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 이만 이동하셔야 됩니다"


"싫어! 알렌이 안 가면 나도 안 갈거야!!"


마수들이 쳐들어오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이 나라의 공주인 아리스는 자신의 호위기사인 알렌의 손목을 붙잡은 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싫다고 했어, 알렌을 버리고 갈 바엔 그냥 같이 여기서 죽는 게 나아!"


"공주님!"


알렌은 아리스의 말에 크게 감동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고집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알렌이 이 나라에 남아 마수들을 상대해야 공주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아리스 또한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마차에 타는 것을 거부했다.


아리스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는 시녀들은 진땀을 흘리며 그녀를 설득하려고 하지만, 그녀의 완강한 고집은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알렌은 마음이 아프더라도 특단의 조치를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천천히 아리스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


"알렌, 아무리 너라도 해도 절대 안 들을거야."


"공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뭐?"


알렌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방금까지 완강한 자세를 취했던 공주의 눈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시녀들의 눈과 몇몇 기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러나, 알렌은 그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주제 넘는 생각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리스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러니, 꼭 살아 남아주시길 주제 넘지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리스가 힘없이 제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어.... 그딴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죄송합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아리스의 대답에 알렌은 조용히 대답했다. 알렌은 자신의 마음이 그녀의 입지를 어떻게 할 지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풀릴 길 없이 쌓여만 갔던 사랑은 어느새 아리스가 눈치챌 정도에 다다랐다.


"싫어...싫다고... 날 사랑해주는 건 너밖에 없는데 너가 여기서 죽으면 내가 살아봤자 무슨 의미야..."


"..."


알렌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끼고 있는 아리스의 부들거리는 손을 최대한 부드럽게 잡았다.


"공주님."


"아리스, 아리스라고 불러줘."


"예, 알겠습니다. 아리스님. 저는 당신이 꼭 살아남길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 여기에 꼭 남아야만 합니다. 이미 아리스님의 생각을 알고 있다 해도 이 판단은 바꾸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이 무례한 기사의 죄를 원망하여 꼭 살아주시길 바랍니다."


"알렌.. 사실은 나도..."


아리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알렌이 근처에 있던 마법사에게 아리스가 잠들도록 시켰기 때문이다.


알렌이 목각인형 처럼 푹 쓰러지는 아리스를 부축하여 조심스럽게 마차 안으로 옮겼다.


"그럼, 아리스님을 부탁하네."


"예."


그렇게 그 자리에는 알렌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저 멀리 말과 함께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 마차를 멍하니 바라보던 알렌은 오랜 시간의 역사가 깃들어있는 궁전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묵묵히 자신에게 달려오는 마수들에게 허릿춤에 있는 검을 뽑아들며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