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 가져왔어, 윌...”

 

방문이 열리자,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정확히는 절반 정도만이 보였지만, 식별에 지장은 없었다. 이 성에 누군가 있다고 해 봤자 나와 그녀, 둘 뿐일 따름이니까. 그러니 헷갈릴 일은 없는 셈이다. 

 

소녀의 절반 정도밖에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아주 간단하고 비참한 것이다. 내 몸뚱이가 바닥에 드러누운 채로, 한 마리의 벌레처럼 꿈틀거리기만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물론, 내가 좋아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양새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맛도, 있으면 좋겠는데...”

 

뻐근한 목을 움직이며 곁눈질을 하자, 소녀가 김이 피어오르는 그릇을 들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녀가 다가와 앉으면서, 가까워진 그릇을 관찰하니 그 내용물이 귀리로 만든 죽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뜨거우니 잠시 기다려’ 라고 말 한 그녀는, 스푼으로 내용물을 뜬 다음, 후후하며 조심스레 입김을 불었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스스로도 포기해 꺾인 줄만 알았던 반항의식이, 어째서인지 모르게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나는 입을 꽉 깨물고, 양팔로 땅을 짚었다. 그 상태로 힘을 쥐어짜 내자, 울분 섞인 신음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새어나왔다.

 

그 노력으로 지면에서 불과 수cm 가량을 멀어질 수 있었다. 내가 쓰러져 있던 자리에는, 땀이 굳어지며 생겨난 소금 자국 같은 것이 생겨나 있었다.

 

“끄으... 으아아악!”

 

그러나 몸이 따라주는 것은 거기까지라는 듯, 철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지면과 재상봉하게 되었다. 힘줄이 끊긴 발목에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감각을, 나는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실감했다.

 

“무리하지 마, 윌.”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은 소녀가, 내 발목의 힘줄을 끊어버리고 성에 가두어 버린 장본인이, 나의 머리칼과 뺨을 어루만졌다. 

 

“말했잖아? 내가 윌의 손, 발이 되어 준다고.”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너무나 부드럽고 평온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두렵게 했다.

 

양 팔로 나를 껴안은 소녀는, 그대로 상체를 일으켜 나를 벽에 기대어 놓은 후 죽을 뜬 스푼을 내 입가로 가져다 대었다.

 

‘아~’ 하며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내게 죽을 권하는 그 모습은, 인자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스푼을 멀뚱히 바라보며 뜸을 들이던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부드럽게 끓여진 곡물이 목구멍을 자연스레 타고 흘렀다.

 

달리 의미는 없이, 그저 구차한 삶을 이어나가는 연료로서, 귀리 죽이 한 숟갈씩 사라져 갔다.

 

무념히 죽을 받아먹던 나는, 눈동자를 옮겨 소녀를, 엘리라는 이름을 지닌 가냘픈 소녀를 바라봤다. 

 

검은색을 베이스로 한, 근대적인 풍의 드레스가 먼저 눈에 들어오는 한편, 새하얀 눈과 같은 순백색 머리칼이 허리 너머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상반된 색상의 두 요소들이, 극적으로 대비 되면서 동시에 어우러졌다.

 

소녀의 체구는 작고, 체형도 늘씬하지만, 그럼에도 몸매에서는 여성스러운 곡선이 엿보였다. 피부가 머리칼 못지않게 하얗고, 부드러우며, 이목구비도 오밀조밀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미모에 방점을 찍는 것은 눈이었다. 양 눈에 보석처럼 박힌 회백색 눈동자가, 엘리라는 한 소녀를 궁극적으로 완성시켰다. 그렇게 완성된 소녀는, 누구라도 넋을 놓고 바라볼 정도로, 가히 고귀하다 할 수 있을 만큼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신비로운 눈동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엘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눈웃음을 지었다.

 

“맛있어?”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맛을 봐야...”

 

엘리는 지금껏 자신이 쥐고 있던 스푼을, 돌연히 나의 손아귀에 꼭 쥐어주었다. 그 행동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 속 뜻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먹여줄래?”

 

기대에 차 있는 엘리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저 빛나는 보석 속에 무슨 감정들이 엮여 있을지, 그것까지는 나로서도 헤아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떠한 감정에서 비롯하였든, 이런 것은 근본적으로 애완동물의 재롱과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재롱을 부리기엔 몸도, 마음도, 너무나 지쳤다.

 

굳은 침묵. 내가 엘리의 기대감에 호응해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뿐이었다. 






실수였다. 

 

“싫어?”

 

엘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져갔다. 아까까지의 자애로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이내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얼음장 같은 억양으로 그녀가 말을 이었다.

 

“다른 년한텐 해 줬잖아.”

 

그리고 부릅뜬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나는 보았다.

 

“나는, 싫어?”

 

백옥같던 은색 눈동자에서, 붉은 안광이 서서히 빛나고 있는 것을. 

 

이전에도 몇 번인가 보아온 그 붉은 눈에, 나는 포식자 앞에 선 생쥐처럼 오한과 떨림을 느끼며 움츠러들기 시작했다.

 

“무섭지 않아. 네가 어떤 존재든, 엘리는 엘리인걸?”

 

언젠가 그녀에게 해 주었던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거짓되고도, 야속한 그 말을, 한때 그런 말을 내뱉었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경악? 비웃음? 혹은 그럴 리 없다고 미래를 부정할 수도 있겠다.

 

두려움에 실성한 나머지 ‘하하’ 하고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쩌면 그것은 순전한 공포에 비롯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공포가 아니라면, 분명 자신에게 보내는 비웃음이리라, 나는 그리 단정 지었다.

