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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토스.


광륜을 단 존재들이 사는 세계.


그녀들은 자신을 학생이라고 부르며, 어째서인지,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녀들은 날 선생이라고 부른다.


눈을 떴다. 새벽이었다.


나는 일어나 물을 한 잔 마시고, 창가로 다가가 달을 바라보았다.


이 키보토스라는 곳에는 광륜이 땅에도 솟아나 있다.


광륜의 꼭대기에 걸린 듯한 밝디 밝은 달이 장관이었다.


여기로 다시 돌아오기 전의 기억이 난다.


분명히 시로코 여신... 아니, 시로코 씨와 백화점을 산책하고 있었다. 여러 군데 끌려 다니고 있었지만,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뻤다. 그러다가, 시로코 씨와 똑같은 얼굴의... 또 다른 시로코 씨...


"윽!"


나는 고통에 머리를 붙잡았다. 그녀를 떠올리자 머리가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에게선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머리에 광륜이 달린 것만으로 그녀들을 여신이라 칭했었다. 나를 이끌고, 심판해주는, 그런 존재로.


하지만, 그녀는, 발랄한 다른 여신들의 분위기가 아니라, 무겁고 진중한 분위기가 전신에 흐르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신으로서의 심판을 내린 경험이 있는, 격이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다.


"일어나셨나요? 선생님?"


그 때, 세리나 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새벽녘의 달빛이 비춰지는 광륜은 평소보다 더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 세리나... 씨."


"..."


사신이 자신의 로브를 흩날리는 듯 무겁고 차가운 침묵이 흘렀다.


"세리나... 씨...라니. 생소하네요."


"...여신님으로 불러드릴까요?"


"세리나라고만 해주세요."


"세리나. 미안합니다. 그녀와의 만남 이후로, 많은 것을 깨달았어요. 당신은, 여신님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다행이네요. 적어도 다른 학생들이 당황해 하실 만한 일은 하지 않으실 테니까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이 났다. 매일 같이 찾아오는 모든 사람을 향해 나는 기도하고, 소리지르고, 광증을 일으켰다.


"네.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시로코 여신님은 어디계시죠?"


"어떤 시로코 씨 말인가요? 아비도스에 있는 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여신님이라고 부르지 마."


그 순간, 공간이 열리고 검은 여신의 드레스를 입은 여신님이 눈 앞에 나타났다.


"여신님..."


나는  또 한 번 고개숙여 기도했다. 그녀의 압도적인 아우라는 역시, 내 앞에 있는 세리나 씨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선생. 나를 용서해."


"용서라니, 제가 어찌 그런. 저를 여기서 심판하셔도 저는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시로코 여신님은 눈을 부릅뜨고는, 내 가슴팍에 손가락을 들이대셨다. 손톱이 뾰족하지 않았는데도, 여신님의 손가락은 나의 몸을 파고들었다. 마치 물 속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듯 했다.


"당신에게 색채를 아주 조금 흘려 넣을 거야."


"선생님께 그런 짓을 해도 되나요?"


세리나 씨가 여신님을 향해 물었다. 여신님은 안타까워하면서도 각오를 다진 얼굴을 하고 계셨다.


"충격요법이라고 생각하면 돼."


시로코 여신님의 손가락이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무언가가 내 가슴팍으로 흘러들어오는 느낌과 함께, 나는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 의식이 멀어졌다.


"미... 용서... ...생"


시로코의 얼굴에는 눈물이 번져 있었다.




"안녕! 마리! 오랜만이야!"


"선.....생님...?"


내가 우선적으로 간 곳은 트리니티의 참회실이었다. 일주일 24시간을 그곳에만 처박혀 먹는 것도 거부하고 기도만 한다는 마리는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그러나 마리는 그런 초췌해진 몸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게 뛰쳐나와 내게 안겼다.


"아, 하하, 마리. 그동안 잘... 지냈어?"


