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K416(클루카이)

G28(에이플린 -> 그냥 내가 임의로 지었음)

WA2000(마키아토)

"아침입니다. 지휘관. 일어나주세요."

"흐아암~... 벌써 아침이야...?"

0700. 오전 7시. 인공위성 신호를 받고 시차를 보정하는 디지털 알람시계는 매일 정확이 이 시간에 울린다.

오른쪽메는 푸른빛이 감도는 은발의 여인이, 왼쪽에는 시금치의 뿌리와 이파리처럼 그라데이션 톤의 초록빛 머릿결의 여인이 누워있다.
그녀들이 각각 붙잡아 안고있는 양팔에서 기분좋은 풍만함과 부드러움이 느껴지는 아침. 남자라면 에로틱한 로망이 충족되는 만족감을 느낄 호사로운 광경이다. 나도 그런 만족감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양 팔에 족쇄가 채워진 듯한 구속감이 드니 양팔에 미녀를 안는 에로티시즘에 마냥 빠져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가 지금 내 독백을 듣는다면 배부른 소리나 한다며 화를 낼 것 같지만... 내가 그녀들에게 사육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지울 수가 없으며 매일같이 그녀들에게 구속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건 그 느낌의 연장선이다.

그녀들에게 끌려와 같이 생활을 시작한지 6개월쯤 지났다. 그리폰&크루거에서 근무하며 굵직한 사건사고에 휘말려 생사를 넘나드는 피말리는 경험들을 겪은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회의감을 느껴 사직서를 던지고 스스로 퇴사했다. 그것이 10년 전의 일.
혈기왕성하고 능력을 인정받는 청년이었던 나는 의욕을 잃고 하루의 대부분을 거의 누워서 지내는 생활을 수개월 했다. 번아웃 상태였다...라고 하면 이해가 되려나? 마인드맵이 망가진 전술인형이 이런 기분일까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아무튼 그리폰&크루거를 퇴사하고 나서도 인생이 순탄치는 않았다. 여러 사건에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그린존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옐로우 존으로 쫒겨난 신세. 어떻게든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나는 용병 일을 하며 전혀 넉넉치 못한 생활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지휘관..."

"지휘관... 정말 지휘관이다! 정보가 맞았어 언니. 지휘관이 정말 살아있었다고!"

신소련 군부가 활개를 치고다니는 탓에 일거리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어느날. 나는 시궁쥐처럼 위험구역에 들어가 돈이 될만한 부품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돈이 될만한 값비싼 배터리팩을 찾아 기분좋게 돌아가려던 그때. 그리운 두 얼굴과 마주쳤다. 그리폰&크루거의 전술지휘관으로 일하던 시절 부하였던 두 인형이었다.

"416... G28... 오랜만이네. 이런 위험한 곳에는 왜 온거야?"

"그건 이쪽이 할 말이라고 지휘관.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된거야?"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더니 이런 신세가... 저는 정말 당신이 죽은게 아닐까 생각하다가..."

두 여인은 말없이 다가와 나를 끌어안았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사는 힘든 삶에 지친 상황에서 그리운 두 얼굴을 보았기에 나도 눈물이 났었다.

"다... 다 내 잘못이야. 지휘관을 홀로 두는게 아니었어. 적어도 나라도 지휘관의 곁을 지켰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텐데."

"나도 드디어 자유가 됐다는 생각에 지휘관이 사라져 버릴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저 언니를 뒤쫒느라..."

"아니야... 너희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내가 지쳐서 떠난건데. 그나저나 너희들을 다시 보니 너무 반갑네. 잘 지냈어."

"잘 못지냈습니다. 당신이 돌연히 사라져 버린걸 알고나서 제가 얼마나... 으윽..."

"지휘관이 사라져버린걸 알고나서 언니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알아? 몇년동안 지휘관을 찾아다니다가 포기하기 직전에 정보를 입수하고 바로 달려온거야. 연락 한번도 안 하고 진짜 나빴다 지휘관..."

"흐윽... 후우... 됐습니다. 이렇게 살아있는걸 확인하고 찾았으니 된거에요. 이제 모든것이 해결됐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들 지휘관도 아닌걸. 그냥 잊고 살아도 되었는데."

그 말을 한 순간, 한순간 눈을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친 것 처럼 그녀들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까지 눈시울을 붉히던 HK416,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던 G28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안쪽에 블랙홀이라도 존재하는 듯이 빨려들어갈 것 같은 압도감 마저 들었다.
내가 마치 해서는 안될 말이라도 한 듯이 죄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하하... 우리가 지휘관을 얼마나 보고싶어 했는데. 잊고 살라는 말은 너무 섭섭한걸."

"응. 그렇네. 나는 단 하루도 지휘관을 잊어본 적이 없는데 말이야. 긴말 필요 없습니다. 저희와 같이 그린존으로 가시죠. 더이상 이렇게 비참하게 사실 필요 없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건 제가 모두 제공해 드릴테니... 당신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언니 뿐만이 아니야. '우리'가 앞으로 지휘관을 보살필거야."

