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안붕 씨."

"아닙니다, 저야말로..."


얀붕은 차분하게 마이크를 들고 있던 얀진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은 뒤, 그녀와 악수를 나누었다. 그의 표정에서 개운함이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모든 예측이 불확실했기에 아직 얀붕은 완전히 불안감을 지워낼 순 없었다. 

설령 그녀의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성격이 대중들에게 밝혀지더라도 그녀가 얀붕을 포기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고, 뉴스와 기사를 본 얀순이가 돌발적인 행동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 


"얀붕 씨. 당분간은 얀순 씨랑 만나거나 통화할 때 조심하세요. 저희도 최대한 밖으로 얘기가 새지 않게 노력해볼게요."


이런 그의 걱정을 아는지 얀진은 얀붕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측은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다독여주었다. 그녀는 얀순과 얀붕과의 관계에서 제3자였기에 지금 그의 심정을 100%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되었든 자신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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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얀순 : 얀붕아ㅎㅎ 지금 어디야???]

[김얀붕 : 잠깐 나왔어]

[김얀순 : ???]

[김얀순 : 날씨도 쌀쌀한데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녀ㅎㅎ 얼른 들어가]


"..."


얀진과의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갈 집도 없어 헤메던 그때 그녀에게 카톡이 왔다. 

잠시 나왔다고 하니 곧바로 날씨가 춥다며, 오늘도 집에 갈 거라며 얀순이는 제 마음대로 떠들어댔다. 정말 질리다 못해 보기가 싫어졌다. 어차피 며칠 뒤면 평생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할 텐데, 나는 그 짧은 순간조차도 그녀와 육성으로 얘기하거나 대면으로 만나는 것이 싫었다. 


지금도 가끔씩 버스 광고판에서 그녀의 얼굴이 나올 때마다 흠칫 놀라곤 한다. 광고판 속의 밝은 미소를 띤 그녀가 가짜임을 알면서도, 고개를 돌리면 진짜 그녀가 눈앞에 나타날 것만 같은 망상에 시달린다.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아주 빠르게, 그녀의 폭언과 아직도 몸 구석구석 선명하게 남은 폭력의 흔적들이 내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 것 같다. 

이럴 줄 알았다면 병원에서 정신 치료를 더 성실히 받았어야 했는데. 살짝 후회하고 있다. 


[김얀순 : 맞다! 얀붕아 지금 전화할 수 있어?]

[김얀붕 : 아]

[김얀붕 : 밖이라 전화 못할 ㄱ


띠리링

띠리링


...얀순이는 오늘도 여전히 이런식이다. 

그녀의 물음표는 질문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상 통보나 마찬가지다. 지금 당장 그녀의 연락을 거절했다간 어떤 짓을 당할지 몰라 숨을 크게 들이쉰 뒤 조용히 그녀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ㅅ..."

"얀붕아, 지금 시간이 언젠데 밖이야? 여자친구 기다리게 하는건 아니지이, 지금 네 집앞에 거의 다 왔는데 빨리 와~."


역시 그녀는 내가 전화를 받자마자 자기 할 말만 늘여놓고 투정을 부렸다. 어젯밤의 그 소름끼치는 차가운 목소리와는 정반대의 가벼운 농담스런 말투였지만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이 있듯, 나는 얀순이의 목소리에서 미약하게 그녀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조, 조금 늦을...것 같은, 데?"

"..."


하지만 나도 그녀에게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미 얀진과 함께 벌어놓은 일이 있지 않은가. 

제삼자가 듣기에는 다소, 아니 매우 유치한 애들 반항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내 나름대로 최대한 반항스럽게 그녀에게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얀순이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없이 있다가 이내 의미를 알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웃음소리에 식은땀을 흘리는 사이 다시 그녀가 물었다.  


"얀붕아, 많이 늦어?"

"...응."

"그래그래~, 천천히 놀다와. 기다릴게~."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전화를 걸 때와 똑같이 자기 마음대로 끊어버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끊기고 나서야 나는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눈을 껌뻑거렸다. 

얀순이는 내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비꼬듯이 반어법을 사용하며 은근한 압박을 넣곤 했다. 보통이라면 마지막 그녀의 말을 듣고 아차 싶어 귀가를 서둘렀겠지.  


.

.

.


나는 '205호'라는 번호가 새겨진 문을 두드렸다. 

잠시 안에서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활짝 열리며 집안에 있던 사람이 갑작스레 방문한 나와 눈이 마주쳤다. 


"...택ㅂ, 야...얀붕 씨!? 여기는 어떻게 알고...?"

"죄송해요, 얀진 씨. 갑자기 찾아와서..."


집주인은 다름아닌 오전에 인터뷰를 나누었던 기자 박얀진이었다. 

그녀는 방금 씻은 것인지 젖은 머리에 수건을 얹어놓은 상태로 손님을 맞이하다가 화들짝 놀라 "자, 잠시만요!"라고 외치며 문을 거세게 닫아버렸다. 

그렇게 어벙벙한 상태로 닫힌 문을 바라보는 것도 잠시, 이내 다시 문이 열리며 옷을 챙겨입은 그녀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그녀는 처음엔 자기가 사는 집을 내가 어떻게 알았는지 당혹스러워하다가 이내 자신이 장문의 카톡을 보내면서 직접 집주소를 까발린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는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인상을 썼다. 


"이제 좀 쓸데없는 카톡도 줄여야겠네요..."

"그래도 그 덕분에 오늘 얀진 씨 찾아왔어요, 사실은..."