나는 마리에게 상투적으로 잘 지냈냐는 인사를 했다. 내가 말하고도 잘못 말한 것 같아 당황스러웠지만, 마리의 얼굴은 그러든 말든 눈물 범벅이었다.


"...네! 선생님! 선생님을 기다리면서 한 번도 지루하지 않았어요!"


마리는 이 상황에서도 내게 미소를 보였다.


나와 마리는 기도실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게 있었던 일, 나의 감정, 마리의 감정 같은 모든 것을 쏟아내었다. 마치 참회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듯 진솔한 대화가 오갔다.


"선생님..."


마리는 갑자기 내 손을 꽉 잡았다.


"이 손, 절대, 절대, 절대. 놓치지 않을 테니까요."


급작스레 마리의 두 눈에서는 초점이 사라지고, 손아귀 힘도 강해졌다. 키보토스 학생의 힘은 나 같은 성인 남성이 당해낼 수 없는 것이었다.


마리의 얼굴이 내게 가까워졌다. 슬슬 무서워질 때 쯤, 마리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손에는 마리의 손가락 자국이 빨갛게 남아 있었다.



마리와의 만남을 마친 후에도, 나는 여러 학생들과 만났다.


"이오리!"


"이 목소리는... 선생?"


이오리는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란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저기 말이야, 선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이오리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내게 말을 건넸다.


"응."


"혹시, 내가... 선생에게 명령을 내렸던 거... 기억해?"


"...아! 30분 동안이나 다리를 핥았던 거? 기억하지!"


내가 다른 학생들을 여신으로 섬겼을 때의 기억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선명한 편이었다.


"크윽...."


이오리의 얼굴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 바보가아아아!"


"자, 잠깐만!"


이오리는 손, 발, 꼬리까지 이용해서 나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물론 진심으로 때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징벌은 한참을 이어졌다.

 

"...잘 가. 선생."


이오리는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해 주었다. 내가 돌아갈 때 쯤, 눈에 초점이 없어지면서 보호, 다리 같은 단어를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별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았기에 나는 갈 길을 갔다.



"아리스!"


내가 발을 돌린 곳은 게임개발부였다.


"앗, 선생님! 이제 아리스를 여신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까? 퀘스트가 끝난 겁니까?"


"응, 말하자면."


"마침 부실도 오늘은 비어 있었습니다! 오늘은 둘이서 같이 노는 겁니다!"


나는 아리스를 무릎에 앉히고 한참 게임을 이어갔다. 아리스가 하던 게임은 왕자가 마왕을 물리치고 여신을 구하는 게임이었다.


"아리스, 선생님의 패턴, 기억하십니까?"


"...응."


"그럼 그 패턴을 공략하고 싶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아리스는 양 팔을 양 옆으로 쭉 벌렸다. 암만 봐도 안으려고 하는 자세였다.


"자! 껴안기 패턴은 아직 공략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서 안으십시오!"


"아, 아리스, 잠시만... 그건 좀..."


"...에잇!"


왠지 잠시 눈에 초점이 사라진 아리스는 그대로 날 껴안았다.


"최고입니다... 아, 아니, 이 패턴은 공략이 한참은 걸릴 것 같습니다..."


아리스의 말대로, 나는 한참을 안겨져 있어야만 했다. 빠져나가려고 하면 아리스가 엄청난 완력으로 나를 제압했기에, 나는 아리스가 놓을 때 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자! 여기까지 하고 다음에 또 공략하는 겁니다!"


"엣? 공략 끝난 거 아니었어?"


"아직 한참 남았습니다!"


나는 쓴웃을을 지으며 아리스와 작별했다.



"...사오리. 거기 숨어있지 않아도 돼."


샬레로 돌아가는 길, 나는 인기척을 느끼고 사오리를 불렀다.


"선생."


"사오리."


사오리는 내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인기척을 낼 만큼 허술한 학생은 아니었다. 사오리가 작정하고 숨었을 때는 훈련된 요원 몇십명을 상대로도 한번도 들키지 않은 적도 있다고 했으니.


