에 집중해.”

  제 딴에는 멋지게 갈등을 매듭짓고 시리우스는 곧바로 트레이너의 얼굴을 곁눈질로 바라봤다. 소리없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보자 그녀의 표정도 살짝 녹아내렸다. 시선이 느껴지자 곧바로 손으로 볼을 매만지며 표정을 바로잡고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았다.
  자존심이 있지. 오는 사람 안막고 가는 사람 안잡는다는 태도로 살아왔는데 자기가 아쉬워하는 입장이 되는건 싫었다.

  트레이닝을 마무리짓고 트레이너실에 도착하니 예기치 못한 손님이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우리 멍멍이. 잘 지냈어?”
  “이 사람은 누군데 너한테 아는 척이야?”
  “…”
  “뭔데? 퍼피쨩, 왜 말이 없어?”
  “아, 혹시 담당? 엄마가 와도 얘가 대답을 안해~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건 여전하네. 담당 앞이라 그런거니?”

  중년의 우마무스메는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띄워보는데 그렇게 큰 소득을 보진 못했다.
  트레이너의 표정은 굳었고 시리우스는 상대의 체취에 무례한 행동인걸 알면서도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옷차림은 단정하지만 온갖 화장품, 향수 냄새가 뒤섞인건 둘째치고 가끔씩 술 냄새가 틈 사이에서 기어나오는 벌레처럼 코를 괴롭히니 여간 곤욕스럽기가 짝이 없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엄마가 아들 보러 오는데 이유가 있니? 좀 차갑게 굴지 말고. 응?”
  “술 냄새 풍기고 올 곳이 아니라는건 아실텐데…”
  “으음~ 오기 전에 딱 한 잔 했어. 한 잔.”
  “어떻게 들어온… 아니, 그건 중요한게 아니네.”

  교직원과 친족 관계를 입증하든 따로 허가를 받든 방문 전에 인터넷이나 전화상으로 미리 신청만 하면 되니 어떻게 들어왔는지 묻는건 의미가 없었다.
  말문이 막힌 트레이너는 일단 자기가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

  “시리우스, 이야기가 길어질거 같으니까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낼게. 돌아가도 될거 같아.”
  “이 아이 이름이 시리우스니? 섭섭하네. 서로 처음인데 소개부터 해줘야지.”
  “엄마, 제발…”

  이상한 광경이다.
  자기 가족한테 담당을 소개할 수도 있건만 이 자리를 피하고 싶은 눈치다.
  시리우스도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지만 트레이너의 태도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악물고 주먹을 쥔 손이 떨리는 모습, 그녀는 그대로 남자의 부탁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시리우스는 문 앞을 서성거렸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자기 가족한테 담당을 소개하지 않는게 마음에 걸렸다.
  혼란스러운 감정이 가라앉으며 살짝 분노가 일었으나 문을 열어젖히지는 못하고 귀를 대며 벽 너머를 살폈다.
  벽 너머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 = =

  “인터뷰에 앞서 담당분 아리마 기념 1착 축하드립니다.”
  “네, 감사합니다. 근데 음… 인터뷰는 언제 공개하는 건가요?”
  “협의한 사항이나 발행지 정책에 따라 다르긴 한데 보통은 인터뷰 시점에서 일주일 정도 걸리죠. 혹시 무슨 문제가 있으신지…?”
  “아뇨, 그냥 제가 알고있는 사실과 다른지 확인한 거예요.”

  기자의 의문을 일축하고 무난하게 인터뷰를 마친 트레이너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앞으로 굽혀 무릎에 기대 잠깐 눈을 붙이기로 했다.
  연말에 있을 행사만 몇 개 넘기면 앞으로 한두달 정도는 숨 돌릴 시기가 온다.
  머리 속에는 몇 가지 걱정이 남았지만 무언가가 크게 엇나갈 가능성은 적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다.
 
  “우리 멍멍이 씨, 왜 그리 불편하게 자?”

  급하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시리우스 심볼리 또한 예상치 못한 과민반응에 덩달아 몸이 움츠러들었다.

  “으앗, 뭐하는 건데?”
  “어? 아, 미안해. 시리우스, 다른 사람하고 착각했어. 그 호칭으로 부르는건 좀 참아줘…”
  “왜? 퍼피쨩이나 멍멍이나 그게 그거잖아.”
  “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

  그는 두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문지르며 느릿하게 의자에서 일어났다.
  시상에서 위닝 라이브까지 끝났으니 돌아갈 시간이다.
 
