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글 - https://arca.live/b/yandere/6750435


전에 쓴 글이랑 합쳐서 통합본으로 올림



기사단 연무장에서 어김없이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탁! 퍽! 목검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소리가 화려하게 울려퍼졌고, 점점 속도와 박자를 높이더니 이제는 빈틈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의 간격으로 휘몰아쳤다.


어느새 연무장에는 많은 인파들이 모여 대련을 응원하고 있었다. 비단 기사들뿐만 아니라 기사단 막사에서 일하는 하녀들, 인부들, 종자들까지. 한 마음 한 뜻으로 한 기사를 응원했다. 기사는 맹렬하게 일격을 가하며 그들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만 좀 꽥꽥거려. 집중이 안 되잖아.


기사는 거침없이 대련 상대의 어깨를 향해 일격을 날렸다. 하지만 상대는 가뿐히 공격을 흘리고 검을 치켜올려 그녀의 목을 노렸다. 기사는 재빠르게 몸을 비틀어 검을 휘두르며 그의 공격을 튕겨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크게 돌렸다. 사뿐한 발구르기. 그 다음 동작은 기사의 허리를 향했다.


여기까진 예상하고 있었다고.


기사는 검자루를 내리찍어 그의 칼날을 막아냈다. 그리고 다시 검을 들어올려 그의 머리를 노렸다. 그는 이 상황에서 절대로 검을 들어 받아칠 수도 없고, 뒤로 물러나 공격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기사가 속으로 쾌재를 울렸다.


됐어, 됐어!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하지만 찰나의 순간, 그녀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짓궂은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검으로 내려치는 게 아니라 다리로 올려찼어야지."


그는 몸을 숙여 굴렀고, 그녀의 일격은 허무한 헛손질로 끝나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발목이 휘감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이를 바득 갈았다. 다리를 걸었구나! 그녀는 발목에 힘을 주어 버티려 했으나, 이미 무게 중심이 앞으로 쏠린 탓에 그대로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풀썩, 모래사장에 진한 키스를 한 기사는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으로부터 사방에 모래가 튀겼고, 구경꾼들은 환호를 보내거나 아쉬운 듯 한탄을 보냈다. 대련 상대는 여전히 짓궂은 웃음을 띄우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십쇼, 아가씨."


기사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리고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녀의 대련 상대, 얀붕이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래사장에 목검으로 뭔가를 적었다. 곧 숫자 하나가 적혔다. 0. 그 다음에 기호 : 가 쓰였고, 그리고 그 뒤로 숫자가 적힐 때, 기사 얀순이는 이성을 잃고 그에게 목검을 휘두를 뻔했다.


"자, 오늘 대련까지 해서 0 : 32……."


그 말까지 듣자 결국 얀순이는 참지 못하고 얀붕이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다.


**********


"져, 졌습니다."


또 한 명의 대련 상대를 굴복시킨 얀순이의 기분은 이상하게도 개운하지 않았다. 오히려 찝찝하고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녀는 대련 상대에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그대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상대는 기사단의 유망주. 짧은 시간 동안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고, 소문으론 동쪽 산에서 기승을 부리던 산적 떼도 단신으로 격파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상대는 되지 않았다. 그녀의 연격을 힘겹게 막던 그는 결국 틈을 보였고, 그녀는 그 틈을 향해 검을 찔렀다. 아마 진검이었다면 그 남자는 왼쪽 눈을 잃었을 것이다.


그녀는 분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렸다. 이런 전사도 그녀는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저 남자보다 체구도 작고 비실비실해 보이는 그 얀붕이라는 한량에게는 이길 수가 없단 말인가. 얀순이는 씩씩거리며 크게 발을 굴렸다. 그 따위 평민 기사 하나 이기지 못하고 이렇게 애만 태우다니. 공작가의 명예가 용서치 않았다.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향한 곳은 얀붕이의 숙소 방이었다. 다짜고짜 문을 열어젖힌 얀순이는 얀붕이에게 소리쳤다.


"나와라!"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던 얀붕이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났다. 얀순이는 그런 얀붕이의 멱살을 끌어올리고 어깨를 잡아당겼다. 얀붕이의 땀냄새 밴 채취가 풍겼다. 얀순이는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그대로 얀붕이를 연무장으로 끌고 갔다. 얼떨결에 얀순이의 손에 이끌려 연무장에 오게 된 얀붕이는 하품을 하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리 그래도 하루에 3번 대련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

"시끄럽고 검이나 잡아!"


얀순이가 얀붕이를 향해 일갈했고, 얀붕이는 허리를 돌리고 팔을 뻗어 올리며 몸을 풀고 목검을 집었다. 얀순이도 목검을 고쳐 잡고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얀붕이가 그녀를 향해 검을 치켜올린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신속하게 돌진했다.


