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얀순아… 그게…"


"아니다, 우선 앉아. 괜히 서서 힘빼지 말고."


"아, 크흠, 응."


방금 전까지 카리나와 치고박던 사람이 맞는건지 아주 평온한 얼굴로 컴퓨터와 서류를 만지작거리던 얀순이.


마치 기계가 모드를 바꾼 것 같은 느낌이다. 수많은 모드 중에서 기본이 되는 저 포커페이스야말로 뭔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지 모르니 제일 두렵다.


얀순이의 안내대로 소파에 앉아 잠시 뜸을 들인 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얀순아, 아, 쩝… 오빠가…"


"잠깐, 미안하다고 하면 내쫓을거야."


"그, 그게 아니라…! 내일, 외출 좀 나가도 될까…?"


"외출? 갑자기?"


"어… 그… 어… 그냥, 바깥 공기나 쐴까 싶어서."


"뭐, 그래, 잘 다녀와. 답답하면 나갔다 와야지."


"응."


"".......""


얘기가 끝나자마자 무겁게 깔리는 어색한 침묵. 


우선 쉬운 관문인 외출 허가는 맡았다. 근데, 이제 어려운 관문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지?


'어쩌지, 어떡하지? 아… 머리야…'


"오빠."


"아, 어어어. 왜?"


"더 할 얘기는 없는거야?"


"그, 아, 뭐냐… 하아…"


"오빠?"


"얀순아, 그냥, 요즘 머리가 많이 복잡하다…"


"......"


"오빠, 그거 기억나?"


"응?"


결국 뾰족한 수가 없어서 한심하게 푸념이나 지껄이려는 순간, 얀순이가 무언가 떠오른 듯 말을 끊었다.


"며칠전에 내가 경주에서 이겼을 때, 소원 받았잖아."


"…그게 왜…?"


"그 소원, 지금 쓰려고."


"어, 그, 그래. 한 번 말해봐..."


곧이어 상당히 불안한 얘기가 나오자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 영리한 애가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 숨을 졸이며 행복회로를 돌려댈 수밖에 없었다.


내 질문에 행동으로 대답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얀순이는 온몸이 쫄깃해지는 하이힐 소리와 함께 소파로 다가왔고


"윽?!"


"왜, 내가 그렇게 무거워?"


"아니 잠깐만…"


"...후후♡ 오빠아…"


아주 자연스럽게 허벅지 위에 앉으면서 날 껴안았다.


예상을 하긴 했지만 매우매우매우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지자 머리는 복잡해지는 수준을 넘어 과열되기 시작했고, 입은 무슨 말을 출력할지 몰라 이상한 소리만 수없이 뱉어댔다.


"오빠에게 난 여동생이잖아. 그 여자는 약혼한 연인이고. 그치?"


"......"


"근데, 그 여동생 상대로 이래도 되는거야? 가슴에서 지진난 것 같네…"


"잠깐, 얀순아… 이건 선을 넘은…"


"사람이 어떻게 정해진 선에서만 먹고 살아?"


"이건, 윤리가…"


"그깟 윤리 때문에 20년 동안 오빠를 사랑해온 나만 바보가 되는 거잖아."


"5살 때부터 네가 날 좋아했구나… 어…"


"이제 알았어?"


"...응…"


"상관없어. 5살 때든 뭐든 내가 제일 후회하는 게 우리 집에서 살던 시절에 오빠를 안 덮쳤던거야."


"그건 미성년자 때였으니 더 심각하지 않을…"


"반대로 지금은 걸리는 거 하나 없이 가능하단 거네?"


"예? 그 말이 아니라…!"


"시끄러."


-투둑, 툭…


정말로 선을 넘으려고 넥타이를 풀자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온다.


곧 카라의 단추까지 풀리고, 그 다음 단추로 손이 향하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오며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었다.


"읏?!"


"얀순아, 조금만, 조금만 진정하자, 응?"


우선 그녀를 아주 살살 밀어내어 시간을 벌고, 다른 주제를 꺼내 화제를 전환시킨 뒤 유유히 탈출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다른 주제라면, 아, 아까 전화 속의 그 미친년으로 하면 되겠다! 역시 탈출구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찾는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오빠가 질문 하나만 할게! 혹시, 방에서 아까 전화한 내용 좀 공유할 수 있을까?"