  “시리우스, 넌 축하 모임이 따로 있지 않아?”
  “마치 넌 그 자리에 빠진단 소리로 들리는데.”
  “마침 연말이라 친지들도 모이는 자리일텐데 내가 끼는건 좀 그렇지 않나 싶어.”
  “안 돼. 따라 와. 반론은 안받아.”
  “그래도…”

  뭐라 제대로 말하기 전에 그녀는 말없이 트레이너를 향해 다가가고 그는 뒷걸음을 치다 이윽고 벽에 다다랐다.
  뭐라 말은 못하고 팔로 그녀를 제지하지만 내뻗은 상대로 그대로 잡혀버렸다.  
  서로의 코가 닿을 정도까지 얼굴을 들이민 시리우스는 목소리를 잔뜩 깔며 불만을 뱉었다.

  “야.”
  “…왜?”
  “저번에 왜 그랬어?”
  “뭐를?”
  “일주일 전쯤에 트레이너실에 네 어머님이 오셨을 때, 왜 날 따돌렸냐고.”
  “내 가정사에 신경 쓸 이유가 있어?”
  “언제나 그런 식이지. 마음을 주면 도망치고,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도 정도가 있어.”
  “그런 게 아냐…”
  “그럼 입 다물고 따라와. 가면 잡아먹히기라도 당할거 같아?”

  힘 차이 때문에 떨리는 트레이너의 팔을 보며 작게 실소를 흘렸다.
  이렇게나 쉬운데 어려운 길로 가려고 했구나.
  귀여운 퍼피쨩, 사랑스러운 강아지, 아, 이제야… 어떻게 다루는지 알았다.

  둘이 같이 문 밖을 나서는 와중, 눈을 가늘게 뜨고 남자를 다시 한번 바라봤다.
  체념한듯 눈을 내리깐 얼굴을 보고 처음에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손을 내밀면 고분고분하게 잡아주고 거리를 좁혀도 피하지 않는 모습에 웃음이 피어난다.

  시리우스는 타인에게 다소 시건방진 태도를 취할지언정 폭력을 휘두른 경우는 없었다.
  인종적으로 완력이 강해 철저한 교육을 받은 탓도 있었지만 주된 이유는 따로 있는데.
  어린 시절의 경험, 타인이 내놓은 선택지로만 갔었던 일에 후회를 느껴 강요에 큰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다짐을 좀 어긴 걸로 사람을 얻을 수 있으면 누가 마다할까?
  신념이라고 하기에는 철저하지 않고 약속이라고 하기에도 가벼우니 꼭 지킬 필요는 없다.
  따져봐야 10대 후반의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생각하는 다짐의 무게는 별로 크지 않았다.

  그렇게 트레이너를 끌고 간 후, 심볼리 저택에서 열린 연말 모임 겸 축하연은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자리였다.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를 소개하고 친척 동생들에게 신랑 데려왔냐는 식으로 놀림도 받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집안 어른들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고 부모님도 호의적인거 같다.

  트레이너가 자기 마음에 솔직해지는 것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시작이 조금 안좋았단 자각은 있지만 예전부터 그를 대했던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으니 당근과 채찍을 잘 써먹으면 되리라.

  그는 강아지같은 사람이니까.
  고분고분하고 나만을 봐주는 귀여운 사람.
  나한테 화내는 법조차 모른다. 조금은 어리광을 부려도 괜찮겠지.

= = =

  우편물로 뒤덮인 책상, 남자는 손바닥으로 표면을 한번 슥 훑었다.
  그 중에 몇 개는 내용을 확인한 것이고 또다른 몇 개는 봉인조차 뜯지 않은 것들이다.
  나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다. 안봐도 아는 것들이니까.
  그렇게 손으로 던지고 쳐내니 밀랍으로 봉인한 멋들어진 편지 봉투 하나가 남았다.

  잘나가는 명문이란걸 자랑하고 싶은지, 먼저 유선상으로 통보했음에도 굳이 우편으로 전하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는 점에서 그는 새삼 사는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봉인을 뜯고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의 내용을 읊었다.