검은 정확히 얀붕이의 미간을 향했다. 얀붕이는 얀순이의 돌진을 그대로 받아낼 생각인 듯 처음의 자세 그대로 얀순이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녀에게 사각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공격을 막지 않고선 못 베길 것이다. 그리고 공격을 막는다면, 바로 연격을 꽂아내리면 버티지 못하겠지.


"하앗!"


검은 얀붕이의 미간 앞에 멈춰섰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얀붕이의 검이 얀순이의 명치 바로 앞에 멈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얀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얀붕이와 얀붕이의 목검을 번갈아 보았다.

왜?

이번엔 도대체 어째서?


얀순이의 물음에 대답하듯 얀붕이는 목검을 던져놓고 얀순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왠진 모르겠지만 네 움직임은 뻔히 보인단 말이야."


얀붕이는 킥킥 웃었다. 얀순이는 이 얄미운 남자를 잡아먹을 듯 매섭게 노려보았다. 얀붕이는 그 눈빛을 보고 장난끼가 돈 듯, 그녀를 향해 짓궂은 농담을 건넸다.


"자, 이번 승부까지 쳐서 0 대 33……. 이거 점수 늘어날수록 결혼할 나이도 늦어지는 거 아니야?"


얀순이는 명예가 실추당하자 참지 못하고 얀붕이를 향해 목검을 휘둘렀고, 얀붕이는 깔깔 웃으며 그녀의 검을 피해 재빨리 도망쳤다. 쫒고 쫒기던 둘은 어느새 연무장을 몇 바퀴째 뛰고 있는 꼴이 되었고, 교관들은 그 모습을 질렸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치 어린아이가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얀순이는 정신없이 목검을 휘두르며 얀붕이의 뒤를 쫒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얀붕이! 네 이놈, 거기 서라, 좋은 말로 할 때 서! 지금 서면 아무 짓도 안 한다! 으아아아아! 너 잡히면 죽여버릴 거야!!"


서로 모순되는 말을 지껄이며 얀붕이의 뒤를 쫒아오는 그녀를 보며, 얀붕이는 미친 듯이 연무장을 질주하며 웃었다.


**********


"도대체 뭐야."


얀순이는 빵을 우물거리며 주먹을 부들거렸다.


도대체 내가 그 놈에 비해 부족한 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 놈은 나에 비해 출생도 비루한데다 검술 실력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고, 물론 훈련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치루고 있는 훈련보다 더 단계가 낮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도대체 왜, 그 남자에게 이기지 못한다는 것인가.


"기운 내십시오, 얀순 아가씨."


새로 온 견습 기사라는 놈이 옆에서 꼬리를 쳤다. 하찮기는. 얀순이는 분을 풀기 위해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홍차가 목을 넘어가는 동안, 견습 기사는 그녀에게 계속해서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탕발림을 날렸다.


"아마 요새 몸 상태가 좋지 않으셔서 그러실 겁니다. 요새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훈련에만 열중하고 계시잖아요? 아마 푹 쉬시고 다시 해 보시면 압승하실 수 있을 겁니다."


얀순이는 그녀의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아첨도 결국엔 현실로 다가올 것이다. 얀순이는 머지 않아 얀붕이를 굴복시킬 것이다. 그 놈이 엎드리며 패배를 선언하는 모습이 그려졌고, 얀순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조만간 바닥을 설설 기게 해 주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녀는 다시 홍찻잔을 입에 대었다.


하지만 그녀가 찻잔을 입에 댄 순간, 차마 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그 얀붕이라는 기사, 생각보다 별 거 없는 놈이더라고요. 얀순 아가씨를 이긴 것 치곤 제게 허무하게 깨져버렸으니 말입니다. 얀순 아가씨도 다음 번엔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거에요."


얀순이는 차마 차를 마시지 못하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견습 기사는 흠칫 놀라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그녀에게서 형용할 수 없는 기백이 느껴졌다. 살기에 가까웠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노리듯 기사를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손이 떨리며 찻잔 손잡이가 부서졌다.


그녀는 납득할 수 없었다.

네가 이겼다고? 얀붕이를?

그것도 아주 가볍게 쓰러뜨렸다고? 얀붕이를?

나도 지금까지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얀붕이를?

네가 감히?


얀순이는 거칠게 의자를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반동 때문에 의자가 바닥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견습 기사는 "히익!" 불쌍한 비명을 지르며 한 발짝 더 뒤로 물러났다. 얀순이가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한 걸음 가까워질 때마다 견습 기사는 얀순이에게서 흐르는 살기에 압도되어 눈물을 글썽거렸다.


