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 레이더스. 전 제국 궁정 마도사단 특무 분실 No. 00《광대》이자 지금은 알자노 제국 마술학원의 교사

저티스 로우판 가라사대 백 번 싸워 99번 지고 1번 이기는 상대일지라도 그 한 번의 승리를 맨 처음 움켜쥐는 남자였다

그렇기에 그의 제자 시스티나 피벨 역시 앞으로 무슨 시련이 닥쳐도 글렌이 넘지 못할 역경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들을 지키는 것까지 포함해서

왜냐하면 지금까지 글렌과 보낸 수많은 날들이 그를 증명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상시엔 변변찮지만 할 때는 확실히 하는 남자, 가 글렌에 대한 시스티나의 평가였다

그러니까 언제나처럼 하늘의 지혜 연구회 일당이 루미아를 덮쳐와도 결국 글렌이 잘 해결해줄 거란 믿음이 은연중에 존재했었다

하지만 그건, 무른 생각이었다

「선생···님···?」

「하얀, 고양···이···」

이번에도 시작은 같았다. 루미아를 노리는 세력이 시스티나들을 습격, 이후 글렌을 비롯한 모두의 반격으로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글렌의 가르침으로 마술 실력이 일취월장한 시스티나는 얼마 전 그로부터「파트너」란 말까지 들었기에 텐션이 평소 이상이었고 그 결과 무모한 수를 두고 만다

글렌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고 도망치는 적을 쫓아간 시스티나. 허나 그것은 함정이었고 굳어버린 시스티나를 향해 쇄도하는 마술을 글렌은 온 몸으로 받아낸 것이다

「싫어, 싫어, 싫어···! 정신 차려요, 선생님···!」

자꾸자꾸 차가워져 가는 글렌의 몸. 피투성이의 글렌은 간신히 미소를 띠고선 시스티나를 향해 자신을 탓하지 말란 말만 남기고 그녀의 품속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그것이 한때「정의의 마술사」를 꿈꾸던 남자의 최후였다···

***

글렌 레이더스 사후, 시스티나는 마치 삶을 포기한 것처럼 살아갔다. 학원에도 등교하지 않은 채 저택의 방에 처박혀 침대 시트를 눈물로 적실 뿐인 나날

그에게 솔직한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서 오는 후회, 그를 자신 대신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죄책감, 앞으로 그를 영원히 볼 수 없다는 상실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뒤따를 용기는 없는 한심함. 그런 여러 복잡한 상념들이 이리저리 얽매여 시스티나를 사슬과 같이 묶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시스티나가 방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 방문 앞으로 어느 남자가 찾아왔다. 글렌 레이더스의 절친한 동료였던 알베르트 프레이저였다

「시스티나 피벨. 그 녀석도 네가 그렇게 있길 원하지 않을 거다」

「삶의 목표가 없다면···설령 그 녀석을 죽인 쓰레기들에 대한「복수」를 원동력으로 삼아서라도 살아가라. 어떻게 해서든 네가 살아가야 녀석의 죽음이 단순한 개죽음이 되지 않는다」

복수. 그 말은 시스티나의 마음속 깊숙이 새겨졌다. 알베르트로선 딱히 진심이 아니었고 오히려 그녀가 다시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극약 처방이나 다름없는 말을 내뱉은 거지만···그것은 확실히 실수이자 오판이었다

그 후 시스티나는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마술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과정이 얼마나 육체적으로 힘들고 아파도 그녀는 내색 한 번 하는 일 없이 묵묵히 나아갔다. 그런 그녀에 대한 주변 학우들의 감상은 기계와 같다, 였다

그렇게 글렌의 뒤를 잇는 여러 조력자───주로 세리카 아르포네아, 이브 디스트레───들의 도움을 받아 마술학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시스티나는 원래 꿈이었던 마도 고고학을 과감히 버리고서 알베르트의 추천을 받아 제국 궁정 마도사단 특무 분실에 입대한다

알베르트로선 한때 글렌의 애제자였던 그녀를 이런 더러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만들게끔 하고 싶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규격 외의 마술사인 시스티나를 쉽사리 포기할 순 없었다

마술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습득하는 천재성, 압도적인 선천적 마력 수치, 외도 마술사들을 향한 확실한 증오, 더군다나 그녀 스스로의 입대 요청. 특무 분실의 일원으로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최상의 인재였다