  “귀하의 귀책사유로… 본 편지는 계약 해지에 관한 사항을 통보드립니다. 때이른 작별에 유감을 표하며… 어쩌고저쩌고…”

  다소 비꼬는듯한 느낌으로 중얼거리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끝이구나.
  삶은 쉽사리 끝나지 않기에 어렵다. 끝날 수 있다면 새로 시작할 수도 있을텐데.
  그런 점에서 트레이너에게 삶이란 항상 끝내고 싶은 것이었다.

  그의 기억은 친모로부터 목줄로 목이 졸리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술 냄새, 남녀의 웃음 소리가 뒤섞이고 시야가 좁아지면서 오래된 전등이 깜빡이듯이 잠깐 세상이 까매졌다가 밝아졌다.
  겨우 몸을 일으켜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니 해뜨기 직전, 푸르른 새벽 하늘이 보였다.
  왜인지 몰라도 눈물을 흘렸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일지, 새벽 하늘이 아름다웠는지 그때의 감상만큼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스스로를 개로 여기며 살아왔다.
  목줄에 목이 졸린 그때부터였을까? 사채업자들이 트레이너의 친모가 아닌 그를 찾아가기 시작했을 때? 아니, 사실은 태어났을 때부터?
  목줄의 쥐고 있는 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모습을 바꿔갈 뿐, 그는 언제나 목줄을 찬 개였다.

  어린 시절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 넘기고 엄마 친구라는 사람이 와서 남자를 친모에게서 어찌 떼어내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잠깐 착각을 했던 시기다. 채무자들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돈 못받은 사람들은 참 무섭다. 법이고 뭐고 어떻게든 받아낼 방법을 찾아서 쫓아온다.

  중앙 트레센에 도전하게 된 이유도 그 탓이 크다.
  학대를 가한 친모가 우마무스메인 배경 때문에 본능적으로 혐오감이 들었지만 뭐, 어떤가. 돈만 많이 받을 수 있으면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
  이성적으로는 그때 목을 졸랐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들이란걸 안다.

  꽤 어려운 과정이었지만 두 번의 도전으로 트레이너가 됐다.
  그는 꽤 똑똑한 사람이다. 자기가 개라는걸 알 정도니까.

  혐오감과 트라우마 같은건 차치하고 트레이너 직무에 꽤 보람을 느꼈다.
  서브 트레이너로 커리어를 시작하면서 자기가 의지할만한 존재가 되는 느낌도 꽤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꽤 적성에 맞는거 같아서 스스로도 놀랐다.

  그렇게 1년 정도 서브 트레이너 일을 마치고 시리우스 심볼리를 담당을 맞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쪽에서 먼저 지명했다.
  처음은 트레센 학원 밖에서 호객꾼에게 휘말렸을 때가 첫만남이었다.

  - “퍼피도 송곳니 정도는 있잖아. 장식으로 달고 있는 거 아니지?”

  그 말을 듣고 잠깐 정신이 아뜩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자기 본질을 꿰뚫린 불쾌감, 우마무스메라는 인종에 대한 혐오감이 가장 먼저 뇌리를 강타했다.
  최악의 첫인상이었다.

  그래도 담당이 된 이상, 최선을 다했다.
  안면을 튼 시간이 길어지니 새로운 면모도 알게 되고 오해도 풀리면서 나름대로 정이 들었다.
  배경과 처지를 잊고 우정을 나눌만한 상대 정도는 됐다고 생각했었다.
 
  - “그래, 파티는 어떠셨나. 퍼피쨩?”
  - “시리우스, 하… 정말로 다 모인 줄은 몰랐는데…”
  - “음? 불만있어?”
  - “아니, 오해가 있을거 같아서… 방금 남친같은 말이 나올 때, 거기 어른들 눈빛이 조금…”
  - “넌, 내 건데. 집안 어른들이 뭐 어쨌는데?”
  - “우리, 그정도 사이였었나?
  - “…무슨 소리를 할건지는 모르겠지만, 입 닫아. 따르기나 해.”

  축하연 자리, 저택 발코니에서 서로 나눈 대화, 시각이 다름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저 마음은 소유욕에 불과할 뿐이라고
  최근 들어 힘으로 제압당하는 일이 생기고부터 느끼던 애매함이 방금의 대화로 확신이 됐다.
  경고 한 마디와 함께 목을 조를듯이 감싸쥔 그녀의 손은 마치 목줄과도 같았다.