얀순이가 그녀와 눈을 맞췄다. 어느새 그들의 거리는 주먹 하나만큼까지 좁혀졌고, 얀순이가 그녀를 노려보며 어깨를 끌었다.


"따라와라."


그녀는 얀순이의 팔에 이끌려 연무장까지 끌려오다시피 했고, 결국 연무장에 도착하자 얀순이는 그녀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녀가 눈물을 그렁거리며 손을 매만지는 동안, 그녀의 발치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연습용 목검이었다. 얀순이는 기사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집어라."

"네…… 네?"

"집으라 말했다."


얀순이는 차갑게 대꾸하고 검을 고쳐 잡았다. 기사가 우물쭈물대며 조심스럽게 검을 집어들었다. 얀순이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가 검을 집는 순간, 얀순이의 일격이 그녀의 어깨를 강타했다. 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졌다. 억울하다는 듯 기사는 얀순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는 비웃음 섞인 냉소를 보내며 말했다.


"다시 집어라."

"제…… 제가 뭘 잘못한 겁니까?"

"잘못?"


얀순이가 웃었다.


"아니, 네가 잘못한 건 없다. 네가 얀붕이를 이겼다고? 그것도 아주 가볍게? 그럼 네 실력이라면 나 정도의 검사는 쉽게 물리칠 수 있겠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기사는 그녀의 말실수를 후회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얀순이는 이제 그녀가 검을 집는 걸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녀는 매서운 찌르기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노렸다. 기사는 몸을 굴려 그 공격을 피했으나, 그 탓에 검을 놓치고 말았다. 얀순이는 그녀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고, 곧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졌다.


허리, 가슴, 배, 이마, 어깨, 그녀의 내려찍기가 계속해서 그녀의 몸에 꽂혔다. 기사는 몸을 둘러싸며 소리쳤다.


"죄, 죄송합니다! 얀순 아가씨!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자비를!"


하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얀순이는 기사를 향해 몇십 번의 일방적인 폭력을 가했고, 곧 그녀가 실신하여 정신을 잃기 전에 목검을 치켜올려 내리찍을 준비를 했다. 기사의 눈이 흔들리며 눈물을 쏟았다. 목검의 힘이 점점 아래를 향했고, 단두대처럼 그녀의 미간을 향했다.


"꺄아아아악!!"


기사가 비명을 질렀다. 검이 내리찍혔다. 쩍! 둔탁한 소리가 났다. 얀순이는 조용히 검을 거두었다.


기사는 눈을 뜬 채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녀의 머리 옆엔 음푹 패인 구멍이 생겼다. 얀순이는 그녀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다, 그녀가 쥐고 있던 목검을 그녀의 가슴 위로 집어던졌다. 벌벌 떨리던 그녀의 몸이 목검과 부딪히자 위로 크게 들썩였다. 얀순이는 기사를 그대로 방치한 채 연무장을 떠났다. 얀붕이의 숙소를 향해.


얀순이는 얀붕이를 호적수로 인정하고 있었다.

얀순이가 인정한 호적수를 모욕하는 놈들은, 얀순이를 모욕하는 것과 같았다.

얀순이는 얀붕이를 이길 것이다. 그 전까진 그 누구도, 얀순이에게서 그 영광스런 승리를 가로챌 순 없다.

이것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


얀순이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얀붕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얀붕이는 평소와 같이 얀순이의 공격을 가볍게 흘리며 카운터를 가했지만, 얀순이도 이번만큼은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얀순이는 반격에 맞추어 자세를 바꾸고 빈틈을 노려 일격을 가했다. 얀붕이는 그 기백에 맞춰 공격을 흘리고 막고, 다시 반격을 가했다.


쉴새 없이 연무장에는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마치 딱따구리 무리가 나무를 두들기는 것처럼 화려하게 난타했고, 구경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기사단장 역시 팔짱을 끼며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호오……."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다 그만 옆에 있던 사람의 존재를 망각할 뻔 했다.


"어떠신지요?"

"촉망한 인재들이구려."


기사단장의 옆에서 후덕해보이는 남성이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한 손으론 어린 딸의 어깨를 잡으며, 두 사람의 검무를 흥미로운 듯 지켜보고 있었다. 비록 그는 무예에 소질은 없었지만, 저런 화려한 검술에 혹하는 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의 어린 딸 역시 입을 헤 벌리며 아버지와 똑같은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검이 부딪히며 서로의 빈틈을 확인했다. 쩍! 목검 두 자루는 그 상태로 멈춰 서로의 동태를 확인했고, 먼저 파악을 끝낸 사람은 얀붕이였다. 물론 얀붕이는 얀순이에 비해 힘이 부족하지만, 얀순이는 그 힘으로 밀고 들어올 것이다. 그걸 이용해 공격을 흘리고 페인트 공격을 가하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계산을 끝낸 얀붕이가 검에 힘을 살짝 뺐다. 그 탓에 얀순이의 무게 중심이 조금 앞으로 이동했고, 얀붕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발을 크게 굴려 몸을 돌리고, 화려하게 그녀의 뒤를 향해 몸을 굴렸다. 관중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얀순이의 뒤통수는 완전히 노출되어 있었다. 얀붕이는 씩 웃었다. 그래도 이번엔 열심히 했구나. 그가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얀붕이는 검을 멈추었다.

