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 글 - https://arca.live/b/yandere/6760027?target=all&keyword=%EB%B9%84%EC%A0%95%EC%83%81&p=2
사랑은 저무는 해와 같았다.
사랑은 언덕 뒤편으로 꺼져가고 있었다. 일몰의 지평선은 주황빛 휘장을 두른다. 물러가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고 그 마지막이 미련을 줘서 다음의 일출을 기다린다. 그를 사랑한다. 하지만 이루어질수 없는 사랑인 것을 안다. 그를 생각하고, 연모하고, 오래도록 그려온 나날이었다.
나의 사랑은 항상 어둠이 지고 난뒤에 시작되었다.
사실 당신은 아주 배려심있고 자신을 희생할줄 아는 사람이다. 당신은 윤기가 나는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졌다. 투명한 호수처럼 맑고 순수한 미소를 지을줄 안다. 싱그러운 숲의 녹음처럼 푸르고 넓은 마음을 가졌다. 당신을 볼떄마다 한여름밤의 빗속을 우산을 쓴채 걷는것같다. 후텁지근하고 답답한 가슴이 씻겨내려간다.
그런 당신을 보면서 가슴이 조여들고 숨이 막히는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당신은 스스로가 얼마나 아름답고 치명적인 사람인지 모른다. 그걸 모르는게 얼마나 다행인지, 또 얼마나 매력적인지 혼자서 기뻐하고 불안스러웠다.
당신은 세상에서 한명뿐인 사람. 그래서 더 없이 소중하고, 인정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아무도 그걸 모르는 것이 슬프고, 한편으로는 고맙기만 하다. 나 같은 사람은 당신에게는 너무 부족하니까. 당신이 과분하고 또 분에 겨워서 곁에 다가서는것조차 망설일 정도니까. 그대는 모를거다. 내가 옆에 서있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하고 머리가 붕 뜨는지. 남 몰래 당신을 보다가 언뜻 시선이 마주치면 숨을 죽인채 고개를 돌리는 것을.
당신이 알아줬으면 한다. 내 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나는 그럴수가 없다. 나는 밝은곳에 있을수 없는 사람이니까. 당신처럼 아름다운 빛을 뿜어낼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항상 저물어가는 당신을 바라본다. 저물어가는 해처럼, 아래로 꺼져가는 당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오면 항상 아쉬워서 다음 일출을 기다린다.
사위가 어둑해지면 낮에 있었던 찬란한 햇볕을 떠올린다. 밤 하늘에는 달이 떠있다. 나는 당신의 모든 순간을 지켜보아도 함께 할 수는 없는 사람이다. 내 마음은 어둡고 습한곳에서 자란다. 그래서인지 당신을 동경했던 것 같다.
나는 당신이 낮에 보여준 그 빛을 그리워한다. 당신이 보여준 그 빛을 그리워하여 밤하늘의 달을 쳐다본다. 달은 예리한 칼날처럼 푸르고 섬뜩한 빛을 보여준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달을 향해 걷는다. 어쩐지 그대를 향한다는 마음으로, 낮에 쫓아가지 못한 그대를 만나러 간다는 심정으로 정처없이 걷는다. 나도 그것이 가짜라는걸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의 마음은 이곳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밝은 빛으로 나설 용기가 없으니까.
나는 어느새 아주 멀리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달빛을 한껏 머금고 당신을 떠올린다. 잠시동안은 행복하고, 그대와 있는 것 같지만 결국 낮에 본 그대가 떠올라서 항상 아쉬워한다. 달빛을 받다가 날이 밝아지면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그리고 멀리서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을 본다. 나는 어느샌가 한밤중에 떠오를 달을 생각한다. 그대가 가고나면 달을 향해 걷고 기뻐하는 내 모습을 떠올린다. 그대에게 다가갈 용기는 없이 달만 쫓아가는 내가 슬프고 한심하다. 하지만 그만둘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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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의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 애정결핍입니다. 포괄적으로 따지면 그런거고요, 좀 더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면 사랑을 갈구하는 상태라는겁니다. ”
사랑을 갈구한다라. 아이의 두 부모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여기서 나올줄은 예상도 못했다. 사랑은 그것보다 훨씬 온화하고 배려심이 넘치는 말 아니였던가 ? 누군가에게 모진말과 폭행을 하고, 구속하기를 좋아하는 딸 아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의사는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뒤이어 말했다.
“ 그러니까. 환우분께서 하시는 행동은 사실 남한테 관심을 받고, 떠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떄문에 생기는겁니다. 상대방을 너무 좋아하고 같이 있고 싶은데, 만약 조금이라도 밀어내는 것 같다 싶으면 억지로라도 붙잡으려고 하는거죠 ”
“ 그러니까. 제 딸이 상대를 너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그런건가요 ? ”
아이의 아빠가 말했다.
“ 좋아서 괴롭힌다기 보다는….너무 좋아해서 오히려 두려워한다는게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상대가 언젠가는 떠나거나 나를 싫어할거라는걸 가슴속에 품고 있는거에요. 그러다 만약 그런 징후가 보이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합니다. 떄리고, 욕하고, 짜증을 막 부리죠. 그건 사실 나한테 관심을 달라는 신호입니다. 근데 이러면 상대방은 더 싫어하죠. 결국에는 떠납니다. 그러면 그걸 견딜수가 없어서 어떻게든 구속하려고 드는거에요. 혹시 환우분과 마찰이 생기는 아이들이 원래는 전부 친한사이 아니였나요 ? ”
듣고보니 정말로 그랬다. 아이는 처음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웃고 친절하게 대해왔다. 문제가 생기는건 언제나 구면이었다.
아이의 엄마는 얼굴을 감싼채 몸을 숙였다. 내 딸이 저렇게 식탐을 부리듯 관심과 애정을 원하고 있었다니. 지금까지 한번도 몰라줬던게 가슴이 아팠다. 어쩐지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아 원망스럽기만 하다.
“ 너무 자책하지는 마세요. 이 나이대의 아이들한테는 다들 이런 성향이 있습니다. 정도가 조금 다를뿐이에요. ”
“ 나아질수는 있는겁니까 ? ”
“ 물론 가능합니다. 심리적인 요인은 충분히 해결할수 있어요. 아직 나이도 어리시고… ”
“ 방금 뭐라고요 ? ”
“ 네 ? ”
“ 방금 뭐라하셨잖습니까. 심리적인 요인 뭐라고… ”
“ 아, 그것말이죠 ”
의사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제 말은, 가정환경이나 주변관계에 변화를 주면 훨씬 나아질거라는 말입니다. 어쩄든 이것도 대인관계능력을 키우는게 중요하니까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는 이별이 당연한거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면 나이가 들면서 사라질겁니다. 이것도 환우분들마자 편차가 있기는한데 확실한건 전보다는 많이 나아질거에요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별. 새로운 관계. 전부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아니. 평생을 살아온 사람도 그것의 정답을 알지 못한다. 아이의 아빠는 다른것에 관심이 있었다. 방금 전 들은 심리적인 요인…환우마다의 편차…아이의 아빠는 말했다.
“ 혹시나해서 말입니다. ”
“ 말씀하세요 ”
“ 딸 아이가 저대로 나아지지 않을수도 있습니까 ? ”
아이의 엄마는 남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불길한 소리를 왜 하냐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의사는 입술을 모으며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 아주 가끔, 선천적인 장애가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주. 정말 극소수에요 ”
“ 그럼 제 딸아이는 어느정도 입니까 ? ”
의사는 다시 말을 아꼈다.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가 폭행과 협박, 괴롭힘에 가까울정도로 남을 학대하고 있었다. 사실 대답은 정해진 것이다.
“ 같은 환우가 100명이라고 치면 정수아 환우분은 그 중 심각한 한 두명에 들어간다고 할수있어요. 어쩄든 치료를 해봐야합니다. ”
아이의 아버지는 말없이 천장을 보았다. 아내는 그 말을 듣고는 다시 고개를 파묻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 죄송합니다. ”
의사가 대답했다. 모두들 아무말이 없었다. 그때 아이는 복도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발을 구르고 있었다. 아이는 혼자였고 사라진 부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아득했다. 아이는 혼자 남은게 서러워 방을 나온 부모에게 울면서 달려들었다. 두 부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집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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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부모는 작은것부터 시작했다. 먼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정해주었다. 먹고난 식기를 치우거나 방 정리를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이가 혼자서 해낼 즈음에는 함께 물러서서 지켜보았다. 일을 마치면 칭찬을 하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아이는 자기 할 일을 알아서 찾았다. 두 부모는 함께 지켜보다가 어느순간 한 사람이 슬쩍 다른곳으로 사라졌다. 아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몇 번 칭얼거리며 안겼지만 바뀌는건 없었다. 아이가 불안해하면서도 할 일을 마치면 다시 돌아와 더 큰 보상을 안겨주었다. 자립심을 키워주려는 의도였다.
훈육은 효과가 있었다. 다시 몇 달이 지나자 아이는 부모가 없이도 그런대로 평정을 유지할수있었다. 아이를 지탱하는건 눈 앞에 있는 숙제들이었다. 치워야하는것들, 풀어야하는것들, 보고 만져야하는것들에 집중하고 있으면 어느샌가 엄마와 아빠가 돌아와있었다. 두 사람은 아이가 얌전해지는걸 보고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쩌면 고칠수도 있을 것이다. 집 안에서는 그랬다. 문제는 밖에서 터져나왔다.
아이는 부모가 없는 밖에서 특히 불안해했다. 바깥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처럼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하염없이 기다리도록 내버려두었다. 아이는 또래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벗어나거나 밀어내는 기색을 보이면 억지로 잡아두었다. 마음에 드는 아이에게는 정도가 심해졌다. 조금 뒤에는 교사에게조차 집착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부모는 심란한 마음으로 그것을 전해들었다. 처음부터 금방 끝날거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닫혀있는 아이에게 세상을 열어준다는 마음으로 굳은 각오를 했다.
그렇게 몇 달, 몇 년이 지나고 아이는 소녀로 변했다. 소녀는 점차 세상을 알아갔다. 세상과 그곳을 살아가는 인간은 원래부터 경계를 두고 있어서,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을 알았다. 사람간의 거리는 각자 다르고 시간이 지나면 가깝고 멀어진다는것도 깨우쳤다. 망망대해에서 선박들을 줄로 묶어놓은것과 같았다. 줄의 간격이 멀면 파도나 폭풍우가 칠 때 끊어져 뿔뿔이 흩어졌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가 부딪혀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소녀는 그렇게 홀로 지내는법을 알았다. 하지만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속은 항상 공허하고 외로웠다. 이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는 역으로 거리를 둬야하는 것이 슬프고 받아들일수 없었다. 소녀는 배운대로 했다. 외로울때는 자신이 해야할일에 집중했다. 공부를 했고, 어머니를 대신해 빨래와 밥을 지었고, 가끔씩 아르바이트를 했다. 본래 부지런한것보다는 외로움을 견딜수없어서 그렇게 했다. 소녀는 남들이 보기에 과묵하고 차가운 인상으로 변했다. 스스로 의도한게 아니였다. 만약 누군가와 가까워지면 결국 쌓여버린 한과 외로움을 그자에게 덮어씌울것만 같았다. 그게 두려워서 항상 타인과의 안전거리를 두었다.
