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주의! 역NTR 묘사 있음.







"축하드립니다!"


-짝짝짝짝짝짝!


"아하하… 감사합니다."


"우아아아… 지휘관님과 내가 부부라니…"


서류를 써서 제출하고, 도장이 쾅 찍히면서 모든 직원이 기립박수를 날린다.


오늘부터 카리나와 정식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사귄지 불과 3주 남짓에 혼전임신도 가미된 초스피드 속도위반이었지만, 10년을 알고 지내며 이미 알건 다 아는 사이였기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만.


음, 물론 문제가 아예 없진 않다. 얀순이가 있으니까.


얀순이는 내가 외출한다는 것만 알 뿐, 그 외는 아무것도 모른다… 진짜 모를까…?


뭐 어쨌든, 지금은 카리나와 있으니 그녀와 손을 맞잡고 밖으로 나와 번화가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혼인신고도 마쳤고, 산부인과도 갔다왔으니 이제 할거라곤 놀기 뿐, 그중에서도 6시 정각의 저녁식사 시간이다.


"안 배고파?"


"좀 고프긴 하죠… 그러니! 오늘 저녁은 지휘관님이 해주신 음식 먹고 싶어요!"


"에이, 이런 좋은 날에 초 칠 일 있어?"


"아무리 많은 음식을 먹어봤어도 역시 지휘관님 요리가 최고라구요~ 그러니 오늘은… 토마토 스파게티!"


"그래? 흠, 너무 무난하네. 더 좋은 것도 있는데 왜?"


"임신하니까 평소에 잘 찾지 않는 음식들이 많이 당기더라구요. 우리 아가가 미식가여서 그런걸까요?"


"요녀석, 엄마 힘들게 하면 돼, 안 돼?"


"정말~ 뭐에요~! 아! 지휘관님, 혹시 잊은 거 없어요?"


내 요리가 먹고 싶다고 보채던 카리나가 갑자기 제자리에 서서 웃더니, 품에 폭 안겨 고개를 들어올린다.


"지휘관님, 우리 이제 부부잖아요."


"그럼. 아이도 있는 엄연한 가정이지."


"그런데, 아까 나오면서 키스를 깜빡 했어요…"


-쪽.


"이러면 돼?"


"조금 더…"


남편으로서 아내가 원하는대로,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방해되지 않도록 근처 한산한 공원으로 가 맘껏 키스를 나누었다.


입술이 떼어지자 내 허리에 손을 두른 그녀는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요, 지휘관님..."


"나도 사랑해, 카린."


"헤헤… 그러고 보니 이젠 서로 여보라고 불러도 되지… 않으으으으을… 으… 부끄러워…"


"하하, 그런가? 지금부터 그렇게 부를래?"


"아우으… 그냥, 지휘관님이라는 호칭이 제일 입에 감기고 익숙해서, 당분간은 이렇게 할래요…!"


"그래. 뭐든 익숙한 게 좋은거지."


이런 귀엽고 허당스러운 면이 그녀의 진정한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 그녀는 또 무언가 떠올린 듯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중 벌떡 일어나 다시 내 손을 잡아끌었다.


"밥 먹기 전에 들릴 곳이 하나 있어요!"


"그래, 가자."


"엥? 안 궁금하세요?!"


"으으음~ 굳이~"


"그러지 말고 한번만 물어보세요!!"


"하하, 알겠어~ 우리, 어디 가는거야?"


"비~밀! 히히~"


"음…?"


뭔가 속은 기분이 들지만 힘을 풀고 카리나에게 몸을 맡긴다.


다시 번화가를 가로질러 도착한 곳은 한 백화점. 외관부터 돈을 휴짓조각처럼 볼 사치가 줄줄 흘러나오지만, 거침없이 문을 연 그녀는 직원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날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그리고 목에 두르고 있던 목도리로 내 눈을 가리고 천천히 밀며 어디론가 이끌었다.


"얼마나 대단한 걸 준비한거야?"


"짜잔~!"


목도리가 빙글빙글 돌며 풀어지자 반지 한쌍이 명품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고급스러운 케이스에 담겨져 있었다. 나몰래 커플 반지를 준비해 온 것이다.


"정말 잘 어울려요, 고객님!"


"보통은 남성분들이 커플 반지를 준비하시는데, 고객님의 남편 사랑이 보통이 아닌가봐요~"


"저 혼자 독단으로 한거라…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어요…"


"...무슨 소리야? 엄청 예쁜걸! 고마워, 카린. 이런 비싼 반지를…"


"아, 흐흥! 지휘관님에게 걸맞는 반지일려면 이정도는 돼야죠!"


칭찬을 마구 날리던 점원들이 위에 씌워져 있던 유리 케이스를 벗겨내고, 남녀용으로 나뉘어진 반지를 건네줬다.


"자, 서로 끼워주는 거에요!"


"알겠어. 그럼, 네가 준비했으니 내가 먼저 끼워줄게."


카리나의 왼손을 들고, 약지에 천천히 반지를 끼워준다.


카리나도 마찬가지로 내 투박한 손을 들어 반지를 끼워주었고, 서로 왼손을 잡아 궁합이 잘 맞나 확인해본다.