그의 검을 막기 위해 황급히 뒤로 이동하는 얀순이의 목검 때문이 아니었다.

얀붕이의 눈은 기사단장 옆의 후덕한 남성과 귀여운 인상의 여자아이에게 향했다. 그는 그 둘의 정체를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국왕 폐하, 공주 전하.


그는 일부러 목검의 속도를 늦추었다. 얀순이가 충분히 그의 공격을 받아칠 수 있도록, 그리고 무너진 그의 자세에 일격을 가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을 잃은 얀붕이의 검은 얀순이에 의해 허무하게 공중에 띄워졌다. 무기를 잃은 얀붕이는 그대로 힘을 잃은 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얀순이가 그의 미간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두 눈을 커다랗게 불린 채로.


"졌습니다."


얀붕이의 선언에 관중들은 환호를 보냈다. 마치 일류 음유시인의 무대가 끝난 것처럼 여기저기서 박수와 찬사가 이어졌고, 특히 기사들의 환호성이 더욱 크게 들렸다. 기사들은 얀순이의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녀에게 찬사의 말을 보냈다. 얀순이는 그 상태 그대로, 얀붕이의 눈을 조용히 응시했다.


내가 이겼다.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얀붕이는 내 앞에 주저앉아 패배를 시인했다.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하나도 기쁘지 않단 말인가?


그녀가 검을 거두었다. 얀붕이는 그녀를 향해 웃으며 조용히 목례를 했고, 그녀 역시 그를 따라 황급히 목례를 했다. 고개를 든 얀붕이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축하한다."


얀순이는 얀붕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곧 얀붕이의 위, 정확히는 2층 높이의 테라스를 보고야 말았다. 국왕 폐하와 공주 전하. 그 둘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서야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얀붕이는 그녀에게 패배한 것이 아니다. 단지 져 주었을 뿐이다.

그녀가 국왕 폐하의 앞에서 망신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는 어느새 얀붕이의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그가 놀란 듯 얀순이를 바라보았다. 얀순이는 굳은 표정으로, 어둡고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전언을 전했다.


"잠시 따라와라."


얀붕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한참을 말이 없이 기사단 병영을 누볐고, 그들의 발걸음은 뒤뜰에 멈추었다. 주변에 인기척이 없음을 확인하자, 얀순이는 얀붕이를 벽으로 밀쳤다. 얀붕이의 몸이 벽에 부딪혀 살짝 들썩였고, 얀순이는 얀붕이의 머리 옆에 오른손을 내리쳤다. 얀붕이가 배시시 웃으며 얀순이를 내려보았다. 얀순이는 살기를 품은 눈빛으로 얀붕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그랬지?"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시치미 떼지 마라!"


그녀가 다시 한 번 오른손으로 벽을 세게 강타했다. 그녀가 건틀릿을 끼고 있었더라면 분명 벽에 패인 자국이 남았을 것이다. 얀붕이는 그리 생각하며 다시 얀순이의 오른손에서 시선을 거두고 얀순이와 눈을 맞추었다. 얀순이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분노가 쏟아졌다.


"내가 국왕 폐하의 안전이니 한 수만 봐 달라 부탁이라도 했나? 아니면, 너 같은 평민이 공작가 출신인 날 이긴 게 오점으로 남을 거라 생각했나? 내가, 내가 그딴 알량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하기라도 했냐고!"

"이야, 얀순이 주제에 내가 봐준 건 눈치 챘구나?"

"뭐라고?"


그녀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은 엄청난 속도로 진검을 뽑았다. 얀붕이의 눈이 커졌고, 그녀는 그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주 예리한 각도로, 그가 얀순이에게 허용했던 그 일격과 비슷한 각도로.


하지만 얀붕이의 대처는 방금과는 달랐다. 얀붕이는 물 흐르듯 그녀의 공격을 흘렸다. 이성을 잃은 그녀의 몸이 중심을 잃었고, 얀붕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얀붕이는 얀순이의 손을 내리쳤다. 밀려오는 격통에 얀순이는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고, 정수리에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딱! 경쾌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얀순이는 두 손을 들어올려 머리를 감쌌고, 다리를 굽혀 몸을 말았다. 그녀는 멍청한 표정으로 얀붕이를 올려다 보았다.