부모는 언제나 소녀를 이해했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버틸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소녀는 조금씩 타인을 만날 수 있었다. 아직 두려웠지만 마음을 열고 치유를 하는 과정이었다. 소녀가 이렇게 버틸수 있었던건 부모의 덕이다.
만약 이대로였다면 문제는 없었을거다.
소녀는 가족과 동시에 무너졌다. 언젠가부터 부모는 항상 싸웠다. 몇 번의 고성이 오가고, 결국 파국을 맞았다. 소녀의 엄마는 끝끝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으나 소녀는 짐작했다. 더 이상 철 없던 꼬마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는 추악했다. 겉과 속이 다르고 앞에서는 웃으며 뒤로는 비정하고 욕구에 충실했다. 사실 그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성과 만나고있었다. 그건 소녀가 어렸을떄부터 있던 일이다. 싸우고 난 뒤에는 며칠씩 늦게 돌아왔다. 처음 맡는 향수냄새가 났다. 엄마는 아버지의 휴대전화에 있는 기록을 보고 남 몰래 방으로 들어가 울었다. 소녀는 부부의 관계가 망가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소녀가 아는 두 분은 무덤까지 함께 들어갈 사이였다. 그래서 버팀목이었다. 세상에는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 관계가 있을거라고 믿었다.
아버지의 배신을 알자 자신이 알던 사실이 무너졌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을 때, 힘들었던 자신을 돌봐주었을 때, 그 모든순간에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거다.
소녀는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걸 몰랐을수 있냐고,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는데 모르는게 말이나 되는거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울음을 참고 먼곳을 보았다. 그떄 느꼈다. 사실 엄마도 다 알고있었던거다.
다 알면서도 숨겼던거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 둘로 나뉘었다. 그들이 함께 살고, 좋은 부모를 연기했던건 어디까지나 소녀를 위해서였다. 불쌍한 딸 아이를 위해서, 저 아이가 자라는것만이라도 볼수 있도록, 가짜 엄마와 가짜 아빠, 거짓된 가족이 모여 연극을 하고 있었던거다.
가족이 거짓된 것을 알자 그들과 있었던 시간도 덩달아 거짓말이 되었다. 소녀는 일생을 가족에게 의지하며 살았다. 지금까지의 인생이 헛된일로 다가왔다. 그럼 내가 배운것들은 뭐지 ? 남을 위하는 법, 남을 받아들이는 법, 남을 떠나보내는 법, 남 없이도 혼자 살아가는법, 남을 사랑하는법. 모든게 결국 거짓속에서 피어났다는 말인가 ? 소녀는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배운것들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어찌보면 인생의 진리였다. 그런데 그것들이 전부 다 추악한 거짓속에서 태어난거라니. 쓰레기들 사이에서 꽃이 핀 것이다. 꽃이 향기롭고 아름다워도 깔려있는 쓰레기는 쓰레기였다. 악취가 올라오는 쓰레기다. 하지만 우습지 않은가. 오히려 그 꽃이 쓰레기에서 피어났기에 돋보이고 아름다워보이지 않는가 ? 소녀는 그 피어난 꽃을 품은채 살았었다.
소녀는 무너졌다. 쓰레기는 더러웠고 피어난 꽃은 아름다워서 무너졌다. 둘 사이의 차이가 클수록 혼란과 슬픔, 분노가 커졌다. 지금까지 그들이 한 말을 믿었는데, 그 말이 진실이라 믿고 직접 확인까지 했는데. 결국 자신들의 말조차 지키지 않았다. 그들은 소녀의 곁을 떠난 것이다.
소녀는 전보다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다정하던 두 사람조차 결국 배신을 하는구나. 내가 가장 믿었던 사람들도 나를 속일수 있는거구나. 가족이라는 존재도 무너지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소녀는 우울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에는 더 절실하게 다가왔다.
두 사람에게 배운것은 사라졌다. 소녀는 더 이상 공부를 하지도, 빨래와 밥을 짓지도, 아르바이트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울고, 외로움을 느끼고, 배신감에 몸서리를 쳤다. 소녀는 잠을 못이뤄 눈가가 거뭇해지고, 긴머리가 푸석하게 갈라졌다. 누군가를 만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했다가는 분명 이 사무치는 외로움과 슬픔이 그 사람을 휘몰아칠 것이다. 스스로를 아는자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 누군가를 만나면 그 사람은 파멸할 것이다. 내가 갈구하는 사랑과 애정을 견딜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떠나간다면 그떄는 자신도 파멸할것이었다.
소녀는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오랜시간이 지나고 도저히 견딜수 없을떄야 얼굴을 비췄다. 소녀는 학교에 가서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 누구도 말을 걸지 못하게. 그 누구도 다가오지 않도록. 학생들은 소녀의 음침한 기운을 알고는 알아서 피해다녔다. 다행이었다. 차라리 그들이 나를 피하는 것이 낫다.
그런데 거기서 그 남자를 만났다. 그는 학생들이 말리는 와중에도 소녀에게 다가갔다. 단순히 떨어진 지갑을 주워준 것이 다였다. 남자는 물건을 건네주면서 여름에 긴 머리를 하면 답답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단발이 어울릴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들이 부르자 인사를 하고 멀어졌다.
소녀는 그가 주워준 지갑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이래서는 안돼는데. 왜 말을 건거야. 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거야.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며 그대로 서 있었다. 마음을 억눌렀다. 간신히 참아내고 교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얄궃게도 그 날 자리를 바꾸면서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잘 부탁한다며 웃었다. 운동을 좋아해서 체격이 다부지고 몸에 열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소녀는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건 그의 열기가 전해져서일까 나 스스로 열을 내는것일까.
어쩌면 긴 머리 때문에 그런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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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아무도 없는 교실에 들어갔다. 주위를 살펴보고는 그의 자리로 가서 가방을 뒤졌다.
“ 있구나…. ”
가방에서 헝클어진 체육복 상의를 꺼냈다. 다시 주변을 보고는 가방을 닫는다. 창가쪽으로 가서 쪼그려 앉았다. 조금 망설이다가 옷을 향해 코를 박는다.
냄새가 진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이상하게 온몸이 저릿했다. 혹시 흘러서 묻지는 않을까 침을 삼켰다. 다시 숨을 쉰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사진첩에 들어갔다. 단체사진이나 메신져에 올라온 그의 사진을 캡쳐해둔 것이 있었다. 눈으로는 그의 얼굴을 보고 코로 냄새를 맡았다. 몇분만 지났는데도 머리가 어지럽고 몸이 뜨거워진다.
자연스럽게 손이 아래로 가려고 했다. 그래도 학교에서는 아닌 것 같아 간신히 참아냈다. 요새는 이상하게 성욕이 강해진 것 같다. 소녀는 몇 번씩 만지려는 충동을 참아냈다. 소녀는 위험하다는걸 알면서도 냄새 맡기를 멈추지 않았다. 인내와 충동을 수차례 오고간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이런 순간이 지금껏 몇차례나 있었던가. 스스로가 한심하고 나약했다.
“ 병신….등신새끼….지금 뭐하는거야 나… ”
소녀는 훌쩍거렸다. 이러면 안된다는걸 알면서도 계속하는게 고통스러웠다. 특히나 성적인 욕구가 들때는 자괴감이 심했다.
소녀는 몰랐으나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 나이가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이 여성임을 자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함께 관계를 맺고싶은건 사실이다. 하지만 소녀는 그것을 외면했다. 객관적으로 봐도 소름이 끼치고 무서웠기 떄문이다. 생각은 부정했으나 몸은 스스로 반응했다.
소녀는 울면서도 냄새를 맡았다. 자괴감이 들어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수업종소리가 울렸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 가방에 체육복을 쑤셔넣었다. 잠시후에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왔다.
저중에 소녀가 사랑하는 남성이 있다. 그는 손 부채를 부치며 자리로 왔다.
“ 수아 너, 오늘도 쉬었구나 ”
“ 아..응.. ”
남성은 의자에 앉았다. 땀이 맺힌 가슴 앞섬이 야하게 보였다.
“ 맨날 체육수업떄만 빠지더라. 어디 아프다고 했었나 ? ”
“ 그냥 몸이 안좋아서 그래 ”
소녀는 말을 흐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뭔가. 말을 걸어보고 싶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띄엄띄엄 입을 열어본다.
“ 그게…한일..아.. ”
“ 엉 ? ”
“ 너가 참 부러워…밖에도 마음대로 나가고..나..는…그렇게 못…하는데 ”
남성은 잠깐 대답이 없다가 웃으며 말했다.
“ 뭐야, 그런게 부러운거야 ? ”
그는 잠깐 웃었다. 소녀는 자신이 말을 잘못했나 불안해졌다.
“ 나는 몸 쓰는거 말고는 잘 하는거 없어. 너는 대신 공부 잘하잖아. 오히려 너가 더 부러운데 ”
아니야. 나 같은것보다 너가 훨씬 더 멋있고 좋은 사람이야. 소녀는 속으로 대답했다.
“ 머리가 이렇게 치렁치렁하니까 그렇지. 나라도 더워서 쓰러지겠다. ”
남성이 소녀의 머리를 살짝 건들였다. 소녀는 몸을 움찔했다.
“ 아 ”
잠깐뒤에 남성이 멋쩍은 듯 말했다.
“ 미안 ”
“ 아니…야 괜찮아.. ”
남성은 개념쩍은 듯 입을 삐쭉 내밀고 생각했다. 방금 전 실례를 범한 것 떄문일지도 모른다.
“ 너는 단발이 어울려 ”
“ 응 ? ”
“ 그 말 하려고 그런거였어. 함부로 만지려한건 미안해. 근데 사실 너는 그 머리보다는 확실히 단발이 잘 어울리거든. 너가 긴 머리를 하고 있으면 조금 아깝다고 해야하나 ”
무슨말을 하는거야 ? 소녀는 남성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난데없는 칭찬에 머리가 핑핑 돌고 중심을 잡기 어렵다.
“ 어쩄든 그래서 맨날 자르라고 하는거 같아. 방금 전 만진것도 그래서야 미안해 ”
“ 괜찮아 ! ”
소녀는 빽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남성이 자신을 쳐다보았다. 아. 뭐하는거야. 멍청하게. 스스로를 욕했다. 남성은 한번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 하여튼, 그렇게 긴 머리를 하면 불편하기만 하잖아 ? 이참에 자르는건 어때 ? ”
소녀는 아무말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어떤 남학생이 인파를 헤치고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 야 ! 한일아 ! ”
“ 깜짝이야, 왜 ? ”
“ 너 혹시 체육복 남는거 있냐 ? ”
“ 어, 있기는 한데 ”
“ 오늘 체육조별연습 하기로 했단 말이야. 방과후니까 오늘 쓰고 내일 다시 돌려줄게. 부탁 좀 하자 ”
다가온 학생은 한일과 친해보였다. 소녀는 슬쩍 눈을 돌려 그를 흘겨보았다.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당황스럽고 불편하다. 역시 모르는 사람은 아직 주저하게 된다. 그것보다. 자기말고 친한 사람이 있다는게 제일 신경쓰이는 일이다.