"이렇게 하니까 더 예쁘네. 잘 어울린다, 그치?"


"만족하셔서 다행이에요… 지휘관님…"


"나야말로, 고마워."


"이제 돌아가요! 아까 얘기한 거 안 잊었죠?"


"그럼, 토마토 스파게티."


"히히히~ 맛있겠다…"


쇼핑한 물건들을 차에 싣고 훈련소로 복귀한다. 그리고 얀순이한테 보고를 해야될 시간이 왔다.


뭐라 둘러댈까, 누구랑 어디서 뭐를 몇시에 어떻게 왜 했다 할까?


일단 카리나를 방으로 보내고, 반지도 빼서 잘 숨겨둔 뒤, 얀순이가 일을 보는 사무실 앞에서 잠시 고민을…


"뭐해, 오빠?"


"아, 아아… 안녕, 얀순아…"


"할 얘기 있어서 온거야?"


"그, 오늘 외출 보고해야 해서 왔지…"


"그래? 들어와."


"응."


밖에서 오는 걸 생각 못했네…


예상과 달리 방 안이 아닌 복도에서 나타난 얀순이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마음을 다 잡고 대충 둘러댈 말을 체계적으로 조합했다.


얀순이가 건네준 서류에 인적사항과 날짜, 시간을 쓰고, 일정을 아까 생각했던대로 적는다.


"자, 여기."


"음… 친구와 술 마셨다… 오빠 친구들은 다 한국에 있잖아."


"아, 그그, 최근에 새로 사귄 놈이야… 당연히 남자고!"


"그래…? 그렇구나…"


"으응…"


"그 친구분은, 금발 머리에 사이드 테일을 하고 다니나 봐?"


"뭐… 뭐라고, 아니…"


"내가 모를 줄 알았어? 둘이서 아주 잘 놀고 다니더라?"


-쫘악! 쫙!


아, 기어코 알아챘구나…


열심히 머릴 굴려서 적은 서류가 쓰레기로 변해 눈처럼 떨어진다.


엄마에게 일탈을 들킨 아이처럼 어버버거리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난 얀순이는 내 옷깃을 부여잡고 일으켜 세워 차가운 목소리로 날 추궁하기 시작했다.


"시청은 왜 갔어? 말해봐. 설마, 혼인신고하려고 간거야?"


"맞다, 산부인과도 갔더라? 벌써 애 만들었구나?"


"잠깐만, 얀순아, 조, 조금만 진정해봐…"


"그놈의 진정, 진정. 난 언제까지 진정해야 돼? 언제까지 참아야 되냐고?"


"......"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훨씬 전부터, 그리고 더 많이 좋아하는데… 왜… 오빠느은…"


얀순이가 고개를 들어 나와 얼굴을 마주한다.


차가워진 적색 눈동자는 없는 게 이상할 지경이고, 입술을 꾹 다물고 눈물이 그렁그렁 찬 얼굴로 애써 울음을 참고 있었다.


소매로 눈물을 두어번 닦은 그녀는 곧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대더니, 내 목도리를 꽉 잡으며 말했다.


"더이상 못참아… 당장 따라와. 이건 상관으로서의 명령이야…"


"...…"


아까 카리나가 그랬던 것과는 정반대인 분위기 속에서 얀순이에게 질질 끌려갔다.


줄타기를 하는 건 이리 어렵구나. 


한명을 선택하면 다른 한명을 버려야 하는 그런 잔인한 상황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뭘까.


하나만 고르는 건 죽어도 싫었다. 어떻게서든 둘을 같이 데려가고 싶지만,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는 이게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제, 현실에 순응해야겠다.


카리나와 얀순이를, "아내" 카리나와 "여동생" 얀순이로 구분할 시간이 기어코 오고 말았다.


"들어가."


-콰앙!


"원래 다음주에 하려고 했지만, 더이상 못참아."


'심문실'이라 적힌 방에 강제로 집어넣어진 상황에서, 숨을 고른 후 그녀에게 사실상 선을 긋는 통보를 날렸다.


"...얀순아."


"왜…"


"그만 하자…"


"뭐라고…?"


"난 이미 결혼을 했는데, 널 어떻게 받아들이겠니…?"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그렇게 날 좋아했으면, 너와 내가 다시 만났던 그날에 바로 정체를 밝히고 고백했으면 됐잖아."


"아, 아니야… 그건…"


"뭐가 아닌데? 솔직히 말할게. 난 아직도 네가 이성으로 전혀 안 보여."


"아냐… 제, 제발 그러지 마 오빠아… 제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하자, 얀순이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으며 주저앉더니, 결국 첫 이별 때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 바지를 꼭 잡고 애원했다.


"우리, 다시 만난지이 이, 이제 일주일, 남짓이야… 그런데, 또, 또 오빠랑…"


"내가 여기로 넘어온 것도 794를 엿먹이려고 그런 거였지, 널 보고 넘어온 건 아니였어."


"그만… 그마아안… 나 싫어한다 하지 마아…"


"널 싫어하는 건 아니지. 그냥, 이성이 아닌 남매로서 사랑할 뿐이야."


