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으, 얼른 가죠…”


“응, 어후, 심장 떨려…”


“그래도, 헤헤, 서로 진솔한 대화도 나누고, 아가한텐 미안하지만 오랜만에 그것…도 하고… 아무튼! 엄청 의미있는 시간이었어요!”


마치 적군의 본부에 잠입하는 것처럼 잔뜩 긴장한 채로 사방을 살핀다.


아무도 없는 해변임에도 야외에서 부끄러운 짓을 하니, 끝엔 둘 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오빠아!”


“지이~ 휘이~ 과아아안~!”


“지휘관이다! 다들 잡아!”


“커헉!”


“잡았다아~”


“에, 오빠, 이게 뭐야…? 가슴에 왜 붕대를…”


“맞다, 아까 말해줬어야 됐는데… 사실, 지휘관이 아까 바위에서 떨어져서 다쳤거든.”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도와줬지!”


“크게 다친 건 아니지? 휴, 다행이다…”


“응! 붕대와 연고만 틈틈히 갈아주면 문제 없대!”


하필이면 저 멀리서 날 발견하고 달려오는 삼총사. 도망갈 새도 없이 순식간에 달려들었다.


조금만 늦었으면 이 세마리 비글들에게 그렇고 그런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을 것이고, 그럼 당분간 얼굴도 못 마주치는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음, 일단 아가씨들, 잠시 스탑.”


“응?”


어쨌든 카리나와의 마음을 재확인한지 얼마나 됐다고 다른 여자들과 있을 순 없는 법, 품 안으로 안겨든 삼총사를 잠시 떼어두고 카리나의 허리를 둘러안으며 말했다.


“아내랑 데이트하고 있잖아, 데이트. 너희들이 그렇게 안겨들면 안 되지.”


“헉! 맞네! 타이밍이 안 좋았구나…”


“앗, 미안해, 오빠… 어라, 벌써 결혼한거야…?”


“그때 키…”


“키?”


“키스했으니까 결혼한 거 맞지! 엄청 진하게 하더라구!”


“뭐뭐? 그걸 봤다고?”


“응! 그때, 공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식당 뒤편에서”


“SOPII, 그만…!”


“지금 상황에서 할 얘긴 아닌 것 같아…”


“으…”


“크흠…”


에이 참, 분위기 바로 깨지네.


친구들도 놀란 SOPII의 폭주에 우리 둘의 얼굴은 홍당무에서 토마토로 진화했다.


한편으로는 ‘얘네들이 그걸 어떻게 본거지?’라는 의문과 ‘와, 그정도로 격렬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아, 그런가?”


“그래…! 지휘관과 카리나한테 실례야… 근데 우리가 뭐 때문에 지휘관 찾았더라?”


“글쎄…”


“아! 튜브!”


“맞다! 튜브 사주라고 하기로 했었지!”


“지휘관, 우리도 튜브 사줘, 튜브!”


“장관 언니는 사주고 우리는 안 사주고!”


그리고 본색을 드러내시는 세 꼬맹이들. 얀순이의 튜브가 그렇게 부러운지 아이처럼 칭얼댄다. 


하지만 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지. 어렸을 때부터 쬐끄만 녀석들 조련하는 데에 도가 튼 김얀부이 아니겠나?


“수영 잘 하면서 뭔 튜브야.”


“뭔 소리야! 우리 셋 다 맥주병인데!”


“칸센이 그런 소릴 하네…”


“호넷은 그렇다 쳐도 우리 둘은 바다와 담을 쌓았잖아! 육지와 하늘, 물과는 완전 상극이라고!”


“너희들, 나 배신하는거야?”


“그게 아니라…! 오빠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ㅅ”


“자, 넌 함재기도 할 수 있고, 너는 794 시절 수중침투 단골이었어. 끝. 반박 안 받아. 마저 데이트하러 갈게.”


“아, 잠깐만! 이건 아니지!!”


“우리가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수영도 가능한 건 아니란 말이야!!”


“나는 항모에서 뜰 수 있는거지, 물에서 날아오르는 게 아니라고! 그건 비행정이지이이!!”


“아, 아, 몰라몰라. 내가 너희들 수영하는 것만 몇번을 봤는데 어디서 확 마.”


“윽…! 그래, 수영할 수 있어! 하지만 수영과 튜브는 별개의 문제라구우!”


“수영은 수영대로, 튜브는 튜브대로!”


“예예, 연설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만 가볼게요.”


“에, 어딜 가는데?!”


