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아는 말이 유난히 적었다

거울을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일까 친구가 없기 때문일까

자신이 언제나 사연 많아보이는 표정을 짓고 다니는 것을

그 누구도 그녀에게 말해준 적이 없었던 듯 했다


"버밀리온, 장미를 보러가요 우리!"


그런 그녀도 장미를 보러 갈때는 해맑았다

장미를 본다고 하기에는 좀 어색한 부분이 있지만


"딱 한송이만 꺾어서 줄래요?"


달달하고 가벼운 체취가 나는 율리아는

언제나 내게 단 한 송이의 장미만을 요구했다

작은 나이프로 줄기의 가시를 모두 제거한 한 송이의 장미


"역사수업은 어찌 잘 이해 되요?"


"난 계속해서 수인의 역사를 알려달라고 해왔는데."


모든게 완벽한 이 아가씨에게 하나의 단점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 공포스러운 수인에 대한 집착을 고를 것이다

율리아가 알고 싶어하는 내용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너무 잘 알고있다

내가 연구소에서 연구하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니 모를리 없다.


"...나는 타인의 인생을 망치는 일에 관심 없어요."


일상이 된 거절멘트에 율리아는 언제나 그랬듯 째려보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붙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기서 조금 새롭게 더 나아가서


"그때 당신 부하 중에서 몇 명이 죽었더라?"


사고회로가 정지된다

부정하고 싶어 잊어왔던 싸늘한 진실

발끝부터 순수한 분노가 끓어오른다


-휙


그저 충동적으로 몸이 움직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보이는 모습은

두 손에 밀쳐져 장미밭으로 넘어지고 있는 율리아

율리아가 상처라도 입었다간 바로 해고될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뭐하고 있는건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율리아를 감싸려 장미밭으로 몸을 던졌다


뺨을 스치는 장미 가시

율리아의 등이 손에 닿고 팔에 감긴다

향긋한 장미향과 부드러운 피부 그리고 따가운 가시

시나몬빛 긴 머리카락 사이로 본 여름의 하늘은 푸른빛이었다.


"아저씨 늑대 맞구나. 거칠고 부드러운 사람이네."


몸을 일으켜 세우자 내 옷 곳곳에 난 구멍이 눈에 들어온다

불행중 다행은 율리아는 다친 곳은 물론이고 오히려 그런 짓을 한 나를

기대했던 모습이라고 하면서 웃으며 볼을 붉히고 있었다


"아저씨에겐 내가 말할게요. 내가 장난 좀 쳤다고."


"그러면 아가씨가 혼나잖아요."


"그럴 가치가 있는 순간이었어요.

그러니까 아저씨는 그냥 조용히 가서 약이나 바르세요.

알겠죠? 약속해줘요!"


하얗고 고운 손가락을 내게 내미는 율리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번만입니다."


저택의 메이드인 크리스틴이 내 모습을 보고 한 말은

내 예상대로 헤져버린 옷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 베인 상처가 생긴 내 몸을 보고 걱정하는 한마디였다

매번 느끼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여러모로 어색하고 이상하다


"이미 헤진 옷인데 조금 찢을게요.

약 바를려면 그래야 편하니까요."


크리스틴의 치료는 조금 따끔하면서도 안심되는 감각이었다

내 볼과 등을 유심히 보며 베인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정성은

마치 팔레트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열정과 닮아있었다.


"어쩌다가 메이드가 된거에요?"


"어려서부터 동생을 돌보는 일이 좋았어요.

우연히 율리아 아가씨와 인연이 생겨서 이곳에 고용된지 한 3년은 됐죠.

자 등은 끝났고 이제 다리 한번 볼께요."


크리스틴은 바지에 난 헤진 구멍을 벌리며 말 없이 상처를 치료했다.

왼쪽 종아리에 난 큼지막한 화상을 보기 전까지는


"...이런 화상은 뭘 해야 입는거에요?"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10년 전 일이고."