"아, 아아…!! 아냐, 싫어… 싫어어… 여동생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오오…"


"나, 5살 때부터, 오빠 좋아했단 말이야… 오빠가 날 도, 돌맹…"


"그래서?"


"그래서…? 아, 그, 그러니까…"


"이거, 다시 돌려줄게."


목걸이로 차고 다니던 얀순이의 반지를 다시 풀어 다리 옆에 두었다.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다고 말했던 물건이지만, 이렇게 해서 선을 확실히 그어야 했다.


그러자, 얀순이는 더욱 과열된 반응을 보이면서 내 바지를 더욱 세게 붙잡고 절규했다.


"아아아, 이, 이거 내거, 아니야… 오, 오빠거야… 제발… 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제발… 오빠, 다시 생각해봐아… 응? 오빠… 제발요오…"


"저, 오빠가 해달라는, 건 다해드릴 수 있어요… 돈 필요하시면 드리고, 죽일 사람 있으면 죽여드리고… 오빠가 원하면 여기서, 이깟 몸 따위 맘껏… 쓰셔도 되고오…"


"김얀순! 미쳤어? 뭔 개소리야. 내가 그딴 쓰레기새끼로 보여?"


얀순이에 대하여 하나 더 알아간다. 절박할 때는 나를 향해 존댓말을 쓴다는 것, 그리고 선을 세게 넘는다는 것.


블라우스를 완전히 풀어 속옷을 드러낸 얀순이의 입에서 위험한 말이 흘러나오자 나도 모르게 고함이 나왔다.


얀순이를 말로만 상대해선 안 된다는 건 진작에 알아차렸으니, 참 안타까운 몰골로 웅크려 벌벌 떨던 얀순이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덮어 주고 발길을 돌렸다.


"히끅! 아, 아니요… 아니에요…! 오빠는… 세상 그 누구보다… 착하느은…"


"...그만해. 이만 갈게."


"아, 아아, 안 돼! 안돼안돼안돼안돼안돼! 가지 마!!! 지금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나가면… 엄청 후회할거야아…!"


"하아…"


하지만, 발걸음은 얼마 안 가 살벌한 협박에 멈췄다. 얀순이의 강한 권력을 알고 있으니 이렇게 마무리짓기엔 또 두려웠다. 강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스스로가 너무 싫었다.


"그, 그러니, 오빠… 오빠아… 저 두고, 가지 마세요… 무, 무서워…"


"얀순아, 일어나."


"오빠아아…"


곧 26살을 맞이하는 아가씨답지 않게 6살 아이처럼 엉엉 우는 그녀의 얼굴을 엄지로 닦아줬다.


딜레마에 제대로 빠진 지금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일단 얀순이를 의자에 앉혀 등을 토닥여주며 달래주자 울음기는 그나마 좀 잦아들었다.


하지만 조용함을 깨는 얀순이의 부탁은 나를 더욱 옥죄었다.


"오빠, 부탁 하나만 들어줘… 그, 소, 소원 있으니까…"


"응."


"나랑, 한 번만 해주, 면 안 될까…?"


"뭐…?"


"그러면, 더이상 오빠 안 괴롭힐게… 더이상 그 여자도 안 괴롭히고… 오빠 앞에서 좋아한다는 말은 절대 안 꺼낼게… 물론 지금 하는 것도… 아무한테도 안 말할게…"


"...그러니, 제발… 오빠한테 안기고 싶어…"


"아…"


이 딜레마는, 수심이 매우 깊다.


얀순이는 이미 다 준비해둔 침대를 펼치고, 콘돔을 꺼내온 뒤, 치마의 지퍼를 천천히 내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스륵…


"...오빠아…♡"


"아프면… 말, 해…"


"네♡"


그에 맞춰 25년을 지켜온 그녀의 입술에게 내 것을 내주었고, 서로의 몸을 껴안으며 딜레마의 어두컴컴한 심해층으로 끝없이 잠수했다.


내가 고통받을수록, 내가 썩어갈수록, 주변인들이 행복해지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죄책감이라는 수압에 죄어져 오는 고통을 꾹 참고 더욱 아래를 향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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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매우 더러운 기분으로 이뤄진 정사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온몸에 도는 혐오감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세상 어떤 미친 또라이가 혼인신고를 하고 반지를 맞춘 날에 바람을 필까. 구역질이 올라오는 걸 꾹꾹 참았다.


그 뒤에서, 불그스름한 흔적이 남아있는 이불에서, 땀으로 범벅되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얀순이는 한바퀴 빙글 돌아 날 껴안으며 몸을 일으켰고, 어깨와 목덜미를 조금씩 깨물며 말했다.


"고마워, 오빠…"


"......"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보이네… 알아, 나도 이해해… 내가 좀, 막 나갔지… 미, 안해…"


"...아냐."


"아니긴… 그리고, 내일도 사무실에 와줄 수 있어?"


"왜."


"이번 일 관련해서, 할 얘기가 있거든."


"...그래. 점심 먹고 찾아갈게."


"응, 알겠어…"


내 말투가 차가워진 걸 눈치챈 듯 얀순이가 허리에 둘러진 팔을 우물쭈물 풀었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청소를 시작하려는 찰나, 얀순이가 어디선가 리모컨을 꺼내며 말했다.


