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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으로 달려가서 법관에게 늦은 밤에 실례를 무릎쓰고 찾아가 일단은 그 날 있었던 일을 모두 고하였다.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엄연히 피를 본 일이었기도 했고 자신의 권역에서 초법적인 사태가 일어난 것에 분개한 법관은 클레트가우경에게 호통을 쳤고 그를 처벌하려 했으나 나는 오해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 사건을 크게 키우고 싶지 않다고 아뢰고 그날에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시인하는 동의서를 작성한 뒤에 추후 클레트가우 가문에서 나에게 해코지를 가하려 한다면 이 동의서의 내용으로 처벌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썼다. 어차피 세력이 강한 가문이었기 때문에 일개 평민인 내가 그들의 처벌을 요구한다 한들 신분격차로 인해서 약한 처벌만 가해졌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했더라면 나에게 돌아오는 보복또한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을테다.


나는 복귀하는 마차에서 함께 그를 연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병사들에게 나의 별명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문둥이 도살자라니....한때 내가 병에 걸려서 사경을 헤멘 적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절대로 문둥병이 아니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알려주기를 문둥병에 걸린 것으로 판단된 병사들을 바이츠제커의 휘하에서 따로 떨어뜨려 놓은 뒤 돌아올 수 없는 전장에 보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때를 어렴풋이 기억 해 내었다. 그들은  고열로 간신히 서 있는 것 정도만 가능한 나와 내 동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만약에 그곳에서 살아남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문둥병인지 뭔지 모를 병으로 천천히 죽어 나갔을 것이다. 운이라고 해야 할지 지독하다고 해야 할진 모르겠지만 사지로 몰렸던 우리들 대부분이 전장에서 살해당하고 며칠밤 낮을 잠도 자지 못하며 격전을 이어가며 소수의 인원만이 겨우 버텨내어 결국 살아남았다. 하지만 우리를 마중 나오는 아군은 없었고 살아남은 자들도 그곳에서 하나 둘씩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때 정말로 행운이 찾아 온 것인지 각 도성을 돌아다니면 의술을 베풀던 수도사들 무리가 우리 근처를 지나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가 문둥병이 아닌 고열을 동반한 고름병에 걸렸다는 것을 확인하고 치료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도성에 있을 때를 제외하곤 제대로 된 휴식도, 위생도 갖출 수 없었기 때문에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결과로 얼굴과 몸엔 지울 수 없는 흔적들이 남았지만 흉측했던 고름들이 사라져서 전보다는 나아진 상태였다. 우리가 귀환 한 것을 본 지휘관과 바이츠제커 공자는 죽은 사람이 돌아온 것인양 믿지 못하는 눈치였고 우리를 향해 발검을 하고 궁수들을 향해 우리를 겨누라고 명했다. 하지만 도성에는 지켜보는 눈이 너무나 많아서 우리를 함부로 해할 수가 없었고 결국 군의관을 데려와 우리가 문둥병이 아닌 고름병이었고 치료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 받은 뒤 우리는 입성이 허가되었다.


이 전투에서 우리는 적을 전멸시키지 않았다. 흉측한 외모를 가진 자들이 잃을 것이 없어 목숨을 신경쓰지 않고 싸우기 시작하니 그들은 괴물을 본 것 같이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내 이름이 어떻게 그들에게 알려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잔혹하게 적들을 도륙한 나는 나도 모르는 새에 문둥이 도살자 라는 당사자인 나는 치욕스럽게 여길 이명을 멋대로 붙인 것이었다.  


"문둥병이 아니었군요....정말이지 바이츠제커 그자는 지독합니다. 아마 지금까지 데커트씨가 겪었던 전투중에서 가장 힘들고 고된 전투였겠지요. 그래도 몇년 전에 효수를 당해서 지금까지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루었으니 다행입니다."


한 병사가 나에게 모든 일이 잘 되어서 다행이라는 듯이 그렇게 얘기하였다. 나는 웃으며 답했다.


"그 전투는 내가 겪은 전투중에 가장 고된 전투는 아니었다네."


이후 돌아오는 내내 그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럴 법도 했다. 아마 듣는다면 비교적 평화로운 삶을 살았던 그들은 전쟁의 두려움에 군복을 벗고 싶었겠지.