"아서라. 기사라 돼서 아군한테 검을 휘두르면 쓰냐?"


얀붕이가 가볍게 얀순이의 어깨를 두드렸다.


"무릇 기사라면 아군을 지키기 위해 적에게 검을 휘둘러야지. 그 멋진 검으로 아군을 벴다간 자랑거리도 안 돼, 인마. 특히 나한테는. 난 절대로 너한텐 지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얀순이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분한 듯 얀붕이를 노려보았다. 얀붕이는 그런 그녀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다음 번엔 안 봐줄 거야."


얀순이는 그의 얼굴에 눈을 맞추었다.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가 얀순이의 어깨를 토닥이고 뒤뜰을 떠날 때까지, 얀순이는 멍하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모습이 점이 돼자, 그녀가 천천히 일어났고, 어느새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그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의 이가 악물렸다. 얀순이는 뺨을 때리며 황급히 뒤뜰을 떠났다.

그녀는 얀붕이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


얀순이는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갑옷을 벗어던지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그녀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녀는 베게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리며 오늘 있었던 대련을 떠올렸다. 얀붕이는 그녀의 찌르기를 간파하고 단숨에 거리를 좁혀 목에 칼날을 대었다. 그녀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한숨을 뱉었다. 얀붕이의 입술이 그녀와 가까웠다. 한 걸음만 앞으로 나갔더라면 단숨에 입술을 훔칠 수 있을 정도로. 한숨은 곧 신음이 되었다.


얀순이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얀붕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얀순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손을 잡아 일어났다. 여기저기서 떠들어대던 관중들도, 둘의 싸움을 지켜보던 교관들의 모습도 이제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오직 한 사람만을 담고 있었다. 얀붕이가 그녀를 향해 웃었다. 얀순이는 그 미소를 떠올리며 소리 죽여 웃었다.


얀순이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손이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속옷을 향했고, 꼼지락거리며 애타는 마음을 위로했다. 얀순이가 한숨을 뱉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얀붕이의 미소를 생각했다. 한 마디 움직일 때마다 얀붕이의 거침없는 검격과, 한 마디 움직일 때마다 얀붕이의 입술을 생각했다.


만약 얀붕이와 맺어지게 된다면, 얀붕이의 아이를 낳게 된다면,

아이는 얼마나 강한 전사로 자랄까? 아이는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더 닮았을까?


얀순이는 그녀의 '보물'을 꺼냈다. 얀붕이가 대련을 하고 씻으러 간 사이 슬쩍한 전리품이었다. 그녀는 남은 한 손으로 그걸 집어 얼굴에 처박았다. 얀붕이의 땀냄새와 채취가 풍겨왔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졌다. 음습한 성욕으로 인해 그녀의 가슴이 설레였다. 그녀는 황홀하게 셔츠 속의 공기를 빨아마쉰 후 교태롭게 신음을 흘렸다.


얀순이의 몸이 들썩였다. 그녀의 손이 빳빳히 굳으며 절정을 음미했다. 그녀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사타구니를 탐욕스럽게 탐하던 손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진득한 액체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것을 입에 넣고 물고 빨고 핥으며, 그녀는 얀붕이의 이름을 속삭였다.

언젠가 널 이기고 말겠어.

그리고 그 다음엔….


얀순이는 행복한 망상 속에 잠을 청했다. 얀순이는 행복했다.

그 다음 날, 얀붕이가 공주의 호출로 왕궁에 불려가기 전까진.


**********


얀순이의 검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얀붕이는 가만히 검을 받아치며 틈을 노렸다. 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이변을 느끼며, 얀붕이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공격은 평소보다 더욱 빨랐고, 평소보다 더욱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정교한 자세가 없었고, 귀족다운 기백이 풍기는 자세 또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얀순이가 힘을 잔뜩 실은 올려치기를 하자, 얀붕이는 잽싸게 그것을 검으로 받아쳤다. 쩍! 큰 파열음과 함께 얀순이의 검이 하늘로 둥실 떠올랐고, 얀붕이는 얀순이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얀순이는 분한 듯 얀붕이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평소와 같은, 패배를 인정하는 듯한 기운은 아니었다. 오히려 얀순이는 초조함에 젖어있는 듯 했다.


"얀순아. 너 오늘 왜 그래?"


얀순이는 그 말에 흠칫 놀라며 얀붕이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입을 우물거리며 뭔가 말을 하려 하는 듯 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얀붕이에게 매섭게 다가갔다. 그 기백에 얀붕이가 흠칫 놀라 한 발짝 물러나자, 얀순이는 그의 손을 강제로 끌어 무언가를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얀붕이가 뭔가 질문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는 황급히 연무장을 빠져 나갔다.