" '우리'라고? 내 앞에서 당당하게 그렇게 말하다니, 꽤나 대담해졌네. 에이플린."

"설마 클루카이 언니 혼자서 독차지할 생각? 그건 아무리 나라도 조금은 불만이려나..."

"뭐... 좋아. 여동생에게라면 조금은 양보해 줘도 되겠지."

그녀들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 무언가 어긋난 그녀들의 맥락. 내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상황이라고.

"저기... 만나서 반가웠어. 나는 이만 가볼테니까, 나중에 만나서 술...은 안되고 차라도 한잔 ㅎ..."

"누가 멋대로 떠나도 좋다고 했습니까?"

그녀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던 순간, 팔이 아플 정도의 힘이 물리적으로 나를 붙잡아 세웠다.

"어... 416...? 방금 뭐라고 했어...? 나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째서 멋대로 떠나려고 하죠? 저는 그걸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만."

"얘들아 그래도 한때는 내가 너희들 상관이었ㄴ..."

"지휘관은 지휘관이지만 지휘관이 아닌거야. 그러니까 이제 우리한테 명령은 못하고, 우리는 지휘관을 독차지할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는거라구."

"에이플린의 말이 맞습니다. 당신은 저희에게 명령할 수 없죠. 당신은 이제 제 지휘관이 아니니까요. 그러니 저희가 계획했던 대로, 당신의 신병을 확보하겠습니다."

몸이 타오르는 듯한 지릿한 격통과 함께 실이 끊긴 목각인형처럼 몸이 쓰러졌다. 어느새 에이플린의 손에는 테이저건이 들려있었고, 텅 빈 카트리지의 안이 보였다. 내용물이었던 물건은 아마 내 몸에 박혀있겠지.

"제 이름은 클루카이. 앞으로는 그렇게 불러주세요."

"내 이름은 에이플린이야. 잘 부탁해 지휘관. 그리고 이렇게 강압적인 방법을 쓴건 미안해."

"당신을 이런 환경에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이정도는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클루카이가 나에게 무언가 주사하는 것을 끝으로 그날의 내 기억은 끊겼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그녀들의 집에 있었다.
클루카이의 말대로 정말 모든것이 다 준비되어 있었다. 안락한 집부터 시작해서 그린존 시민권, 내 경험과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직장까지... 그녀들이 설립했다는 PMC에 전술요원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에헤헤... 좋은아침~ 지휘과안~..."

"선수치지 마. 에이플린."

잠이 덜 깬 에이플린의 입술이 오른뺨에 닿고, 경쟁이라도 하는 듯한 클루카이의 입술이 왼쪽 뺨에 닿는다.
생존 자체가 고달파진 세상에서 모든것이 준비된 질 높은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그녀들과 함께 시작해서 그녀들과 함께 마무리하는 하루를 반복하는 나날이 계속 이어지는건 정신적으로 피곤했다.
그녀들은 업무에 임할 때를 제외하면 항상 내 곁에 따라붙고, 그녀들이 허용한 범위 내에서 자유를 보장받는 다소 답답한 삶에 적응하는건 아직 어려울 것 같다.

클루카이가 말하기를... 사랑이 완전해지기 전에는 완전한 자유를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감시를 하는듯 마는듯한 주시가 계속 따라붙는다.
다른 여성과 대화를 하는 정도는 상관없다. 업무상 필요한 의사소통 뿐만 아니라 잡담을 나누는 것도 문제가 없지만... 상대가 식사약속을 잡는 등의 일정을 잡으려고 하면 나타나서 제지를 한다. 이건 그녀의 여동생인 에이플린도 마찬가지다.

이쯤되면 그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도통 감이 오지를 않는데...

"오늘 업무는... 두 사람은 계약 때문에 미팅이 있다고 했지?"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오늘은 저희 둘이 미팅을 다녀올 겁니다. 저희들이 없는 동안 업무를 맡기겠습니다."

"걱정 같은건 하지 않지만, 우리가 없는 동안에 바람피우면 안된다? 그럼 다녀올게."

"걱정 말고 다녀와. 나중에 보자."

그녀들은 둘이서 업무를 보거나 출장을 가는 경우가 꽤나 있다. 그녀들의 감시가 느슨해지는, 비교적 긴장을 풀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물론 몸에 추적장치가 달려있어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하면 곧바로 쫒아 오겠지만...
아무튼 자유시간 아닌 자유시간에 업무를 마무리하고 직원들을 퇴근시킨 뒤 거리를 걷고 있었다. 그녀들이 곁에 없는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허전함을 느끼는건, 그녀들에게 정이 붙었다는 증거일까.

"어...? 지휘관. 그린 존에는 무슨 일로 온거야?"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 오랜만이야 마키아토."

길을 걷다가 익숙한 얼굴을 마주쳤다. 그리폰 전술지휘관시절 부하였던 WA2000이라는 이름의 전술인형. 지금은 마키아토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잘 지냈어?"

"나야 뭐... 그럭저럭 잘 지냈지... 그나저나, 여기에는 몰래 들어온거야?"

"아하하... 그런 셈이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에 대해 언급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알게되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까.