이 날로부터 며칠 뒤 나는 클레트가우경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그의 여식인 아가씨를 나에게 맡겨달라고 한 것은 결코 아가씨를 내 처나 첩으로 둘려고 했던 것이 아니다. 난 도성에서 집으로 돌아온 다음날 아침 농사를 지으러 가려는 아내를 붙잡고 도성에서 클레트가우경과 한 약속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 이것은 아내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나중에 모든것이 끝나고 제대로 설명을 할 테니 지금은 나를 믿고 따라달라고, 절대로 나는 당신을 배신하지 않는다고 약조했다. 지금까지 내가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불만이었는지 약간 언성이 오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녀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기에 그렇게 반응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고 나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과의 약속을 이제와서 없던 것으로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대로라면 아가씨로 인해 나의 가족들은 때때로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과감히 결정 한 것이었다. 결국 아내는 불만이 있었지만 한수 접어 들어가면서 마지못해 동의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가씨가 우리 집에 찾아왔다. 평소에 입었던 화려한 복식이 아닌 이 마을의 평범한 사람들처럼 입고 화장도 하지 않고 머리도 차분하게 빗어 늘어뜨려 놓은 채로 말이다.


내가 클레트가우 경과 약조한 것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한달에서 두달간 그녀를 출가시킨 뒤 우리집의 식솔로 받아들일 것이다. 둘째, 나는 내 본처와 동등하게 그녀를 대할 것이고 신체적인 접촉도 이루어 질 지 모르겠지만 엄연히 귀족가문의 여식인 그녀의 정조를 평민인 내가 건드릴 순 없기 때문에 내 본처와 그녀 모두 성관계를 하지 않을 것이다. 셋째, 만약 그녀가 이곳 생활에 만족한다면 나는 내 본처와 결별하고 그녀를 처로 맞이 할 것이다. 넷째, 만약 그녀가 이곳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돌아가지만 나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한다면 나는 어떠한 방식으로던 책임을 지겠다. 저잣거리에서 조리돌림을 당하던 귀족가의 여식을 능멸한 죄로 처형을 당하던 온전히 클레트가우 경에게 처분을 맡기겠다.  


난 내 본처와 동등하게 그녀를 대할 것을 맹세했기 때문에 부인을 대하듯이 그녀를 대했다.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 경어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대하는 말투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나 지나치게 격식을 차린 말투로 대하진 않았다. 또한 호칭도 부인이 되었다. 그녀는 내심 기뻐하는 눈치였다. 이따금씩은 평소의 귀족으로써 받았던 대우와 격차가 심해서 당황하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적응 하는 듯 했다. 어느날 밤엔 안방에서 세 명이 함께 자고 있을때에 그녀가 나의 허벅지부터 시작해 손을 아래로 쓸어내리며 나를 유혹해 온 적이 있었지만 나는 즉시 내 본처를 깨우고 이 사실을 고한 뒤에 나는 함께 지내는 동안 두 사람중 누구와도 성관계를 할 의사가 없음을 다시 한번 밝혔다. 그때에 그녀는 반발하는 듯 했으나 내 본처가 그녀에게 화를 내며 대꾸하자 불만스러운 태도였지만 이내 잠잠해 졌다.


하지만 그녀가 도저히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곳의 위생과 식사였다. 하루에 두번도 목욕을 하고 세번도 옷을 갈아입던 생활에서 이틀에 한번꼴로 목욕을 하고 사흘에서 나흘에 한번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는 생활은 그녀에게 굉장히 고되었던 것 같다. 나는 겉으로는 그녀에게 조금만 참으면 다시 예전처럼 잘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다정하게 이야기 했지만 속으로는 그녀를 비웃었다. 귀족가에서의 식사는 입은 즐거웠지만 복통과 설사를 불러왔다고 했던 그녀였다. 그렇다면 우리 집에서 먹는 식사는 맛은 그때보다도 형편 없겠지만 적어도 복통은 겪지 않을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식사와 위생에는 불만이 있는 듯한 태도였다.


고된 육체노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처음 이곳에 오고 며칠간은 어린 시절에도 몇번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하면서 즐거워 했고 밤이 되서 돌아갈 때에 나와 내 본처, 그리고 그녀가 함께 담소를 나누며 그날의 밤처럼 하늘에 수놓은 별빛을 보며 추억에 잠기고 다시 행복에 잠기는 듯 했지만 이윽고 그녀의 가녀린 육체에는 너무나 고된 노동에 지쳐서 나와 본처가 농사를 마치고 담소를 나눌 때에 그녀는 옆에 누워 이른 밤잠을 청할 때도 많았다. 그런 생활에 점점 그녀는 야위여 갔고 한달이 지나던 때에 결국 식사를 거부했다.