그리고 그것은, No. 13《사신》의 탄생이기도 하였다

제국 궁정 마도사단 특무 분실 No. 13《사신》시스티나 피벨은 첫 임무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여러 군용 마술들을 살상 목적으로 망설임 없이 쓰는 시스티나. 수년 전 진 가니스의 라이트닝 피어스 한 방에 벌벌 떨던 그녀는 온데간데 없었다. 저티스 로우판과의 첫 조우 당시 피범벅이 된 글렌의 손을 내친 그녀는 이제 없는 것이었다

저 녀석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 아니야. 구축해야만 하는 쓰레기들───시스티나의 외도 마술사들에 대한 평가는 그게 전부였다

게다가 시스티나는 거기서 더 나아가 앞으로의 방침을 정하는 회의에서도 주저 없이 루미아를 미끼로 삼는 방안을 내놓았다

「루미아의 정보를 흘리죠. 그럼 분명 녀석들은 올 거예요」

「시스티나···그건···」

「괜찮아, 리엘. 루미아도 찬성한 사안이니까. 최대한 녀석들을 많이 유인해서, 또 죽이기 위해선 이보다 나은 방법은 없어」

「······」

시스티나와 루미아, 두 사람은 글렌이 죽은 그날 이후부터 이미 친구라 불릴 관계가 아니게 되어 있었다

루미아는 페지테 최악의 사흘간 사건 때처럼 자신으로 인해 글렌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시스티나는 시스티나대로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원망하고 있었다. 이전 자신은 절대 저리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한, 다른 반의 학생들처럼···

그러니까 루미아도 끝없는 죄책감에 짓눌려 마음이 병든 상태였고 시스티나가 자신을 미끼로 써도 생글생글 웃으며 따를 뿐이었다. 하지만 시스티나는 루미아의 이상성을 눈치채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도 마음이 깊게 병들어 있었기에

사신의 낫은 계속해서 휘둘린다. 시스티나가 마도사단에 입대한 지 어느덧 12년, 그녀는 글렌의 공적을 아득히 뛰어넘어 있었다. 알베르트와 크리스토프, 버나드를 비롯한 집행관 대부분이 시스티나를 특무 분실의 에이스로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째설까···아무리 녀석들을 죽여도 메워지지 않는 이 공허함. 그것은 틀림없이 그리움과 닮은 감정이었다

「선생님···저, 오늘도 힘냈어요···」

어느 저택. 세리카에게 받은 글렌의 사유물이 늘어선 방의 침대 위,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시스티나는 옛날 글렌이 걸쳤던 로브를 소중한 듯 안고서 노곤한 중얼거림을 흘렸다. 선생님이 살아있었다면 이런 자신을 칭찬해줄지 꾸짖을지 잘 모르게 되었다

그러자 문뜩 시스티나의 양 뺨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 학창 시절 그에게 품었던 감정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때보다 더 커져 솔직하지 못한 탓에 진심을 전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그녀를 끝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좋아, 해요···선생, 님···」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이젠 이 세상에 없는 누군가를 향한 고백은 망연히 공기에 녹아 사라져갈 뿐

사실 처음엔 궁정 마도사단이 아니라 리엘이 탄생한 계기가 된「Project : Revive Life」를 다시 연구해 그를 되살릴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건 인간으로서 결코 넘어선 안될 금기의 선. 그렇기에 시스티나가 끝끝내 그 선을 넘는 일은 없었다. 거기다 설령 되살리는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게 불완전하거나 가짜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으니 말이다

또 그렇게 해서 살아난 선생님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 계획 자체를 자기 손으로 무산시켰던 선생님이니까

그런데 왜 이제 와서···단념했을 것이 분명한 그 어두운 구상이 재차 고개를 내미려는 걸까. 시스티나는 잘 알 수 없었다

아니, 다른 생각은 됐어. 적어도 오늘 선생님의 꿈을 꿀 수 있다면···그리 생각한 시스티나는 눈물의 자취를 남긴 채 천천히 잠의 세계로 빠져들어갔다

나이 스물 여덟. 아직도 병애(病愛)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한 특무 분실의 에이스, 시스티나 피벨의 하루는 오늘도 이렇게 저물어간다···

***

「에···?」

맨 처음 느낀 것은, 따스한 햇살. 뒤이어 들려온 것은 소란스러운 군중의 소리

그 이변에 시스티나가 서둘러 눈을 뜨자 그녀의 앞에는 그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꿈···?」

분명 자신은 제도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을 터이다. 헌데 어째서 애틋한 추억으로만 남은 학구 도시「페지테」의 대로 한가운데에 서 있는지 시스티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확실히 비현실적인 상황. 그런데도 사방에서 전달되는 현장감은 꿈이라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글렌이 죽은 이후 학창시절의 꿈은 종종 꿨었지만 이렇게 리얼리티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시스티나가 멍하니 있던 그 순간

「시스티···? 괜찮아?」

그녀의 시야에 끼어들어온 낯익은 얼굴 하나. 청명한 눈동자, 눈부신 금발 머리카락.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아이는───

「루미, 아···?」

왜 루미아가 여기에···? 계속되는 이변에 시스티나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기억대로라면 루미아는 자신의 지시에 따라 스노리아에 먼저 가 있었을 텐데···

아니, 기다려 봐. 루미아···왜 그 옷을···왜 알자노 제국 마술학원의 교복을 입고 있는 거야···? 루미아가 이런 장난을 칠 리가······응?