"전화…?"


"그 있잖아! 네가 미친년이라고 욕하면서 막 깡이 좋네 잡으면 되네 한 거!"


"아, 그거? 오빠 꽤 머리쓰네?"


"어어! 그거그, 잠깐, 얀순아 뭐라고?"


"머리 잘 쓴다고. 그걸로 관심 끌고 도망가려는 건 오빠 딸들도 알아."


"....."


10초도 안 돼서 망했다. 제대로 망했다.


진작에 내 머리 위에 선 얀순이 상대로 뭘 해봤자 무의미한 경우의 수만 줄어들 뿐이다.


암만 이빨을 털어봤자 얀순이를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아까도 그렇게 당해놓고 또 멍청하게 되도 않는 수를 썼다.


이젠 정말로 힘을 써야되나? 그 배신자년들과 달리 속이 아무리 무서워도 겉으로는 완전무결한 여자를 해코지하는 쓰레기가 되는건가?


"흠… 생각해보니까 오빠 말이 맞는 것 같아."


"?"


"그 미친년이 누군지 알고 싶어?"


"예예!!"


"그러면… 다음주에 알려줄게. 이만 가봐도 돼. 내일 외출 잘 다녀와 오빠."


"어, 그, 그래… 내일 보고하러 올게, 내일 봐 얀순아!"


"아, 소원은 아직 유효한거다? 그날 가서 쓸거니까 기대해도 좋아."


"뭐ㅇ"


-철컥!


"아… 그래도 시간 번 게 어디냐… 하마터면 먹힐 뻔 했네…"


는 얀순이의 자비? 엔딩. 살았다…


괜히 얼타다가 또 트집잡힐까봐 얼른 인사하고 얀순이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물론 얀순이가 드디어 날 본격적으로 취하려고 하니, 일주일 안에 최대한 대책을 세우면서 복잡한 머리를 더더욱 돌려댔다. 미친년의 정체가 뭔지 생각할 겨를 따위는 1도 없었다.


김칫국을 왕창 때려박은 시선으로 보면 이 미친년이 얀순이에 대항할 조력자가 될 수도 있으니 하루 빨리 그 얼굴이나 보고 싶네. 어떻게 생겨먹었을려나?



.



.



.



.



.



.



.



"히히, 지금 보러 갈게, 자기!"


무사시를 떨쳐낸 뉴저지는 함교로 가 추진 레버를 최고 출력에 놓고 마스트의 성조기를 백기로 바꿔 달았다.


원래 계획이었다면 무작정 텍사스의 훈련소로 쳐들어가 쑥밭을 만들어놓고 얀붕을 데려오는 것이었지만, 그러면 뱃속의 아이가 크게 다칠 수 있었기에 그냥 마음 편하게 항복하고 아이를 낳은 뒤 목숨을 끊으면서 794의 연적들을 길동무로 삼겠다는 극단적인 계획으로 변경했다.


조용히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한때 부하로 있었던 고국의 함대나 항공기에게 최대한 빨리 걸렸으면 좋겠다는 뉴저지의 마음을 이해한 듯 그녀의 귀가 순간 쫑긋했다.


"USS 뉴저지, 랩터, 나 기억해?"


타이밍 좋게도 1주일 새에 794의 모든 것을 박살내고 간 공군의 한 소녀가 교신을 걸어온 것이었다.


장관이 데리고 온 9명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강한 무력을 선보였던 랩터의 송신에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얀붕을 위해 죽겠다고 각오는 했지만, 아이까지 죽는 건 원하지 않았기에 설마 이 자리에서 아이와 함께 수장되는 것인가 싶어서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교신을 받은 뉴저지는


"아, 응… 랩터, USS 뉴저지, 당연히 기억하지."


"그래, 우선 말해두자면, 나는 네가 수사 중에 무단으로 출항한 것에 대한 경고로 온거야. 수틀리면 사령부가 라이트닝에게 격침 명령을 내릴 수도 있으니 내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따라."