"아가씨, 한달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 놈에게 연정과 미련이 남아 계십니까? 이러한 생활을 감당 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때 그녀에게 다시 경어와 존칭을 쓰며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이 화들짝 놀라면서 반쯤은 울며 나에게 애원했다. 좀 더 버텨 볼 터이니 제발 자신을 이곳에 남게 해 달라고 말이다. 나는 알겠다고 한 뒤 그 날 도성으로 가는 마차에 올라 클레트가우 경과 만나 그녀가 한달을 더욱 버티겠다고 했으니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실 수 있냐고 청원했다. 그는 나와 약속한 기간이 있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동의했다.


도성에서 돌아오면서 나는 선물을 샀다. 난 도성에 들를 때마다 부인을 위해 선물을 사곤 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니 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사 오라고 하곤 했지만 아이들에겐 평소에도 과자를 자주 사 주기도 했고 생일마다 할 수 있는 선에서 녀석들이 원하는 것을 사 주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도성에 들른 날에 사는 선물은 내 아내를 위한 것 뿐이었다. 당연히 본처와 내 본처 행세를 하는 그녀의 것까지 함께 사서 돌아온 나는 각기 선물을 건네주었다. 아내는 농사를 지을 때 뿐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머리에 스카프를 두르는 것을 즐겨했기 때문에 종종 나는 이쁜 자수나 질이 나빠 귀족들에게 유통되지 않는 저급보석이 박힌 두건을 선물하곤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고 내 아내는 기뻐하며 그것을 머리에 둘러보고는 나에게 안겨 사랑한다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아르엘에겐 자수가 놓인 손수건을 선물 해 주었다. 노동에 익숙하지가 않아 땀을 자주 손으로 닦아내어 피부가 많이 상해있던 것이 좋아보이지 않았다. 비록 그녀가 원해서 이곳에 있는 것이라곤 하나 한달 뒤엔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최대한 탈없이 돌려보내고 싶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받아들이며 내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것을 보물처럼 손에 쥐고 (그녀 기준으로)집안 가득한 먼지에 때라도 탈 까봐 소중히 보관함에 넣어두었다.


결국 한달이 지나고 보름이 되던 때에 그녀는 내게 성토했다.


"데커트! 대체 날 왜이렇게 괴롭게 하는 건가요! 이곳에서 벗어나서 나와 함께 도성으로 간다면 당신도, 나도 행복해 질 수 있어요! 그런데 어째서...어째서 저를 괴롭게 만드는 건가요?"


나는 그녀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했다. 이런 상황에 노출시킨 나도 참 지독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나와 함께 살기 위해선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귀족가에서 먹던 것과는 다르게 곡식으로 대부분의 허기를 채우고, 조금 먹을 수 있는 고기도 신선하진 않고, 지저분하게 같은 옷을 사흘에서 나흘동안 입어야 하고, 자주 씻을 수도 없고, 화장은 꿈도 못 꾸며, 나의 일은 나 스스로가 전부 책임져야 하는 것. 그것이 나의 삶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살고 싶다면 그녀는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들을 모두 포기 해야만 한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제가 왜 아가씨를 이곳에 불러들였는지...."


"과거에 내가 벌인 짓 때문에 그런 것인가요! 그렇다면 사과할게요! 제발...제발 나와 함께..."


"아가씨가 저와 함께 있기 위해선 이곳에서 저와 함께 여생을 보내셔야 합니다. 저는 이곳에서 인생의 35년중 6년을 제외하고는 전부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6년을...제외하고? 당신은 이곳에서 평생을 머문 것이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떠나고 2년이 지난 뒤에 왕명에 의해 징집되었습니다. 실상은 당신의 낭군이었던 바이츠제커 가문의 사병으로 끌려간 것이었지요. 첫 전투를 하고 도성으로 귀환했던 그 날, 저는 성문에서 바이츠제커 공자를 기다리는 당신을 봤습니다. 그때에 당신은 분명히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을 터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곳에 끌려왔는지, 어째서 부상을 당했는데도 변변찮은 치료조차 받지 못했는지 따윈 궁금하지 않으셨겠죠."