"뭐지…?"


얀붕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작고 예쁘게 접힌 쪽지가 있었다. 얀붕이는 그걸 펼쳐 보았고, 아담하고 귀여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얀붕이는 얀순이가 이런 예쁜 글씨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 쪽지에 적힌 내용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단 창고로 와 줘.'


얀붕이는 쪽지를 다시 접고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녀가 미처 치우지 못한 기물들을 정리한 뒤, 그 역시 총총걸음으로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얀붕이는 가볍게 뜀박질을 하며 기사단 창고로 향했다. 얀붕이는 이런 자잘한 일에도 운동할 거리를 찾는 버릇이 있었다. 얀붕이는 흔해 빠진 범재였다. 얀순이에게는 매번 승리를 쟁취하는 그였지만, 다른 기사들 앞에선 맥도 못 추리고 손수무책 당하기만 하였다. 얀붕이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더욱 노력해야만 했다. 그녀와 대등한 위치에, 하다 못해 그녀의 발치에라도 서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얀붕이는 약간 설레는 마음에 속도를 살짝 높였다. 그는 혹여나 창고에서 얀순이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로맨틱한 상황을 그려 보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어 그 환상들을 떨쳐내 버렸다. 그는 평범한 재능만큼이나 평범한 출생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 같은 귀족 아가씨가 그 같은 평민에게 눈독을 들여선 안 됐다. 그녀는 그녀만의 세상이 있으니까. 얀붕이의 입술이 더욱 세게 짓눌렸다.


어느새 얀붕이는 창고 앞에 도착했다. 숲어귀 앞에 있는, 인기척 없는 장소였다. 약간 설레는 마음을 품고,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을 품고 얀붕이는 창고 문을 열었다. 퀘퀘한 나무 냄새가 그의 코를 간지럽혔다. 그리고 먼지덩이가 코로 들어오자, 얀붕이는 크게 재채기를 했다. 코를 훌쩍이며 창고를 둘러본 얀붕이는 위화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고 안에서 얀순이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얀붕이는 "얀순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는 기습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언가 얀붕이의 손을 붙잡았다.


"무, 뭐?"


그리고 뒤통수에 얼얼한 통증이 흘러 들어왔다. 다행히 기절할 만큼 강렬한 일격은 아니었지만, 골통이 울리는 탓에 얀붕이는 힘을 제대로 줄 수 없었고, 그의 손은 어느새 밧줄로 묶여 있었다. 곧 엄청난 힘이 그의 몸을 쓰러뜨렸고, 얀붕이는 그대로 먼지 가득한 바닥 위로 쓰러졌다. 얀붕이가 힘겹게 고개를 들어 괴한의 정체를 살폈다.


얀순이가 그의 가슴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야, 얀순아?"


그녀는 얀붕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팍을 붙잡고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에 맞춰졌다. 마치 떼어진 것을 원래대로 합치려는 듯, 얀순이의 입술은 얀붕이의 입술 위에서 우물거렸고, 그 틈을 비집고 미끈한 물건이 밀고 들어왔다. 얀순이의 혀는 얀붕이의 입 속을 게걸스럽게 탐했다. 그의 이빨, 혀, 입천장, 볼 안 쪽, 혀 밑에 고여있는 침, 그녀의 촉수가 입 속의 모든 것들을 훑고 지나갔다. 얀붕이는 읍, 읍, 나오지 않는 말로 얀순이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녀의 향긋한 채취가 흘러 들어왔다. 가끔씩 입이 벌어질 때마다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황홀한 눈으로 그와 입을 맞출 때마다, 얀붕이는 뒤통수의 통증과 알싸한 향기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 그만…."


얀순이는 "푸하." 한숨을 뱉으며 그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말에 수긍하여 입술을 뗀 건 아닌 듯 했다. 얀붕이는 떨리는 눈으로 얀순이를 바라보았다. 얀순이는 평소와 같은 찬란한 갑옷도, 기풍이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옷가지를 입고 있지도 않았다. 대신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고 있었다. 살짝 바람이 불기만 해도 그녀의 뽀얀 속살이 보일 정도로 아찔한 복장이었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고, 그녀의 손이 얀붕이의 옷가지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얀붕아, 하지만 더 이상 못 기다려."

"무슨 말 하는 거야, 이거 풀어!"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얀순이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거칠게 단추를 풀었다. 하지만 단추가 풀어지지 않자, 그녀는 손에 힘을 주어 얀붕이의 셔츠를 찢어버리듯 잡아 당겼다. 그 반동에 의해 얀붕이의 옷 단추가 폭발하듯 튀어올라 사방에 흩어졌다.