"...으응… 뉴저 윌코…"


살벌한 경고에 목소리가 0에 수렴하듯 기어들어갔다.


무사시와의 대화에선 그까짓 미사일이야 버티면 된다고 당당하게 나섰지만, 사실 저들이 버튼 하나로 자신을 대서양 밑바닥에 쳐박아버릴 수 있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측이 794를 도청한 결과 넌 794로 귀항해도 목숨을 부지할 순 없을거야. 반대로 이렇게 무단으로 항해하는 행위 역시 타 조직에서 무력 시위로 보고 널 공격하겠지."


"응, 맞아…"


"그래서 우린 너에게 기회를 주고자 해. 창 밖을 봐볼래?"


"갑자, 우와!"


랩터의 교신에 자리에서 일어난 뉴저지가 함교 밖 창문을 통해 본 하늘엔 잿빛의 전투기 스무여대가 일제히 그녀를 호위하듯 굉음을 내며 비행하고 있었다.


이전의 생각과 걱정을 모두 잊은 그녀의 감탄사에 랩터는 웃으면서 답했다.


"엄청 멋있다아…! 설마 너희들이야?"


"후후, 우린 아니고 람슈타인에서 출격한 녀석들이야. 아까 널 구해준 것도 쟤네들이고."


"날 구해주… 아하, 엔터프라이즈가 아니었구나… 그럼 라이트닝은 어딨어?"


"여깄지롱~! 네 거대한 엉덩이에 있다구 블랙 드래곤씨~"


"텍사스에서 여기까지 날아온거야…?"


"쩌어~기 항모에서 왔지! 난 언니랑 다르게 함재기도 할 수 있어!"


"라이트닝, 이제 그만. 본론으로 돌아와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에게 투항하면 지휘관을 만나게 해줄게. 또한 너와 네 아이 또한 우리의 지원 하에 본토에서 잘 살 수 있을거야."


"항복하면… 자기를…?"


"아까 무사시와의 대화 또한 도청했어. 듣는 내가 소름이 끼치더라고. 지휘관을 위해서, 그리고 794의 동료들을 죽이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다라, 참 대단한 각오네."


"아, 그것도 엿들었어?"


"응. 어차피 네가 죽는거나 794가 전부 죽는거나 우리는 다 원치 않아. 죽고 싶어도 법의 심판은 받아야지. 그래서 제안을 하는건데, 어때, 투항할"


"응! 반란군 USS 뉴저지는 이 자리에서 미합중국 공군에게 항복할게! 어차피 항복할 생각이었다구~"


"...역시나네."


"아, 그리고 지휘관을 만나는 건… 혹시 언제야~?"


"일단 네가 뭘 숨겨온 게 있는지, 왜 항복했는지 등 여러 사항을 조사하고 서류작업까지 마쳐야 돼. 그러면 바로 만날 수 있어."


"히히히~ 드디어 자기를 다시 만난다니… 귀염둥이도 기대돼?"


교신을 통해 느껴지는 뉴저지의 끔찍한 얀붕사랑에 랩터는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폭탄을 가져오는 게 아닐까, 괜히 애꿏은 이들에게 해코지하면 어쩌나 싶어서 걱정이 떨어질 생각을 안 했다.


한편, 뒤에 있던 그녀의 동생은 꽃밭의 머리로 여러 행복회로를 돌려가면서 뉴저지를 회유했다.


마침 들뜬 목소리가 순식간에 가라앉은 뉴저지가 자조섞인 목소리로 우울해하자


"그런데, 자기가 귀염둥이를 안 받아주면 어떡하지…"


"오빠는 아주 착하고 마음씨 넓은 사람이니까, 네가 진심어린 사과를 하면 받아줄지도 몰라.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해!"


-철컥!


"안 그래~?"


"히잇?! 깜짝아…! 너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라이트닝, 너 설마…"


"함미에 착륙해서 왔지!"


"거기 엄청 좁을텐데…?"


"언니는~ 못하는~ 수우우~ 지이이익~ 이~ 차악~ 류우우욱~!"


그녀가 있던 함교 문을 벌컥 열며 깜짝 등장했다.