  학생과 지도자의 관계, 사회적 지위, 나이 차이 등등 온갖 장애물이 둘 사이에 있지만 가장 중요한게 하나 있다.
  ‘나는 그녀와 어울리지 않아’ 같은 자기혐오가 만든 착각은 아니다.
  그는 그저 우마무스메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튼 계약 관계를 중도에 끝내버렸으니 꽤 바빠질 것이다.
  귀한 집 아이 꾀어내고 계약 해지까지 시켰으니 중요한 시기를 허송세월하게 만들었다고 어떻게든 책임 소재를 묻거나 거액의 위약금을 요구할 수 있다.
  어차피 상관없는 이야기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말 끝이니까.

  살아가려고 한다면 살 수 있다.
  시간만 들인다면 빚은 다 갚을 수 있다. 남은 삶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 그게 의미가 있을까?
  목줄에 매인 삶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지만 목줄이 없는 삶은 상상도 못한다.
  평범한 삶은 상상조차 못하는 삶이다.
  그는 희망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처음은 친엄마 그리고 채무자 그 다음은 시리우스 심볼리
  마지막으로 목줄을 잡은 것은 벽에 박힌 선반이 되었다.

= = =

  시리우스 심볼리는 성큼성큼 발소리를 내며 트레이너실을 향했다. 숨소리는 분을 삭이지 못한 탓에 조금 식식거리고 눈매는 날카롭다.
  문 옆의 상태안내 표지판은 ‘업무 중’ 표시다. 예의상 문을 가볍게 노크하고 대답을 기다렸다.
 
  대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자 귀를 문 쪽으로 살짝 가까이 옮겨 벽 너머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것처럼 고요하다.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그녀는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선전포고하듯이 고성을 내질렀다.

  “너, 계약 해지라니 정신이 나간거냐?”
  “…”
  “하, 아무 말도 없어? 선반 아래서 뭐 하는…”
  “…어?”

  위화감을 느끼고 황급히 선반 아래의 인영을 향해 달려나갔다.
  일몰을 등지고 서 있는 형체에 가까이 다가서자 그것은 서 있는게 아니라 매달려 있다는걸 알게 됐다.

  “야… 너, 왜 그렇게 있는 건데… 왜… 왜…”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트레이너에게 질문을 던졌다.
  애석하게도 대답을 할만한 상황은 아니었기에 공허한 말소리만 방 안에 울려퍼진다.

  “아, 아, 퍼피…쨩… 아…”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흐느낌에 섞인다.
  흐린 시야 속에서 가까스로 그를 바닥에 눕히고 응급처치를 시작한다.
  현실도피에 불과한 행동이지만 배웠던 내용을 필사적으로 떠올려가며 떨리는 팔다리를 쉬지않고 움직였다.

  안기고 싶었던 그 품을 세차게 밀어낼 수밖에 없다.
  닿고 싶었던 그 입술은 무척이나 차갑다.

  온몸이 땀으로 푹 젖고 얼굴은 눈물과 땀으로 범벅이 되면서도 처치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결국 그 모든게 의미없다는걸 겨우 깨닫고 트레이너실에 있는 응급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트레센 응급연락망입니다. 어떤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여보세요… 퍼, 퍼피쨔… 아니, 여, 여기… 사, 사람이 흣…흑… 죽었어요…”
  “의료팀 출발했습니다. 응급처치법은 알고 계신가요?”
  “이, 이미, 했… 읏… 어요…”
  “잠시 진정해주세요. 일단…”

  시리우스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수화기를 든 팔을 아래로 툭 떨궜다.

= = =

  “…혼자 왔냐?”
  “…”
  “왜 말없이 가만 있어? 우리 서로 한 번 봤었을텐데? 아니다. 난 너 세번째로 보는 거네.”
  “어머님께 사죄를 드리려고…”
  “사죄는 무슨 사죄? 친엄마라는 인간은 아들 뒈진거 알고 헤까닥했는데 왜? 우리 엄마까지 미친년 만들려고 왔나?”

  쪼그려앉은 남자의 발치는 담배 꽁초가 한가득이다.
  상대가 우마무스메인걸 알면서도 담배 연기를 연신 뱉어내며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네가 사죄해봐야 뭐가 달라져? 알면 까무러칠 이야기 해서 뭐하게?”
  “…”
  “하…”

  자리에서 일어나 발로 꽁초들을 대충 긁어모으고 손가락으로 코를 슥 훑었다.
  여자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땅을 계속 쳐다본다.
  그는 민망함을 애써 감추려 이마와 앞머리를 손으로 한 번 쓸어올리고 한숨을 크게 쉬며 입을 열었다.