 

이 지경이 되고도 여전히 마음 한 켠에서는, 엘리가 이런 짓을 할 리 없다고, 무언가 잘 못 되었거나 꿈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으니까.

 

“안... 돼?”

 

그러나 현실은, 그 무엇보다 가까우며 때문에 잔혹한 법이다. 실존하는 눈 앞의 괴물이, 짙은 피에 잉크를 섞은 듯 어둠을 뿜어내는 눈동자가, 나를 헛된 망상으로 도피하지 못하게끔 붙잡았다. 

 

그 눈을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숨이 멎을 것 같았기에, 나는 도망치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눈동자를 아래로 내리깔자 죽 그릇이, 스푼을 쥔 채 애처로이 떨고 있는 손이 시선에 들었다.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벌벌 떠는 손을 재촉해 죽을 한 숟갈 떠올렸다. 

 

스푼이 심하게 흔들렸다. 떠진 죽이 불안정하게 이리저리 출렁이더니, 그 중 일부가 찰팍- 하고 도로 떨어져 나갔다. 가까스로 엘리의 입 앞까지 스푼을 옮겼을 때는, 뜬 죽의 반절 정도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다행히 엘리는 그것으로 만족한 듯, 입 사이로 ‘헤헤’ 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녀의 눈동자도 다시 회색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아~’ 하고 엘리가 입을 벌렸다. 내부에 가지런히 나 있는 치아와, 작은 혓바닥이 보였다.


유독 두드러지는, 인간의 것보다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 역시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을 목격하자 움찔거린 나는, 다급히 엘리의 입 사이로 스푼을 집어넣었다. 이러한 과정을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우리는 비로소 그릇을 전부 비울 수 있었다.

 

죽의 절반은 나에게, 나머지 절반은 엘리의 입으로 사라졌다. 다시 말해 절반은 별 의미가 없는 셈이다. 보통의 음식에 그녀는 영양을 얻을 수 없고, 맛조차도 느끼지 못하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정말 평범한 한 명의 소녀처럼, 정말로 맛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먹는 내내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먹었어. 헤헤.” 

 

아마도 엘리에게 요리의 맛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내가 떠 준 것을 먹는다는 행위 자체에 있겠지. 

 

아무튼간에, 이것으로 오늘의 식사가, 식사를 가장한 소꿉놀이가 끝이 났다. 





 

“그럼... 이제 후식.”

 

그렇다면 다음 순번으로,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괴물이 식사를 할 차례였다.

 

엘리는 양팔로 나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두 얼굴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와 그녀의 거리가 서로의 숨결까지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좁혀졌다.

 

“잘 먹을게?”

 

덥썩- 하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두 입술이 맞부딛힌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는 한편, 입안으로 들어온 엘리와 나의 혀가 서로 뒤엉켰다. 저항할 세는 없었다.

 

다른 누군가가 우리 둘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정분이 든 두 남녀의 격렬한 애정행각이라고, 그렇게 짐작하리라 예상된다.

 

행위만 보자면 그 생각은 지극히 옳다. 거부권이 없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 겁탈이라는 점만 제외한다면.

 

두 혀가 얽히며 침이 찰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격렬한 움직임에 숨조차 쉬기 버거웠다. 어떻게든 틈새로 공기를 들이마시려 했지만, 엘리는 그런 자그마한 빈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욕망을 탐해 왔다. 

 

나의 숨구멍에서 헐떡이는 신음이 흘러나왔고, 엘리에게서도 비슷한 신음소리가, 하지만 명백히 다른 느낌의 음이 들려왔다. 

 

“흡.. 흐읍... 하아... 하...” 

 

그동안의 경험에 빗대어, 나는 엘리가 점차 흥분에 젖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점점 입맞춤이 격렬해지며, 그에 따라 숨이 가빠졌다. 

 

키스만으로 혼절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내게 엘리를 밀어낼 힘 따위가 있을리 없다. 정신을 유지하는 것마저도 벅차지만, 이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직후, 내가 느낀 것은 모종의 이물감이었다. 

 

“끄으... 흐아....”

 

날카로운 무언가가 혀의 근육을 뚫고 내부로 파고든 감각, 뜨거운 것에 데인 것과 같은 고통이 머리에 전해졌다. 

 

잠시 뒤 이물이 떨어지자, 인간이라면 으레 흘리기 마련인, 선홍색의 피가 혀의 구멍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엘리의 입이 나와 잠시 멀어지고, 그녀와 나의 이마가 맞닿았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들었다. 

 

“잘 먹을게. 오늘도, 그리고 앞으로도...”

 

흐르는 피에서 찝찔한 맛이 났다. 보이지는 않지만, 붉은 피가 나의 입안을 온통 적시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시 혀가 겹쳐질 때, 그 피는 주인이 아닌 다른 이의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갔다.

 

피를 빨아들이는 엘리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붉게 빛이 나고 있었다. 

 

진정한 의미의 식사, 이것은 뱀파이어의 식사다.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가 있던 나는, 멀게만 느껴지는 어느 과거를 회상했다.

 

따뜻하고, 즐겁고, 미소 짓는 나와 그녀가 있던 공간. 그러했던 시절이, 내 기억이 끝없는 고통 끝에 왜곡되지 않은거라면, 분명히 존재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따뜻한 난롯가여도, 불구덩이에 몸을 던져선 안 되었던 것이겠지.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된 날. 그래, 그 때... 

 

애시당초 나는, 이 성으로 도망쳐서는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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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올릴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열심히 써 보겠음.

+ 향후 빌드업이 좀 길? 수도?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