“몰라요~”


“거기 서! 튜브는 사주고 가아!”


“카린, 도망가자!”


“네? 엣, 지휘관니이임!?”


-으으으으으…!


“내일 우리한테 잡히기만 해봐! 절대 안 놔줄거야!”


저런 얄팍한 수작으로 날 이기려 하다니, 가소롭구만.


아주 손쉽게 격파해주고 카리나와 자리를 떠난다. 한순간에 털려버린 삼총사는 뒤에서 씩씩거리며 수군거리지만, 깔끔하게 눈길조차 안 주고 떠나준다.


“후우… 후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에요…?”


“오냐오냐 해주면 버릇들어. 안 돼.”


“그렇다기엔 아이들한테는, 다, 해주시잖아요...”


“공주님들이니까. 나 따위가 감히 공주님들의 어명을 거역할 수 있겠어?”


“정말, 엄청 딸바보이시네요… 그리고 장관님한테 튜브 사줬다는 건 또 뭐에요?”


“어렸을 때 사준건데 아직도 가지고 있더라고.”


“흐음…”


방금전 대화에서 심상찮은 걸 캐치한 카리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진다.


이러면 또 불안한데… 하필이면 튜브를 사준 대상이 그 누구도 아니고 얀순이니까.


“그러면, 저도 내일 하나 사야겠어요.”


“어, 그래… 뭐 사줄까…?”


“네? 당연히 제 돈으로 사야죠. 누구와는 다르게요.


“...알겠어, 네가 원한다면야…”


살벌하다 살벌해…


아, 해변에서의 밀회는 침대에서도 계속 됐다.


아이들이 깰까봐 안절부절해 하면서 사랑을 나눴더니 배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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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아빠, 새벽에 뭐 했어…? 엄청 시끄러웠다구웅…”


“아… 그게… 어… 음…”


“운동… 운동!”


“어어! 그래! 운동했어!”


“밤에… 운동을…?”


“하암… 졸려…”


아우, 부끄러워라.


아빠와 새엄마의 일탈로 피곤함이 잔뜩 서린 아이들의 얼굴. 놀기 위해선 체력이 필요한데 전혀 그런 모습이 아니다.


결국 아이들은 해변 대신 이불을 택하고 마저 잠을 잤다. 심지어 꼬마 메이드들도 일 대신 잠을 택했으니, 애비로써 참 할 말이 없다.


“우리가 너무 심했나봐…”


“그러게요… 으…”


“애들 깰 수도 있으니까, 나가자. 어제 튜브 사고 싶다고 했잖아.”


“아, 그랬죠? 어서 가요!”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해변으로 향한다. 오늘은 제발 별 탈 없이 하루가 지나가길 바란다.















…라고 한지 불과 5분도 채 안 지났을 무렵이었다.


“잠깐만, 저저저, 아오, 진짜, 또 풀어놨네.”


“네?”


“저기 봐봐. 저 나무 옆에.”


“나무…? 어?!”


“팔자도 좋아. 바싹 태우겠어.”


“저게 말이 돼요? 어떻게 범죄자들이…”


“얘가 뭔 짓을 한건지… 얼씨구, 나 보자마자 도망가네?”


“숨기는 게 있나봐요…”


794에서 찾아온 세 아가씨들이 저 멀리서 태닝을 하다가 날 보고 쏜살같이 사라진다.


시작부터 매우 꿀꿀한 기분이다. 이게 미국의 사법거래 뭐시기인가? 어떻게 돌아다니는거지?


짜증이 팍 난다. 음, 이럴 땐… 아이스크림을 하나 잡숴줘야지. 달달하고 시원한 것은 모든 근심걱정을 날려주거든.


“에헤이, 아침부터 참… 카린, 기분전환도 할 겸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까?”


“음, 네, 좋아요. 마침 목이 마르던 참이었어요.”


“우리 마누라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마, 마누라라니…”


“왜? 맞는 말이잖아.”


“그래도, 부끄럽다구요…”


“그러면, 와이프?”


“아으으…”


“하하, 알겠어. 그만 할게. 안녕하세요, 사장님. 또 뵙네요.”


어제 호놀룰루에게 가판대가 박살난 아저씨네 가게로 가서 초콜릿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는다.


아저씨도 날 반갑게 맞아주시긴 했는데, 영 달갑지 않는 이야기로 맞아주셨다.


“아이구, 여자친구랑 같이 오셨네. 어제 그 아가씨는 누구던가요?”


“옛날 친구입니다. 지금은 아니에요.”