"저기... 오랜만에 만났는데 차라도 한잔 하자."

"음... 그러자. 나도 오늘은 더이상 일정이 없으니까."

오랜만에 만난 직장 동료를 그냥 보낼 수 있겠는가? 그녀를 따라서 밤거리를 걷다가 분위기 좋은 건물로 들어갔는데...

"차 마시자면서 바에 온거야?"

"일 끝나고 한잔 하고 싶었다고. 자기도 좋으니까 불평 한마디 안 하고 따라왔으면서..."

"하하. 와짱과 함께 마시는 술을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으윽... 그런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예전이라면 '그런 별명으로 부르지 마'라던가 더 고압적으로 말했을 텐데. 지금은 얌전한 고양이가 다 됐네."

"그리폰 퇴사하고 10년이나 지났잖아. 그때의 나와는 다르다고."

솔직하지 못하고 세침데기 같은건 지금도 여전하지만, 10년 전에 비하면 성숙해진 숙녀가 되어있었다. 이 모습을 보니 뿌듯하면서도 아쉬운 느낌이 드는건 왜일까...

"저기... 전에 예기한거 생각해 봤어?"

"응? 어떤거?"

"까먹은 척 하지 마! 그... 내 집에서 같이 살자는거 말이야. 당신도 언제까지고 옐로우 존에 있을 수는 없잖아."

"미안. 너에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바보야...!"

눈가에 눈물이 조금 고인 그녀가 버럭 화를 내고 내 어깨를 붙잡았다.

"둘이서 살기에는 조금 좁을지 몰라도, 필요한건 다 있어. 나도 언제든지 당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오기만 해."

"마키아토..."

"10년. 당신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10년이나 지났어. 하루도 당신을 잊어버린 날이 없었어. 혹시 죽은게 아닐까 불안하고 허탈한 마음을 안고 살아오다가 겨우 이렇게 찾은거라고. 그러니까... 또 사라져 버리지 말고 곁에 있어줘."

그녀의 말은 진심일 것이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해도 거짓말을 한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그녀에게 갈 수ㄴ...

"지휘관. 이게 무슨 상황이죠?"

"위치 정보가 바로 되어있길레 뭔가 이상해서 급하게 와봤는데, 도저히 그냥 넘겨들을 수 없는 말을 들어버렸어. 설명해줘. 지휘관."

"어... 얘들아...?"

등이 서늘해지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클루카이와 에이플린이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 이곳까지 쫒아온거지?

"후우... 제 불찰이군요. 당신을 이렇게 멋대로 돌아다니게 두는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꼬리치는 년이 있었을 줄이야..."

"저기... 마키아토는 그리폰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고, 오늘은 우연히 만ㄴ..."

"헤에... 지휘관은 전 직장 동료가 같이 살자는 권유를 한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거야? 그것도 여자인데? 우리가 있는데도?"

"됐어. 이야기는 돌아가서 하자. 지휘관. 돌아가죠. 설명은 집에서 듣겠습니다."

클루카이가 나를 억지로 일으켜서 데려가려고 하던 그 때였다.

"가만히 있자하니 안되겠네. 당신들 도대체 누구야. 왜 지휘관을 데려가려고 해?"

"감히 내 지휘관에게 손을 대? 당장 그 손 놔."

"누가 들으면 이녀석 아내라도 되는줄 알겠네. 아까 위치정보 어쩌고 하는걸 보니 스토커 아니야? 그쪽이야 말로 손 떼시지!"

"이쪽은 당당하게 지휘관이랑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는걸. 지휘관을 찾아와서 같이 살자느니 뭐니 하는 그쪽이 스토커에 가깝지 않을까?"

"뭐라고...? 한 지붕 아래에서... 뭐가 어째? 지휘관. 설명해봐. 지금 저 여자가 하는 말이 사실이야?"

에이플린의 말을 들은 마키아토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나를 억지로 끌고가던 그날 그녀들의 눈빛처럼.

"어... 그게 맞긴 맞는데...

"내가 같이 살자고 했을 때는 거절하더니, 이런 두 여자랑 놀아나고 있었어? 진짜 믿을 수가 없네! 당신, 그렇게나 내가 싫었어?"

"그만. 지휘관이 우리가 동거중이라는 사실을 인정했으니 끝난거 아닌가? 그쪽은 마시던 술이나 마저 마시라고."

"웃기지 마. 정말 지휘관이 선택해서 너희들이랑 동거중이라면 저런 표정을 지을리가 없지. 지금 너희 둘이 죄인을 압송하려는 것 마냥 들이닥친 것도 이상하잖아. 지휘관. 이년들한테 협박당한거야? 역시 납치당한게 맞지?"

"마키아토. 진정좀 해."

"내 질문에 대답이나 해!"

마키아토가 쥐고있던 컵이 산산조각났고, 붉은 빛의 네그로니가 선혈처럼 튀고 테이블 위를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휘관. 사람을 화나게 하는 방법이 뭔지 알아? 첫번째는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거."

"두번째는












TMI : 마키아토는 소녀전선 2에서 지휘관에게 정말 같이 살자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