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변만화(千變萬化)
노아가 가진 사기적인 특성이다.
그녀는 무엇이든 변할 수 있다.
꼽추 노인, 어눌한 어린애, 기골이 장대한 군인까지.
목소리 톤, 주름 하나하나까지 정밀하고 세밀하다.
황궁에 침입한다면 분명 에리카를 노릴 것이다.
에리카가 죽는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스토리가 어그러질 것이다.
그만큼 에리카는 중요한 인물이다.
절대 그렇게 둬선 안 된다.
 
“요한. 오늘 왜 이리 안절부절 못 하는 거지?”
 
베리아에 조공을 바치러 온 사신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들은 극진한 인사를 하고 가지고 온 조공품과 특산품을 하나하나 설명하며 여제에게 바쳤다.
에리카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서 온 사신들을 치하하고 쉬게 했다.
즉 황궁에 외부 유입이 많아졌다는 소리다.
나는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에리카님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주의를…”
”훗. 너처럼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요한. 하지만 난 간단히 죽지 않아. 이건 교만이 아니다.”
 
과연 카리스마에 몰빵한 군주답달까.
두려움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자신감 가득 찬 목소리는 이제 약관을 넘은 처녀란 게 믿기지 않았다.
제국은 완전히 자기통제하에 있고 그 어떤 반항도 불허한다는 위압감.
실제로 철통같은 황궁의 보안을 뚫고 들어온 암살자가 에리카와 눈을 마주치자 그대로 주저앉았다는 이야기는 그녀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다.
 
<철의군주>
 
찌르면 피는커녕 철이 흐를 것 같은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대신과 신민들이 괜히 벌벌떠는 게 아니다.
잠깐만.
근데 난 왜 그 영향을 안 받는 거지?
<창조주의 페로몬>이 <철의군주>보다 상위에 있다는 건가?
 
“요한. 난 널 높이 산다. 내 밑에 있는 사람들 중 날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없다. 근데 넌 다르다. 마치 날 알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과연 통찰력이 대단하다.
 
“…집무가 끝났습니다. 에리카님.”
“오늘은 늦게 끝났군. 방으로 돌아가도 좋다. 요한.”
“아닙니다. 끝까지 수발을 들겠습니다.”
”…? 뭐 마음대로 해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에리카가 향한 곳은 황제가 사용하는 목욕탕이었다.
에리카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같이 씻겠느냐?“
”…괜찮습니다.“
”흥. 시시한 놈.“
 
그곳엔 이미 열 명의 메이드가 여제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종일 대신과 사신들의 조그만 낌새를 찾으려 애썼지만 찾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신분으로 숨어들었다는 애기다.
사람이 가장 방심하고 여제의 몸에 손을 댈 수 있는 유일한 교차점.
나는 에리카보다 앞서가 그녀들에게 말했다.
 
”내게 누군가 떨어뜨린 나비머리핀이 있다.“
 
내 말에 메이드들이 수군수군 거린다.
 
“…?”
“갑자기 왜 저래?”
“몰라. 고문당해서 미쳤나봐.”
“….”
 
나는 그 말을 무시하고 말했다.
 
“너희들 중 주인이 있으면 오늘 밤 날 찾아와라. 만약 내 말을 무시하고 앞질러간다면… 나는 그 머리핀을 버리겠다.”
 
“!”
“버리든가 말든가.”
“그깟 머리핀이 뭐가 중요하다고 저런대?”
“쉿. 폐하 오셨다.”
 
에리카가 요한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그녀들에게 주의를 줬습니다.”
“요한. 걱정이 많으면 사람은 살 수 없다. 물론 내 걱정을 해주는 건 기쁘지만 말이다.”
“…예. 이제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에리카님.”
“음.”
 
에리카는 도도하게 목을 세우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자 옷자락이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한참을 서있다가 달이 뜬 것을 보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나비머리핀.
그것은 어린 시절 요한이 노아에게 준 유일한 선물.
오빠와 동생을 잇는 노아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 * * *
 
 
 
 
똑똑똑.
예상대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와.”
 
메이드복을 입은 무색무취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눈가엔 이미 눈물이 그렁그렁 달렸다.
 
“오빠!”
 
와락.
동생 노아가 변장을 풀고 나를 안았다.
오랜 시간 함께한 가족이라지만 빙의한 나는 일면식이다.
어쩔 줄 몰라하다가 어색하게 노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격정적인 해후가 끝나고 노아가 안타까운 듯 내 볼을 매만졌다.
 
“…오빠 피골이 상접했어. 괜찮아…?”
“어? 어. 괜찮아. 잠을 좀 못 자서….”
“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역시 그 년을 죽였어야 했는데…!!”
 
대답을 잘못 했다.
아니, 이건 내 책임이 아니다.
어떤 말을 해도 에리카가 한 짓으로 오해할 것이다.
화가 잠잠해지자 노아는 궁금하단 듯 말했다.
 
“어째서 말린 거야? 에리카를 죽일 천재일우의 기회였는데.”
“에리카를 죽여도 널 잃는다. 그렇게 둘 수 없어.”
 
내가 말했지만 납득이 가는 근사한 이유다.
하지만 노아는 의아한 듯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언제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황제를 죽이자고 결의했잖아…? 당신, 정말 오빠 맞아?“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작가라고 모든 설정을 기억할 수 없는 노릇이다.
특히 요한같은 엑스트라 캐릭터는.
나는 입에 경련이 일어나는 걸 꾹 참아내고 의심의 눈빛을 품는 노아를 쓰다듬었다.
 
”노아. 넌 지금 너무 성급하다. 날 구하려는 생각 때문에 궁극적인 목표를 놓치고 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내 몸을 봐라. 어디에 고문의 흔적이 있지?”
 