“ 어…뭐 그러지 위에만 필요한거 맞지 ? ”
한일은 입고있던 체육복 지퍼를 내렸다. 소녀는 순간 놀라서 벗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 아니, 야. 아무리 그래도 입던걸 주냐 새거 있잖아 ”
“ 야 임마. 나도 내일 써야해 ”
“ 집가서 빨면 되잖아 ”
“ 안돼 우리집 세탁기 고장났단말이야 ”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였다. 소녀는 대화를 유심히 듣고 있었다. 뭔가 떠오르는게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말을 해도 될까 ? 그래도…그래도…소녀는 입모양을 달싹거리다 눈을 꼭 감고 외쳤다.
“ 저…저기 한일아 ! ”
“ 어 ? ”
“ 친구한테 빌려줘…내가 너거 빨아서 올게 ”
세 사람 모두 말이 없었다. 중간에 튀어나온 남학생은 뜨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 사실 놀랄만한 일이다. 그녀는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와 긴 머리탓에 은근히 무시당했다. 그녀는 없는 사람처럼 지냈다. 한일이 워낙 인망이 넓고 포용력이 커서 그런거지 다른 사람이면 말도 걸지 않았을거다.
“ 너…집에 세탁기 있어 ? ”
한일이 말했다.
“ 아….아니.. ”
“ 그럼 ? ”
“ 손….빨래…. ”
한일은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고심을 했다.
“ 뭐, 손 빨래까지 공들여 해주니 남는 장사겠지. 야 가져가라 ”
한일은 가방에서 체육복을 꺼내 남학생에게 던졌다.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이다.
“ 고마..워 ”
“ 인사는 내가 해야지. 너도 가져갈래 ? ”
“ 아 응 ! ”
한일은 상의를 벗어서 소녀에게 주었다. 남학생이 소녀를 유심히 보고는 말했다.
“ 야. 화장실이나 가자 ”
“ 뭔 화장실을 떼로 지어서 가냐, 기집애도 아니고 ”
말은 그렇게 해도 한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학생이 옆에서 어꺠동무를 했다. 교실을 나가면서 소곤소곤 말을 건다. ‘ 야. 그냥 안 빌려준다하면 될걸 뭐하러 재한테….재 좀 위험해보여… ‘ ’ 됐어, 뭐 어떄 빨래도 해준다는데 ‘ ’ 하여간 속 편한 새끼 ‘
물론 소녀는 모든 대화를 들었다. 순간 울화가 치밀어서 남학생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우리 둘을 이간질하려는 저 박쥐 같은 놈. 숨이 막힐떄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 눈알이 뒤집힐때까지 내손으로…..그러다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야. 아니야. 미쳤나봐 나.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괜찮다.
소녀는 아이들 몰래 냄새를 맡았다. 열기에 젖은 땀냄새, 태양으로 덥힌듯한 뜨거운 공기. 그녀의 두 눈동자가 떨리고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황홀했다. 다시 체육복을 보는데 긴 머리칼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아. 이 머리.
그녀는 한손으로 머리를 쓸어내렸다. 한일이가 자른게 더 좋을거라고 했었지. 조금만….조금 잘라볼까. 그녀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수업종이 울렸다. 아이들은 자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체육복을 가방에 넣고 다소곳이 앉았다. 잠시 뒤에 한일이 빠른걸음으로 자리로 와 앉았다.
“ 손빨래 힘들다는데, 괜찮겠어 ? ”
한일이 교과서를 펴며 말했다.
“ 아니야, 괜찮아 ”
소녀는 드물게 밝은 어조로 말했다. 선생이 들어오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한일은 꾸벅꾸벅 졸다가 엎어져서 잠들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서 해야할일을 고민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옆자리에 앉아서 정 반대의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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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와서 해야할일을 했다. 제일 먼저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거실을 지나가는데 안방이 보였다. 소녀는 방으로 가기전 멈춰서서 안방문을 보았다. 엄마는 항상 저 방에 누워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저 문을 경계로 다른세계가 있는 것 같았다. 문을 열면 무너지고 버려진 방이 나올것같다. 아무 생명도 없는 방. 그 방은 아빠가 집을 나간후로 시간이 멈춰 있었다.
엄마는 어느날부터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녀는 개의치 않는다. 개의치 않는다기 보다는 이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두 모녀의 관계는 달라져있었다.
문 앞에 빈 그릇이 있었다. 그래도 살아있나 확인하는겸 밥은 차려서 앞에다 두었다.
소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열었다. 벌써부터 냄새가 진하다. 소녀는 가방을 던지고 의자로 가서 앉았다.
“ 하아…후우… ”
냄새를 맡는다. 빨래는 할거다. 일단 하고싶은것부터 하고.
소녀는 결국 참았던 욕구를 풀기 시작했다. 서둘러 하의를 내린다. 손으로 문지르다가 애달파져서 아예 내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아…아…한일아… ”
냄새를 맡으면 어쩐지 그 사람이 눈 앞에 있는 것 같다. 소녀는 눈을 감고 상상에 집중했다. 천천히 몸이 포개지더니 커다랗게 자신을 감싼다.
“ 사..랑해.. ”
소녀는 혼잣말을 이어갔다. 말의 중간은 상상속에 존재했다. 소녀는 그 잘린 말에 대답하고, 질문을 했다. 결국 모든건 소녀의 머릿속이라 혼자만의 대화였다. 그게 가짜라는걸 느낄수없도록 소녀는 냄새를 깊게 마셨다. 이렇게라도 해서 만나야한다. 내가 그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니까.
소녀는 계속했다. 몸이 움직이면 쾌락이 오고, 쾌락은 몸을 움직이게 했다. 한쪽이 움직이면 다른 한쪽이 딸려왔다. 두 존재는 선두를 바꾸며 달리다 절정에서 만난 뒤 멈췄다. 소녀가 긴 교성을 질렀다. 옷에 파묻혀서 소리가 꽉 뭉쳐졌다.
“ 아…하아…. ”
소녀는 멈춘 뒤 자신이 한 일을 확인했다. 팔에서 힘이 풀리고 얼굴에 닿은 체육복을 내렸다. 스르륵. 더러운 붕대를 풀 듯 옷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소녀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 천장을 보았다.
또 저질러버린거다. 정말, 이제는 심각해지리라는걸 알고있었다. 그가 쓰던 옷까지 빌려와서 몰래 이런짓을 하다니. 소녀는 반쯤 헐벗어버린 아래를 보았다. 습하고 뜨거웠다. 항상 이러고 나면은 참을 수 없는 외로움과 자기혐오가 든다.
나이가 든 후로는 전처럼 과격해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사람한테는 모질게 대하고싶지 않다. 하지만 역으로 이런식으로 욕구를 푸는게 당연해졌다. 행위가 거칠고 변태적으로 변할수록 속 안이 병들어가는거라고 생각했다.
한번의 절정 뒤에는 공허하다. 몸이 데워지는 다음 순간까지 이 공허함을 참아야한다. 만약 그 사람이 옆에 있다면 소녀를 안고, 달래주고, 쓰다듬으며 채우려들지 않을까. 소녀는 혼자인게 더욱 아쉬웠다.
소녀는 만약 사랑하는 그이가 알면 어떻게 될까 상상했다. 그건 너무 끔찍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 이제 그만할거야….그만해야해… ”
소녀는 옷을 추스르며 중얼거렸다. 그만해야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건데. 오히려 이럴수록 더 멀어지는거라고. 소녀는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당장 옷을 빨기는 주저된다. 소녀는 침을 삼켰다.
몇 번을 고심했다. 시간이 지나자 충동을 못 이겨서 몸을 달랬다. 그리고 후회했다. 그러다 몸이 달아오르면 옷에 코를 쳐박고 그 짓을 한다. 좋다가도 슬프고, 몸을 비틀다말고 울었다. 소녀는 그렇게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할수 없을정도로 감정의 양 극단을 오고갔다. 밤이 어둑해지고 지칠때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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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복은 전해주지 못했다. 소녀가 남긴 체취가 진했기 떄문이다. 소녀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 아냐 괜찮아. 나중에 갖다줘 ”
한일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의 친구는 먼저 옷을 갖다주었다. 한일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그를 만났다. 그가 먼저 잘 받았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자 친구는 말했다.
“ 거봐. 무슨 이상한 짓거리 하는거라니까 ? 뭐하러 빌려줬어 ”
“ 손빨래라는데 시간이 좀 걸리겠지 ”
“ 아니. 그것보다 느낌이 묘하잖아 ”
“ 어떤거 ? ”
“ 재 왠지 너 좋아하는거 같아 ”
한일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 뭐라는거야 ”
“ 봐 너도 그런건 싫잖아. 아니야 ? ”
싫다기보다는 연애대상으로 삼은적은 없었다. 오히려 조금 사양이다.
“ 뭐하러 잘해주고 있어. 그냥 모르는척하고 살아 ”
“ 내가 알아서 할게 ”
“ 제발 좀 그래라 ”
한일은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갔다. 체육시간에는 축구를 했다. 공을 차면서도 친구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생각은 안해보았다. 만약 수아가 나를 좋아한다면. 이상하게 거북한 느낌이 든다. 싫다거나 취향이 아니다 같은 보통의 문제가 아니였다. 그녀랑 사귀는건 뭔가 부담스럽고 거대한 짐을 떠안는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그녀의 모습은 부자연스러운면이 있었다. 감정을 꽉 동여맨채로 숨겨둔다는 느낌이다. 어떻게든 숨기고 티내지 않으려해도 결국 새어나온다는 느낌. 어둠 뒤에 숨어서 다른 표정을 지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싫은건 아니다. 단지, 뭔가 주저되는게 있어서이지. 알고보면 여리고 착한 사람이라는걸 느낄 수 있다. 그래도 친하게 지내는것과 사귀는 것은 아예 다른 차원 이야기다.
어쩌면 조금씩 거리를 둬야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최대한 친절한 방법으로 그랬으면 한다. 그 아이가 나쁜건 아니니까.
누군가 한일에게 패스를 했다. 그는 복잡한 생각을 날려버리듯 뻥하고 공을 걷어찼다.
그 이후로 둘 사이는 예전만은 못했다. 한일은 그녀가 싫은게 아니였다. 친구의 말을 듣고는 자신도 모르게 의식을 하게된다. 소심한 그녀를 위해 먼저 말을 거는것도 적어지고 대답은 짧아졌다. 일부러 하려는게 아니라 더욱 불편했다. 말하는법을 까먹기라도 한 듯 일상적인 대화도 힘들어졌다.
소녀는 그런것에 민감했다. 한일이 자신을 피하려는걸 저절로 느꼈다. 소녀는 몇 번씩 고민하다가 가방에서 체육복을 꺼냈다. 한일에게 전해주었다.
“ 여기..가져왔어 ”
“ 아. 고맙..ㄷ..아니.. ”
한일은 옷을 받고는 고개를 튼채로 말했다.
“ 고마워 ”
“ 으응.. ”
‘ 다 ’ 랑 ‘ 워 ’ 의 차이 하나뿐이었다. 뜻은 같아도 그 우러나오는 마음이 다르다. 아니 사실 별 차이도 없었을거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걸 무시하기에는 유약한 사람이었다.