  “그쪽도 뭐… 아니, 아니 무슨 말을 하겠냐만은… 아무튼 처음부터 무례하게 말한건 미안한데. 근데 그냥 가셨으면…”
  “최소한… 최소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만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아, 미치겠네. 그쪽도 그냥 편하게 말해요. 나도 말 막 할거니까.”

  스스로도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어 반문했다.

  “그런데 댁도 2년 정도 함께 있었잖아. 그… 뭐냐 가문에서 신상 조사 안하셨나?”
  “했었어… 다만 모두 알려주진 않았다.”
  “알만하네. 애한테 다 알려주는건 좀 그렇지.”

  남자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옆으로 기울였다. 이내 얼굴을 찡그리며 그것을 구겨버리고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래도 전부 말해. 다 말하는 조건으로 나도 그정도는 알아야겠다. 그쪽에선 내 친구를 어떤 모습으로 보는지 궁금하네.”
  “…별거 없어. 젊은 시절의 치기로 덜컥 애 낳았는데 남자는 어딘가로 도망치고 고향에 내려와서 혼자 키우려니 막막했겠지. 그러다보니 자기 애한테 사회생활의 고통을 풀게 되면서… 그 사람은 망가졌어.”
  “뭐, 내가 아는 거랑 크게 안다르네. 그런데 계약은 왜 해지한건데?”
  “트레이너의 친모가 심볼리 가문과 접촉한 일이 있었다…”
  “…”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자기 아들을 구실로 삼아 돈이라도 뜯어낼 작정이었나봐. 하필 내가 트레이너를 집안에 소개하기 며칠 전 이야기였어. 타이밍도 좋아. 누가 봐도 트레이너가 노리고 그런거 같잖아. 우습지? 하… 하하…”

  시리우스 심볼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마른 웃음을 토했다.
  그는 심드렁한 눈빛으로 그녀를 잠깐 흘겨보고 말을 꺼냈다.

  “내 차례인가?”
  “그래, 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나는, 음… 그 녀석, 언제 처음 봤더라. 아, 초등학생 때 등교하다 봤네. 담벼락에서 웅크린 채로 울고 있었지.”
  “아침에 학교 갈 생각은 안하고 질질 짜고 있길래 왜 우냐 물었더니 계속 울기만 하더라. 그때 목에 줄로 조른듯한 자국이 있어서 좀 이상하다 생각했었는데.”
  “…”
  “네 입장에선 이런 이야기를 왜 하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이게 네 트레이너를 설명하기 가장 좋은 이야기야. 계속 들을거지?”
  “상관없어…”

  내심 ‘전혀 상관없을거 같지 않은데’ 라고 생각했지만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자기 친구가 죽은 원인 중에 그녀의 비중도 조금은 있으니까. 마음 써줄 이유는 없다.

  “결론만 말하면 친모한테 목이 졸린거야. 그것도 강아지 목줄로, 강아지를 키우려고 했는데 집주인이 애완동물은 금지라고 하니 홧김에 그랬다고 했었나?”
  “그 뒤에도 우리 강아지, 강아지 하면서 지 자식한테 목줄을 채우는데 나중에 우리 부모님이 친모라는 년과 그 녀석을 떼어놓고 그 건으로 이야기 하니 뭐라고 한지 아냐?”

  그녀는 창백한 안색이 되어 벽에 기댄 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전 강아지니까 괜찮아요.’ 라고 말하대? 나중에 나이 처먹고 트레이너 되어서 그 이야기 다시 꺼냈을 땐 이젠 괜찮다고 하니 나도 털어낸줄 알았어.”
  “그런데 씨발… 그 놈이 죽고 방 정리를 하다보니 그 목줄이 나온 거야… 어떻게 챙긴건진 몰라도 그걸 간직하고 있더라 너가 봐도 그게 괜찮은 거냐?”