“어라, 아까 우리 가게 와서 사과하면서 하는 말이 애아빠라 그러던데…”


“지휘관님…?”


“참나, 뭔 애아빠야, 씨…”


“허어, 비하인드 스토리가 또 있구만?”


맘껏 싸돌아다닐 수 있게 됐으니 깡도 생긴건가, 이제 막 나가네.


아저씨의 말을 들은 카리나의 얼굴이 순간 경직되어 내 뺨을 달군다. 그러면서 팔짱을 더욱 세게 낀다.


“카린, 걱정마. 어제 뭐라고 했어?”


“근데, 애아빠라뇨…?”


“걔네들이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


“아… 하…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죠. 어떻게 사람한테 그런 짓을 하고 애아빠라고…”


“많은 일이 있었나봐?”


“아, 그, 모르는 게 약일겁니다. 죄송하지만 알아도 좋을 게 없을 거예요.”


“역시 유명한 분답게 별 일이 다 생기시네. 미안해요. 내가 쓸데없는 얘길 꺼내서…”


“아유, 아닙니다.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네, 수고하세요.”


기분전환을 하려고 했더니만, 별 재미를 보진 못했다.


그러면 카리나의 말대로 튜브나 사러 가볼…


“튜우우우우우우~! 브으으으으으으으~!!!”


“우리도 튜브!!”


“튜브! 튜브! 튜우우우우우우부으으으읍!!!”


아, 머리야…


어제의 앙금을 잊지 않고 난동을 부리는 비글들, 옆에 있는 언니들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머리를 부여잡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연거푸 쉰다.


마침 SOPII의 입을 막으며 진압을 시도하던 M16과 눈이 마주쳤고,


“가. 빨리.”


입모양으로 이렇게 말하며 얼른 도망가라고 손을 세차게 휘젓는다. 저들에게 잡히면 매우매우매우매~우 귀찮아질 게 안 봐도 비디오다.


아휴, 아까 봐뒀던 가게인데, 이러면 발품 팔아야 되잖아… 참 되는 거 없네.


“튜브 한 번 사기 힘들다…”


“왜 가는 곳마다…”


“그러니까. 근데 카린, 뭔 튜브를 사려고 그러는거야?”


“사실 튜브보단 고무보트에 가까운건데… 지휘관님이랑 같이 타려고…”


“아… 그런 거였어?”


“네…”


하지만 되는 게 없으면 될 때까지 해야지. 바다에서 연인과 함께 보트를 타고 노를 젓는 미친 낭만, 크으, 이건 못참는다.


카리나의 손을 꼭 잡고 고무보트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뒤진다. 















“거 참, 이 넓은 곳에서 보트 하나 파는데가 없네.”


“슬슬 배도 고파요…”


“그럼 밥부터 먹고 다시 찾아보자. 뭐 먹고 싶어?”


“지휘관님의 선택이 곧 제 선택이에요…”


“음, 바닷가에 왔으니… 해물로 가자.”


우선 오전엔 별 소득이 없었다. 


인근의 미국냄새 물씬 풍기는 식당으로 들어가 자리를 찾는데, 와, 진짜 되는 거 없다.


“자리, 자리가… 어.”


“우웁?!”


“자, 자기…?”


“어머, 지휘관군?”


“아… 돌겠네, 진짜.”


입구 바로 옆 자리에서 생선을 열심히 해체하고 있던 세 칸센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꽂힌다.


아까 그렇게 도망가놓고 여기서 잡히네. 참 어이가 없어.


“카린, 가자.”


“자, 잠깐만…!”


“뭐.”


“우리, 잠시만 얘기 좀 하면 안 될까…?”


“까고 있네. 야, 괜히 깝치다가 장관님이 미사일 쏠까봐 걱정돼서 그런다.”


“장관님이라 하지 말고 그냥 여동생이라고 해도 되는데~ 굳이 숨길 필요 없다구?”


“하, 지랄…”


“이런, 우리 아이들이 깜짝 놀랐겠네. 아빠가 무서운 말을 내뱉으니까…”


이로써 얀순이가 얘네들과 결탁하고 있는 게 확실해졌다.


잡힌지 24시간도 안 된 것들이 나와 얀순이, 카리나, 뉴저지 이렇게 넷만 알던 비밀을 알고 있는데 말해 뭐해?


한편 카리나도 계속 신경을 긁는 세인트루이스에게 화가 많이 났다. 맞잡은 손에 전해지는 악력이 장난이 아니다.