"나...나는...."


그러자 그녀는 우는 것을 멈추고 눈동자를 크게 뜨며 경악하는 듯 했다. 나는 웃기기만 했다. 그녀의 남편이 도성 근처의 마을 전체를 돌며 왕명을 위장해 멋대로 징병을 한 사실이 발각되어 숙청되고 처형당한 것을 알고 있었을 터인데 이제와서 마치 몰랐다는 듯이 놀라는 것을 보니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아가씨가 평민의 신분으로 이곳에 남아서 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그때 저는 끌려갔을 터입니다. 하지만 살아 돌아왔을지 죽었을 지는 또 모르는 일입니다. 저는.... 아가씨가 제 곁에 남아있었고 만약 제가 살아남게 되었다면 마찬가지로 결국 평화로운 시기에 사직을 청해서 이곳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전장에서는 인간 취급을 못 받으며 싸웠고 지금 제 얼굴에 난 흉터와 자국들도 전투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아가씨는 제가 나이를 먹고도 개구장이 짓을 해서 그랬던 것이라고 짐작하셨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나를...원망하는 건가요?"



"아가씨를 원망하고 저주하려 했다면 진작에 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니 안심하시길. 아무튼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어떤 때에는 적의 지휘관을 사살하고 그가 먹으려고 준비 해 두었던 식사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운 적도 있었습니다. 처음 한 두번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니 좋았지만 자주 그런 짓을 하다보니 아가씨가 그러했듯이 탈이 났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환멸이 났습니다. 언제나 고향이 생각났고 전장에서 죽은 저의 둘째 형님과 당신의 아버지인 클레트가우 경이 버리고 떠난 뒤 사라진 그 식솔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아아...."


그녀는 이내 탄식만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이어서 계속 말했다.


"아가씨, 아가씨가 바이츠제커 가에 입적한 뒤로 가끔씩 당신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바이츠제커공과 행복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가끔씩 손을 맞잡고 외출을 하고, 제가 저택에서 근무를 하는 동안 그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만.....제발...그땐 몰랐었어. 그 사람이 그렇게나 잔혹한 짓을 벌이는 줄은...."


"압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평민으로써의 삶을 정리하시고 바이츠제커 공자와 혼인을 하신 것 때문에 아가씨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째서...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 거야?"


"당신이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났으면서, 이제와서 그것들을 다시 그리워 하는 척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니야....아니야! 난 정말!..."


"그렇다면 정말로 친가에서 누리셨던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이곳에서 저와 함께 여생을 보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저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그 모든것을 포기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녀는 망설였지만 끝내 대답하지 못했다. 그야 당연했다. 이곳을 떠나서 살아온지 20년이 되어간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 사랑하는 본처를 거는 거대한 도박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녀가 절대로 버티지 못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과거에 변할 수 있었듯이 지금에 와서도 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히 그녀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홀로 두고 내 본처와 함께 농사를 하러 갔다. 그날은 나도, 아내도 아무 말 없이 집에 돌아왔고 예상했던 대로 아가씨는 사라진 뒤였다. 아가씨가 사라진 뒤 나는 아내와 다시 행복한 삶을 살았다. 도시에도 틈틈히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가기도 했다. 바이츠제커 가문이 축출 된 뒤 새롭게 자리를 차지하게 된 귀족들은 온건한 자들이라는 평판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앞으로는 이전처럼 긴장감 있는 삶을 살진 않게 될 것이다. 



혹시나 아가씨를 마주치게 될 까봐 염려스러웠지만 저잣거리에서 어느날 들은 소문에 의하면 혼사도 거부하고 그저 친하게 지내는 얼마 안 되는 지인들을 가끔 초대하거나 직접 찾아가는 것 외에는 전혀 타인과 교류가 없다고 한다. 아마 호즈만 경은 답답했겠지만 그래도 재혼한 부인과 본 후사가 혼인을 해서 가문을 이어나갔으니 그녀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터이다. 조금은 심란했지만 아내의 미소를 보니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은 전부 잊혀졌다.


