뉴저지는 본래라면 하늘에서 자신에게 미사일을 겨누고 있어야 할 라이트닝이 코앞에서 나타자 우울함이 순식간에 당황으로 바뀌며 어떻게 할 줄을 몰랐다.


날개를 갈아치우고 십여미터의 헬리패드를 통해 들어온 건 알 턱이 없었으니 말이다.


"그럼 엉덩이에 있다고 한게…"


"응! 그때부터 널 찾으려고 여길 다 뒤지고 있었어!"


"하아, 라이트닝, 언니가 독단적인 행동은 하지 말라고 했지? 만약 뉴저지가 항복 대신 대공포로 답했으면 어떡하려고 그랬어? 돌아오면 엄청 혼날 줄 알아."


"힝… 언니 너무해…"


"아, 아냐… 어차피 항복할 생각이었다니까…!"


"그치? 그럼 안 혼나겠다~"


"에휴… 어쨌든, 항복했으니 우리가 지금부터 호위해줄게. 해안경비대에게 체포될 때까지 24시간 쭉 따라다닐거야."


"대신 이제부터 무전기를 못 써. 무사시와 네가 헤어지려는 즈음부터 라디오 재밍을 걸고 있었거든. 이 교신이 끝나면 채널이 노이즈로 범벅될테니 귀 아프기 싫으면 차단해."


-치이이이이익!


"으갸악?! 나도 포함되는거였어?! 언니 나빠…"


"괜찮아…?"


"...뭐, 이깟 노이즈 쯤이야! 그나저나 배 안 고파? 여기 먹을 거 있어? 아니다, 그냥 한 번 찾아보고 올게~!"


"어, 잠깐만?!"


미친 텐션을 따라잡지 못하고 저멀리 사라진 라이트닝을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뉴저지.


'나보다 더 심한 것 같은데, 자기는 이런 애를 어떻게 다루는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아직 함내 구조가 익숙치 않을 그녀를 따라나섰다.


"으음~ 맛있다아~ 역시 해군 밥이 최고야!"


"난 그게 제일 맛없던데…?"


"이게 맛없다고? 얼마나 입이 고급진거야?!"


"많이 있으니까, 조금만 천천히 먹어…"


"괜찮아~ 괜차흐웁?!"


"봐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켁! 켁! 무, 무우… 우울…"


아니나다를까 식당에서 해군에 보급된 레토르트를 용케 찾아내어 까먹다가 체하는 해프닝을 시작으로


"우와… 거의 시계방이네… 엄청 복잡해…"


"아무것도 건드리면 안 돼! 알겠"


"이게 주폰가~?"


"안 된다니까!! 주포 맞으니까 절! 대! 저얼대애! 절대 누르지 마!"


"야호! 맞췄다아!"


"지금 퀴즈 푸는 거 아니라구…"


"...맞췄으니까 한 번만 눌러보면 안 돼애?"


"안 돼! 넌 하늘로 도망칠 수 있겠지만 난 못한단 말이야!"


"공포탄 같은 거 넣어서 쏘면 되잖아?"


"...그런가?...가 아니라!!"


의도치 않은 무력시위를 원한다거나


"저기… 안 갈거야?"


"여기서 자고 가려고!"


"뭐?! 무슨 소리야? 이제 밤인데 빨리 복귀해야지!"


"괜찮아~ 이런 일탈 쯤은 오빠도, 랩터 언니도, 장관 언니도 다 봐줄거야~"


"아니… 만약 내가 나쁜 마음 먹고 널 인질로 잡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다아~ 생각이 있으니까 괜찮아~"


"무전기도 무용지물이라 네 언니한테 연락할 방도가 없단 말이야… 괜히 나만 더 나쁜 사람 되는 거 아냐?"


"열심히 변호해줄게!"


"그렇게 쉽게 끝나면 그냥 재워줬… 하아… 됐어. 여기 아래가 침실 구역이니까, 따라와."


"응! 나이스~"


"잠깐, 명심할 게 있는데, 난 네가 여기서 벌인 일과 불이익에 대해 아무 책임도 안 질거야. 알겠어?"


"응응!"


.


.


.


.


.