“너희들! 무슨 낯으로 지휘관님 앞에 나타난거야?!”


“우린 계속 피하고 다녔는데 지휘관군이 잡은 거야. 안 그래?”


“아니, 거기서 기어코 넘어와서 멀쩡히 돌아다니는 게 말이 되냐고!”


“잘나신 지휘관군의 여동생께서 우릴 풀어줬으니까. 모처럼 고향에 왔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겠더라고.”


“양심이란 게 있으면 풀어줘도 다시 들어가야지…! 그리고 호놀룰루, 넌 지휘관님을 애아빠라고 소개했더라? 뭔 자신감이야?”


“아니, 그걸 어떻게…”


“우리가 직접 그 아저씨네 가게에서 들었으니까!”


“루이스가 시킨 거긴 하지만… 나도, 지휘관을 좋아하고, 아이도 가졌으니까 그렇게 말, 한건데…”


“그게 잘한 거야!? 엄연한 유부남인 사람을 그딴 식으로 소개해?”


“카린, 조금만 진정해… 내가 잘 얘기해볼게.”


“지휘관님, 가요! 이 여자들과 같은 장소에 있는 것도 싫어요!”


“자기! 아무것도 안 할거라고 약속할테니, 걱정말고 먹고 가…! 이 근방에서 식당이라곤 여기밖에 없어…”


“너희들 새주인인 내 여동생께서 뭐라 하시는 줄 아냐? 약속은 깨지라고 있는 법이란다. 내 옆에서 깐죽대다가 미사일 날아오면, 나도 죽는 거 아냐?”


“우… 정말인데…”


“가자.”


“네!”


뉴저지의 마지막 권유를 뿌리치고 새로운 식당을 찾아보기로 한다.


휴대폰의 지도 앱을 키고, 사람들에게도 물어보고 하며 열심히 걸어다녀봤으나


“오늘 뭔 날인가, 한창 점심인데 왜 다 닫았지?”


“그러니까요오… 휴, 더워라…”


“심지어 편의점도 먹을 게 없고…”


하와이에 훨씬 빠삭한 그녀의 말대로 30분을 돌아다녀도 Restaurant의 R조차 보이지 않는다.


결국 허기와 더위로 탈진해 야자수 아래 그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한참을 생각해보다가 떠올린 답은, 결국 이거 하나 뿐인 듯 하다.


“...그냥 다시 돌아갈까?”


“제 자존심이 허락 못해요!”


“그래도 30분이나 지났는데, 걔네들도 나갔겠지.”


“어, 그럴수도 있겠네요…?”


“나도 가기 싫은데 어쩌겠어. 밥은 먹어야지.”


“맛있어보이긴 하던데…”


그렇게 다시 돌아온 아메리칸 스타일 식당, 사장님이 ‘뭐하는 놈이지’ 하는 눈빛으로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를 안내해준다.


공교롭게도 아까 그녀들이 앉았던 곳 바로 옆자리에 당첨되었고, 창문 밖 하와이의 아름다운 해안을 애피타이저로 삼는다.


“봐봐. 갔다니까. 이렇게 깔끔하잖아.”


“불안한데…”


“믿어봐. 설령 다시 온다고 해도 별 탈 없을거야.”


“실례합니다,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이거랑, 이거랑, 콜라 두개 주세요.”


“네, 조금만 기다려주, 오, 손님?”


“네?”


“이 지갑, 손님 거인가요?”


종업원이 주문을 받고 카운터로 가다가 얼마 안 가 멈춰선다.


그러곤 바닥에서 검은색 무언가를 주워 내게 보여준다. 심플한 디자인의 두둑한 여성용 지갑이다. 휴대폰의 페이앱을 애용하는 나는 물론이고 카리나의 것도 전혀 아니다.


설마…


“으음… 누구건지 알 거 같은데 좀 봐도 될까요?”


“그럼요.”


“아, 예, 아까 이 자리에 있던 여자들 거네요. 제가 잘 전달하겠습니다.”


“그분들과 아는 사이이신가요?”


“아주아주 잘 알죠.”


칠칠맞은 년들, 쯔쯔쯔. 얀순이한테 개털리겠네.


지갑을 열어보자 두툼한 달러뭉치와 어제의 그 블랙카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얀순이가 카드도 어떻게 받아서 돌려준 게 너무 무섭다.


다른 사람이 주웠으면 땡잡은 거였는데 하필 내 손에 들어왔네? 이러나 저러나 속이 타들어가는 건 매한가지긴 하지.