얀순이의 손이 황급히 그의 고간을 향해 내려갔다. 그녀의 손은 더듬거리며 그의 물건을 찾았고, 방금 전의 키스로 인해 부푼 그의 물건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얀순이가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는 흥분에 의해 거의 실신할 정도로 호흡이 불안정해져 있었다. 그녀의 속옷이 스르르 내려가 젖은 균열을 드러낼 때, 얀붕이는 다급히 소리치며 손을 꼼지락거렸다.


"야, 얀순이! 너 뭐 하는 거야, 네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알고 있어!?"

"알고 있어."


얀순이의 몽롱한 눈이 얀붕이와 마주쳤다.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어. 네가 왕궁으로 가 버리면 더 이상 너와 만날 수 없어. 안 돼. 안 돼. 아직 한 번도 너한테 이기지 못했는데, 이기면 꼭 너한테 고백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얀순이의 두 손이 얀붕이의 뺨을 붙잡았다. 얀붕이의 몸이 들썩이며 그녀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뱀처럼 그의 몸을 옭아맸다.


"그러니까 내 안에 확실한 증거를 새기면, 네 아이를 배면 돼. 헤어지지 않을 수 있어. 드디어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어."


얀순이는 얀붕이의 입이 열리는 것을 보자마자 재빠르게 그 입을 틀어막았다. 얀순이의 혀가 다시 한 번 탐욕스럽게 얀붕이의 입 속을 훑었다. 질식감에 얀붕이의 눈이 점점 위로 치켜 올라갔다. 그의 손이 다급한 손짓으로 손목에 묶인 밧줄을 긁었다. 얀순이는 황홀한 표정으로 그의 입술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사랑의 말을 속삭였다.


"사랑해, 얀붕아."


그리고 그의 물건을 그녀의 사타구니에 정확히 겨냥했다. 그녀가 허리를 숙여 그를 그녀의 몸에 들이려 한 그 순간,

얀붕이가 거칠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 어?"


당황한 얀순이는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고, 얀붕이는 그녀를 강하게 밀쳤다. 얀순이가 쓰러지자 얀붕이는 숨을 몰아쉬며 그가 묶여 있던 밧줄을 들어보였다.


"너, 포박술엔 영 재능이 없다?"


얀붕이는 무방비한 그녀를 덮쳤다. 얀순이가 몸을 들썩이고 신음을 흘리고, 때론 얀붕이의 몸을 걷어차고 할퀴며 손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얀붕이의 의도는 명확했다. 얀붕이는 그가 그랬던 것처럼 얀순이의 손목을 포박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어째선지 얀붕이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얀붕이가 그녀의 손을 묶으며 말했다.


"말했을 텐데, 넌 절대 날 이길 수 없다고."


마침내 포박을 끝낸 얀붕이는 땀을 닦으며 옷가지를 고쳐 입었다. 얀순이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얀붕이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향해 쭈그려 앉았다.


"이렇게 과격한 방법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야, 얀붕아…."

"공주 전하의 제안은 거절하고 왔어."


얀순이의 동공이 커지자, 얀붕이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뱉었다.


"너랑 좀 더 함께 있으려고."

"그, 그게 무슨…."

"왜 지금까지 네 고집에 맞춰서 대련에 어울려줬다고 생각해?"


얀순이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고,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얀붕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애원하는 듯한 얀순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런데 이건… 이건 선을 넘었지. 실망이다, 얀순아. 진짜 실망이야."


얀붕이가 혀를 찼다.


"정나미가 떨어질 정도로 실망이 커."

"아, 아니야, 얀붕아. 내, 내 말 좀 들어줘…."

"아니, 필요 없어. 내일 공주 전하께 말씀드리러 갈 거야. 호위 기사가 되겠다고. 그럼 너와 더 이상 마주칠 일도 없겠지."

"제발, 제발…."


얀붕이는 창고 문을 열었다. 몸을 크게 들썩이며 흐느끼는 얀순이를 흘끗 쳐다보고, 얀붕이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지금까지 고마웠다, 얀순아."


그리고 차갑게 문이 닫혔다.


얀순이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망연히 문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무너지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져 엉엉 울음을 했다. 얀붕이의 이름을 부르며, 내가 잘못했다며 흐느꼈다. 하지만 저 문이 다시 열리고 얀붕이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얀순이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얀순이는 거의 비명을 지르듯 얀붕이의 이름을 외치며 울었고, 어찌나 크게 울었는지 목이 매여 헛구역질을 하고 기침을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쉬어갔다.


얀순이는 그녀의 결정을 후회했다. 좀 더 건전한 방법으로 얀붕이에게 마음을 전했다면, 그에게 닿았을까? 하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하찮은 자긍심이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거부했다. 그 자긍심이 그에게 고백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녀는 그녀의 자긍심을 저주했다. 혀라도 깨물어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곧 그녀의 이빨이 크게 열렸다. 그녀의 생각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 윗니와 아랫니가 단두대 칼날처럼 서로를 향해 거리를 벌렸다.


