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의 첫만남 이후 그와의 만남들은 나에게 흥미와 관심을 가져다주었다. 신비롭고 어딘가 매력적인 그의 모습에 빠져든 나는 성공을 자신하며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그러나 그 구애에 돌아온 것은 차디찬 냉대 뿐이었다.

"처음부터 저희의 관계는 철저히 정략적인 관계였습니다, 부인. 부인은 저와의 결혼을 통해 이 왕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고 승계받길 원하셨고 저는 이 왕국의 존속과 왕국민들의 안전을 보장받길 원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기에 이루어진 거래였지요."

"그러니 말입니다, 부인."

"이제 같잖은 연기는 그만두시지요."

그의 차가운 말투와 눈빛은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내 자존심에 큰 스크래치를 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협박과 회유, 그리고 설득을 합친 구애는 미적거리던 그의 태도에 변화를 강요했고 결국 첫날밤을 보냈다. 그럼에도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차가운 눈빛은 경멸의 눈빛으로 바뀌었고 행동 또한 동토의 겨울처럼 차가워졌다.


어쩌다가 이렇게까지 변한 것일까?

충직스러운 기사가 주군을 배신하게끔 한 그의 매력은 나에게도 변함없이 적용되었던 모양이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던 예전의 감정과 달리 이제는 사랑으로, 그리고 평생 실패 한 번 겪지 못한 나에게 닥쳐온 커다란 실패들은 그것을 집착으로 바꾸었다.

이렇게까지 나를 몰아세웠으니 이제 결말은 정해져있다.

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고 성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내 품에 안겨 내 것이 되겠지. 아니, 확실하게 말하자면 내 것이 될 운명이고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느 날 바뀌었다.

집무실에서 여기사와 사랑을 나누는 그의 모습을 본 그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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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처음에 인내하고 어느 정도 쉬울 거라 생각했던 일들은 급격히 변화를 거쳐 재앙처럼 나에게 덮쳐왔다.

여왕 소피야와의 관계.

너무나도 차가워 얼음여왕이라 불리우는 그녀와의 관계는 지극히 정무적이고 사무적일 것이다, 라는 나의 생각은 단순히 착각에 불과했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녀는 나와의 관계에 적극적이었고, 어떻게든 선을 그으려던 나의 노력을 무시한 채 계속 가까이 접근하며 압박하기 일쑤였다.

결국 그녀와 원치 않은 관계를 맺고 조금씩 가까워지던 때 아주 곤란한 고백을 받았다.

"너무나도 곤란하시겠지만, 차마 참을 수 없어서 고민 끝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전하를 좋아합니다."

갑작스레 사랑을 고백하는 친우 겸 전 기사단장이자 현 시종인 그녀의 고백. 나는 전혀 예상못한 고백을 곱씹으며 과거를 회상한다.

아직 어렸을 적 동갑내기였던 귀족의 여식과 우연히 정원에서 만났다.

정원에서 비밀 만남을 가지며 관계를 키워오던 우리들은 나이를 먹으며 멀어졌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왕의 하나뿐인 적자라는 위치는 나에게 막중한 짐과 같았다. 그럼에도 자유분방한 성격을 떨치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던 내 정신을 일깨운 건 도적 떼가 습격한 어느 마을을 지나면서였다.

불에 탄 집들과 가족을 잃고 굶주린 채 울기만을 반복하는 갓난아기들. 갈 곳을 잃은 고아들과 굶주린 백성들은 연신 내 이름만을 연호했다.

변변찮은 이름조차 없었던 그 마을에서 나는 왕관이 주는 무게를 알았고, 내가 어떤 위치인지도 깨달음을 얻었다.

그 날 이후로 매일같이 수련에 힘썼다.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는 지루한 나날들.

인간 관계는 많지 않았고 어렸을 적 만났던 소녀와는 같은 스승을 둔 사제로써 고통과 기쁨을 나눴다.

어쩌면 그 때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것 같았다.

나를 볼 때마다 조금씩 붉어지는 볼, 약혼녀의 이야기를 듣자 어두워진 얼굴, 그리고 나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모습.

왕세자와 군왕으로서 책무에 빠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외면했을지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사랑과 충성을 바쳐온 그녀를 나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아무 말도 아니라며 떠나가는 그녀의 팔을 잡고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나는 지금까지 그대의 감정을 알아주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대의 감정을 알면서도 군왕으로서 무시했을 수도 있겠지."

"그렇기에 사죄의 의미로써 오늘은 그대와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전하!"

놀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지고 어린아이마냥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 그녀를 안으며 나는 잠시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이제 다 끝날 줄 알았던 비극은... 이제 시작의 종을 울렸을 뿐이었다.

얀 시동 겁니다. 자유로운 감상과 평가, 그리고 의견 받습니다.

*오랜만에 써서 마음가는 대로 썼는데 글은 괜찮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