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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 편의 이야기>



  두 사람 사이의 영구적인 인연을 맺어주는 아티팩트 '소유의 잔'을 사용하면 말 그대로 사용자 둘 사이에는 영원한 인연이 이어지게 된다.


  주인은 영원히 종이 되는 자를 소유한다.


  종이 죽더라도, 그 영혼마저도….


  주인과 종의 영혼에 새겨진 소유의 인장은 그 해괴하리만큼 기나긴 세월 동안 묶이게 된 두 영혼의 영속적인 계약을 상징하는 증거이다.


  죽어서도 종은 주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어서도.





  라티느 제국의 수도, 황도 레이시아.


  제국과 연합군 사이의 전쟁이 제국의 승리로 마무리되고.


  레이시아의 가장 큰 도로 두 개가 가로지르는 대륙에서 제일 넓은 광장인 라티느 중앙 광장에선 나라의 전복을 획책한 반란 분자들의 처형식이 이제 막 막이 올랐다.


"죽여라! 죽여라!"


"저 놈들을 당장 죽여 버려!"


  야유하는 관중들과, 그 한가운데에 산더미처럼 쌓인 나무 장작 더미들.


  그 사이로 솟은 나무 기둥에는, 내란을 주도했던 반란의 주동자가 다시는 풀려날 수 없도록 꽁꽁 묶여 다가올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


  베로니카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지켜봤다.


"저 자구나."


  이 반란을 주도했다는 자가.


  나의 셰인을 죽게 한 간접적 원흉이.


"그리고 이제 죽겠지."


  저 광기에 휩쓸린 관중들의 저주 속에서.


  자신을 죽이기 위해 봉기했다는 자들은 이제 죽는다.


  나라를 뒤집어놓기 위해 일어난 저 자들은 이제 죽는다.


  나의 셰인을 죽게 한 원흉들은, 이제 죽는다.


"그래."


  고통스러운 가운데 절규하며 죽으리라.


  화염 속에서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죽으리라.


  뜨거운 불길에 휩싸여 온몸의 살과 근육이 타들어가는 작열통 속에서, 한 줌 재에 합쳐져 그을음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리라.


  그것이 저들의 운명.


  저들이 들고 일어났을 때부터 정해지게 된 그들의 마지막.


"……." 


  나는 저들을 용서해야 할까?


  나의 셰인을 죽게 만든 저들을, 과연 용서해야 할까?


"…모르겠구나."


  베로니카는 알 수 없었다.


  저들을 용서해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타 죽게 놔두어 그들의 시신에 침을 뱉어야 할지.


  셰인의 말이 떠올랐다.


'제가 황녀님을 만나게 되고 나서 알게 된 게 하나 있습니다.'


'뭔데?'


'해보지 않곤 모른다고요.'


  해보지 않곤 모른다라.


  …….


"풋."


  베로니카는 작게 웃었다.


  이 대륙의 어떤 간 큰 자가, 라티느 제국의 황녀에게 그런 말을 올릴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네 말이 옳아.


  세상엔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


  지금 내가 해보려는 것도, 아마 그것들 중에 하나임에 틀림없는 거겠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을게.


  네가 응원해줬던 것처럼.


  베로니카는 나무 장작 더미 앞으로 내려갔다. 반란의 주동자를 직접 보기 위해서.


  나무 단상의 계단이 베로니카의 구둣발 소리로 울리고.


  마침내 베로니카와 반란의 주동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했다.


"…이게 누구신가?"


  힘겨운 듯이 주동자가 입을 열었다.


  기둥에 묶인 반란의 주동자는 꾀죄죄한 차림에 온몸이 상처 투성이인 것이, 이미 황실에게 적잖은 고문을 당한 것처럼 보였다.


  고름이 줄줄 흐르는 입으로 주동자가 말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설마 환영은 아니겠지?"


"아니다. 네 놈의 앞에 있는 건 틀림없이 대 라티느 제국의 제2황녀, 베로니카 라티느임에 틀림없다."