최근들어 한일이 매정하다는걸 느낀다. 대놓고 피해다니거나 싫은티를 내는 것은 아니였다. 그는 원래 좋은 사람이니까. 남을 함부로 무시하는 인간은 아니다. 그녀가 느낀건 그것보다 훨씬 주관적인 문제였다. 당사자끼리만 알 수 있는 미묘한 공기의 흐름이 있다. 한일 또한 알고있었을거다. 하지만 둘 중 소녀의 마음이 더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더욱 차갑게 느껴진다.
나를 싫어하나보다. 그 말이 가슴에 꽂혔다. 하늘에서 떨어진 칼 한자루가 머리부터 시작해 온몸을 갈라놓았다. 소녀는 조용히 숨을 쉬었다. 온통 칠흑 같은 어둠이고 홀로 버려진 것 같았다. 소녀에게는 스스로가 그렇게 보였을거다. 배경도 인물도 사라진 어둠. 그리고 버려진 개처럼 덩그러이 남아있는 소녀가 보인다.
보는게 괴로웠다. 너무 어둡고 쓸쓸하다. 한일이 있어서 세상이 밝아진거였다. 그는 태양처럼 밝고, 따스하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가 떠나면 이제는 ?
한일을 보았다. 그는 등을 돌리고 있다. 소녀를 외면하는게 보인다. 다들 그랬다. 소녀의 부모도. 다른 친구도. 어른들도. 학교의 선생과 학생들도. 세상 전체가 그랬다.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곁을 내어주다가 항상 떠나간다. 그러다 흐지부지 없던일로 변하고 만다.
그것만은 싫었다. 떠나면 안돼. 소녀는 잠시 한일을 때리고, 가두고, 묶어두는 상상을 했다. 한일은 영원히 떠나지 않았다. 어디론가 도망갈수 없도록 나만 바라보고 나만 알고 나만 곁에 남도록 해주는건 어떨까. 나랑 그이와의 세상을 다시 만들어간다면 좋을거야. 조금이라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아. 그녀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숨을 깊게 마시고 뱉는다. 왜 이러는거야. 미친짓이잖아. 저 애 한테는 그렇게 할 수 없어. 손톱을 물어뜯으며 못된 생각을 가라앉혔다.
소녀는 한일과 이어질 수 없는걸 알았다. 적어도 지금은 불가능하다. 나 같은 불안정하고 미친여자를 과연 받아주겠는가. 그가 망가질 것이다. 그는 나랑 완전히 다른세계에서 살아가니까.
소녀는 스스로가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것을 알았다. 슬픈건 그걸 너무 잘 알면서도 빠져나올수가 없다는거다. 슬픈 눈으로 한일의 등을 보았다. 영원히 만날 수 없을거다. 적어도 그 스스로가 원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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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은 고민이 깊었다. 어째야할지 답이 안 나왔다. 처음부터 상황을 확실히 아는것도 아니다. 수아의 마음은 그녀만 아는 사실 아니던가. 명제부터가 흐릿한데 답이 나올수는 없다.
한일은 맞은편에 앉아 빨대를 문 여인을 보았다. 자신보다 한 학년 위에 있는 선배다. 킨 머리칼을 뒤로 묶은 선배는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며 커피를 빨았다.
“ 그래서 뭐 그렇게 된거죠 ”
한일의 말이 끝났다. 푸하. 선배가 빨대에서 입을 뗀다.
“ 뭐하러 그런걸 걱정하는데 ? 그냥 철벽치면 되는거잖아 ”
“ 맞는 말이에요 ”
한일은 순순히 인정했다.
“ 너도 참 특이하다니까. 괜히 남 걱정하다가 인생 피곤해진다. ”
“ 선배는 이럴떄 어떻게 하나요 ? ”
“ 나 ? ”
여인은 눈동자를 위로 모았다. 으음- 몇초 뒤에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 나를 좋아하는건 그 사람 마음이지. 내가 잘못한것도 아니고 내가 어떻게 해줄수 있는것도 아니야. 그런건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두는거야. 한쪽이 마음을 닫든 받아주든 ”
“ 선배는 인기가 많아서 그런거겠죠 ”
한일이 한숨을 쉬었다. 여인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어머 ? 너는 안 그런줄 아나봐 ? ”
“ 제가요 ? ”
“ 그런게 있어 ”
여인은 새침한 표정으로 다시 커피를 빨았다. 뭐야. 한일은 영문을 알수없는 표정이었다.
“ 어쨌든 너의 요점은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고 멀어지겠다는거 아니야 ? ”
“ 그게 어려워서 이러는거죠 ”
“ 나참, 기다려봐 이런건 한번도 생각해본적 없는데. 잠깐만… ”
여인은 빨대를 입에 물고 고민했다. 가끔씩 입을 오므려서 커피를 빨아올렸다. 생각이 막힐떄마다 커피를 들이키는 것 같았다. 절반 정도 비워졌을떄 여인이 말했다.
“ 어쨌든 너가 그 아이를 배려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있는거잖아. 나는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걸 ”
“ 배려 ? ”
“ 그래, 너는 그 아이한테 어떻게든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하잖아. 그것 자체가 나름대로 신경을 쓰고 있다는거 아니야 ? 뭐. 너가 원래부터 몰캉몰캉, 맥아리가 없어서 이러는걸수도 있지만 ”
여인은 호호하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사모님 같은 웃음소리다.
“ 이것 참…. ”
“ 그러지말고 잘 생각해봐, 왜 그 아이를 배려해주는건데 ? 막말로 나 같으면 신경도 쓰지 않았어 ”
여인은 커피를 다 마시고 앞에 놓인 타르트 접시를 바라보았다. 하얀 생크림이 올라간 먹음직스러운 타르트다. 포크를 들고는 한입을 먹는다. 으음 맛있구만. 여인은 높은 콧소리와 함께 미소를 지었다.
배려라. 배려. 그 아이를 배려한다고 ? 내가 ? 한일은 생각했다. 생각은 단순하지않았다. 자기 안에 있는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야했다. 배려라. 그런걸 의도한건 아니야.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러지 않았어. 그게 배려인것도 몰랐었지. 나는 그냥 배운대로 했을뿐이야.
우리 부모님처럼 했어. 두 분은 언제나 했던 말을 지키고 내 의사를 물어보았지. 그냥, 그게 다야.
“ 생각이 안나 ? 당 떨어져서 그래, 이거 한입 먹어봐 ”
여인은 타르트 한 조각을 내밀었다.
“ 됐어요 ”
“ 아 글쎄 먹어보래두 ”
“ 별로 안 떙겨요 ”
“ 맛있다니까 ?! ”
“ 끄응 ”
한일은 입을 열었다. 달달한 타르트 한 조각이 들어왔다. 한일은 몇 번 씹어서 삼켰다.
“ 맛있네요 ”
“ 그치 ? ”
여인은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창가에 앉아있었다. 밖에서 바라보면 잘 나가는 선남선녀의 커플이었다. 귀품있고 유머가 넘치는 여인, 따뜻하고 부드러운 남성미가 있는 남자. 둘의 대화는 카페 유리창에 막혀 안에서 맴돌았다. 대화가 들리지 않으니 보이는 것으로 알아야했다.
인파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쓸데없는 소리가 많아서인지 보이는 정보는 크게 느껴졌다. 소녀는 골목 사이에 숨어있었다. 아름다운 여인과 한일. 어쩐지 헤실헤실 웃음을 흘리는 여인과 그걸 바라보는 한일. 사랑을 표현하는 듯 달콤한 간식을 주는 여인과 받아먹는 한일. 소녀의 눈에는 한가지 사실로만 보였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구나.
소녀는 한참을 서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일어났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등을 돌렸다. 그리고 걸었다. 골목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채 계속 걸었다. 고개 숙인 소녀는 입술을 꺠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다 막다른 벽이 나왔다. 소녀는 참지못하고 주저앉았다. 소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엉엉 울었다.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가슴에서 열이 올라왔다. 쪼그라드는 듯 갑갑하고 아프기만 했다. 하긴 맞는말이야. 저렇게 멋있고 좋은 아이가 아무도 만나지 않는게 이상하지. 맞아. 이렇게 될거였어. 그녀는 서툰 위로를하며 눈물을 훔쳤다.
괜한 짓을 했다. 오늘따라 마음이 붕뜨고 조바심이 들었다. 결국 하교길에서 그를 몰래 따라갔다. 어디선가 예쁜 선배가 튀어나오더니 함께 걸어가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수도 없다. 저런 광경을 보고서도 어떻게 아니라 할수있을까. 역시 함부로 좋아해서는 안됬어. 이렇게 아프고, 힘들어하고, 혼자서 망상에 빠져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소녀는 눈물을 삼키려 노력했다. 끅끅거리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터져나온다. 억지로 막아둔게 터지자 더 서럽게 울었다. 그 아이랑 같이 있고싶어. 그 아이를 더 가까이에서 보고싶어. 사랑한단 말이야. 너무 좋아서 나도 어쩔수가 없단말이야. 속에 담겨있는 말과 울분이 터져나왔다. 소녀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감정을 쏟아내었다. 애절하고 슬픈 말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다른 말들이 섞여온다.
너가 가져가면 되는거잖아.
뭐 ? 소녀는 움찔거렸다. 헛것을 들은 것 같다. 그걸 부정하듯 지독한 말이 줄을 지었다. 너가 뻇어가면 되는거잖아. 너를 사랑하게 만들면 되는거 아니야 ? 목소리는 본래 한 몸인 듯 익숙했다. 소녀는 기억했다. 아주 오래전 소녀의 가슴이 아플 때, 외로울 떄 들렸던 말이다. 이제는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아니였구나. 소녀는 애써 부정했다. 아니야. 싫어. 그렇게 할 수는 없어. 나를 어떻게 사랑하게 만들어 ? 나는 다르단 말이야. 그와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말이야. 말은 다 들어주고 대답했다. 아이를 달래주는 듯 온화했다.
역시 부정하는구나. 불쌍해. 너가 참 불쌍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참아왔니. 날떄부터 이런 지독한 마음을 가졌다니. 남을 진심으로 사랑할수 없도록 태어났는데, 그게 오히려 사랑에 목말라하는 표현이라니. 너도 정말 기구하구나.
소녀는 말이 없었다. 말은 그대로 이어갔다. 소녀를 품에 안고 쓰다듬는 듯 안락한 말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어. 얼마나 참아왔는데. 사실 너는 여태까지 잘해온거야. 가족한테 배신당하고도 버텨왔잖아. 남을 상처주지 않으려고 피해다녔잖아.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건지 알지 ?
소녀는 지금까지의 슬픔과 외로움을 떠올렸다. 심장이 바닥에 쓸리고 짓밟히는 느낌이었다.
그래. 그런데 이제야 잠깐 행복해졌어. 그를 알고난후로 분명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어. 하지만 다시 떠나갈려고 하네. 그 전보다 더 외롭고, 더 슬프고, 더 힘든 순간이 기다리겠네. 너는 그걸 견딜수 있을것같아 ?
확신할수 없었다. 말은 그것보라는 듯 거침없이 이어갔다.
이미 많이 참아왔잖아. 원래라면 그를 잡아둘거였잖아. 잘 참아왔어. 이미 충분해. 이제는 조금 욕심을 부리는게 어떄 ? 아주 살짝만. 너의 인생이 잠시라도 행복하게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히 힘들어질거야.