내가 상의를 벗자 노아는 붉어진 얼굴로 몸을 살펴보고 만져봤다.
적당한 근육이 있는 몸에는 어떠한 멍자국도 없다.
노아는 내 말을 유추하려는 듯 한참을 생각하다가 깨달은 듯 외쳤다.
 
“…고문 당하지 않았다? 그럼 설마…!”
“그래. 맞다. 나는 잡혔지만 잡히지 않았다. 에리카를 말로써 꾀어내고 약간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그 신임을 모두 얻었을 때….”
“에리카를 죽이는 것을 넘어… 황제를 노린다?”
“물론 쉽지 않을 거다. 에리카는 물론이고 안으론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다.”
 
노아가 소리쳤다.
 
“군사력! 에리카가 죽었을 때 황궁을 제압할 수 있는 힘!”
“그래. 맞다. 안에선 그런 것까지 만들기 힘들다. 아무래도 눈이 많으니깐. 하지만 너라면….”
 
나는 노아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최대한 열정적인 눈을 흉내내며 노아에게 신호를 보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밖에서 힘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노아.”
 
노아가 감탄한 듯 말했다.
 
“황제를 죽이겠다는 말도, 날 잃으면 안 된다는 말도… 모두 그런 속뜻이었다니… 그, 그런 것도 모르고 오빠를 의심해서… 죄, 죄송해요. 오빠….”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

 
[호감도가 맥스가 됐습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휴. 대충 스토리가 흘러가게 만들었군. 오늘부턴 내 통제에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다. 내 말도 잘 들을 테고.’
 
이때였다.
황궁에서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는 유일한 인물이 문을 두드리지 않고 문을 발칵 연 게.
 
“요한! 자는데 미안하다. 역시 네가 없으면 잠을 잘 수가 없을 것…… 어?”
 
야밤에 서로 껴안는 두 남녀.
격정적인 감정이 흘러간 듯한 분위기.
나는 노아의 얼굴을 들키지 않기 위해 머리를 끌어안았다.
노아는 내 의도를 깨닫고 순간적으로 얼굴을 변화시켰다.
에리카의 얼굴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이게 지금 무슨 일이지?”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호감도가 하락했습니다!]
……

 
[에리카의 분노가 하늘 끝까지 치솟습니다!]
[여제가 진노합니다!]
 
산 넘어 산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노아와 밀담을 나눌 곳이 내 방 말고는 없었으니깐.
에리카의 나에 대한 의존도가 내 예상보다 컸다는 것도 이 사태를 야기시켰다.
나는 평범한 메이드로 변한 노아를 밀어뜨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몸을 일으켜 예의를 갖췄다.
 
“오셨습니까? 에리카님.”
”…넌 날 배신했다. 네게 한 마디 유언을 남기는 걸 허락한다.“
”전 당신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절 죽인다면 나중에 후회하는 건 에리카님이 될 것입니다.“
“뚫린 입이라고 마음대로 지껄이는 군. 내 장점 중 하나는 분노해도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는 거다. 요한. 네 말을 계속 들으면 난 필시 현혹돼서 넘어갈 테지. 지금부터 한 마디 말도 하지 마라.”
 
“알았으면 무릎을 꿇어라!”
 
쿵!
머리에 갑자기 암석이 떨어진 것 같은 무게가 느껴졌다.
 
[<철의군주> 효과가 발동합니다.]
[여제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에 의해 당신은 여제의 말을 반항할 수 없습니다!]
 
내 몸이 저절로 꿀리고 고개가 숙여졌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갑자기? 이제 와서? 호감도가 급하락한 탓일까? 분노해서? 좋은 정보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이제 바통은 노아에게 넘겨졌다.
훗날 거대 반란군을 이끌 유능한 지도자가 될 노아라면, 그리고 내 말을 알아들었을 노아라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
에리카의 차가운 눈동자가 노아에게 향했다.
 
“배시? 넌 아까 날 씻겨준 메이드구나. 요한과 넌 무슨 사이지?”
 
배시로 변장한 노아가 대답했다.
 
“저와 요한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노아!’
 
순간적으로 고개가 들려졌다.
하지만 노아는 내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내게 윙크를 보냈다.
에리카가 눈을 감았다.
 
“…역시 예상대로군. 요한은 물론이고 내 물건에 손을 댄 너 역시 사형을 내……”
 
노아가 말을 끊었다.
 
“폐하. 오해하지 마십시오. 요한은 저의 숨겨진 가족. 정확히 말하면 제 이복오빠입니다.”
 
그리고 품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팔을 그었다.
노아의 진한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이 피가 그 증거입니다. 저와 요한의 피를 대조하면 필시 같은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에리카는 그 말을 덤덤히 들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배시. 꿇어라.”
 
쿵!
노아는 나와 마찬가지로 강제로 몸이 움직여졌다.
노아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에리카는 천천히 움직여 노아의 단도를 빼앗아 내 앞에 섰다.
숙여진 고개 위로 압도적인 존재감이 느껴졌다.
과연 패권을 다투는 제국의 여제!
에리카가 단도를 휘둘러 내 팔을 그었다.
피가 흐르자 왼손으론 내 피를, 오른손으로 노아의 피를 훔쳤다.
그리고 문을 열기 전 뒤돌아 우리에게 말했다.
 
“확인하고 오겠다. 만약 거짓말일 시 날 능멸한 죄를 톡톡히 받아낼 것이다.”
 
덜컥.
문이 닫히자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거짓일 수 없다.
실제로 노아는 내 배다른 동생이니깐.
노아가 배시시 웃었다.
 
“어때? 잘했지?”
 
무릎을 움직일 수 없지만 손은 움직일 수 있다.
나는 노아의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