"아, 오빠,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


"응?"


"벽을 봐봐."


-삑!


저 벽이 뭐… 뭐야, 저게 접히는 거였네?


리모컨이 작동되었다는 신호음과 함께 벽, 아니, 셔터가 착착 접히면서 올라갔고, 그 너머에는 한 여인이 의자에 묶인 채로 눈물과 침을 질질 흘리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체를 보아하니, 기나긴 파란 머리의 꼭대기에 달린 두갈래 장식, 은빛깔 의복, 794에서 최강을 자부하던 전함, 그리고 날 질식시켜 강간한, 미 해군의 뉴저지가, 전혀 안 어울리는 이미지로 입에 붙은 테이프를 어떻게든 떼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으읍…! 으으읍…"


"자, 오빠가 궁금해 했던 미친년이야..."


"뉴저지…?"


-쫘악!


얀순이는 그런 뉴저지를 보며 실실 비웃었고, 내 코트를 겉에 두르고 일어나 뉴저지의 입에 붙은 테이프를 떼주었다.


수차례 기침을 하면서 흐느끼던 뉴저지는 멘탈이 제대로 박살난 듯 초점흐린 눈으로 날 바라보며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 기이… 어, 째서… 저 여자랑 한… 흐극, 윽…"


"......"


"내가 데려온 거 아니야. 오빠 만나고 싶다고 직접 대서양을 건너서 왔더라고."


"그런데 오빠한테 한 짓이 있어서 너무 괘씸한 거 있지? 그래서 주제파악하라고 오빠와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보여줬어."


"너, 너어… 이런다고 한, 적은 없었자나아…"


"반대로 안 한다고 한 적도 없었는데?"


"흐윽, 흑… 자기이… 나, 기염두이이라앙… 자기 만나려고오… 이, 이렇게 왔는데… 저 여자가아…"


"...하아… 진짜…"


그냥 이게 뭔 난장판인가 싶다.


나는 처자식을 지킨다는 자기합리화 속에서 이러고 있고, 내게 거래를 제안한 얀순이는 대가로 처음을 바쳤고, 날 만나겠답시고 대서양을 건넌 뉴저지에게 그 외설적인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단다.


순간 이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이 들어 그 자리를 박차고 침실로 돌아갔다.


뒤에서 두 여인이 날 잡으려고 소리쳤지만, 철저히 무시했다.


"아! 지휘관니이이임~"


"...카린."


"어라? 지휘관님, 혹시 안 좋은 일 있었어요…?"


"......"


"지휘관님…?"


"응, 있었지. 마누라한테 해줄 토마토 스파게티 소스병을 깨뜨렸지 뭐야…"


"후엣?! 마, 마누라라뇨?! 무, 물론 맞는 말이긴 한데… 부끄럽다구요오!"


내 가슴팍을 두드리면서 응석을 부리는 카리나의 몸을 꼭 껴안으며 은근슬쩍 반지를 다시 끼웠다.


"하하하, 알겠어. 그래서 소스 사오느라 좀 늦었네. 이제 스파게티 해줄게. 15분만 기다리고 있어."


"휴우, 깜짝아… 오늘은 왠지 더 배고프니까 많이 해주세요!"


"응. 하… 마가 꼈나…"


"뭐라고요?"


"아, 아무 말도 안 했어. 해물로 할까, 미트볼로 할까?"


"해물~!"


"그래…"


면을 삶고, 토핑을 볶고, 소스를 뿌리고, 또 볶은 뒤 젓가락으로 면을 배배 꼬아서 모양을 만들고, 오래 기다렸을 그녀에게 낸다.


"우와… 역시 지휘관님의 요리실력은… 전 정말 복받은 여자인 것 같아요! 이런 남자가 제 남편이라니… 히히히~"


"에이, 내가 어떻게 복이야…"


"정말, 또 그러시네! 지휘관님, 자신감을 가지세요! 지휘관님처럼 상냥하고 멋진 남자가 어딨어요?"


"...하하, 알겠어, 괜한 얘기 해서 미안해. 마음 놓고 얼른 먹어."


"그럼, 맛있게 먹겠습니다!"


"응. 어때?"


"으음~ 너무 맛있어요~! 아직 제 요리는 지휘관님에 비하면 한참 멀었나봐요…"


"잘 먹네… 다행이다…"


행복한 얼굴로 스파게티를 음미하는 그녀를, 식탁 위에 놓인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볼 때마다 죄책감은 배가됐다.


카리나에게 너무 미안해서, 부부가 된지 불과 몇시간도 되지 않아 그 의무를 저버린 스스로가 역겨워서, 깡이라곤 1도 없는 탓에 벌어지는 일들이 두려워서, 그날밤은 결국 잠을 설쳤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아아암… 응…"


그 다음날은 병든 닭처럼 골골대며 얀순이와의 약속대로 사무실로 향했다.


카리나가 손수 매어준 넥타이를 이리저리 만져대면서 도착한 그곳은 당연히 얀순이가 있었고,


"안녕 오빠."


"자기…!"


"하아… 얜 또 왜 여깄어?"