"반성 좀 했냐?"


하지만 그녀의 이빨이 닫힐 일은 없었다.

얀순이는 그녀의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달빛이 내리쬐는 창문 틀 위에 얀붕이가 생글생글 웃으며 앉아 있었다.


"나 연기 좀 하지? 이야, 기사단에서 짤리면 오페라 배우라도 노려 봐야겠어."

"야, 야, 야…."


얀순이는 차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얀붕이는 사뿐히 창문에서 내려온 다음 천천히 얀순이를 향해 걸어왔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의 웃음은 따뜻하기 그지 없었다. 그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녀의 포박을 풀었고, 그녀의 손목을 매만졌다.


"어차피 호위 기사 자리는 물 건너 갔어. 공주 전하의 면전에서 대놓고 거절하고 나왔는데, 이제 와서 받아줄 것 같냐? 나라도 안 받아주지."


얀붕이는 그녀를 향해 치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쪽지 받았을 땐 솔직히 좀 설렜다? 근데 네가 이렇게 과격하게 나올 줄은 몰랐지. 좀…. 꼴리긴 했지만."


얀순이는 멍청하게 눈을 꿈뻑였다.


"그, 그럼…."

"속았지?"


얀붕이가 깔깔 웃으며 얀순이의 어깨를 토닥였다. 얀순이는 한참을 멍청하게 그의 웃음을 바라보다, 얼굴빛을 여러번 바꾸었다. 처음엔 창백하게, 그 다음은 빨갛게, 그 다음은 매우 시뻘겋게. 얀순이의 마음 속에 불꽃이 일었다. 방금 전의 음습한 성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안도, 그리고 분노. 그녀의 심장이 쿵쾅대며 손을 재촉했다.


그녀는 얀붕이의 몸을 밀쳤다. 경박한 웃음소리를 내던 얀붕이의 몸이 굴러 바닥에 쓰러졌다. 그럼에도 얀붕이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고, 게슴츠레한 눈으로 얀순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얀순이의 손이 얀붕이의 두 손목을 붙잡았다. 얀붕이는 웃음을 멈추고 얀순이와 눈을 맞추었다. 얀순이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불길한 웃음이었다. 분노로 일그러진, 하지만 살의는 없는 짓궂은 웃음이었다.


"그래, 네가 포박술을 좀 익혔단 말이지?"

"그, 그래."

"그럼 그 포박술로 내 손도 한 번 풀어보지 그러냐?"

"그…건 힘들 것 같은데. 너 나보다 힘 세잖아."

"그렇단 말이지."


얀순이의 웃음이 더욱 비틀렸다.


"내가 절대 널 이길 수 없다 했지?"

"그…랬지."


그녀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그럼 잠자리에서도 이길 수 없나 한 번 보자, 이 쌍놈아."


**********


목검이 서로 부딪혔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의 검을 맞부딪혔지만, 아버지에게 딸이라서 봐 준다는 여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딸의 공격을 막아내기 힘겨워했고, 딸아이는 그를 거세게 밀어붙였다. 곧 그녀의 공격이 아버지의 어깨를 강타했고, 그 충격으로 아이의 아버지는 검을 놓치고 말았다. 딸이 그를 향해 검을 겨누자, 그는 웃으며 두 손을 치켜올렸다.


"내가 졌다."

"졌네."


딸아이가 크흐흥, 만족스럽다는 코웃음을 뱉었다. 하지만 곧 어딘가 토라진 듯한 표정으로 목검을 집어던지고 그대로 잔디밭에 주저앉았다. 아이의 아버지도 그녀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곧 그의 딸에게서 속사포 같은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근데 왜! 왜 엄마한텐 못 이기는 거야! 아빠랑 붙으면 매판 이기는데 왜 엄마랑 싸우면 맨날 지냐구!"

"글쎄다."


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샌드위치 두 개를 꺼냈다. 하나를 입 속으로 우겨 넣으며 하나를 딸아이에게 건넸고, 딸은 샌드위치를 우악스럽게 입 속으로 집어넣고 웅얼거렸다.


"응에 애 어아으 아하항헤 호히히햐홍."

"다 씹고 말해라, 욘석아."


딸의 작은 목구멍으로 샌드위치가 넘어갔고, 그녀는 아까 못 다 한 말을 마저 꺼냈다.


"근데 왜 엄마는 아빠한테 못 이기는 거야? 아빤 맨날 나한테 지는데."

"글쎄올시다."


아버지가 머리를 긁적이며 환하게 웃었다.


"아마 내가 네 엄마랑 인간 상성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