"흉이 심하게 졌네... 습한 곳에선 따가울건데 괜찮은거 맞아요?"


"10년동안 그랬어요. 익숙한 고통이니까."


질 괜찮은 식사와 이어지는 수업시간

낮의 일이 떠올라 잠 못드는 밤이 찾아왔다


"늑대..."


이럴땐 난 곧장 옛날 일을 떠올린다

더럽고 차가운 바닥에서 미래를 그리던 20대 초반의 패기를 떠올린다

머리는 차갑게 식히고 총구는 뜨겁게 데우던 열정이 있던 나 자신을

그런데 오늘따라서 나를 처음으로 친절히 대해줬던 인간이 떠오르는 듯 하다.


고아원에서도 유일한 수인으로 외면받았던 내게 주어진건

인간 아이들이 사용하고 버렸던 학습지 뭉치들이 전부였다

그저 배움이 즐거워서 밥먹는 시간까지 버려가며 한 글자라도 더 외웠다

우연히 박사님에게 관심받고 처음으로 세상에 나왔던 나이 15살


'나는 수인도 문명을 이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도 지성 생명체고 충분히 국가를 세울 능력이 있어.

너가 그곳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떠올랐고,

이 생각을 연구를 통해 확실하게 굳혀보려 한단다.'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모종의 이유로 박사님의 학위가 취소되고

연구소가 해산되어 문을 닫았던 과거가 떠오른다

그 모든게 제국에서 지시한 거라는 사실을 알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박사님, 세상 모든 곳에서 제명당해도 제겐 당신이 제 교수님이고 박사님입니다."


헤어질 줄 알았다면 그때 말해볼걸 후회하는 지금

10년이 너무 길었다. 이제는 찾아가기에도 너무 늦었다

그저 후회하며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야지


"율리아?"


"아저씨 안자네..."


자기 나름대로 발소리를 죽이고 몰래 다가왔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수인의 감각은 마치 짐승의 그것과 같기에 속일 수 없는 것

어린 소녀의 모험이지만 어울려줄 생각은 없다


"가서 자시죠, 어두운데 뭐하고 있는거에요."


"내게 하늘은 낮에도 어두운걸. 밤에도 밝고."


"눈이 안보인다는 말을 문학적으로 한다고 해도 안통합니다."


"칫, 꼰대 아저씨."


"방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에 저택 복도는 모노크롬의 색감으로 반짝였다

나는 율리아의 손을 잡고 계단을 향해서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아저씨 울었어?"


"들었습니까?"


"나 귀 좋은거 알잖아.

눈을 잃고 귀와 코를 얻었거든 신님에게."


"그냥, 옛날생각에 한방울 흘렸어요.

아가씨가 알아야 할 부분은 아니거니와, 지극히 개인적인 겁니다."


율리아가 내 손을 끌어당겼다.

놀라서 뒤로 돌자 창문 사이 어두운 곳에 선 율리아의 윤곽선만이 보였다

상큼하게 웃고서는 장난스럽게 한마디 던지는 율리아


"나는 알고싶은데, 아저씨를."


정말 골때리는 한마디

난 말문이 막힌 나머지 그냥 하품 한번으로 답하고선 입을 닫았다.


"벌써 방문 앞이네.

아저씨, 굿나잇 키스 한번 해줘요."


"나보다 20살은 어린 애에게 욕정하는 사람 아닙니다.

15살이면 어른까지 겨우 3년 남짓인데 좀 어른답게 나오시죠."


"참... 말 하나는 사납게 한단 말이야.

집사에게 낮에 있던 사건의 진실을 말한다면..?"


인질이 잡혀버렸다.

그래, 부모님이 없으니 누구에게 의존하려는 마음은 굴뚝같겠지.


-쪽


"이번만입니다."


"잘자 아저씨.

나의 왕자님 버밀리온."


아주 작은 소리로 속닥거리는 율리아를 뒤로하고

나는 한결 편안한 마음이 되어 잠을 자러 방으로 들어갔다.




연참 비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