“이야, 이거 봐봐.”


“어디서 나온 돈일까요?”


“원래 범죄자들은 현금을 애용하잖아. 자기들이 모아놓은 것도 있을 거고, 부족한 건 독일 애들과 짝짜꿍해서 출금했나봐.”


“거긴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지…”


“그러니까 말이다. 일단 밥부터 먹자.”


괜히 재수없는 소리만 늘어놓으면 밥맛도 떨어지기 마련이다.


마침 종업원이 거대한 접시 두개를 위태롭게 들고 우리 테이블로 다가온다. 저렇게 큰 게 엄청 빨리 나오네?


“손님, 주문하신 생선구이와 모듬튀김입니다.”


“여기 놔주세요. 감사합니다.”


“와, 엄청 크네요?”


“둘이서 다 못 먹겠는데…”


“우리 아가도 있으니까 셋이죠!”


“하하, 요즘 엄마 졸라서 많이 먹긴 하지.”


“맞아요, 제 식탐이 늘은 게 아니라 아가가 먹보라서 그런 거라구요~”


“글쎄다~”


“으읏…! 정말이라구요!”


“알겠어, 알겠어. 자, 아.”


“네? 에, 그… 갑자기…”


“큼직하게 뜯었어. 어서.”


“부끄러운데… 으, 아…”


“어때, 맛있어?”


“으음… 음! 엄청 맛있어요!”


먹음직스러운 생선의 살코기를 발라서 카리나에게 먹여준다. 보기만 해도 배부르다는 게 뭔 말인지 알 것 같다.


아, 아이들 밥은… 얀순이한테 맡기기엔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정도 없어보이니까, 여기서 포장해가야겠다.


“사장님! 1번 세트랑 모듬튀김 5개 포장해주세요!”


“많이 배고프세요?”


“아니, 애들 거.”


“아, 점심을 못 먹었겠네요…”


“보트는 아이들 밥 먹이고 다시 찾자.”


“네. 그리고 이 지갑은 어떡할까요?”


“얀순이한테 얘기해서 처리해야지. 뭐 어쩌겠어.”


걱정거리는 다 처리했으니 마저 식사를 이어나간다.


오전에 고생한 탓에 식탁 위 요리들은 금방 사라져갔고, 마지막 남은 새우튀김을 반으로 나눠먹으며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포장한 음식이 식을까봐 서둘러 호텔로 돌아갔는데, 잠자는 이불 속의 공주님들은 아직도 꿈나라를 행차하시는 중이다.


암막 커튼과 에어컨으로 잠자기 딱 좋은 환경이 조성된 덕분에, 그 누구도 눈을 뜰 생각이 없어 보인다.


“미안해서 어떡하지…”


“아예 밤을 샌 것 같아요…”


“깨우기도 뭐한데… 참… 음… 결국 한 명이라도 깰 때까지 기다려야겠네.”


“보트는 내일 찾아야겠네요.”


“그러자. 아무래도 이 근방엔 그 가게밖에 없는 거 같아.”


그리하여 오후 일정은 캔슬. 뜨거운 하와이의 태양에 잔뜩 혼난 몸을 식혀주고, 아이들을 위한 늦은 점심을 준비하자.


주메뉴인 먹음직스럽게 익은 랍스터와 생선은 고명과 함께 중앙에 놔두고, 튀김은 타르타르 소스와 간장을 곁들여서 공평하게 나눈다. 


나머지 반찬들으으으은… 아오, 이 지갑 엄청 거슬리네. 그냥 놔두고 올 걸 그랬나? 카리나도 이걸 못 마땅하게 여기며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눈치이다.


“왜 사람 귀찮게 만들까, 쯧쯧.”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불쌍하잖아. 이거마저도 없으면 완전 빈털터리일텐데.”


“죄송하지만 전 지휘관님을 배신하고 더럽힌 여자들 따위 걱정해줄 여유는 없다구요!”


“미운 정이란 것도…”


“...정마알! 지휘관님, 당신은 이 부분이 문제에요! 천성이 너무 착해서, 다른 사람들이 지휘관님을 업신여기고 우롱해도 그냥 웃으면서 넘어가니까아…!”


“아......”


어라, 반응이 이렇게 격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왜 뇌절을 하냐, 적당히 끊었어야지 새끼야.


“그러니, 최소 한 번 즈음은… 보는 사람 입장에서도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그냥 농담 한 번 해본건데… 알겠어, 다음부턴 안 그럴게.”