「시, 시스티···?」

···젊다

거기에 키도 약간 작다

눈앞의 아이는 틀림없이 루미아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루미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모습은 학창시절의 루미아에 더 가깝다고 할까···잠깐, 학창시절···?

「읏···!」

그제서야 허겁지겁 자신의 몸을 확인하는 시스티나. 그녀 또한 루미아와 같이 마술학원의 교복을 입고 있었다

「아···」

그래, 루미아만이 아니었다. 시스티나 자신의 몸도 여러 가지 작아져 있었던 것이다. 마치 그 시절로「돌아간」것처럼

그까지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이런 일, 있을 수 없어.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마술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고

그래도···그래도···소원을 하나 이룰 수 있다면 이런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처음부터 다시, 라는 건 시스티나가 무척 꿈꿔왔던 것 중 하나니까

「···루미아, 올해 몇 년···?」

「시스티···? 갑자기 무슨 말을···」

「어서 말해줘! 올해 몇 년이야?!」

「1, 1853년, 인데···」

1853년. 확실하다. 분명 자신이 마술학원 2학년일 때였다. 그렇다면 역시, 시간을 거슬러 왔단 거야···?

시스티나는 극히 당황한 기색의 루미아를 내버려 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와중 루미아로부터「괜찮아?」나「학원에서 세실리아 선생님을 불러올까?」같은 안부를 묻는 말이 때때로 들려왔지만 지금의 시스티나에겐 그런 걸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만약 이게 꿈이 아니고···정말「그때」로 돌아온 거라면···다시 한 번「그 사람」과도······

복받쳐 올라오는 고양감. 정말 오랜만에 체내에 활기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 마다지 않던 소망이 실현된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이미 메말라버렸다 생각한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하늘이 마침 그런 시스티나의 간절한 마음에 응답한 건지

「우오오오오오?! 지각, 지가아아아아악?!」

오른편에서 이젠 두 번 다시 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 있던 것은 입에 빵을 문 채로 이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는 변변치 못한 남자. 흑백 사진 속에만 남아있을 터인 단면적 형상이 각양각색의 입체적 형상으로 되감기듯 돌아가 그녀의 눈에 그리운 사람을 비췄다

「이, 이런! 거기서 비켜! 꼬맹이들아아아아!」

「전」에는 깜짝 놀란 탓에 무심코 흑마「게일블로」를 사정없이 날렸지만···이번엔 다르다. 시스티나는 그와의 재회를 망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위대한 바람이여》

시스티나는 적절히 개변한 저위력의 게일 블로를 발동해 맹렬히 달려오던 글렌을 두둥실 띄웠다. 그리고 바람의 위력을 천천히 조절해가며 글렌을 살포시 지면에 내려놓았다

그에 남자는 틀림없이 부딪힐 거라 생각했던지 멍한 표정이었다. 루미아는 루미아대로 시스티나의 능숙한 대처에 놀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스티나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서 남자, 즉 글렌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가───

「선생님···!」

안겼다

이 체취, 감촉···절대 꿈이 아니야! 정말 살아있는 글렌 선생님이라고···!

글렌의 가슴팍에서 부비부비, 무척 오랜만에 주인을 만난 애완동물같이 뺨을 연신 비벼대는 시스티나. 그런 시스타나의 얼굴은 환희의 눈물에 젖어있었다

반면 글렌은

「에? 응? 뭐, 뭐야?」

이성이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는 모양

글렌 레이더스. 백수를 관둔지 첫날만에 정체 모를 미소녀에게 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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츤데레가 후회와 절망을 거쳐 얀데레로 변하는 글이 오랜만에 써보고 싶어져 써봤음
최근 나온 츤데레 캐릭이라 하니까 얘밖에 안 떠오르더라. 다른 아는 츤데레 캐릭인 루이즈나 이오리는 오래되기도 오래돼서...
상중하 구성으로 3화 정도까진 생각해 놨는데 2화는 담에 시간 될 때 써서 올려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