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번호 9813번 버밀리온 스탠던, 출소일이다."


10년만에 만난 햇빛은 마치 깨진 유리처럼 따갑고 아름다웠다

배고픈 지식인으로 들어가 배고픈 전과자로 나오는 칙칙한 자유의 순간

죄목은 반역, 강간이나 살인보다 나을진 몰라도 어디서 일하기도 힘든 중범죄이니,

그 오랜 기간 썩고도 산더미로 남은 앞으로 살 날이 제일 문제였다


"기다려주는 사람은 있나?"


간수가 약간의 동정을 품은듯 상냥하게 물어보았다


"기다릴 일 없도록 했습니다.

지금쯤이면... 신대륙에서 어엿한 현지인이 되었겠네요."


"자네도 따라서 갈려고?"


"아니요. 할 일이 많아서요."


간수는 약간의 비웃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반역죄로 다시 들어오면 사형을 면하긴 힘들거야.

무슨 마음인지는 이해한다만, 수인들의 국가같은건...

앞으로 100년 안에는 허황된 꿈같은 소리이기도 하고.

7년동안 함께 만나서 즐거웠네. 앞으론 착하게 살고."


10년만에 다시 만난 도시의 거리는 변함없이 매연이 가득하고 활기찼다

불어오는 빌딩풍과 돌아가는 무빙워크, 뛰어가는 노동자들

이전과는 다르게, 10년의 공백이 나만 동떨어진 기분이 들게 한다


잠시 모든걸 잊고 가만히 도시를 보고있던 내 앞에 검은 자동차 한대가 멈춰섰다

짙은 검은색으로 선팅된 뒷유리와 비싼 자동차 브랜드의 로고

용건이 무엇인지 알수없는 자동차의 창문이 천천히 내려왔다


"스탠던씨 맞습니까?"


"무슨 일이죠?"


"제가 모시는 집안에서 당신을 고용하겠다 하십니다.

중범죄자라 일 구하기 힘들건데, 가정 교사로 일하는건 어떤가요?"


솔깃한 제안이다. 아마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 분명할 정도로

나를 배신했던 그자식들이 이렇게 비싼 차를 사용할 리도 없고,

무엇보다도 운전기사가 수인인걸 보면 국가기관의 납치시도도 아닐 것이다


"좋습니다. 안내하시죠."


어쩌다 얻어탄 자동차의 내부는 깔끔하고 정돈되어 있었다

작고 좁은 공간이지만 마치 아늑한 가정집의 거실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동차가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그도 그런것이 내가 타본 자동차는 싸디 싼 구닥다리나 죄수 수송차가 전부였으니


10년동안 훌쩍 늘어나버린 신호등과 자동차들로 자꾸 막히는 진로 속에서

차 창문 너머로 본 거리는 칙칙하고 지루하게 보였다

맨눈으로 보던 세상과는 다르게, 어둡고 생기없게


"선팅을 이렇게 진하게 하면 뭐가 좋은가?"


"진하게 하는게 차 내부도 안보이고 좋아요.

그냥 좀 남아도는 양반들은 늘 자기 사생활 신경쓰더라고

돈 많은게 떳떳하지 않은건지 숨길게 많은건지"


어두운 색조의 풍경을 바라보며 포장도로가 끝이나고 비포장 도로가 시작되며

도로의 건물은 사라지고 나무와 밭이 나올 즈음에

저 앞에서 아름다운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시죠."


하얀 담벽에 검은 창살

검은 쇠창살문을 열자 장미로 가득한 정원이 등장했다


"아, 만지려고 하지 마세요. 찔릴 수도 있습니다."


"한번 찔려보셨나요?"


"저는 아니고 아가씨가..."


큼지막한 대문을 열자 등장하는 저택의 내부는

넓직하며 적당히 치장된 절제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우선 먼저 씻으시죠, 아가씨는 냄새에 예민하셔서

방금 감옥에서 나온 악취나는 사람을 보고 교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집사는 나를 1층 복도의 저 끝으로 안내했다

직원을 위해 마련된듯한 아늑한 욕실

체크무늬 타일과 덩그러니 놓인 샤워기가 옥중에서 봤던 것과 닮아있었다


'신세는 나아졌네.'