아니야. 그건 싫어.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다칠거야. 분명 내가 그를 다치게 할거야. 그도 원하지 않을거야. 나를 싫어하게 될거야. 말은 인내심을 갖고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그를 다치게 하라는 말은 안했어. 그냥 조금 욕심을 부리는거지. 그 정도로는 다치지 않아. 그리고 만약 그런다한들 무슨 상관이야 ? 다시 너를 사랑하게 만들면 되는거잖아.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그 사람을 사랑하는거 아니였어 ? 예전으로 돌아가기 싫은거 아니였어 ? 다시 혼자로 돌아가기 싫은거잖아 그런거잖아.
소녀는 말이 없었다. 돌아가기 싫은건 맞다. 그건 섬뜩하고, 뼈가 시리고, 숨이 막히는 고통이었다. 죽음보다 더한 그런 늪에 빠지기는 싫다. 소녀는 순간 어머니를 떠올렸다. 방안에 누워서 아무것도 안하는. 죽음을 기다리는 혼자의 모습. 그녀의 몸과 마음은 땅 속의 묻힌 시체마냥 썩어가고 있었다.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텅 빈 눈으로 바닥만 본다. 어느샌가 눈물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것 봐. 이제는 돌아가지 못해. 혼자 남는게 얼마나 두려운지 알잖아. 밖으로 나가. 나가서 빨리 저 사람을 잡아.
소녀는 골목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한일의 뒷 모습이 보였다. 집으로 가는 듯 혼자였다. 잠깐 머뭇거렸지만 따라갔다. 말은 잘했다는 듯 뒤이어 말했다.
너무 죄책감 가지지마, 이건 그냥….
말이 가슴 속에서 울렸다.
사랑해서 그러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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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한동안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를 따라가는 것은 여러감정을 불러왔다. 기대, 행복, 사랑, 기쁨과 선망이 있었다. 반대로 슬픔, 애통, 분노, 두려움과 자기혐오도 있었다. 소녀는 마음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여러 감정이 섞여서, 하나의 상태를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한가지는 확실하다. 모든건 그를 통해 이어져있다.
그가 친구와 놀러가거나 카페에서 본 여인을 만나면 몸이 저절로 떨렸다. 자신이 없어도 즐겁게 웃는 그의 모습이 보였기 떄문이다. 그럴떄마다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를 납치하고, 때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떄까지 감정을 주입시키는 어지럽고 위험한 생각. 하지만 좋은일도 있었다. 그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떄마다 남 모를 비밀을 공유한다는 느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는 집으로 가는길에 꼭 들르는 빵집이 있다. 거기서 크루아상과 코로케를 산다. 가끔씩은 스포츠용품점에 들른다. 거기서 비싼 축구화와 공을 만지작거린다. 그리고 아쉽다는 듯 손목보호대나 아대를 사서 돌아간다. 그는 길을 걷다가도 한번씩 머리를 만지작거린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칼이 신경쓰인다는 눈치다. 그런것도 사랑스러웠다.
소녀는 몰래 사진을 찍고 노트에 필기했다. 그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가는중이었다. 그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신이어야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알아가는 것이 분명 사랑이었으니까. 소녀는 그의 집주소까지 알아내었다. 집은 번듯한 2층 단독주택이다. 잘 사는 집의 풍채가 느껴진다. 가족은 화목해보인다. 그의 부모는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이면 서로 대화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이걸 적을떄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자신의 옛날가족이 떠올라서이다. 소녀는 꾹 참았다.
학교로 돌아가서는 그대로였다. 두 사람은 짧은 대화만 했다. 한일은 여전히 거리를 두었다. 소녀는 그게 미웠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 노트에 적힌것들이 많았다. 그와 대화하고 싶다. 어느 날 소녀는 종례시간에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 저기 한일아… ”
“ 응 ”
한일은 가방을 정리하다가 소녀를 보았다.
“ 손목은 괜찮은거야 ? ”
“ 어 ? ”
한일은 자기 왼쪽 손목을 보고는 다시 소녀를 쳐다봤다. 소녀는 변명처럼 뒤이어 말했다.
“ 아니…예전에 너가…배드민턴 치다가 한번 다친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
“ 아 ”
한일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가방을 정리하던 그는 가장 무난한 방법을 택했다.
“ 걱정해줘서 고마워 ”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한일의 말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소녀는 그래도 대꾸를 해줬다는 것, 고맙다는 말을 들은 것이 좋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대화를 해본다면 좋을텐데. 소녀만이 알고있는 그의 비밀이 많았다. 이걸 하나하나씩 말해주고 싶다. 선생이 도착했다. 둘은 별말 없이 헤어졌다.
소녀는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조금씩 대화를 시도했다. 알고있는게 많아서 대화 할 거리는 많았다. 소녀는 그에게 맞춰 주제를 정했다. 며칠이 지나자 그의 반응도 길어지고 있었다. 변해가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건 존재한다. 그 선배라는 여인이다. 둘은 자주 만났다. 소녀는 만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언젠가 한일에게 물어보아도 별 대답이 없었다. 소녀는 불안해졌다. 그에 대한 모든걸 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여인과의 대화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품는지 알수가 없었다. 그는 여인과 대화할떄는 근심이 많아보였다. 가끔 웃고,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소녀 앞에서는 지은적 없는 얼굴이다.
한일은 대화 한 다음날에 자주 웃었다. 소녀를 대하는것도 편해보였다. 전날과의 차이가 커서 소녀의 궁금증은 더해졌다.
솔직히 화가 난다. 자신은 힘들게 고생하는데 저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를 뺏어가다니. 소녀는 순간 화가 치밀어올랐다. 여인의 뺨을 때리고 걷어차고 싶었다. 그러다 진정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뭔가. 자신만이 독차지 할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
소녀는 생각했다. 무언가 떠오르는게 있다. 하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걸까 ? 그는 옆자리의 한일을 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태평한 표정이었다. 소녀의 고민은 상관없다는 듯 했다. 그 표정을 보자 뭔가 서운하고 억울한 기분이 든다. 자신이 힘든걸 몰라주는게 미웠다. 소녀는 결심했다. 그래, 해야겠어. 분명 그가 아플수도 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그도 나를 사랑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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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한일은 인기가 많다. 소녀는 당연하다고 여겼다. 멋진 사람은 그럴 자격이 있다. 다만 허락해줄지는 소녀의 마음이다. 그래도 좋아하는이의 매력을 증명받았다는건 기분 좋은 일이다. 소녀는 노트에 적힌 명단을 죽 보았다. 모두 한일을 좋아하는, 적어도 의심이 가는 학생이었다. 모두들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려고 안달이었다. 물론 그럴수록 그 자리에 가까운 사람을 질투하는게 당연하다.
모두들 그 선배라는 사람을 질투했다. 소녀가 알아본 바로는 여인은 학교에서 인망이 넓었다. 다만 남학생에 한정해서다. 그건 한일과 같은 이유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한일은 남녀 관계없이 두루 친하게 지냈다. 이 여인만 유독 같은 여자한테 미움을 샀다.
처음에는 하찮은 사람이라서 그런줄 알았다. 하지만 잘 따져보니 그렇지는 않다. 그녀는 1학년때 무슨 사고가 있었다. 학교에 떠도는 소문거리중에 하나다. 원래 사람이 모이는곳에서는 그런 일이 꼭 벌어진다. 당시 그녀는 사랑을 했다. 그것도 학년 전체 최고의 남학생과 만났다. 모두의 주목을 받는 커플이었다. 하필 거기서 일이 터진거다.
어느 날 그녀는 헤어졌다. 그것도 전교생의 앞에서 헤어졌다. 들리는 말로는 뺨을 때리고 넘어트렸다고 한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본채 그곳을 떠났다. 교제중인 남성은 이미지가 좋았다. 성실하고 젠틀한 인상이었다. 당연히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을거다. 남자들은 가끔 느끼하고 잘난척한다며 그를 멀리했다. 왜 그렇게 평이 갈리는지 알만하다.
그녀는 모두가 선망하는 남자를 걷어찬 악녀로 남았다. 이 정도는 어느 학교에나 떠도는 소문거리에 불과하다. 소녀가 알아본 것은 달랐다.
사실 그 남학생은 별로 성실하지도, 젠틀하지도 않았다. 그는 여자를 물건 다루듯이 했다. 몰래 더러운 사진을 찍는 일이 많았다.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물론 그녀도 몰랐다. 어느 날 알게 된 후로 헤어진 것이다. 다행히 여인의 사진은 없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건 아니다. 여인은 제 나름의 분풀이를 하고는 헤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거기서 한일이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한 학년이 올라갔었다. 한일은 같은 동아리 후배였다. 그녀는 아직 힘들어했다. 그 다음은 알아서 흘러갔을거다. 한일은 원래 착하고 주변을 잘 챙기니까. 언젠가부터 그녀는 나아지기 시작했다.
소녀는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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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일아 ”
소녀는 자리에 앉은 한일에게 인사를 했다. 아직 등교한 학생이 적어서 교실은 비어있었다.
“ 수아구나 ”
“ 어제는 잘 들어갔어 ? ”
“ 응 ”
물론 아닐거다. 집으로 가면서도 아무곳에도 들르지 않았다. 평소의 그와는 달랐다.
“ 밥은 ? 밥은 먹었어 ? ”
“ 먹었어 ”
“ 그래 ? 혹시 이 근처에 빵집…. ”
“ 수아야 잠깐 말 걸지 말아줘. 미안해 ”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속상하지만 넘어가야했다. 힘들만할거다. 학교 전체에 이상한 소문이 퍼져가니까. 방법은 쉬웠다. 그냥 살짝 떡밥을 뿌리면 된다. 사실을 조금만 바꿔서 전달하면 됬다. 알고보니 그 선배, 만나던 사람이 함부로 여자 몸을 찍는 사람이더라. 만나면서도 계속 그 짓을 했다더라. 그리고 헤어진뒤에는 한일과 같이 다니고 있다. 이런것들이다. 여인이 뭘 했는지는 상관 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이 지어낼 것이다.
교제했다는 남성은 당연히 부인했다. 그런건 헛 소문이라고. 원래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잘 통했다. 여인을 싫어하는 학생들은 계속 말을 바꾸며 헐 뜯었다. 나중에는 일부러 여인이 헛소문을 퍼트린걸로 바뀌었다. 사진을 찍는건 여자쪽이 원래 하던 것으로 바뀌었다. 같이 다니는 한일도 입에 올랐다. 물론 한일은 그다지 타격이 없었다. 화살의 대부분은 여인에게로 갔다. 그래도 신경이 쓰이기는 할거다. 학교생활이 전처럼 편할 수는 없을거였다. 어느정도 의도한거였다.
소녀는 넘어가기로 하고 고개를 돌렸다. 분명 지금 당장은 힘들거다. 그런만큼 혼자 둬야만했다. 어차피 나한테 넘어올건데 뭐. 대수롭지 않은일이다. 한일은 어딘가 불편한지 몸을 들썩거렸다.