  갑자기 주동자가 거세게 몸부림치며 베로니카에게 소리쳤다.


"네 년이!"


  스르릉!


"감히!"


"쉿."


  황녀의 뒤에 도열해 있던 기사들이 움찔거리며 즉시라도 주동자의 혀를 베어낼 것처럼 칼을 뽑아 들었으나, 베로니카는 오른손을 들어 조용히 그들을 제지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는 전허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동자는 베로니카에게 외쳤다.


"네 년이 무슨 낯짝으로 내 앞에 얼굴을 들이민 거냐!"


"……."


"네 년이 주도한 그 학살로 얼마나 많은 자들이 죽어갔는지 아느냐!"


"그래."


"…뭐라고?"


  담담히 대답하는 베로니카의 모습에 주동자는 열띠게 소리치던 것도 관두고 황당스레 그녀에게 되물었다.


"안다고? 몇 명이나 죽어갔는지?"


"천오백팔십칠 명. 안다. 내가 내린 명령으로 5년 전 황도에서 죽어간 빈민들의 숫자지."


"크크크, 크크크큭…."


  주동자는 낄낄 웃었다.


"네 년의 명령 때문에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었는지, 네 년이 알고 있다고?"


"그래."


"그럼, 누가 죽어갔는지도 네 년은 알고 있느냐?"


  뒤이어, 주동자는 울부짖었다.


"내 아내가! 내 아들이! 내 딸이! 모두 네 년의 명령으로 달려온 기사단의 손에 하나하나 죽어갔다!"


"……."


"네 년은 모르겠지. 소중한 이를 잃게 되는 아픔을!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 없는 가장 깊은 상심을!"


"……."


"네 년은 모르겠지. 라티느 제국의 제국민이던 우리가 라티느 제국 기사단의 손에 죽어갔던 심정을!"


"……."


"네 년은 모르겠지! 우리가 잃은 자들의 얼굴을, 이름을, 인생을! 네 년이 놀린 가벼운 입방정 때문에 죽어간 그 모든 사람들의 한이 서린 인생을 네 년이 어떻게 알고 있겠느냔 말이다!"


"…네 말이 옳다."


"…뭐?"


  베로니카가 말했다.


"네 말이 옳다고 했다."


"하, 하하하. 지금 내가 들은 게 환청은 아니겠지?"


"아쉽게도 아니구나. 누구에게 아쉬운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베로니카는, 장갑 밑의 손을 나머지 한 손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으면서, 주동자에게 말했다.


"나는 모른다. 내 명령으로 죽어간 자들이 누구인지."


  그게 네가 사과할 일이야?


  너는 황도의 쓰레기를 청소했을 뿐이잖아.


"나는 모른다. 내 명령으로 죽어간 그들을 옆에서 지켜봤을 네 놈들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네가 그 마음을 왜 몰라?


  너도 너의 소중한 사람을 잃었잖아! 그들이 말미암은 그들만의 폭동 때문에!


"나는 모른다. 나를 씹어 죽이고자 들고 일어났을 네 녀석이, 지금 나를 눈앞에 두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네가 말했잖아.


  씹어 죽이고 싶겠지! 지금 네가 그런 것처럼!


  베로니카!


"시끄러워."


  …….


  어째서….


  어째서 지금 넌 그런 선택을 하려는 거야.


  너는 황가의 미치광이잖아.


  너는 감정 잃은 황가의 이단아잖아.


  너는.


  너는….


"맞아."


  네 말은 틀리지 않았어.


  나는 황가의 미치광이.


  나는 감정 잃은 황가의 이단아.


  나는 어미 없이 태어난, 황가의 외톨이.


"하지만."


  하지만 그런 내게도, 소중한 인연이 있었어.


'다시 별들의 품으로 돌아가 시녀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 직접 용서를 구할 수 있도록, 평생토록 연습을 해두는 것이라고 해둘까요.'


  나를 바라봐 준 나만의 인연이 내게 말했어.