"지금 재밌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혼자 보기엔 아까운 거거든. 그래서 오빠 오기 전에 일단 머릿수 좀 늘려봤어."


오른손이 소파의 손잡이와 수갑으로 연결된 뉴저지도 남은 왼손을 흔들고 뻗으며 인사했다.


그 맞은편에 앉아 한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찔리긴 찔렸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손가락을 꼬물거린다.


"뭔 자신감으로 왔냐?"


"아, 그, 그니까…"


"경찰 부를까?"


"냅둬. 이미 체포된 신분이야."


"그래? 참, 뉴저지, 너도 큰 건 안 바라지?"


"....자기이… 난, 내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어... 그치만, 이 아이는…"


"쯧. 그래서, 아이 낳을 때까지만 나 좀 봐달라고?"


"......"


(끄덕끄덕)


"에휴…"


"나도 내가 염치없는 건 알아… 하지만, 귀염둥이는… 엄마가 죄인인 거 빼곤 죄가 없으니까아…"


"그런 죄없는 아이들을 가지고, 날 가두는 족쇄로 써먹어? 처음에 메이드장들한테 그 소리 듣곤 순간 내 귀가 맛이 갔나 생각했던 건 알려나?"


"우으…"


"...어쨌든 난 아이만 데려갈테니, 쓸데없는 기대는 하지 마. 알겠어?"


"아… 으응…"


뉴저지와의 일은 대충 처리된 것 같으니, 그 재밌는 일이 뭔가 알아볼 차례다.


잠시 화장실에 가서 마음정리를 하고 사무실로 돌아가자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던 얀순이가 해맑게 날 부른다.


"맞다, 재밌는 일은 또 뭔데?"


"아, 오빠, 타이밍 아주 좋았네. 얼른 와봐."


왠지 느낌이 안 좋지만, 재밌다고 하니 일단 들어보긴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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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와 폭우 속에서도 아랑곳 않는 군인들이 철통같이 지키는 모 건물 앞, 곳곳에 생긴 웅덩이를 가르는 소리와 함께 SUV 군단과 검은색 세단이 그들 앞에 정차했다.


군인들이 소총을 내리고 달려가 세단의 문을 열어주자, 그들과 똑같은 회색이지만 장성에 걸맞게 훈장을 비롯한 여러 장식으로 치장된 군복을 입은 남성이 언짢은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하, 참, 이 날씨에 사람을 부르고 난리야. 정신나간 양복쟁이들 같으니. 다들 많이도 기다렸겠어."


"총감님, 다음 일정은 인근 도로에 사고가 발생해 본래 약속 시간보다 늦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1시간 정도 연기할까요?"


"헬리콥터를 부르면 되지 않나."


"악천후 때문에 헬리콥터 이륙이 불허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그 맛간 고철들을 어떻게 피하려고 하나? 일개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를 죽이려고 든 게 불과 한 달 전이라고! 그것도 두번이나!"


"최근 구 794 부지에서 관측된 활동은 0에 수렴…"


"물개나 땅개나 이미 그년들 아래에 기어들어간지 곧 10년인데, 그런 새끼들이 주는 정보를 어떻게 믿겠나!"


"나참, 요즘엔 자다가 이마에 구멍 뚫릴까봐 침대에 눕지도 못하겠거늘, 총리각하께서 빨리 정신을 차리시던가 해야지…"


남성은 차내에서부터 쭉 궁시렁대면서 건물 안으로 향했다.


건물 내로 들어갈수록 최근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로 더욱 심해진 편집증을 비서에게 뽐내고, 그런 비서는 애써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그를 흘겨보곤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구두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림에도 그를 반거주는 이는 하나 없었다.


"뭐야, 왜 아무도 없지?"


"여기 맞는데…?"


"자네, 혹시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나?"


"아닙니다..."


"그럼 왜 아무도 없지?"


"일정대로라면 여기서 방공장교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야 하는데 왜… 일단 연락해보겠습니다."


본래라면 자신이 부른 부하 장교들이 일제히 경례하며 맞아줬어야 했다.


휑한 연회실에 그들이 있어야 했고, 먼지가 쌓이기 시작한 식탁은 진수성찬이 올려져 있어야 했다.


혹독한 한파로부터 도망쳐온 거미의 집의 일부가 된 스피커에선 잔잔한 음악이 나왔어야 하고, 불꺼진 주방에선 음식을 만들고 나르느라 바쁜 요리사들이 있어야 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봤음에도 사람이라곤 자신들밖에 없음을 알아챈 비서가 휴대전화를 꺼내 일제히 메시지와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뭔가 잘못됐습니다! 전원 연락부재입니다!"


"젠장, 당장 시동걸라고 해!"


앵무새처럼 반복되는 TTS의 부재중 전화 알림에 상황이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닫고 남성의 뒷목을 잡아 출구로 뛰기 시작했다.


남성, 독일 연방군 공군총감 헤르만의 편집증은 뒷목이 잡힌 불쾌함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다시 발동되었고


"기사, 기사…"


-연락을 받지 않아 삐 소리로…


"기사도 당한 것 같습니다!"


"이런 씨발! 대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거야?! 당장, 당장 호위병력 출동시켜!"