며칠이 지났다. 그떄는 괜찮았을거다. 소녀는 한일에게 말을 걸고, 그가 소문으로 아파하는걸 보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그의 감정을 조종하는 느낌이었다. 슬픔이나 분노를 조종했다면 소녀에 대한 사랑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에게 받을 사랑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러려면 지금 움직여야한다. 원래 사람의 감정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다. 감정은 다른 감정을 만들어낸다. 분노가 강렬해지면 화를 내기보다는 우울해지기도 한다. 하물며 슬픔을 사랑으로 만드는 것 쯤이야. 소녀는 거울 앞에 서서 제 머리를 만졌다. 길고 푸석푸석, 끝이 갈라져있다. 이런 머리를 달고 잘도 살아왔었다. 그것도 좋아하는 남자애 옆에서 말이다.
소녀는 당장 자르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다. 이런건 처음해본다. 소녀는 안방문을 보았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한테 처음 화장을 배운다고 한다. 그런것조차 없어서 아쉬웠고, 억울했다. 소녀는 방 너머에 있을 엄마를 길게 노려보고는 거울로 돌아왔다. 가볍게 할까 ? 결심을 내리기 전 몇 번 고민을 해보았다.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다.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머리를 잘랐다. 미용실에서 짧게 자르고 앞머리를 둥글게 말았다. 머리만 잘랐을뿐인데 어색했다. 거울을 보니 어딘가 밝아진듯도 하다. 소녀는 스스로가 어색해 오랫동안 보지를 못했다. 얼굴을 붉히고는 화장실을 나왔다. 교실로 가서 앉았다. 아무도 없는 교실이었다. 분명 한일이 올거다. 그는 제일 먼저 등교하곤 했다.
아이들이 재잘재잘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가까워지다가 교실문이 열리면서 선명해졌다. 소녀는 한일을 찾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남자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소녀의 변화를 알고는 빤히 마주보았다. 곧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리로 가서 앉았다. 당황스럽지만 아직은 괜찮다. 조금만 기다리면 그가 올 것이다.
하지만 오지 않았다. 소녀는 하루종일 텅 비어있는 옆 자리를 보았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소녀는 뭔가 잘못된다는걸 알았다.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학교의 분위기가 달라져있었다. 소문은 이상하게 날이 갈수록 퍼져갔다. 퍼지는만큼 살집이 불어났다. 사실 위에 거짓이 달라붙었고 다음 거짓이 그걸 잡아먹었다. 사실과 거짓은 한데 섞여서 구별이 안되었다. 그저 제 몸집이 커가는걸 모두가 지켜봤다. 소녀는 그제서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직접 발로 뛰어가며 소문의 근원을 찾았다. 그떄의 소녀는 머리를 자르고 화장을 했다. 밝게 빛이 났다. 소녀는 아름다워서 모두가, 특히 남자들은 겉모습을 보고 환대했다.
그러나 아니다. 소녀는 이제껏 단 한번도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항상 어두운곳을 벗어난적이 없다. 소녀의 연기는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였다. 그처럼 밝고 따뜻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자신도 그렇게 보이도록 연기를 한거다. 사실 소녀의 마음은 푹 썩어서 곯아있었다. 그저 떠나간 남자의 뒷 모습만 따라가는거다. 그 빛의 잔상을 쫓아 하염없이 뛰는거다. 그게 사랑하는 남자의 빛인줄 알았다. 뜨거운 태양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보니 그건 시리고 차가운 달빛이었구나. 자신이 퍼트린 소문은 걷잡을수없었다. 한일은 예상보다 더 아래로 추락하고있었다. 소녀는 몰래 눈물을 훔치며 계속 뛰었다. 소문의 근원을 알아가려고.
하지만 찾을수없었다. 당연한 것이다. 이런 소문은 원래 머리와 꼬리가 한곳에 존재한다. 어디서 시작됐고 어디서 끝나는지 알수가 없는거다. 하지만 소녀만이 아는 사실이 있다. 자신이 벌인 일이다. 그 사실을 알자 슬프고 화가나서 견디지 못했다. 소녀는 화장실로 들어가 몰래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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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은 학교가 끝나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의 시간을 꼼꼼히 알아두어서 다행이었다. 도어락의 비밀번호는 멀리서 보고 알았다. 그녀는 제일 먼저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남자애답지 않게 깔끔하다. 침대와 이불도 정돈되어있고 책상위는 잡동사니가 없다. 벽에는 유명 축구스타의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누군지 몰라서 사진을 찍었다. 소녀는 그의 이불과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여기서 하루종일 잠이 들고, 공부를 하는구나. 소녀는 그가 방에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쩐지 즐거워보이지는 않는다. 소녀는 슬픈눈을 하고는 책장을 살펴보았다. 어딘가에 그가 남겨놓은 글이 있지 않을까. 중학교 졸업앨범이 보였다. 소녀는 호기심이 들어 그것을 보았다. 그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고 있다. 이떄도 변함없이 멋있었구나. 소녀는 다시 앨범을 닫는다. 혹시 더 어릴떄의 모습은 없나 했는데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 졸업앨범도 없었다. 소녀는 잊어버리기로 하고 다른 책들을 살펴보았다.
무언가 있었다. 너덜너덜한 공책 한권이다. 소녀는 펼쳐서 보았다. 조금씩 읽어가는데 소녀의 눈망울이 흐려졌다. 결코 좋은 내용은 아니다. 일기는 그가 어릴떄부터 써온것처럼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듯 내용이 달랐다. 가족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도 평범하게 살아온 것은 아니다. 그는 입양되었다. 아주 오래전 보육원에서 자란 것이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한뒤에 새부모를 만났다. 이전에 다니던 초등학교는 그리 좋은 추억은 아니였나보다. 앨범은 그래서 방에 두지 않은것이리라. 일기의 내용은 보육원에 다닐떄부터 썼던 것 같다. 입양 된 뒤로는 비어있다.
홀로 남겨진 것이 외롭고 억울하다는 글이었다. 부모가 있는 다른 아이들이 신기하고 부럽다는 말이 있었다. 우습게도 다른 아이들은 부모가 없는 그를 신기하게 여겼다. 괴롭힘을 당하고 우는날도 많았나보다. 글씨가 번져있었다. 소녀는 공책을 덮었다.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큰 상처를 품은 사람이었다니. 항상 밝고 친절한 모습만 보여서 몰랐었다. 졸업앨범을 버릴정도로 아픈 기억이다. 화가 났다. 그의 부모는 과연 어떤 사람이길래 이러는걸까.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아이를 왜 방치한걸까. 버려지는 슬픔은 소녀가 가장 잘 아는것이었다. 그를 놀린 사람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 갑자기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도 분명 아팠을거다. 그런데도 이렇게 멋지게 성장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모양이다. 그를 붙잡는 것이 과연 맞을까 ? 그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걸까 ? 이제야 겨우 밝은 세상으로 나왔는데 내가 다시 끌어내리는 것은 아닐까. 과연 그럴 자격이 있는건지 의심이 들었다. 나는 그를 멋대로 사랑했고, 멋대로 내것으로 만들려한다. 이대로 가다가는 그 끝이 보였다. 분명 안좋을 것이다.
소녀는 울면서 가지고 있던 노트를 찢었다. 미안해요. 당신도 계속 숨기려한 비밀인데. 이제야 잊고 잘 살아가는데. 내가, 이렇게 가다가는 다시 아프게 만들어줄 것 같아.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면서 이런짓이나 하고. 나는 너무 병신이야. 당신이랑 같이 있으면 큰일이 날거야. 그걸 못 견디겠어요.
소녀는 죄책감과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에 울었다. 이런짓은 그만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면 눈물을 쏟으며 방금 찢은 조각들을 모았다. 소녀는 그걸 꼭 움켜쥐고는 계속 울었다.
일주일 뒤 한일은 돌아왔다. 그가 돌아올떄쯤, 소문은 잦아들었다. 물론 이유는 있다. 학생들은 소녀가 지나갈때마다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남학생 몇몇은 불순한 의도가 담겨있기도 했다. 소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소녀는 소문의 근원을 찾다가 결국 자신임을 알았다. 그리고 결심을 했다. 자신이 모든걸 끝내야했다. 시작했을때처럼 또 몇가지 밑밥을 흘렸다. 원래부터 뼈대가 없는 헛소문이었다. 진실은 빠르게 드러났다. 한일과 그 선배는 더 이상 억울하게 욕 먹지 않았다. 대신 소녀가 그렇게 된 것이다. 소녀는 모두에게 미움받았다. 그것을 알고있었고 그래서 다행이고, 기뻐했다.
돌아온 한일은 몰랐었다. 그는 하루종일 아무 말이 없었다. 자리에 앉은 한일에게 소녀가 인사를 했다.
“ 한일아 오랜만이야 ”
소녀는 웃으며 말했다. 한일은 바뀐 소녀가 생소했다. 머리에서 윤기가 흐르고 화장을 한 얼굴이 귀여웠다. 어쩐지 남성을 잘 홀릴 것 같은 외모다. 분명 한일은 머리를 자른 그녀가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변화는 어쩐지 어색하다. 뭔가, 슬픈 느낌이다.
“ 어. 수아구나. 머리 잘랐네 ”
“ 응. 어때 ? 많이 예뻐 ? ”
한일은 조용히 소녀를 보았다. 소녀가 침을 삼켰다.
“ 그래, 예쁘네 ”
“ 다행이다. ”
소녀는 말을 이었다.
“ 너가 없는 동안 많이 심심했어. 이제는 괜찮은거지 ? ”
“ 응 ”
다른 반응은 없었다. 소녀는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 자조적인 웃음이었다. 내가 그를 위로할 생각을 하다니 정말 뻔뻔하기도 하지. 소녀는 다시 한번 물었다.
“ 한일아. 나 예뻐보여 ? 거짓말 안해도 돼. ”
소녀는 한일을 정면으로 보면서 말했다. 한일은 마주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 맞아, 정말로 예뻐 ”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하루종일 같은 질문을 했다. 예쁘다는 대답이 올떄마다 소녀는 고맙다하고 미소를 지었다. 왜 항상 같은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행동에는 뭔가 슬픈면이 있었다. 자신을 알아봐줬으면 하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으레 아이가 부모에게 관심을 요구하는듯한 그런 느낌도 들었다. 아니라고 하면 정말로 마음이 상할 것 같아서 예쁘다는 대답만 했다. 그러나 거짓은 아니다. 한일은 진심으로 소녀가 예뻐보였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일은 생각했다. 내가 너무 차갑게 굴었을지도 몰라. 다음에는 먼저 인사를 해보는게 어떨까. 저 멀리 해가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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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수아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이쯤 되면 이상하다는걸 안다. 한일이 먼저 알아챘다. 그는 주변이들에게 물어보았다. 소녀의 행방을 아느냐고. 다들 인상을 찌푸린채 고개를 저었다. 한일은 그떄 알았다. 소녀는 친구라 부를 사람들이 없었다. 한일은 별수없이 자리로 돌아와야했다. 학생들은 소녀의 행방을 점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소녀가 헛 소문을 퍼트린 창피함을 이기지못해서라고 했다. 어떤 학생은 그 여자선배가 뒤에서 엄청난 보복을 벌여 학교에 나오지 않게 만든거라고 했다. 선생들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소녀의 빈 자리를 보았다. 자연스럽게 가정환경과 연결지었다. 또 말은 안해도 소녀가 학생들의 미움을 사는건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소녀의 담임은 몇 번이나 전화를 했다. 받지는 않고 덩그러니 문자 한통만 왔다. 결국 영 내키지 않는 수단을 써야했다.
