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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나요! 누가 좀 도와줘요!"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검은 공간 안에 울려퍼진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벽에 닿은 듯 허무한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만다.


"젠장..."


남자의 발 밑에는 물이 가득 차 넘실거리고 있었다. 남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물의 저항까지 받으면서도 꿋꿋이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좌우 모두 공허한 검은색만이 눈 앞에 아른거리고 있었고, 제 아무리 발을 움직여도 똑같은 곳만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때, 남자의 눈 앞에서 희망이 떠오르듯 빛이 차올랐다. 그 밝은 빛에 남자는 환희를 느낄 정도였다. 남자는 빛을 향해 걸었다.


그러나, 태양빛이 떠오르듯 차오르던 그 빛은 태양의 빛이 아니었다. 태양과도 같이 둥글지만, 하나의 꽉 찬 원형이 아닌, 하나의 고리 같은 광륜이었다.

 

"아...아아..!"


남자는 그 형상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다리까지 차오르던 물이 넘어지며 그대로 허리춤까지 적셨지만, 남자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남자는 반대편으로 도망치려 했다. 


"어딜 도망가느냐?"


그러나 뒤에서 들려오는 근엄한 목소리에 남자는 발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전 도망치려던 게 아니라... 그저..."


"네놈이 저지른 죄의 심판을 받아라!"


그 목소리와 함께 남자에게는 빛이 눈앞에 들이닥쳤다. 희망도, 구원도 아닌, 죄를 불태우는 화형대의 불빛이.


"으아아아아악!"


선생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온 몸은 땀으로 젖어 흥건했고, 징벌의 불꽃 대신 밖에서 비춰지는 서늘한 달빛만이 선생을 비추고 있었다.


"괜찮으신가요!"


선생이 일어난 지, 10초도 안되어, 세리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계의 바늘은 새벽 3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신님. 주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주무십시오.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선생님이야말로! ...주무셔야해요. 내일은 면회가 있으니까요. 아시겠죠? 수면에 도움이 되도록 아로마 향초를 켜드릴게요."


세리나는 선생을 편히 눕히고, 아로마 향초를 켰다. 기분좋은 향기가 방에 감돌았다.



"응. 내가 왔어. 선생."


시로코는 병원이 여는 시간에 맞추어 찾아왔다. 시로코는 병원 앞에서 야영, 정확히 말하면 노숙을 하며 선생님을 만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 시로코 씨. 빨리 오셨네요?"


"응."


세리나는 시로코를 선생이 있는 병실로 맞이해주었다.


"응. 선생. 내가 왔어."


"안녕하십니까, 여신님. 여기에만 있으니, 새로운 여신님들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저의 기도를 받아주시길."


선생이 말을 끝내고 기도를 바쳤다. 그러나 시로코의 얼굴 표정은 굳어있었다.


"아, 선생님의 소식은 못 들으셨나요? 요즘 선생님이 좀... 아프셔서..."


세리나의 말에, 시로코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고 있었어. 선생이 아프다는 소식은. 하지만, 선생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여기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어."


시로코는 기도하고 있던 선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응.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오자 선생."


그 말에, 선생은 기도를 멈추고 시로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미네 여신님과 세리나 여신님이 바깥은 위험하니..."


시로코는 세리나를 쏘아 보았다. 세리나는 곰곰히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으음, 그 때는 선생님의 상황이 워낙 심각했어서요. 확실히, 이제 선생님도 많이 호전되셨고 하니..."


"응. 바깥보다도, 여기에 앉아만 있는 게 더 위험해. 나가자, 선생님."


시로코는 이미 선생을 힘으로 잡아 끌고 있었다.


"하지만, 세리나 여신님, 그...!"


"저도 동의합니다."


미네가 갑작스레 뒤에서 끼어들었다.


"선생님의 다리 근육이 눈에 띌 정도로 약해지셨어요. 재활을 겸해서, 나가서 좀 걸을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뒤에서는 세리나와 미네가 말로 등을 떠밀고, 앞에서는 시로코가 물리적으로 손을 잡아끄는지라, 선생은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선생님, 잘 다녀오세요!"


세리나가 배웅을 해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길거리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엎드리거나, 기도하진 마세요. 명령입니다."


그리고, 왠지 조금 싸늘해진 목소리와 눈빛으로 당부하는 세리나였다.


"...이건 재활이기도 하니까요! 오후 세 시까진 돌아오셔야 해요!"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남기고, 세리나는 미네와 함께 병원으로 돌아갔다. 



"아아... 여기도... 저기도...!"


자신만만하게 선생을 끌고 가는 시로코와 달리, 선생은 잔뜩 위축되어 허리도 제대로 펴고 다니지 못하는 상태였다.


"응. 선생님. 저기, 저기로 가보자."


"으으... 여신님의 뜻대로..."


시로코가 선생을 이끌고 발을 들인 곳은 시라토리구의 핫플레이스, 백화점 아케이드였다.