  격앙된 말투로 말을 이어가던 그는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겠지. 근데 솔직히… 네가 책임을 질 필요는 없어. 그 녀석도 나이가 찬 성인인데 애새끼 보고 지 멘탈 케어 해달라고 징징거릴 수는 없잖아?”
  “아, 아… 난, 나는…”
  “속된 말로 네가 멘탈 깨질 일이 아니라고, 넌 그저 자기 트레이너를 애칭으로 부른 건데. 그리고 네가 패악질 부린건… 아, 됐다. 그거 받아주는 것도 업무 중 하나일텐데.”
  “그럴 의도가… 아니야. 난…”
  “그래, 네 말이 맞으니까. 너네 집으로 꺼져. 우리집 뒷마당에서 질질 짜지나 말고”

  주저앉은 채,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시리우스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며 남자의 셔츠자락을 짧게 잡았다.

  “부탁,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못한게 있어요… 최소한 부모님께 사죄를 드리지 못하면… 그 사람의 묘에 갈 자격이 없어요.”
  “우리 부모님 만나봐야 무슨 득을 보는데? 자기 자식이 마지막으로 공들인 담당으로 기억에 남으면 얼마나 좋아?”
  “제발… 몇 마디만이라도…”
  “하…”

  무의미한 문답만 반복하며 시간만 보낼 예감에, 남자는 대꾸없이 뒷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부모님한테 이야기는 잘 끝냈다고 말하고 문을 열어주지 말라는 언질도 덧붙였다.

  멀리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당장은 무시할 수 있겠지만 부모님은… 그럴 수 없을 거다. 원체 동정심이 많은 분들이니까.

  예감대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집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탄식과 비명섞인 울음이 정적을 찢어발겼다.  
  곧이어 집기가 깨지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방을 나오니 시리우스 심볼리는 웅크린 채로 흙을 뒤집어썼고 나동그라진 액자, 플라스틱 화분은 입을 헤 벌린 모습으로 누워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맡은 담당이라고 사람이 다칠만한 유리컵 같은건 면전에 던지지 않은 모양이다.

  “지랄났네…”

  나지막하게 뱉은 욕지거리가 이 상황을 대변했다.
  지옥에 욕설 한 마디 더 얹어봤자 달라질게 없는건 그나마 위안이 될만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 = =

  심볼리 루돌프는 읽던 책을 덮고 차 창문을 내려 시리우스를 바라봤다.

  “이야기가 잘 끝난거… 같지는 않네.”
  “…잠긴 문이나 풀어.”

  그녀의 몰골은 좋게 말해도 멀쩡한 꼴은 아니었다.
  코트는 흙과 찻물로 범벅이 됐고 볼에는 옅게 쓸린 상처, 머리카락은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갈텐가? 트레이너 분의 묘라도…”
  “가지 말래…”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모습을 보며 루돌프는 한숨을 푹 쉬었다.

  “트레센 학원으로 가 주시죠.”

  차 안은 히터 소리만 들린다.
  수많은 학생들을 상담해왔던 그녀도 머리 속에서 위로의 말을 고르기에 급급했다.
  수차례 입을 달싹이다 결국 위로를 건네는건 포기하고 차를 돌려 트레센 상점가로 향했다.
  상점가에 도착한 루돌프는 차 밖으로 나갔다. 이내 종이봉투를 들고 오며 내용물을 시리우스에게 건냈다.

  “자네도 나도, 아직까지 한끼도 못했지, 요기거리를 가져왔네.”
  “이건…”
  “몇 개월 전에 유행했는데 난 처음 접하는 거라… 기대가 좀 되는군. 듣던대로 당근 모양으로 된 고로케인가. 색도 꽤 잘 맞췄는걸.”
  “…맛없어.”
  “음? 뭐, 기대했던 것보단 별로지만 그렇게까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숨죽이며 오열하는 시리우스가 있었다.
  그때의 그것과 똑같은 것일텐데. 달라도 너무 다르다.

  “트레이너, 미안, 해… 보고싶어…”

  하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지만, 조금이라도 더 근사한 말을 꺼내고 싶지만,

  온갖 미사여구로 점철된 말은 명계의 강을 다 건너기도 전에 가라앉아버릴 것이다.


  그저 단 한 마디라면 그 사람에게 닿을 수 있을까.


  “사랑해…”

  차창 밖은 곧 벚꽃이 올 계절, 아직은 차가운 바람이 불지만 봄은 온다.
  고작 개 한 마리 죽은 걸로 봄은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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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에 올리는 김에 대회 투고도 겸사겸사 해봄


예전에 대회서 쓰던 아이디는 비번을 까먹어서 새로 가입해서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