"비상! 비상! 총감님이 위험에 노출됐다! 전 병력은…"


-치이이익!


"이 미친년들!! 내가 여기 올 줄 알고 함정을 파둔 거야!"


무전기에서 자신을 지켜줘야 하는 호위들의 신호 대신 애석한 노이즈가 흘러나오자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극에 달했다.


거기에 엎친 데 덮친다고, 마침내 건물을 벗어나 차량에 도착한 그들 앞에는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런 미친…! 총감님, 타십쇼!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벌써 왔어! 벌써 왔다고! 빨리, 빨리! 그냥 밟으면 되잖아!!"


방탄처리를 철저히 한 창문과 타이어가 걸레짝이 된 차량들, 벌집이 된 채 핸들에 머리를 박은 세단의 운전기사, 목이 그어지거나 이마에 구멍이 뚫린 호위병들이 그들의 운명을 암시했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세단의 타이어는 아직 살아있었다. 놓칠세라 차에 탄 헤르만은 비서에게 빨리 출발하라고 재촉했다.


-끼이이이익!


타이어가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차가 움직이면서 그 희망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앞에서 헤드라이트를 일제히 킨 또 다른 차량들이 기다린 것처럼 그 빛을 앗아갔지만.


속도계의 눈금이 20km/h를 살짝 넘다가 초라하게 0을 가리켰다.


"총감님! 빨리 피하ㅅ…"


-탕!


"허어어억…!"


-타앙! 


-푸쉬이이익…


비서의 머리가, 유일하게 살아남아있던 타이어가 요란하게 폭발하면서 그의 빛이 사그라든다.


비명조차 안 나오는 그의 앞에 선 차량들의 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검은 정복의 군인들이 나타났다.


군인들은 중앙으로 가 헤르만의 세단과 대치하고 있던 또 다른 2대의 세단으로 향해 뒷문을 열었고


-또각, 또각, 또각…


마찬가지로 2명의 여성이 내리자 일렬로 서서 경례해 예의를 갖추었다.







그가 794의 여인들 중에서도 제일 싫어하는 두 여인이, 자신과 같은 회색 정복 대신 투박한 철십자가 두루 박힌 검은 정복을 입고 천천히 세단으로 걸어왔다.


허벅지까지 오는 금속 부츠가 만들어내는 섬찟한 소리에 저절로 몸이 움츠러들고, 약속이라도 한 듯 약지에 반지가 껴진 왼손에 연기를 뿜는 루거 권총이 들려져 말문을 막았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와 적기는 '게슈타포에게 걸린 불순분자가 이런 기분이었을까'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덧 여인들과 헤르만은 문을 사이에 두고 복장을 주제로 썩 달갑지 않은 안부를 나누었다.


"안녕, 헤르만. 오랜만에 보네?"


"참 질리는 얼굴이에요. 헤르만 씨."


"네년들일 줄 알았어… 그… 그 옷은…"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 놀란건가?"


"이번에 새로 맞춰봤답니다. 당신같은 벌레 따위한테 보여주긴 싫지만, 좋은 일만 하고 살 순 없는 법이죠, 안 그래요?"


"참나… 쿨럭! 네년들의 시꺼먼, 컥, 속내를 잘 나타내는군…"


"원래 밖에선 안 입었던 옷이지만, 오늘은 중요한 일을 맡았으니 좋은 걸 입어야지."


"최근에 개조를 좀 했답니다. 코어를 갈고, 새 무장을 장착하고, 더욱 빠른 프로세서에, 음, 뭐 이정도에요. 그러면서 새로운 제복도 입었죠."


"개같은 나, 나치년들 같으니…"


"나치라, 참 이해가 안 가. 폴루들도 그렇고 나치라는 걸 현 시대에서 왜 찾을까?"


"네년들이나 저 뒤에 있는 새끼들이나… 케헥, 복장이 딱 지옥에 있는 총통놈 취향이니 그렇지…"


"어머나, 그 사람보단 지휘관의 취향이었으면 참 좋겠는데… 뭐, 이제 옷 얘기는 그만할 때도 됐어요. 자, 헤르만 씨, 내리세요."


"싫, 다면…?"


모든 수를 잃은 그가 나지막하게 뱉은 마지막 발악. 조그만하고 약해빠진 개가 크고 강한 개에게 왈왈 짖는 것처럼 상대의 명령에 무조건 불복종으로 대응하기로 마음 먹는다.


"글쎄, 후회할텐데?"


"좆, 까…"


"마지막 기회에요. 내리세요."


"좆까라고…"


""......""


"...그래. 내리지 마. 그대로 있어."


그의 발악에 이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인 금발 여인의 뒤에서 하늘색 큐브가 나타났다.


큐브는 빙글빙글 돌면서 점점 커지더니, 검은색과 빨간색이 조화를 이룬 거대한 삼두용의 형상을 띄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새 의장이다. 이름은 게리온이고, 배가 많이 고픈 녀석이지."


"마침 여기 좋은 먹이가 있으니 다행이군요."

 

"게리온, 배고팠지? 자. 특별히 고기도 넣어놨어. 어서 먹어."


-쾅!


"끄아악! 괴물…!"