'저는 황녀님의 물건입니다.'


  나를 이해해준 나만의 물건이 내게 말했어.


'그러니 우린 저 이성과 광기로 물든 황궁이란 바다에 감정이라는 우리만의 색채로, 다신 아물 수 없는 우리만의 흉터를 남겨보도록 하지요. 그 때까지 이 셰인은 얼마든지 황녀님의 검이자 방패가 되어 드리겠습니다. 나의 주인이시여.'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유일한 그가, 내게 말해줬어.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하라고…."


"…뭐하는 거야?"


  베로니카가 무릎을 꿇었다.


  가면을 벗은 그녀가 자신의 진짜 얼굴을 드러내는, 첫 순간이었다.


"황녀님!"


"이, 이게 대체!"


  기사들은 기겁하며 베로니카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베로니카는 손을 내밀며 기사들을 물리치곤, 주동자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


"내가 저지른,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는 그 크고도 큰 대죄에 대해…, 지금 여기서 진심을 다해 사죄합니다."


"…지랄하지 마!"


  주동자가 꿈틀거렸다.


"그런다고, 그런다고 내가 너를 용서할 것 같아! 이제 와서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고!"


"아니오. 그렇지 않겠지요."


"…뭐?"


"지금 와서 제가 용서를 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겠죠. 당신은 불타 죽을 것이고 저는 라티느 제국의 황녀로서, 계속해서 삶을 살아나갈 것입니다."


  주동자는 발악했다.


"그럼 네가 하는 지금 행동은 대체 뭐냐! 내가 죽기 전, 우리가 죽기 전! 네 년의 알량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마지막의 마지막에 와서 죄를 느끼는 것처럼 흐느끼며, 사죄하는 척 우리를 죽기까지 기만할 셈이냐! 그런다고 우리가 널 용서할 것 같느냐? 용서할 것 같느냐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야."


  베로니카가 말했다.


"저 역시 이번 사태로 소중한 인연을 잃었습니다. 아마 저 역시도…, 이런 고통을 겪게 만든 자들을 용서한다는 것은, 남은 여생을 생각해봐도 요원한 일일 것임이 틀림없겠지요."


  환하게 웃으면서.


  하지만 눈에선, 참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나와서.


"하지만 이번에 잃게 된 소중한 인연이 일러주더군요."


  이 말을 꺼내려 하면, 자꾸 네가 떠올라서….


"사죄하라고. 남은 평생 간 사죄해서, 지울 수 없는 그 죄를 나중에 제가 죽고 당사자들을 만날 때에도 자연스럽게 사죄할 수 있도록, 평생토록 연습하라고 말입니다."


  베로니카는 눈물을 삼켰다.


"미안합니다."


  제가 저지른 씻을 수 없는 그 죄에 대해서.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이 행동이 끔찍하리만큼 지독한 자기 위로에 불과하다고 해도.


"저를 죽어서도 저주하고, 제가 죽어서 당신께 사죄하더라도 그 때에서조차 제 사죄를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그럼에도.


  미안합니다.


"제 온몸을 다해 빌겠습니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베로니카는 절하듯 엎드렸다.


  대륙의 패자인 나라의 황녀가, 자신을 죽인다고 외쳐댔던 역도에게 고개 숙여 사죄한다.


  그 기묘하고도 거룩한 광경에 기사들도, 관중들도 어느새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멍청하긴."


  엄숙하게 고개 숙인 베로니카를 내려다 보며 주동자는 말했다.


"알고 있겠지? 지금 네가 하는 행동 따윈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압니다."


"네가 이렇게 해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압니다."


"지금 네 년이 하는 짓 따윈 내 가족을 살려낼 수도, 지금 처형 당하게 생긴 내 목숨을 구해낼 수도 없다는 걸 말이야."


"압니다."


"명심해."


  주동자가 말했다.


"당한 자는 죽어서도 잊지 않아. 너를 원망하며 죽어간 우리 가족들은 아직까지도 별들 사이에서 너의 저주를 울부짖으며 나를 기다리고 있겠지."


