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와준다는 명분으로 개똥철학 늘어놓는 가족이란 인간들이랑 대화하다가 답답해서 그냥 푸념글 씀.
아버지나 대학교 선배같은 주변 지인들처럼 괜찮은 사람들도 많지만, 단순히 상대방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좆같은 사람들도 많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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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극심한 불안장애와 중증 우울증으로 인해서, 인생 절반을 '살아있지만 마치 죽어있는 듯한' 생활을 보냈다. 우울증으로 인해 수면 패턴이 망가지면서 내 시간 감각은 뒤틀리기 시작했고, 불안장애로 인해 생기는 무력감과 초조함은 우울증을 더 악화시켰다. 나는 고통으로 가득찬 인생을 끝내기 위해 서랍 첫 칸에 넣은 칼을 셀 수도 없이 쥐었다가 내려놓았다.
하지만 내 인생은 온전히 내 것 만은 아니다. 여태까지 내 정신적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주시고, 물질적인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럴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내가 그렇게 해서 사라진다면, 아버지는 무엇이 되는가? 어머니와 이혼하시고, 할머니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하시고, 결국에는 나 하나만이 남은 이 상황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만큼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내 삶의 미련이자 목적이 되었다. 적어도 아버지가 눈을 감기 전에는 원하는 것 다 이뤄드리고 가자고.
나는 이 개미지옥 같은 뒤틀린 생활에서 벗어나오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일을 조금씩이라도 해보려고 했다. 처음에는 그렇게 수월하진 않았다. 우울증은 마음의 감기가 아니라 뇌를 좀먹는 악성 종양과도 같다. 처음에는 이 무기력의 늪에서 자력으로 벗어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나는 몇 년간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상담을 지속적으로 받고, 운동을 조금씩이라도 이어나가면서 겨우 우울증의 늪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우울증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벗어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주변인의 도움이나 결정적인 계기, 무엇보다도 정신과의 도움이 절실하다.
이런 우울증 환자에게 '너는 이겨내려는 의지가 없는 것 같다', '너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열심히 산다', '나도 트라우마를 겪어본 적이 있고 이렇게 극복했다' 등은 전혀 도움이 되는 말들이 아니다. 단순히 우울증이 의지의 문제였다면 정신과는 왜 존재하고 약이 왜 있고 상담은 왜 필요할까? 아무것도 모른 채 환자들의 등을 떠민다. 환자가 딛고 있는 땅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절벽 끝인 걸 모른 채.
'나보다 더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도 열심히 산다'고? 사람들이 겪은 정신적인 고통이 경제적 상황이나 사회적 지위와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을까? 돈도 명예도 내던지고 세상을 떠난 재벌들은 바보라서 그런걸까? 모든 사람이 겪는 어려움과 그 상황을 극복하는 능력은 매우 개인적이며 다양하다. 어떤 이에게는 큰 도전이 될 수 있는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비교적 수월할 수 있다.
'나도 트라우마를 겪어본 적이 있고 이렇게 극복했다'는 대체 왜 꺼내는 걸까? '나도 할 수 있으니 너도 할 수 있다' 뭐 이런 걸까? 경험상 대개 이런 말이 나오면 뒤로 이어지는 말에선 상대방이 겪은 경험이나 감정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나도 극복했는데 넌 왜 못해?' 이런 식이었다. 자신이 했던 방법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통용될거라고 생각한다면 그 방법을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 매뉴얼에 당장 실어야 하지 않을까? 당장 정신과로 달려가 정신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 앞에서, '보세요, 나는 이렇게 해서 극복했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할 수 있어요!'라고 선포해야 할까? 그 전에 모든 의사가 같은 처방을 써야 할까? 모두에게 같은 치료가 통한다면, 의학은 정말 간단할 것이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양한 방면으로 도움을 주려는 건 고맙다.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인지 알기에 어느 정도 쓴 소리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처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동안 환자가 해왔던 모든 노력을 평가 절하하는 발언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고맙다. 가족이란 인간들이 어떤 인간들인가 절실히 알 수 있게된 계기를 제공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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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족이랑 대화하다 푸념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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