"저희도 가고 나서 얀붕 씨 걱정하긴 했는데, 잘 곳이 마땅치가 않죠?"


얀진은 내 걱정거리를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겐 이미 내가 주변 지인과 가족들로부터 고립당하다시피 한 것을 설명한 적이 있었기에 바로 내 고민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한참이나 "그래도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밤늦게 오시면 어떡해요?!"라며 그녀의 볼멘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그 자리에서 사정사정해가며 간신히 얀진의 집에서 밤을 보내기로 한 나는 최대한 그녀의 잠자리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현관 자리에 누웠다. 

나에게 기꺼이 저녁 식사까지 대접해준 그녀가 최소한 안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평수가 작은 원룸이었던 터라 거기 말고는 딱히 자리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얀붕 씨, 거기 보일러 안 들어가요."

"근데 여기 말고는 딱히..."  


그렇게 내가 현관 근처에 자리를 잡자 집주인이 이불 안에서 혼잣말을 하듯이 나에게 말했다. 

누운 자리가 춥긴 추웠지만 쌀쌀한 늦겨울에 밖에서 노숙을 하는 것보다는 나은 처지라 군말없이 잠만 잘 생각이었다.


"하, 사람이 이리 말해도 왜 못 알아들어요? 그냥 제 옆에 오세요."

"...예?"

"아...아니, 그 뜻은 아니고! 여기 공간 남으니까 제 쪽에 이불 펴시라구요!"        


하지만 그녀는 한바탕 옷더미들을 집어던어던지며 소란을 피우다가 자기 옆자리를 내주었다. 

괜히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기에 조심스레 그녀의 옆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마침내 그녀가 불을 끄자, 어두캄캄해진 원룸에 정적이 돌았다. 그러나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상황이 휙휙 바뀌어서인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건 외간 남자를 집으로 불러들인 얀진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천장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진짜 얀붕 씨랑 이렇게 같이 잘 줄은 상상도 못했는데."

"...저도요."

"얀붕 씨, 그 날 기억나세요? 포르쉐 박은날."

"...당연하죠. 지금와서 하는 얘긴데, 그때도 얀순이한테 뺨맞고 힘들었거든요. 거기다 사고까지 나니까 그냥 욕이라도 시원하게 갈기려고 했었어요."

"그거 집주인한테 하는 소리맞죠? 지금 밖에 눈이 오네마네하는데, 자신있는가봐요?"

"...농담이에요."


얀진의 말에 내가 꼬리를 내리고 헛기침을 켰다. 그녀가 사고를 내긴 했지만 이미 수리비를 받고 합의까지 끝낸 상황이라 더 이상 그때처럼 내가 갑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거 때문에 얀붕 씨랑 이렇게 만나고, 엄청난 대형 뉴스까지 잡았으니까 제 나름으로는 '전화위복'이네요."

"예? 전화요?"

"...흡."


시시한 농담에 그녀가 피식 코웃음을 치고는 장난스레 내 어깨를 툭 치더니 "진짜 헛소리 한번만 더 하면 현관으로 보낼 거에요."라며 웃었다. 언제 이성과 이렇게 장난스레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은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한바탕 각자 이불을 덮고 서로 웃다가 그녀가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얀붕 씨, 민감한 얘기지만은...얀순 씨, 지금도 사랑하세요?" 

"..."


그녀의 물음에 나는 한참이고 깜깜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얀순이와 처음 DM을 주고받을 때는 세상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고 더할 나위 없었다. 

가끔은 그녀의 답장이 한 달을 넘기기도 했고 나 혼자서 김칫국을 마시고는 이불을 뻥뻥 차기도 했지만 정말 그땐 행복했다. 


사실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녀가 나와 사귄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에도 그 마음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형식은 완전히 뒤틀렸었지만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녀와 사귀는 걸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받아들였지만 나도 그녀에게 어울리는 남자친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그녀의 이중적인 태도, 사랑하는 남자친구라며 SNS로 자랑하는 것과 별개로 얀순이는 조금씩 나를 반쯤 애완동물 취급하며 함부로 다루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내가 그녀에게 말대꾸나 성에 차지 않는 행동을 하면 그녀는 '목줄'을 당기고 '훈육'을 일삼았다. 처음엔 간접적이던 압박은 스키장 리조트에서 그녀를 거부하고나서부터 나날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는 언론의 힘을 빌려 그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땐 분명 그녀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아니요, 전혀요."

      

지금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다. 


.

.

.

.

.


"뭐하는거람."


그녀가 덩그러니 남겨진 소파에 몸을 기대고는 손가락을 두드렸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집주인은 부재중, 그것도 연락두절인 상태였다. 아무리 그녀가 카톡을 보내고, 문자를 보내도 그는 답장은 커녕 읽지도 않았고, 전화는 이미 꺼져있었다.   

진작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이빨을 드러내고 빈정대면 보통 꼬리를 말고 허겁지겁 집으로 귀가했을 그가 오늘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그녀에게 그야말로 개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여전히 '1'이 지워지지 않은 카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아무렇게나 폰을 집어던지고 그와 함께 누웠던 침대에 누웠다. 

슬슬 초조해질 법도 했지만, 그녀 역시 그처럼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지 느긋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속을 알 수 없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김얀붕, 그렇게 나온다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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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내내 쓰고지우고 하다가 간신히 올림

진짜 내글구려병이 무섭긴 존나 무섭다 팬아트까지 받아놓고 런할 뻔ㄷㄷ

 

봐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