"…압니다."


"잘 기억해라. 그리고 평생 사죄해. 네가 저지른 그 죄에 대해서."


"…알겠습니다."


"가."


  주동자가 턱짓으로 한 쪽을 가리켰다.


"네 년 얼굴 따윈 보기 싫으니까 이제 꺼져버려."


"…예."


  베로니카는 몸을 일으켰다.


  더러운 흙먼지로 검게 얼룩진 드레스.


  그것을 닦지도 않고 우울하게 물러가는 베로니카의 뒷모습을 보며, 주동자가 던지듯 말했다.


"기다리고 있겠다."


"……."


"저 하늘 위에서, 네가 우리들에게 사죄하러 찾아올 날을 말이야…."


  베로니카는 작게 고개를 숙였다.


  주동자는 어딘가 홀가분한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불을 당겨라!"


  베로니카가 물러가자 처형인은 우렁차게 그들의 처형을 명했다.


  불이 타올랐다.


  바닥에서부터 시작된 불은 이윽고 장작을 타고 주동자마저 삼켜버려, 하늘 끝까지 삼킬 것처럼 탐욕스레 활활 타올랐다.


  불에 타며 죽어가는 주동자의 얼굴은, 그럼에도 어딘가 텅 빈 사람처럼 씁쓸하게 웃으며, 그저 베로니카가 떠나간 자리를 아릿한 눈빛으로 쳐다만 보는 것이었다.


"기다리지."


  네가 찾아와서.


  우리의 앞에, 사죄하게 될 날을….




  얼마 뒤, 베로니카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렇게나 소중히 여기던 모든 물건을 방에 두고, 쪽지 한 장만을 남긴 채.






"…자, 이제 이야기는 끝이란다."


"네? 이잉, 거짓말!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


"하하, 정말 끝났다니까? 왜 안 믿는 거니?"


"왜냐하면, 왜냐하면 아직 베로니카는 죽은 사람들에게 사죄하지 않았잖아요!"


"…이 녀석, 이야기를 제대로 안 들었구나."


  아늑한 어느 여관의 식당.


  어린 아이들을 불러다가 노래를 불러주던 음유시인은, 따지듯이 물어오는 어린 아이의 질문에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다음 얘기는요? 베로니카는 사라져서 어디로 갔어요?"


"미안하구나. 거기부터는 아직 이야기가 쓰이질 않았단다."


"이이잉. 거짓말!"


"진짜라니까. 흐음. 이거 억울해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음유시인이 그렇게 얘기하자, 결국 어린 아이는 자신이 졌다는 것처럼 다시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히잉, 알았어요. 일단 믿어드릴게요."


"일단 믿어주는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


  부끄러운 듯 화를 내는 음유시인을 보며 어린 아이들은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 아이가 물었다.


"셰인은 어떻게 됐어요?"


"셰인?"


"네. 황녀를 지키고 죽어버렸다던 그 호위기사요. 영혼이 이어져 있었다면서요."


"그래, 분명 그랬지."


"그럼 어떻게 다시 살릴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요? 영혼이 이어져 있었는데요!"


"글쎄다. 그건 잘 모르겠구나."


  음유시인은 악기를 치우며 아이에게 말했다.


"저 멀리 연금술 국가에선 호문쿨루스라고, 인간의 육체를 재현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던데 아마 그걸 이용해서 어떻게든 하지 않았을까?"


"어? 뭔가 대답이 자세한데요? 설마…, 음유시인 아저씨가 셰인 본인이라도 되는 거 아니예요?"


"…이 놈들! 나를 놀리려고!"


"하하하! 음유시인 아저씨 화낸다!"


  역정을 내는 음유시인의 손짓을 피하며 어린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음유시인을 놀려댔다.


"셰인! 셰인! 음유시인 아저씨는 셰인이래요!"


"아니라니까…!"


"셰인! 셰인! 음유시인 아저씨는 셰인!"


"이 녀석들이 진짜!"