“...농담이어도… 으, 갑자기 화내서 죄송해요… 어제 그렇게 약속해놓곤…”


“아냐아냐! 내가 눈치 없었지… 괜찮아, 잊어버리자! 하여간 이것들, 괜히 화나게 만들고, 어휴.”


좋지 않은 기억은 빨리 잊는 게 묘약이다. 그리고 이 묘약의 중심엔 


“아쁘아…”


“하아암, 안녕하세요… 카린 씨이…”


“헤헤, 맛있는 냄새 난다…”


“오, 아이고, 우리 잠꾸러기 공주님들… 드디어 깼구나. 아빠가 어젯밤에 너무 시끄러웠지… 미안해…”


“카린 씨, 이게 뭐에요…? 무섭게 생겼어…”


“엄마랑 읽었던 동화책에 나오는 괴물 같아…”


“집게가 엄청 커…!”


“랍스터라는 건데, 비싸지만 그만큼 맛있는 요리야! 아빠께서 너희들을 위해 큰 마음 먹고 사신거란다.”


타이밍 맞게 인기척을 느끼고 하나 둘 잠에서 깨어나는 귀염둥이들이 있다.


요 녀석들을 보기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데 어떻게 부정적인 생각이 들겠어?


시간이 좀 더 흘러, 나머지 아이들도 냄새와 소릴 듣고 일어나 식탁에 옹기종기 모인다.


-잘 먹겠습니다아!


“이건 아빠랑 카린 씨가 도와줄게. 우리 공주님들은 걱정하지 말고 맘껏 먹어.”


“으으음~ 달콤해~”


“이 괴물 엄청 맛있다!”


“생선도 엄청 부드러워요…”


“언니가 이거 먹어!”


“에, 괜찮은데…”


먹기 좋게 랍스터의 껍데기, 생선의 가시를 발라서 내어주면 한 명도 빠짐없이 흐뭇한 리액션으로 보답한다. 아빠할 맛 나네.


지금 이 모습은 내가 그토록 원하던 화목한 가정의 식사시간이다. 엄마아빠는 먹여주고, 아이들은 거기에 맛있다고 화답하고, 얼마나 행복한 모습인가.


-똑똑똑


“어, 손님 왔어요!”


“연락도 없이? 누구지?”


“끄으으응… 너무 높아서 안 보여…”


“누군지 보고 싶어?”


“응!”


아잇, 밥 먹는데 손님이 와버렸네. 나눠줄 게 없는데…


노크 소리에 뭣도 모르고 튀어나간 UMP9의 아이가 손님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다. 엄마가 엄마이니 그 친화력이 어디 가질 않지.


자고로 부모는 자식에게 교육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 법, 비도덕적인 게 아닌 이상 아이가 알고 싶은 건 꼭 알려줘야 한다.


“자, 꽉 잡아! 슈웅~”


“꺄하핫~! 엄청 높다!”


“밖에 누구 있는지 봐봐.”


“음… 예쁜 언니들!”


“...불안한데.”


“뭐가, 아빠?”


“그 언니들 머리색이 뭐야?”


“빨간색 한 명에, 파란색 두 명!”


왜 이러실까. 사람을 왜 이렇게 귀찮게 만드실까. 왜 화목한 가정의 식사시간을 방해하실까.


혹시나 하고 직접 구멍을 내다봤는데 그런 거 없다. 파란 머리 한 분 빼곤 다 우물쭈물하면서 내 답을 기다린다.


“쉬시시시. 다들 조용히. 아무도 없는 것처럼, 쉬이이…”


“왜…?”


“우린 지금 숨바꼭질을 하는거야… 쉬시시, 저 언니들은 술래고, 만약 우리가 잡히면, 저 언니들이 아빠를 어디론가 데려갈거야. 그럼 안 되겠지?”


-헉…!


“이제부터 쉬이… 다들, 아빠랑 카린 씨 말 듣고 숨어있자.”


-응…!


-네…!


“카린, 혹시 모르니까 조용히 애들 데리고 방에 들어가있어.”


“지휘관님이 무슨 일을 당하실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래요…”


“걱정마. 지갑만 던져주고 바로 닫을거야.”


그녀의 걱정에 호기롭게 괜찮다고 답한다. 심플하고 이지하게, 그리고 빠르게 지갑만 셋 중 한 명의 쌍판때기에 던지고 쾅! 참 쉽죠?


자, 바로 실전 들어갑니다이. 아이들이 다 들어갔는지 확인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문고리 잡고,


-철컥!


준비, 던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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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