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떨어지면 많이 아플텐데?"


세상의 모든 빛이 빠르게 움직이는 것같은 대로가 보이는 빌딩의 옥상에서 그녀는 내게 말을 걸었다.


"영혼을 바치는 대신 소원을 이뤄줄게. 딜?"


두개의 양의 형상을 띈 뿔과 엉덩이 너머로 살랑 살랑 흔들리는 꼬리는 그녀가 악마라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

평소의 나였더라면 단칼에 거절했을 제안에, 나는 수락할 수 밖에 없었다.


쉴틈 없이 움직이는 톱니바퀴 속의 부품으로 살아왔다.

감정없는 로봇처럼 지시받은데로 움직이고, 일정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잘하면 상사 덕. 못하면 내 탓.

공이란 공은 다 뺏기고 오점만 남은 내게 돌아온건 권고퇴직이였다.


잘난건 없고, 남은건 중견기업에서 근무한 몇년이라는 한줄의 문장.

퇴직금으로 받은 모든 돈은 엘론 머스크를 믿다가 사라져버렸다.

빌어먹을 전기차. 쫄딱 망해버리라지.


가족도, 애인도, 친구도 없는 나이기에 도저히 미래가 보이지 않아, 자살을 결심했다.

'이왕 죽을거면 회사에서 죽어라.'

입사 첫날 사장이 말한대로 여기서 죽어주마.

내일 뉴스와 주가폭락의 힘을 느껴보라는 물귀신 작전으로 준비 만반으로 옥상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옥상에서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동상을 보며, 괜한  감상에 빠져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눈 앞에는 어둠이 일렁이고 있었다.

깜짝 놀라 뒷걸음을 치자 어둠은 여성의 형태로 변하더니 내게 고하였다.


"영혼을 바치는 대신 소원을 이뤄줄게. 딜?"


초현실적인 존재임에 비해 천박한 어휘에 벙쩌있자, 내 심중을 읽은듯 그녀는 고상한 말은 천사나 쓰는 말이라 하였다.


"물론 악마와 계약한 이상 지옥에 떨어지겠지만, 너를 힘들게 한 모든 것을 현실에서 지옥에 빠지게 할 수 있어. 실체도 모르는 영혼 그냥 내게 주면 안돼?"


맞다.

어차피 버릴 인생. 전부 쏟아주지.


"딜"

"계약 접수입니다, 고객님! 즐거운 이승길 되시길~♡"


.....


그리고 눈을 떴을때, 나는 사장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것도 경쟁사라고 할 수 없는 대기업의.


"분명 이 자리의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을텐데..."

"그 사람이라면 계약이 끝나서 너랑 교대했어! 사람들은 처음부터 너인줄 알거야!"


갑자기 나타난 악마는 내게 계약자인 이상 계속 함께할거라고 하였다.

어차피 나만 볼 수 있다는 그녀였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전 주인은 가족도 있었는데?"

"그러니까 복수만 하고 끝내야지, 갑자기 사라진 가장과 변해버린 현실에서 고통받는건 그 가족인데 말이야~"


경박스럽고 자연스럽게 넘어간 말이지만, 그녀의 말에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래. 

난 복수만을 하는거야. 

날 그런 처지로 만든 세상에게.

절대로 남과 연관되면 안된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게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악마는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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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웠다. 생각보다 모든일이 술술 풀렸다.

거래처와의 거래는 항상 우리쪽에 이득으로 성사됐으며, 내 전 회사를 방해하려는 작전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승승장구하는 세상 속에서 내가 느낀건 허무였다.

이런 세상에서 도망가려던 나였기에, 더더욱 싫증이났다.


남아도는 돈으로 불우한 처지의 사람들을 도왔다.

바꾸고 싶었다. 이 세상을.


"어머, 그런다고 네가 지옥에 가지 않는건 아닌데♡"


악마는 계속하여 나를 타락의 길로 유혹했지만, 나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어차피 갈 지옥이라면, 다른 이들을 조금 도와주어 나를 따라오지 않도록 하는 인생도 괜찮지 않은가?


"재밌는 인간이야. 너는"

"내가 하는 일에 신경 꺼. 악마"

"어머♡ 조금 상처받았을지도?"


지루한 흑백영화의 삶에 조금씩 색이 칠해졌다.

아이들의 웃음, 어르신들의 감사.

모두가 나에게 활력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정치인이 되었다.

압도적인 지지율로 나의 지역구는 나라에서 최고의 복지도시라 불리게 되었다.

많은 검은 돈이 나를 유혹했지만, 가까스로 견디어냈다.

수많은 정치공작들을 뚫고 홀로 우쭉 설 수 있었다.


"재미없어."

"그대로 계속 있어"

"나는 너와 이런걸 하려고 계약한게 아냐."

"나와는 관계없어."


그녀는 나에게 항상 재미없고 지루하다고 했다.

악마인 그녀에게 이 세상은 유희일 뿐.