"음유시인 아저씨는 셰인이래요!"


"셰인, 셰인! 주인도 못 지킨 얼빵한 호위 기사…."


  딱콩!


"아얏!"


"거기까지 하는 게 어떠니, 꼬마 친구들?"


  음유시인을 놀려대던 아이들의 꿀밤을 때리며 등장한 것은, 음유시인과 항상 함께 다닌다는 정체불명의 여인.


  어딘가의 고위 귀족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몰래 자신의 가문에서 도망쳐 나왔다는 소문도 있는 그녀는, 무언가 숨기고 있음에는 분명했으나 꼬질꼬질한 음유시인과는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도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어서, 마을에 들러 음유시인이 노래를 부를 때면 항상 이목을 끄는 주역인 여인이었다.


  여인이 말했다.


"어린 친구들은 이제 가서 잠잘 시간이야."


"힝. 아직 얘기 안 끝난 거 같은데."


"얼른 들어가서 자라. 부모님들께서 걱정하실 테니."


  분홍빛 금발의 여자는 손을 내저어 아이들을 내쫓았다.


  아이들은 혀를 베 내밀면서도 여자의 손짓을 피해 모두 후다닥 도망가버렸고.


  텅 비어버린 여관의 식당에는 음유시인과 여자밖에 남지 않게 되어버렸다.


  그런 여자를 보며 음유시인은 쓰게 웃었다.


"…황녀님, 왜 아이 말을 끊고 그러십니까."


"내 셰인이 그런 거짓말 섞인 모욕을 듣는 걸 어떻게 참겠어?"


"틀린 말도 아닌 걸요. 결국 그 때의 저는 끝까지 황녀님을 지키지 못했으니까…."


  짜악!


"…그런 말 하지 마."


"…네."


"너는 여전히 나의 호위 기사야. 그리고 지금껏, 나를 훌륭하게 잘 수호해 왔고."


"…아니요, 전…."


"내가 알려줬던 두 번째 사실이 뭐였지?"


"…말대답하지 말 것."


"지킬 거지?"


"…네."


  음유시인이 그렇게 대답하자 여자는 뺨을 올려붙이던 아까의 기세는 온데간데 없이, 음유시인의 옆에 앉으며 음유시인을 두 손으로 감싸듯 안았다.


"아직 못다 쓴 이야기를 마저 쓰러 가야지."


"그렇죠."


"떠날까, 오늘 밤?"


"어디로요?"


"다음 마을로."


  음유시인은 끙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지그시 감더니,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럴까요? 안 그래도 라티느 제국의 황제 폐하 생신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황제 폐하.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너는 이제 장인 어른이라고 부르는 걸로 충분하다니까."


"…장인 어른의 생신일이 얼마 안 남았으니, 시간에 맞춰 가려면 부지런히 가야지요."


"후훗, 과연 네 말이 맞구나."


  여자, 베로니카가 일어섰다.


"자아, 길을 떠나볼까?"


"예에, 그러지요."


  남자, 셰인은 베로니카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주종의 각인이 새겨진 두 손이 한데 겹쳐졌다.


"밤이군요."


"그러게. 밤이구나."


"별들께서 오늘도 우리의 앞길을 비춰주시겠지요?"


"그렇겠지. 우리의 어머니들과 함께."


  이 여정이 언제 끝날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 옆에서 함께 걸어줄 수 있는 너의 존재.


"갈까요?"


"그래. 가자꾸나."


  이 길의 끝에 뭐가 있더라도.


  그 때까지 네가 옆에 있어준다면, 내 길은 그걸로 된 거야.


  발을 빨리 재촉해야지.


  가야할 길이 머니까.


  너와 함께 할 이 길이 언제까지고 이어졌으면 좋겠어.


"후훗."


"…왜 웃으십니까?"


"그냥."


  너무 좋아서.


  셰인과 베로니카는 길을 떠났다.




  별빛이 반짝이는 가도를 따라, 소복히 쌓이는 눈길을 가로질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