아침조례 시간이었다. 아이들은 재잘재잘 떠든다. 자 조용 조용. 선생이 출석부로 칠판을 때렸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선생은 말했다.
“ 정수아 학생이 3일쨰 안나온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사람있나 ? ”
다들 눈동자만 굴릴뿐 말하는 사람이 없다.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사실대로 말하는건 불가능하다. 선생은 어른들만의 수법을 쓰기로했다.
“ 뭣 떄문에 안나오는지는 다 모르는거지 ? 좋아. 그럼 오늘 끝나고 수아네 집에 가줄 사람 있어 ? 가정 통신문이 중요한게 밀렸거든 이것만 전해주면 될거야 ”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렷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시 눈동자만 굴렸다. 이 녀석들 이래도 안나와 ? 선생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그떄 한일이 손을 들었다.
“ 제가 갈게요 ”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모였다. 아이들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놀랐으나 한일은 무던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선생은 예상했다는 듯 슬쩍 웃었다.
“ 끝나고 교무실로 따라와 ”
“ 네 ”
학교가 끝나고 한일은 선생의 말대로 했다. 교무실에서 가정통신문을 받았다. 담임은 서명을 해야하는게 두장이나 있으니 잘 확인해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넌지시 수아에게 무슨일이 있었던건지, 혹시 학교에서 문제가 생긴건지 잘 물어보라고 말했다. 한일은 가정통신문은 핑계라는걸 눈치챘다. 담임은 문제가 생겼을때 자기가 피해 볼 짓은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른들은 다들 그런면이 있다. 어느정도든.
하교시간이다. 한일은 교문을 지나쳤다. 바로 등 뒤에서 누군가 어께를 쳤다. 뒤를 보니 선배였다.
“ 어디가 ? ”
“ 수아네 집에 가야해요 ”
으음 - 여인은 답이 없었다.
“ 다른 친구들은 ? ”
“ 없어요 ”
둘은 나란히 걸었다. 갈림길이 나올떄까지는 함께 걸을만했다.
“ 이야기는 다 들었어 ”
한일은 옆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 수아가 그런거라며 ”
“ 수아를 알아요 ? ”
“ 소문만 들었지, 그냥 그게 다야 ”
서로 말 없이 걸었다. 한일이 말했다.
“ 수아가 밉지는 않아요 ? 개 떄문에 그런거잖아요 ”
“ 그러는 너는 왜 찾아가는데 ? ”
여인이 물었다. 대답은 쉽지 않았다.
“ 그냥…수아가 학교에 안 나오잖아요. 갈 사람은 아무도 없고, 대신 저라도 가야해서.. ”
“ 으음 - ”
여인은 잠시뒤에 말했다.
“ 너도 들었지 ? 사실 나, 그 소문 떄문에 힘든적 없어 ”
알고 있다. 소문의 주 표적인 여인은 오히려 무사했다. 그녀가 원래 심성이 착하고 인망이 넓어서 그런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런걸 신경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타격을 입지 않은건 오히려 그 교제했던 남학생 떄문이다. 헛소문과 대적하는 여인은 한가지 우위를 점하는게 있었다. 바로 진실이다.
그 남학생이 더러운짓을 했다는건 변치 않는 사실이다. 오히려 여인을 그것을 이용했다. 소문이 더 널리 퍼진다면 그로서도 달갑지만은 않은 일이다. 여인은 그를 찾아서 담판을 지었다. 소문을 잠재우고, 진실을 찾지 않는다면 나도 계속할거다. 억울하게 욕을 먹는건 싫다. 맞받아치고 끝없이 파헤칠거다. 아무리 욕을 먹고 무시당해도 포기하지 않을거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너에게 불리할 것이다. 그는 순순히 손을 들었다.
그는 의견을 조율했다. 학생들에게 권고하고, 뒤에서 여론을 조작했다. 여인은 소문의 중심에서도 그런대로 잘 지냈다. 이른바 태풍속의 고요다. 동시에 그는 소문의 근원지를 찾으려했으나, 결국 불가능했다.
그렇게 잊혀지나 싶었는데, 터뜨린거다. 그것도 소문을 퍼뜨린 그 당사자가 그렇게 했다.
“ 나는 그렇다 치고, 너는 왜 ? ”
물론 한일 몰래 있었던 일이다. 사실 한일은 학교에 안 나올만큼 욕을 먹지는 않았다. 이건 단순히 예전에 있었던 트라우마 떄문이다. 그러나 진실을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슬프게도 말이다.
“ 그냥, 궁금해서요 ”
“ 응 ? ”
“ 결국에는 자기가 직접 고백했잖아요. 욕을 먹을걸 뻔히 알면서도 말이에요. 왜 그런건지 궁금해서, 그냥 그게 다에요 ”
여인은 무표정하게 앞만 보았다. 힐끗 한일을 보더니 말한다.
“ 역시 내 말이 맞았어. 너는 물렁물렁, 맥아리가 없는 놈이야. ”
그리고는 가방에서 뭔가를 꺼낸다.
“ 자, 이거 받아 ”
“ 뭐에요 ? ”
무슨 서류를 담는 마분지처럼 생겼다. 한일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 수아의 초중고 생기부야 ”
“ 뭐라고요 ? ”
한일은 폭탄이라도 든 것처럼 허둥거렸다. 하마터면 떨어뜨릴뻔했다. 여인은 바보같이 굴지 말라고 한뒤에 덧붙였다.
“ 어떻게 구했는지는 나한테 묻지마 나도 말 안할거니까. 수아가 너를 좋아했다면서 ?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고, 누군지 하도 궁금해서 찾아봤다. ”
그리고는 조용히 말한다.
“ 수아, 꽤 힘들게 자랐더라 ”
한일은 서류를 꺼내 읽어보았다. 여인의 말이 맞다. 조금만 읽어봐도 알수있었다.
“ 우리랑 비슷하네요 ”
“ 맞아 ”
여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곧 있으면 갈림길이 보인다. 이제는 각자의 길로 가야할떄였다. 그 끝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일이다.
“ 최근에 수아 봤었어 ”
“ 네… ”
“ 예쁘더라, 진작 그렇게 했으면 좋았을텐데 ”
한일은 아무말도 안했다. 여인은 쑥쓰러워서라고 생각했으나 곧 생각을 고쳤다. 슬쩍 보아하니 생기부에 눈을 꿰어둔채로 움직이지 않는다. 아주 아주, 정말 진지한 눈초리다. 여인은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그도 나름의 생각을 하겠지. 이제는 알아서 하도록 해야한다.
오늘은 햇살이 밝다. 해가 쨍쨍, 우중충하고 더러운것들을 싹 지워버린다. 여인은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는 하늘을 보았다. 곧 갈림길이 나온다. 좋은 일이 있었으면하고 마음속으로 한번 빌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한일을 위해서도 한번 빌었다. 그가 옳은 선택을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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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선배, 가볼게요 ”
“ 이제는 선배라고 하는거야 ? ”
여인이 픽 웃었다. 한일은 능청스럽게 받아친다.
“ 조금은 어른스러워 보여서. ”
“ 그래 뭐 아무렴, 이제 어여 가라 ”
여인이 손을 흔들며 먼저 떠난다. 한일은 화답을 하며 여인이 먼곳에서 사라질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길을 간다.
소녀는 방안에 있었다. 우리 엄마, 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우리 엄마. 어쩌면 좋아요. 저는 이제 밖에 나가면 안될거에요. 소녀는 침대 밑에 주저앉아있었다. 고개를 들어 누워있는 여자를 보았다. 아무 대답이 없다. 꼭 죽은사람처럼.
엄마.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것같아요. 왜 이렇게 방안에 틀어박히는건지 알 것 같아요. 나는 처음에 당신이 무책임해서 그런줄 알았어요. 힘들어하는 딸은 봐줄생각도 안하고, 그냥 하염없이 방안에 누워있는게 싫었어요.
근데 왜 그런건지 알 것 같아요. 마음이 아파요. 너무 마음이 아프면 결국 살아가는것도, 그렇다고 죽는것도 못하는군요. 이제야 알았어요. 소녀는 가슴을 몇 번 두들겼다. 이대로 아무것도 안하고싶다. 자신 떄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 많다. 영원히, 자신은 영원히 이러고 있어야한다. 그 누구도 좋아하거나 사랑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결국 고통을 주는것이기 떄문에. 소녀는 눈을 감았다. 그대로 사라지고 싶었다. 하지만 뚜렷하게 남아있는 한마디가 있다.
보고싶어.
벌써부터 그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치졸하고 더러운 짓거리를 했는데, 아직 마음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게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 어두운 생각 뒤에는 언제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소녀는 입술을 꺠물었다. 생각하지마, 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느끼지 말아야해. 아무것도 하면 안돼. 그를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해. 소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왜 남들처럼 평범한 사랑조차 할 수 없는걸까. 왜 이런 끔찍한 운명을 타고난것일까. 사랑을 갈구하면서, 그 방식이 상처를 입히는거라니 정말 최악이다.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운명을 탓했다. 운명을 탓하자 과거로 돌아갔다. 출생부터 시작된 이런 저주받은 운명의 계보를 타 올라갔다. 예전에 두 부모님이 떠오른다.
배신을 하기 전, 화목하기만 하던 그떄의 부모였을떄. ‘ 조금만 기다리면 돌아올거야. ’ ‘ 엄마 아빠는 어디 안갈거야.’ ‘ 수아야. ’ 빛 바랜 사진처럼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두분의 얼굴은 희미하다. 빛을 등진채 말하는것처럼 검은 실루엣만 일렁거린다.
그랬으면서. 다들 나한테 약속만 하고. 소녀는 원망했다. 모든걸 원망했다. 제일 원망스러운건 자기 자신이었다. 이대로 의식이 끊어질때까지 방에서 안 나올거다. 영원히. 그떄 초인종이 울렸다. 소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누구지 ?
소녀는 일부러 안 나갔다. 알고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다가올 사람이 걱정되기도 하였다. 지금 소녀를 찾아온다면, 그 사람이 멀쩡히 돌아가기를 장담할수 없었다.
소녀는 숨만 죽였다. 갑자기 철커덕하는 소리가 들린다. 현관이 열리는 소리다. 아. 결국 저 사람은 오는구나. 누군지도 모르지만 불쌍했다. 화분 밑에 숨겨둔 예비 열쇠를 찾았을거다. 바보같이 그런걸 숨겨두지도 않았다니, 소녀는 또 한번 자책했다.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그러더니 이 문 바로 앞에 서있는게 느껴졌다. 문을 두 어번 두드린다. 그리고 소녀에게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수아야 ? 안에 있어 ? ”
뭐야 ? 소녀는 몸을 움찔했다. 한일이다. 소녀가 사랑하는 사람. 왜 여기에 있는걸까. 지금쯤 소녀를 원망하고, 욕을하고, 떠나간 자리를 무덤삼아 침을 뱉어야할텐데 대체 왜 ? 한일은 소녀에게 대답하는 듯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 수아야, 괜찮은거야 ? 문 열어줘 ”
소녀는 주저하다가 몸을 일으켰다. 슬그머니 문 쪽으로 가까이 기댄다.