어린 여자아이가 내 앞에 서더니 내게 이것저것 알려주기 시작했다

뭐 분명 이 집에서 어떻게 목욕하는지 예절같은 거겠지

부자들은 비효율에서 오는 세련됨을 사랑하니까


"이게 샴푸고 머리에 쓰는거고요

이건 바디워시고 몸에다가 쓰는거고요

여기 목욕 타올로 거품 내서 쓰시면 됩니다."


"비누는 어딨나요?"


"얘네가 비누 역할이에요."


돈 많은 사람들은 머리감는 비누 따로

몸 닦는 비누 따로 다르게 쓰나보다

나야 뭐 수인이니 뭐가 다른건지 알리가 없으니


설명대로 유리병에서 따라내보니 향유처럼 끈적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머리에 바르니 알아서 거품이 나오는 신기한 향유


'눈 따가워.'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은 펄펄 끓는듯한 온수였다


"아악!"


내가 아는 샤워기는 얼어붙지 않은게 신기한 정도의

차가운 냉수만을 뿜어야 할 꼴보기 싫은 것인데

이곳에 오고 고작 몇초만에 모든 상식이 부정당하는 기분이 든다


"괜찮아요?"


"뜨거워서 놀랐어요."


"거기 수도꼭지로 온도 조절이 가능해요."


목욕을 마치고 건내준 옷을 입자

그제서야 샤람다운 모습의 내가 거울에 비친다

딱히 어색할 것도 없는 것이, 감옥에서의 10년동안 변한 것도 있고

이제 내 꼬리표 같았던 도시의 늑대란 별명도 옛말이 되었으니까


계단을 올라 복도 저 끝에 있는 문을 열자

어두우면서 넓고 향긋한 공간이 나타났다.


"아가씨, 불은 키고 있으셔야죠."


"꺼져있었어..? 미안."


스위치를 켰지만 여전히 어두운 방

아마 샹들리에의 전구가 다 타버린 모양이었다.

어둠속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내 팔뚝 정도 닿는 키를 가진

눈이 먼듯한 이 소녀가 내가 교사로써 가르칠 아이인듯 했다.


"하아... 버클리씨 불러올게요."


집사가 방을 나가자 소녀는 기다린듯이 일어났다

소리 없이 조용히 문을 닫고는 내게 다가오는 소녀

은은한 향기로 가득찬 어두운 방

그리고 그녀와 나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고 있을때

소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도시의 늑대 맞죠..?"


"...이름을 먼저 물어보는게 예의 아니겠"


말을 하기 무섭게 꼬마가 내 손을 잡더니 이어서 말했다.


"버밀리온 스탠던, 애니멀리아 독립전선 전 2인자이자 유격대 총사령관.

어릴적엔 연구소에서 그린버그 박사의 조수로 일하며 역사학 논문 2개에 이름을 올렸죠.

크리스마스 봉기에서 실베니스시 시청을 점거하고 독립을 선포했고,

제국 정예군에게 공격받아 유격전을 이어가다가 고아원 앞에서 체포되었죠."


공포감이 몰려든다.

그렇게 알아내기 어려운 정보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열심히 찾아야할 이유도 짐작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잣집의 눈먼 아가씨가


"원하는게 뭐지, 스토커 아가씨?"


소녀는 상냥하고 가벼운 웃음소리를 내더니 내게 말했다.


"자유요. 그냥... 당신처럼 자유롭게 지내고 싶었어요.

난 나를 위해 심어진 장미밭조차 나 혼자 가지 못하는 몸인걸요."


"그게 다라고?"


소녀는 내 손을 더 세게 쥐더니 내게 답했다


"수인이면 감각 뛰어나지 않아요?

발소리가 들리는거 같은데 나머지는 이따가 얘기하죠."


복도쪽에서 들려오는 2명의 발소리

전기공과 집사가 돌아온 듯 하다

소녀는 아무일도 없던것처럼 위장하려는 것인지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문이 다시 살짝 열리고 다시 들어오는 한줄기 햇빛

집사가 문을 활짝 열고선 내게 말했다.


"어둠속에서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분이 바로 선생께서 가르치실 아이입니다.

인사는 했습니까 아가씨?"


"안녕하세요, 율리아에요."


전기공이 사다리를 타고 샹들리에를 고치는 동안

나와 율리아 사이에서는 알수 없는 기류가 말 없이 흘러갔다.




소설을 쓰는건 언제나 재밌는 일이야

스토리가 막히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