"응. 여기. 좋아. 사람도 많고, 보석도 잔뜩 있어. 눈호강하기 좋은 곳이야."


그렇게 말하는 시로코의 눈은 단순히 눈호강하기 위한 것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반짝거렸지만, 선생은 그런 것을 신경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좋은 향수가 있는데, 한번 써 보시지 않으실래요?"


"네? 저에게 그런 영광을? 아, 여신님의 은덕은 하늘과 같으시니..."


"네... 네?"


"아, 죄송합니다! 세리나 여신님과의 약속을 잊고... 불경한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저, 저기... 무슨 말씀이신지..."


"응 선생. 이쪽엔 화장품 밖에 없어서 재미없어. 다른 곳으로 가자. 저기 반짝거리는 게 많아."


시로코는 당황하는 점원을 뒤로 하고, 선생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다이아몬드를 파는 보석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기도 하고, 별로 관심 없다고 지나쳤던 명품 샵에서 가격표를 보자 갑자기 관심이 생긴 듯 뚫어져라 쳐다보기도 했다.


"저, 손님, 너무 그렇게 쳐다보시면 다른 손님들이 부담스러워 하셔서..."


"죄송합니다, 여신님. 이 여신님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으셔서..."


"어, 어머... 여신님이라니..."


여신님이라는 호칭을 잘생긴 남자의 칭찬이라고 생각하는 듯, 점원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가방에 시선이 고정되어있던 시로코의 얼굴이 한 층 어두워지더니, 선생의 손을 덥석 잡고 질질 끌고 갔다.


"응. 선생. 바람. 안돼."


시로코는 분노에 찬 듯 한 단어 씩 끊어 말했고, 선생은 조금 생겼던 자신감도 새로 생긴 죄악감에 눌려 다시 마이너스가 되어버렸다.


구경을 마치고, 시로코는 선생의 손을 붙잡고 백화점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기운찬 시로코와 달리, 선생은 이미 지쳐있었다.


"재밌었어? 선생님? 나는 좋았어."


"저, 저도 좋았습니다, 여신님."


"...중간에 선생에게 달라붙은 그 여자만 빼고."


시로코는 갑자기 손톰을 우득, 물어뜯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달라붙은 적은 없었지만, 선생은 여신님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너무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들지 마."


시로코와 선생의 앞에 검은 공간이 열리더니, 시로코보다 훨씬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지만, 그 얼굴은 분명히 시로코인, 또 한명의 시로코가 선생의 눈 앞에 나타났다.


"응. 또 다른 나라도, 선생님은 양보 못 해."


"응. 그런 뜻은 아니지만, 일단 선생님은 쉴 필요가 있어."


쿠로코는 선생의 빈 손을 붙잡았다. 시로코와 쿠로코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질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선생은 쿠로코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여신님..."


"...응. 선생님. 날 그렇게 부르지 말아줘. 그런 말은 부담스럽거든."


쿠로코는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선생의 시선은 여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여신님."


선생의 말투는 한결 더 진지해져 있었다.


"...선생님. 곤란해."


이미 시로코와 쿠로코가 잡고 있던 선생의 손에선 힘이 빠져있었다. 실랑이고 뭐고 다 흐지부지되고 있었다.


"여신님. 저의 여신님."


선생은 무릎을 꿇고 쿠로코를 향해 부복했다. 쿠로코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제발... 날 그렇게 부르지마... 그건... 나에겐 영원한 고통일 뿐이야..."


"진짜 여신님이 앞에 계신다. 나의 눈은 지금까지 허상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인가... 아아! 여신님! 저를 거두어, 영광스런 죽음을 맞게 해주십시오!"


"아니야아!!!!"


쿠로코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주변의 시선이 한 쪽으로 몰리고, 쿠로코와 시로코의 시간은 멈춘 듯 경직되어 있었다. 쿠로코는 눈물을 비같이 쏟아내고 있었다.


"난... 여신 따위가 아니야... 난, 그저 선생님의 학생일 뿐이라고..."


쿠로코는 엎드려 있는 선생의 곁에 같이 엎드려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선생의 입에서는 조용히 기도문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비켜주세요!"


그 때, 세리나와 미네, 하나에게 선생을 향해 달려오며 다른 사람들을 제치고 뛰어왔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군요."


"어쩌죠? 부장님?"


"일단 병원으로 가야합니다. 하나에, 저를 거들어 주세요."


"네!"


"저, 시로코씨? 죄송하지만 하나에 씨와 부장님을 도와드려야 해서, 죄송해요.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뵐게요!"


"으... 응."


"나도 데려가."


쿠로코는 선생을 강제로 등에 업은 미네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지금 선생님은 불안정하십니다."


"...내가, 선생님을 고치겠어. 색채의 힘을 써서라도... 선생을 되돌려놓겠어. 거짓 된 권능이라도 좋으니, 거짓 된 선생만큼은, 싫어. 절대, 절대! 싫어!"


미네는 쿠로코의 눈을 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끝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