나는 친정인 클레트가우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의 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반겼다. 나도 나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러웠기에 아버지의 태도에 반항하지 못하고 억지로 웃음을 지어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렸다. 오랜만에 저택에 돌아오니 몸이 편했다. 하지만 마음은 전혀 편하지가 않았다. 난 아버지에게 그에 대해서 깔끔히 포기했다고 조금은 채념 한 듯이 털털하게 이야기 했다. 그는 그럼 그렇지 라며 오랜만에 집에 왔으니 한동안은 편하게 지내라며 시종을 붙여주었다. 그들은 나를 데려가 씻기고, 옷을 입혀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고, 침대를 깔끔하게 정돈 해 두었다.


집에 돌아와서 이전처럼 가문의 영애처럼 살아가며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니, 겉으로는 평온 해 보였겠지만 속은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난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행복한 사람인 것인양 행동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그 사람을 져버리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납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잠자리에 들면 난 언제나 눈물을 흘렸다. 이곳의 밥은 여전히 입맛엔 맞았지만 속이 쓰렸고 옷은 화려하지만 거칠고 불편해서 움직일때마다 피부가 쓸렸다.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화장을 해 주었지만 붉게 올라오는 것들은 점점 감추기 어려워 졌다. 머리카락도 다시 예전처럼 아름답게 땋았지만 길게 늘어뜨리고 다닐 때보다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전에는 이것들을 버티게 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바이츠제커 공, 나의 전남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내게 무엇이 남은 거지?  문득 과거를 회상했다. 어린 시절에 형제들과 부모님 말곤 사람들 대하는게 서툴렀던 나를 데리고 놀았던 꼬마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수척해 졌지만 그래도 반짝이는 눈빛을 지녔던 소년, 학교에 가는 마차에 오르고 귀가하는 마차에서 내릴때 나를 반겨주었던 청년.


그날 따라 나는 하늘을 보고 싶었다. 내가 살던 산골 마을은 산에 위치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후가 좋았다. 매일같이 맑은 하늘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구름이 잔뜩 낀 날 보다는 햇볕이 드는 날이 더 많았던 곳이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잔뜩 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소년과 함께 보았던,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에서 볼 수 있었던 밤하늘은 이곳에 없다.



















-바이에른 184년 내전을 수월하게 해결하고 왕에게 충성심을 보였던 바이츠제커 가문의 젋은 공자 에그하르트 폰 바이츠제커는 다른 가문들의 시기를 받아 위조된 증좌로 역모로 몰려 효수당했다-
 

-그는 인망이 좋고 어진 사람이었는지라 휘하에 흉측한 외모를 가져서 멸시받던 부하들도 편견 없이 대하였다고 한다-


-그중 가장 유명했던 것은 문둥이 도살자라고 불렸던 데커트라는 병사이다. 그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전투에도 충성심으로 응하였고 살아남았지만 큰 부상을 당해 은퇴하였다-


-그러나 주군을 향한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영지에서 평생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미망인이 된 아르엘 폰 클레트가우는 사랑하는 낭군을 역모 조작으로 잃은 뒤 같이 숙청 될 뻔 하였으나 그녀의 아버지 호즈만 폰 클레트가우가 왕실에 보였던 충성심을 인정받아 숙청을 면하였다-


-그러나 실의에 빠진 미망인은 그녀의 저택에 틀어박혀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바이에른 195년에 쇠약사 했다-



-추후 그를 시기한 가문들이 역모를 일으키고 진압 된 뒤에 진상 조사가 시작되었고 모든 것이 조작된 것이 들통나자 바이츠제커 가문은 복권되었다


-가문에서 몰래 숨겨둔 적자 발두어 폰 바이츠제커가 가문이 복권되며 사면되어 세상에 바이츠제커 가문의 재건을 선언하였고 클레트가우 가문의 영애와 이어져 책이 저술된 바이에른 452년인 지금까지도 가문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바이에른 왕국의 역사 1권 3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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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시바 9800자 실화냐? 길어서 미안.

코로나로 백수 된 김에 오랜만에 좋은 소재가 떠 올라서 한번 끄적여 봤어. 원래도 필력이 좋진 않아서 좀 보기 불편할 수도 있는데 나중에 다시 읽을거 대비해서 틈틈히 수정 해 놓을게.


난 장편으로 갈수록 의욕이 떨어지고 재미가 없어졌는데 오히려 이렇게 단편으로 휘갈기듯이 쓰니까 재미있네. 앞으로도 틈 날때마다 조금씩 써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