“ 수아야. 말 좀 해줘 ”
갑자기 철컥하는 소리가 들린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다.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 오지마 ! ”
문 너머의 남성이 물러서는게 느껴진다. 침대 위의 엄마도 약간의 미동을 보였다. 소녀는 실수했다는걸 알고는 숨을 뱉었다. 차라리 없는척해야했다. 문을 잠그고 죽은 듯이 있어야했는데.
“ 수아야 안에 있는거구나 ”
“ …..응 ”
“ 뭐하고 있었어 ? ”
“ 아무것도, 너가 신경 쓸 필요없어 ”
“ ….그래 ? ”
제발 가줘. 소녀는 그렇게 덧 붙였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를 밀어내고 싶지만 막상 실천하는건 두렵다. 마음이란 이렇게 나약하구나. 소녀는 실감했다.
“ 왜 왔어 ? ”
소녀가 물었다. 한일은 대답이 없었다.
“ 너도 다 들었잖아 ”
소녀가 말했다.
“ 나 떄문에 욕 먹었잖아. 그것도 억울한 일이잖아 ”
“ 왜 그런건지도 알고 있잖아 ”
“ 근데 왜 온거야 ? 욕 할려면 바로 해줘, 괜찮아. 마음 풀리면 그떄 가 ”
한일은 아무 말이 없다. 소녀는 그럴줄 알았다는 듯 쓴 웃음을 지었다. 찾아온 그도 어떤 뚜렷한 목적은 없었을거다. 해봐야 동정심이겠지. 대화는 없었다. 몇분이 지났다. 소녀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했다.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수아야, 나 고백할거 있어 ”
순간 소녀의 몸이 멈췄다.
“ 너, 나를 좋아하지 ? ”
“ 무슨 소리야 ? ”
소녀가 말했다. 한일은 상관없다는 듯 계속 말한다.
“ 근데, 너가 나를 좋아하는거 잘 모르겠어 ”
그는 말하고 있었다. 소녀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알수있었다. 저 문 너머 한일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채 말하고 있었다. 속안에 깊은 것을 털어놓는 모습이었다.
“ 나는 너의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
소녀가 방문에 손을 대었다.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간다.
“ 너는 나를 멋있게 봤었지 ? 내가 밝은 모습을 좋아했던거지 ? ”
무슨 말을 하는거야. 소녀는 되뇌었다. 왜 너 자신을 욕해 ? 왜 그러는거야 ?
“ 사실 아니야, 나는 그런놈이 아니야. ”
한일은 계속 말한다.
“ 나는 사실, 부모님이 안계셔. 지금 계시는 분은 어릴 때 입양해주신 분이야. 그 전에는 쭉 혼자서 살았어. ”
한일이 문 밖에서 눈을 감고 말한다. 왜 갑자기 옛날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수 없다. 이상하게 말이 저절로 나온다. 이건 아마 소녀에게서 자신의 옛날 모습을 보아서일지도 모른다.
“ 그것 때문에 놀림도 받고, 맨날 싸우기만 했어. 항상 시비는 아이들이 걸었는데 혼나는건 나였어. 그러면 개네들은 부모님이 찾아왔어. 찾아와서 달래고, 응석부리고. 그런데 나는 그런 부모님이 없었어. 나 혼자서만 울었어. 결국 싸우면 싸울수록 내가 혼자인것만 알았어 ”
“ 무슨 말을 하려는거야 ? ”
소녀가 말했다. 한일은 계속 이었다.
“ 그래서 한동안 너무 슬펐어. 아무것도 못하고 살았어. 그런데 좋은 부모님을 만나서 결국 나아진거야. 나는 그게 다야 나 스스로 노력한건 하나도 없어. 그냥 운이 좋아진 것 뿐이야 ”
소녀는 눈물이 흐르는걸 느꼈다. 왜 갑자기 자신의 아픔을 공개하는것인가. 그토록 숨겼던 비밀이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던 비밀이었다. 그런데 왜 ? 아픈 것 아닌가. 왜 자신 같이 쓸모없는 사람에게도 그런 말을 하는거야. 소녀는 가슴이 저리는걸 느꼈다. 그의 아픔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의 아픔을 몰래 훔쳐본 자신이 끔찍하다.
“ 미안해….사실 너가 어떻게 지냈는지 봤어. 정말 우연히 본거야. 일부러 그런건 아니였어. 그런데 그게….너가 그런걸 아니까 괜히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거야. 그냥… ”
잠깐 말이 멈췄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망설이는게 느껴졌다. 결국 한일이 말했다.
“ 수아야, 최근에 봤을떄, 정말로 예뻤어. 너무 예뻤어. 너가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 ? 나도 그걸 보고 잠깐 흔들렸던거 같아. 그런데 오늘은 그 말을 하려고 온게 아니야, 예쁘다는 말은 앞으로도 자주 들을거야. 내가 해주고 싶은말은 그게.. ”
“ 수아야 ”
한일이 말했다.
“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지 ? ”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소녀는 입을 가린채 숨을 죽였다. 조금만 건들이면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다.
“ 조금 괜찮아 ? ”
소녀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는 담겨있는 것이 많았다. 문 너머에 있는 한일에게 말했다. 함부로 너를 좋아했다고, 너가 원하지 않아도 멋대로 상상했다고, 더러운 짓거리를 했다고, 상상속에서 너를 묶고, 때리고, 목을 조르고, 나만 보도록 만들고 있었다고, 너를 몰래 따라다니고, 너의 물건을 몰래 가져가고, 너를 찍고, 집까지 들어갔다고, 그리고 너의 가장 숨기고 싶은 비밀을 보았다고.
아파하는 당신을 알았다. 이제는 좋아지려고 노력한 당신을 다시 힘들게 했다. 찌질하게 질투를 해서 당신을, 당신의 주변 사람을 아프게 했다. 결국에는 피해를 주고 말았다. 하지만 가장 슬프고도 미운 사실은
결국 그러고도 마음을 버리지 못한거다. 그래서 아예 모른척하고 살려고 했다. 아예 기억에서 지우고 살려고 했어. 겨우 참고있었는데. 며칠동안 방안에 스스로를 가뒀는데,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질 각오를 했는데, 대체 왜 ? 왜 ?
왜 그렇게 좋은 사람인건가. 당신은.
소녀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왈칵 방문이 열렸다. 소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다.
“ 엉엉. 한일아 미안해. 내가 나빠서 그래. 내가 병신이야. 내가 개 같은 년이야 ….엄마. 우리 엄마도 너무 불쌍해. 나 말고도 우리 엄마도 너무 불쌍해. ”
소녀는 계속 울었다. 침대 위에 있는 여자가 몸을 움찔했다. 한일은 그대로 서서 울고 있는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꼬옥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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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한달, 두달이 지났다. 삶은 계속된다. 삶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은 변한다. 그게 삶을 변하게 만들어준다.
소녀는 다시 학교로 나왔다. 주위의 시선이 두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을거다. 한일은 두려워하는 소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등굣길이다. 옆에는 평소대로 그 여인도 있다. 입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린다.
“ 이럴줄 알았으면 그 날 안 보내줬다고 ”
“ 미안해요 선배 ”
한일이 웃으며 말했다. 옆에 있는 소녀도 멋쩍게 웃는다. 여인은 칫 하고 혀를 찼다.
“ 나 참, 눈꼴시려워서 죽겠네. 나는 먼저 가볼란다. ”
여인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 한일과 소녀는 서로를 보면서 헤헤 웃었다. 한일이 소녀의 어깨를 툭툭친다. 약속을 지키라는 신호였다.
“ 저기…언니 ”
소녀가 여인을 불렀다. 여인은 새삼스럽다는 듯 뒤를 돌아본다.
“ 고맙습니다. ”
소녀가 꾸벅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여인은 황망하게 쳐다보고는 피식 웃는다.
“ 됐어, 늦지 말고 빨리 오기나 해. 첫 등교잖아 ”
“ 네 ”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인은 제 갈길을 간다. 씩씩하고 당찬 뒷모습의 여자가 멀어져간다. 한일은 그걸보며 소녀에게 말했다.
“ 저 선배 좋은 사람이야 ”
“ 응 ”
소녀는 동의한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소녀가 다시 학교로 나올수 있게 도와준 사람은 바로 저 여인이니까. 여인은 겉모습만 털털하고 가벼울뿐 나름 치밀한 사람이었다. 여인은 소녀가 퍼트린 헛소문을 역으로 이용했다. 어쨌든 그에게 관심이 쏠린건 사실이다.
그러자 그와 교제했던 여학생들이 하나 둘씩 나타났다. 의심스러웠을거다. 사실 다들 말은 없었을뿐, 속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소문을 계기로 입을 열기 시작한거다. 여인은 그런 여학생들을 모으고 입단속을 시켰다. 준비가 될떄까지는 말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모두들 동의했다.
그리고 여인은 소녀가 돌아올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소녀가 다시 웃을수 있도록 말이다. 먼저 한일을 이용했다. 한일은 여인과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는 조용히 소녀를 화두에 올리기 시작했다. 여인도 움직였다. 똑같이 소녀를 화두에 올렸다. 그리고 조금씩 진실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선배라는게 사실은 진짜 여자 몸을 찍는 쓰레기였다고말이다. 물론 신빙성이 필요하게 몇 명의 피해자들을 동원했다.
당연히 그는 거부했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런게 아니다. 목적은 관심을 소녀에게로 모으는거였으니까. 어느 날 여인은 확실한 증거들과 함께 그를 신고했다. 그에게 당한 피해자들도 함께다. 피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소녀에 대한 평판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녀가 화두에 오르고 얼마 안 지나 그에 대한 소문이 사실로 밝혀졌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학생들의 머릿속에서 소녀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사건을 해결했다. 결국 처음의 퍼트린 헛 소문도 그 구조가 허술했으니 변주되기는 쉬웠다. 소녀는 진실을 퍼트리려다 사라진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리고 자연히 평판이 올라갔다. 조금은 인상을 찌푸릴만하다. 그래도 사람 사는곳은 어쩔수 없는법이다.
한일이 여인에게 물었을 때 여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 뭐, 헛소문이든 뭐든간에 일단은 잡을 수 있게 도와줬잖아 ? 나도 똑같이 도와는 줘야지 ”
한일은 그대로 소녀에게 전해주었다. 소녀는 진심으로 감동을 받았다. 아주 멋있는 여자라고. 한일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인도 예전에는 소녀와 비슷했다. 그러니 너도 나아질수 있을거라고 말했다. 소녀는 그걸 믿었고 결국 학교에 나오기로 결심했다.
“ 한일아 ”
소녀가 한일을 불렀다. 그는 똑같이 소녀를 마주보았다.
“ 사랑해 ”
한일은 웃었다. 맞잡은 손을 더욱 꽉 쥐었다. 소녀는 좋아서 얼굴을 붉힌다.
하늘이 맑다. 두 사람은 함께 같은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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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서 39000자 쯤이다. ( 얀챈 글쓰기 탭 기준 )
어느 순간부터 이상할거임.
진짜 방금 전 까지 미친듯이 휘날려썼다. 좆같은 조별과제, 개 같은 생굴
솔직히 못 담은것들이 너무 많다. 날림 완결이라 거진 10000자 이상 쳐냄
기회가 된다면 전부 담아놓고 싶다. 특히 결말을 더 꾸미고는 싶은데...쯥..
어쨌든 주최자나 글쟁이나 다들 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