"으아아앙… 너무 불편해애… 이런데서 어떻게 자는 거야…"


"아, 이걸 말 안 했네… 이게 제일 중요한건데… 물론 난 책임 안 진다고 했다?"


"이건 계약 위반이야! 오빠와 언니들한테 이를거라고!"


"네가 계속 잔다고 떼썼잖아! 왜 나한테 성질이야?!"


"치이… 흥!"


"설마 삐진거야? 완전 애네…"


"으으으으으…! 나 애 아니라니까?!"


"어, 초코바다. 먹을래?"


"ㅊ, 초코바…?"


"사탕도 있어. 그때 숨겨둔건가?"


"뭔 사탕인데…?"


"오렌지랑 콜라."


"응! 먹을래!"


"아… 그래. 자."


"잘 먹겠습니다아~"


'그 녀석들보다 더 한 것 같은데…'


자고 가겠다고 시위하다가 된통 당하기까지, 해군의 여러면을 달고 쓰게 맛보는 한 소녀에 의해 뉴저지의 기는 쭉쭉 빨려나갔다.


그렇게 라이트닝의 들뜬 목소리에 둔해져가는 귀를 걱정하던 USS 뉴저지의 마지막 항해가 이틀에서 사흘을 지나 나흘로 접어들었다.


"이만 가볼게! 나중에 기지에서 보자! 안녕~!"


"잘 가! 아… 이렇게 들어온 거였구나…"


등과 발목에서 잿빛의 날개를 펼치며 비행을 시작한 금발의 소녀가 곧 굉음을 내며 멀리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본 뉴저지는 소녀가 떠난 함미에 누워 해가 쨍쨍한 대서양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마천루들의 첨탑은 맨해튼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줬다.


"음, 맨해튼에서 자기와 쇼핑부터 하고… 또, 뉴욕이 훤히 보이는 전망대의 레스토랑에서… 히히히♡ 완전 기대되잖아~"


"아! 귀염둥이용 물건들도 사야겠"


-슈우우우웅!


"지야앗?! 뭐야 저 녀석들!! 분위기 깨지 말라고!"


"...으, 화를 내서 그런가 갑자기 졸리네… 좀만 잘까…"


행복한 상상의 나래를 깨뜨리는 알루미늄 새들에게 성을 내던 한마리 강철 토끼는 곧 아침햇살에 나른해진 몸을 쭉 뻗으며 잠에 들었다.


1시간, 2시간, 3시간… 잠이 점점 길어지며 태양빛은 더이상 아침이 아닌 점심햇살로 바뀌어갔고


-삐, 삐, 삐…


"으우음… 뭐야…"


"USS 뉴저지, USS 뉴저지, 수신 즉시 응답하라."


"......?"


"공격 의사를 밝히거나 무응답할 경우 즉각 발포하겠다."


12시가 되자 배꼽시계 대신 앞의 라디오에서 당장 일어나라는 한 남자의 딱딱한 알람이 그녀를 깨웠다.


"누, 구…?"


"귀함으로부터 남서남 방향 80해리에 위치한 항공모함 전단이다. 항복 시 주포를 본 함대의 위치와 반대방향으로 돌려라."


"아… 응, USS 뉴저지는 이 시간부로 귀함대에게 항복할게. 내가 그 쪽으로 갈까…?"


"본함대가 위치한 좌표를 송신해주겠다, 교신이 끝나는 즉시 방향을 바꾸도록. 이상."


"응, USS 뉴저지 카피..."


교신을 마치고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은 뉴저지는 지금이 마지막으로 바다를 누빌 수 있는 시간인 걸 깨닫고 마스트로 올라가 해가 쨍쨍한 대서양과 저멀리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브루클린 대교와 항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느 정도 눈에 담았다 싶을때 내려와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몸가짐을 바르게 한 그녀는 선수에 앉아 신이 난 듯 콧노래를 불렀다.


"흐흐흥~🎶 아, 왔네…"


약 1시간 후, 슈퍼캐리어와 방공구축함으로 구성된 항모전단이 전방에 모습을 드러냈다.