용은 주인이 가운데 머리를 쓰다듬으며 차량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쏜살같이 날아가 앞발로 차를 잡아들었다.


그러면서 차가 세로로 세워지자 그의 몸은 이곳저곳 부딪히며 구겨졌고, 그걸 본 은발 여인은 은은한 미소가 피어오른 채 쪼그려 앉아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내려드릴까요?"


"빨리 꺼내라고! 저 괴물한테 먹혀서 죽는 건 싫어!"


"후후, 그렇게 나오셨어야죠."


-우지직!


-끼익…


"허억… 허억… 원하는, 게 뭐야…"


헤르만이 마침내 백기를 꺼내 들자 은발 여인은 차의 뒷문을 잡고 우악스럽게 뜯어내 그를 꺼냈다.


발이 되어줄 차량은 고기가 사라진 것에 화가 난 용에게 보닛, 캐빈, 트렁크로 쪼개져 게걸스럽게 씹어먹히는 상황 속에서, 그는 비내리는 바닥에 굴욕스럽게 머리를 박았다.


왼팔과 오른팔이 되어줄 비서와 운전기사는 머리가 사라졌고, 뇌가 되어줄 부하들은 행방불명됐고, 갑옷이 되어줄 호위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거라곤 구차하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비는 것뿐이었다.


여인들은 그런 그를 비웃으면서 부츠로 그의 머리를 꾸욱 눌러 고문했고, 은은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원하는 걸 드러냈다.


"다음주에서 다다음주, 참새녀석들이랑 뭘 할 계획이었지?"


"네년ㄷ"


-꾸우욱


"끄아아아악!!"


"아직도 주제파악이 안 되시나요? 존댓말 하세요."


"...크윽… 끅… 그 미국년이… 말하길 방공 시스템을… 해제하라고 했… 습니다…"


"방공이라, 이유는?"


"그날, 794 지역을 싸그리… 폭격…"


"아, 후훗, 그런 거였어요? 제대로 마음을 먹으셨나 보군요."


"지휘관은… 지금 그 년의 수중에…"


"...그 년한테 전해. 날 건드리면, 지휘관을 건드리면, 죽여버리겠다고."


"크하학…! 허억… 허억…"


"일어나세요. 우리의 깊은 인연을 이렇게 마무리하기엔 너무 아쉬우니까요."


금발 여인이 살벌한 경고와 함께 부츠를 세게 누르며 떼자, 그나마 숨통이 트인 그는 연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얼마 안 가 은발 여인도 발을 뗀 뒤 그를 잡아들어 미리 준비해둔 밴에 던져넣었다.


"왜, 어디서부터 잘못된건가…"


"총리각하가 저 년들을 신뢰했을 때부터…?"


"아니면, 지휘관이 794에 왔을 때부터?"


"왜… 왜… 왜…"


곧 디젤 엔진의 우렁찬 시동 소리가 차내에 울러퍼진다.


그러면서 그의 의미없는 의문은 엔진음에 가려져 사라진다.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은 순간,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빛과 진동을 낸다.


-우우우웅!


"......?"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을 집어들자, '올리비아 장관'이라 적힌 화면이 보인다.


고민할 새도 없이 전화를 받아 또 다시 목숨을 구걸해본다.


"올리비아, 나요! 지금 794의 또라이들이 날 납치해서 어디로 끌…"


"알고 있습니다. 총감님."


"그럼 나 좀 구해주시오! 탈출한다면 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지 하겠소…!"


"가만 생각해봤는데, 디데이의 계획을 고칠 필요가 있더군요."


"그 계획인지 지랄인지는 알 바가 아니고 나 좀 구해달라고!!"


"질문 하나 드리죠. 더이상 필요가 없는 물건을, 굳이 챙길 이유가 있을까요?"


"뭐…?"


올리비아의 매정한 말에 헤르만은 무언가 끊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생명줄과 연결됐다는 걸 이해하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찮게 토사구팽을 당했지만, 이젠 더이상 화를 낼 힘도, 희망을 구걸할 힘도, 고민할 힘도, 모두 없다.


"...씨발, 여기나 저기나 내 편은 없군…"


"더이상 살 이유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맘대로 해. 어차피 죽은 목숨인 거, 담배나 한 대 피우면서 가지…"


"누가 죽고 싶을 때 죽여준다고 말이나 했나요?"


"그건 또 뭔"


-콰앙!


-끼이이이익!


"크악! 악! 어윽!"


담배나 하나 꺼내들어 그나마 멋진 최후를 연출하고 싶었던 헤르만을 향해 순간 무언가 번쩍하면서 밴에 날아들었다.


중심을 잃은 밴에서 이리저리 나뒹군 탓에 한모금 채 빨지 못한 궐련은 저 멀리 튕겨나갔다.


"끄윽… 윽…"


"어라, 으아아악!!"


온몸의 뼈가 부러진 채로 엎드려 신음하던 그는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뚫린 천장으로 내리쬐는 달빛에 비춰진 오른팔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올리비아, 얀순은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비명에 흡족스러워 하며 말했다.


"대인용 미사일이라고 아세요? 차를 타든, 걸어가든, 딱 목표만 맞춰서 죽여버리는 물건이랍니다."