계속해서 보아온 인간 중 나같은 존재는 없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레어 포켓몬이라니, 전설 카드를 뽑았다니 방방 뛰더가 날이 갈수록 표정이 굳어만 갔다.


"야, 너 뭐야."

"뭐라니.."

"왜 계약이 끊기려고 하는건데!!"


평소와 같이 지방 도시 전체를 계획설계하여 복지도시를 만든다는 공약을 이행중일때, 그녀가 다급히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마음에 안들어! 마음에 안든다고!!"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이야. 어차피 너도 내가 죽으면 날 마음대로 할 수 있잖아."

"그니까 그 깨질 수 없는 계약이 지금!!!"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춘 그녀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또!! 또!! 약해졌어!!!"


"나는 내가 가장 마음에 드는 인간이랑만 계약을 한다고!! 그만큼 너도 나에게 끌릴텐데!! 어째서!!!"


언젠가 악마들은 살아있는 존재를 만질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이 먼저 접근하지 않는한.

지금도 분해만할 뿐이지, 나에게 해를 끼치지 않기에 무시를 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그녀가 방을 바꾸더니 은은한 빛이 나는 모텔방으로 변환시켰다.

알싸한 냄새가 방을 가득 매웠고, 커다란 더블베드 위에서 나체 차림의 그녀가 나에게 달콤한 말로 속삭였다.


"대악마의 처녀. 맛보고 싶지 않아?"


엄청난 위력이 담긴 말.

평소 커리어우먼처럼 딱딱하고 맵시 있게 다니던 그녀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매혹적인 어투.

경박한 여성에서 섹시하고 육감적이게 변한 그녀는 도저히 참을 수 없을정도로 날 유혹했다.


은은한 분위기가 감도는 램프와 아늑한 침대.

그녀의 체취가 방의 향기와 더해져 내 코를 자극했고, 침대 위에서 나체 차림으로 뒹굴거리며 다양한 포즈를 하는 그녀에게 난 떨리는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많은 곳에서 나눴던 대화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고아원에서 원장님이 '아이들이 너무나 행복해해요. 이걸 보는게 얼마만인지.. 정말 고마워요.'

노인정에서 어르신이 '내 생전 자네같은 국회의원을 볼 줄 몰랐네.. 내 늙었지만, 자네를 항상 응원하고 있네.'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무상급식의 틀이 아닌, 돈을 조금 더 내더라도 영양이 갖춰진 음식 뿐 아니라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줄 수 있게 됐어요. 아이들 좀 보세요'


그 외의 수 많은 감사인사들....


'아저씨!' '의원님!' '회장님!'


<<감사합니다!!>>


떨리는 손으로 두 뺨을 찰싹 때린다.


"에.. 너 뭘..!"

"나는 너에게 유혹되지 않아."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가슴속에서 날 막는 무언가가 해방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 마치 유럽으로 여행을 갔을때 들었던 오르간 소리.

[하늘에 닿으리라. 하늘에 닿으리라. 찬란히 빛나는 저 태양으로!!] 

성악가의 그 소리가 내 귀에 맴도는 것 같다.


"꺄아아아아아아아악!!!!!!!!"


"이럴 수 없어!!!! 이럴 수 없다고!!!"


"넌 내껀데!!! 내 영혼이라고!!!!!"


"내가 널 버릴 수 있을 거 같아? 너가 이러고 무사할거 같냐고!!!!!!"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나를 덮쳤다.

표정을 잔뜩 구기며 나체 차림으로 내게 소리를 마구 질러대는 그녀는 매우 매력적이였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무서웠다.


"너가 갈 모든곳!! 너가 만날 모든 인연!!! 내가 전부 함께하게 될거야. 이렇게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아? 아니, 넌 내꺼야. 아무데도 못보내. 아무에게도 못 줘. 넌 평생 내게 종속될거야. 끊임없이, 평생!!! 나와의 쾌락의 늪에 빠지게 될거야!!!!"


그녀는 내게 악을 전부 뱉어내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이내, 나는 그녀와 나의 연결고리가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고마웠다."


"꺄아아아아아악!!!!! 이거, 이거만은!!"


그녀는 사라지기 전에 내게 손을 뻗었고 인간인 나에게 악마인 그녀는... 




닿았다.



닿았다고?

그녀와 닿은 손에서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꺄하하하하!! 넌 나와 함께야, 함께라고! 나와 영원히 떨어질 수 없어!!"


손에는 그녀의 눈 밑에 있는 문신이 올라왔고, 다시 그녀와 연결됨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천사한테 부탁해보시지! 과연 그 잘나신 양반들이 해주를 해줄까? 넌 내게 평생, 죽어서도 관리받게 될거야. 내가 모든 곳에 함께할테니! 너는 그리고.."


그녀는 말하다 사라졌다. 내 몸에 표식을 남기고.


문신에서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에 복통이 나는 것 같았다.


괜찮다. 나는 괜찮아.

악마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거야

타오르는 손등을 장갑으로 감추며, 길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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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종합 : https://arca.live/b/yandere/207587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