뉴저지는 함재기와 구축함이 미사일을 겨누고 있음을 알리는 경고가 울림에도 느긋하게 닻을 내린 뒤 무릎을 꿇고 두손을 들어올렸다.


"자! 빨리빨리~"


"집단성폭행, 마약류 사용, 테러 혐의로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다 알고 있으니까 스탑! 불리한 진술은 거부할 수 있다~ 맞지?"


"얼른 태워!"


"타겟 확보. 예인선 투입해."


잠시후 수갑이 채워진 채 더이상 전개할 수 없는 의장을 홀가분하게 뜬 뒤 헬리콥터 안에서 웃음을 잃지 않으며 못다한 잠에 들었다.


슈퍼캐리어에 도착한 헬기는 그녀를 더 큰 수송기로 옮겼고, 누군가의 특별 주문에 따라 그토록 바라던 텍사스의 기초훈련소에 마련된 임시 독방으로 향했다.


"네, 이송했습니다. 우선 여기서 대기시킨 뒤에 부르시면 데려가겠습니다."


"오, 의외로 시설이 좋은데? 텔레비전도 있고, 침대도 깨끗하고, 심지어 냉장고가 음료랑 간식으로 가득 찼잖아!"


"그럼 자기도 이런 방을 쓰고 있으려나…? 곁이 많이 외로울텐데… 얼른 여기로 와, 자기…"


"시끄럽고, 밥 왔으니 다 먹으면 이 구멍으로 내놔."


"에? 식당은 못가는 거"


-쾅!


"야아아… 칫… 이래서 자기 말고 다른 남자들은 싫어…"


의외로 괜찮은 구성에 신이 난 뉴저지였지만, 거기에 초를 치는 쌀쌀맞은 교도관의 말에 기분이 매우 나쁜 얼굴로 식판을 깨작깨작 건드리면서 식사를 마쳤다.


그녀가 식판을 바깥에 내놓자마자 정장을 입은 장성들이 들어와 다시 수갑을 채워 심문실로 이동했고


"왜 나밖에 없어…? 우리 자기는 또 어디 간거야…?"


"".......""


"...정말, 정도 없고 재미도 없고 이게 로봇이야 사람이야?!"


"네, 알겠습니다. 가자고."


"어딜 가는데?"


"곧 있으면 올 거니까 준비나 하고 있어."


"으...! 매너 꽝이네 진짜!"


"그리고 이거! 수갑은 풀어주고 가야지!!"



.

.

.



"…우으으으… 아무나 좀 도와줘어어…"


-끼이익…


"어, 아까 그 사람이네…? 혹시, 지휘관은 언제 와…?"


"......"


"...그러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돼…?"


"......"


"제바아알… 대답은 해주고 ㄱ…"


-콰앙!


"흐으으… 이게 뭔 꼴이야아… 자기는 안 오고… 움직이지도 못하고오…"


목을 제외한 사지가 완전히 결박되어 수시간 동안 의자에 묶인 신세가 되었다.


가끔 가다 들어오는 정장의 거구들은 방 한가운데에 있는 여인이 홀몸이 아니라는, 더 나아가 여인이 방 안에 있다는 최소한의 사실조차 전혀 알바가 아닌 듯 철저하게 제 할일만 한 뒤 사라지면서 멘탈을 박박 긁어댔다.


"우으… 콜록, 콜록! 으윽, 자기이이…"


-철컥!


"으?! 누구…?"


그렇게 한참을 심문실에 방치되어 녹초가 되어버린 그녀의 앞에 나타난 한줄기 희망은


"하아, 기어코 한 마리 기어들어왔네"


"어…?"


"뉴저지, 일어나세요."


"공군장관이 왜…?"


다름아닌 매우 불쾌한 표정으로 서류철을 잔뜩 들고 나타난 얀순이었다.


아직 얀순의 정체를 모르고 올리비아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던 뉴저지는 그저 장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을 심문하는 것에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다만, 얀순이 최대한 본심을 숨기면서 말하고 있음에도 표정과 말투로부터 드러나는 저 살기에  순간 서늘해진 분위기를 느끼고 침을 꿀꺽 삼키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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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엔 이거 포함 3편이 올라갈 예정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