"그런데, 지금 캠을 보니 참 운이 좋으셨네요. 팔만 날아가다니. 이건 예상 외인걸요?"


"으어어으그윽… 대체, 내가윽… 뭘, 잘못…"


"하나만 하세요, 헤르만. 우리 둘의 약속을 그렇게 쉽게 불어버려놓고 용케 살아나갈 거라 생각했어요?"


"곱게 보내주려고 했더니, 우리보다 더 원한이 큰 사람이 있었나봐?"


마침 금발 여인이 자신이 타고 가던 세단의 뒤에서 일어난 촌극에 고개를 저으며 그들의 대화에 껴들었다.


헤르만의 옆에 떨어져 있던 휴대폰을 주워들은 그녀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저 바다 너머의 얀순에게 살벌하게 말했다.


"지휘관, 어딨어."


"아, 그쪽이 비스마르크였나… 기억이 안 나네요. 어쨌든 목숨 살려준 것만으로 고마워하세요. 남의 남자에 신경쓰지 마시고."


물론 얀순도 살살 긁어주는 말과 함께 여인을 조롱했고,


"넌, 내가 이 녀석보다 잔인하게, 살려달라고 빌 때까지 가지고 놀다가 죽인다. 기대해."


"뭐? 참, 같잖아라. 너따위 깡통년이, 나를?"


"말투가 바뀌었군. 더욱 죽이고 싶어지네."


"아, 오빠, 타이밍 아주 좋았네. 얼른 와봐."


"오빠…?"


"누구랑 통화하냐고? 후후, 별 거 아니야. 오빠 예전 부하들이 오빠가 보고 싶다길래 직접 꿈깨라고 일러두는 중이었어."


"지휘관이… 네년의 오빠라고…?"


"무슨 일이에요, 비스마르크 씨?"


"지휘관! 들리면 대답해! 지휘관!"


"지휘관…?"


가진 자의 여유를 맘껏 드러내며 덩달아 온 은발 여인까지 편하게 가지고 놀았다.


"...비스마르크."


"지휘관…!"


"정말 지휘관이에요…? 지휘관!"


"카라비너까지… 하아, 난 너희랑 할 얘기 없어."


"지휘관! 우리 아주 조금만…"


"지휘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할 얘기가…"


"응, 오빠, 괜찮아, 좀만 쉬어. 아직도 이 년들한테 배신당한 충격이 완전히 가진 않은 거 같아."


그 여유, 모두가 가지길 원하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여인들은 간절하게 그와 대화라도 나누길 원했지만 남자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남자를 사실상 소유하고 있는 여인이 다시 나타나 조롱으로 대응했다.


"후후, 갖고 싶어?"


"...지휘관의 털 끝이라도 건들었다가는, 좋은 꼴은 못 볼 거에요."


"귀여운 협박이네. 너희 옆에 있는 등신새끼 뒤치닥거리나 하지 그래?"


-뚜우… 뚜우…


서로를 향한 비난만이 오가던 통화가 얀순에 의해 끊기자, 잠시 잊혀졌던 헤르만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들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가 놓친 궐련을 주워들었다.


늘 자신들을 괴롭혔던, 그리고 얀붕이 떠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한 헤르만은 그녀들의 입장에선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었다.


"생각을 고쳐야겠네. 넌, 곱게 죽기엔 업보가 너무 쌓였어. 스스로도 알지?"


"체펠린 씨에게 미안하지만, 여기서 끝을 봐야겠어요. 어차피 마무리는 제가 지을 생각이기도 했으니…"


"우릴 괴롭히는 것까진 참을만 했어. 거기에 내 동생을 사지로 몰아가기까지 했지만 결국 잘 넘겼지. 근데, 지휘관을 건든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 헤르만, 넌 네 무덤을 알아서 판거야."


"뭔… 개소리야…"


"그거 아세요? 디젤은 휘발성이 낮아서 불을 붙이기엔 부적합하답니다."


-드르르륵!


은발 여인이 밴의 보닛을 열고, 엔진의 캡을 돌려 빼낸다.


그러자 누런색의 엔진오일이 흘러나와 아스팔트 바닥을 적시며 달빛에 은은하게 빛났다.


"설마, 컥… 그만… 둬어… 개년들ㅇ…"


"내일 아침 뉴스의 헤드라인을 끝으로, 더이상 보지 말자고, 헤르만."


"좋은 밤 되세요. 멍청한 헤르만 씨."


-틱!


바닥이 적당히 적셔진 걸 확인한 금발 여인은 방금 주운 궐련을 그대로 땅에 튕겨 던지고 은발 여인을 따라 각자의 세단으로 돌아갔다.


활활 불타오르는 밴을 칠흑 같은 아우토반의 유일한 조명으로, 한 남자의 끔찍한 비명소리를 야밤의 요깃거리로. 그러나 세단의 12기통 엔진이 요깃거리를 천천히 잠식해 곧 게눈 감추듯 없애버리자, 여인들은 아쉬운지 고개를 까딱이며 잠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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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2편이 올라와야 했으나 고민 끝에 두편을 합친 뒤 잘라낼 건 잘라내는 식으로 썼습니다.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