"사오리는 분명, 나와 이야기하고 싶은거지?"


"그렇다. 난,.."


"괜찮아. 사오리. 다 괜찮아."


"하지만..."


"난 전부 기억해. 그리고, 괜찮아."


나는 사오리가 말을 꺼내지 않았는데도, 사오리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사오리는 반대로 눈가에 눈물이 조금 맻혀있었다.


"선생... 여기 오래 있지 못하는 게 한이다만, 기회가 되면 반드시 샬레로 찾아가겠다. 반드시."


사오리는 내가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기도 전에 급한 문제가 있다는 듯 떠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에서 보이는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해보였다. 조금 무서워질 정도로.



"후우, 이정돈가."


나는 샬레의 사무실로 향했다. 천천히 걸어가려 했지만, 느린 걸음은 빠른 걸음으로 변했고, 빠른 걸음은 뜀박질로 변했다.


사무실에 뛰쳐 들어 오다시피 한 나는 내 책상을 미친 듯이 뒤졌다. 보이지 않았다. 점점 조급해져서, 나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까지 내팽개치며 책상을 뒤졌다.


"젠장, 어딨어..."


책상을 뒤지던 중, 소파 옆의 간이 테이블에 약이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약통을 열었다. 급하게 여느라 약 몇 개가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서둘러 약을 입에 넣고, 옆에 있던 물을 마셨다.


마음이 안정되고, 머릿속이 가다듬어진다. 세리나가 처방해준 신경안정제는 탁월했다.


"아..."


두려웠다. 사실은 두려웠다. 그녀들은 여전히 나보다 아득하며 신성한 존재였다. 내가 선생으로서 그녀들을 가르치고, 그녀들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돌아왔기에 그것을 간신히 따를 수 있었지만, 그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을 정도로 긴장되고 두려운 시간이었다.


"...내일도, 해야겠지."


어쩌면 내일도, 어쩌면 평생 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불안감이 조금씩 생겨났다. 신경안정제를 먹어서 이 정도이지, 맨정신으로 받아내긴 힘든 용기가 필요했다.


"...선생."


"히익!"


뒤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로코였다.


"아, 아아... 시로코구나. 여기엔 어쩐 일로?"


"선생님이 걱정돼서 미리 찾아왔어. 그보다, 다 봤어 선생님."


"...시로코."


"응...두려운 거야? 선생님."


"...두려워. 무서워. 내가 그녀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게 무서워."


또 한번, 보라색 포탈이 열리며 또 다른 시로코가 나타났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 선생. 우린, 그런 두려운 존재가 아니니까."


"여신...! 아니, 시로코."


"괜찮아."


"괜찮아."


두 명의 시로코가 나를 양 옆에서 껴안고, 조용한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우린 함께잖아."


"우리가 있잖아?"


"앞으로도 쭉..."


"함께 해 줄게. 두려운 게 있으면, 같이 해줄게."


"걱정이 있으면, 함께 덜어줄게."


"그러니까..."


"오늘은... 편히 자자?"


두 명의 시로코가 껴안긴 채로, 나는 소파에 누웠다. 정확히는 눕혀졌다. 저녁이 깊어가고 있었다. 어제보단 조금 약해진 달빛이 살레 한 구석을 비추었다.


시로코 두 명의 온기가 느껴지는 잠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다.



                                   


끝임. 선생을 너무 광신도로만 굴리는 것도 힘들어서 여기까지 하고 선생의 기억을 되돌리기로 했음


그래도 히나, 와카모같이 쓰면 재미있는 학생도 많을 텐데 못 쓴 건 조금 아쉽네


근데 광신도 같은 비일상적인 소재로 더 쥐어짜긴 힘들 거 같음 ㅎ 조금 반복되는 느낌도 없잖아 있고


아무튼 원글 보고 시작했던 망상이 이 정도 글까지 왔으니 후회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