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https://arca.live/b/yandere/666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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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은 비오는 새벽이었다.


 12시를 아득히 넘긴 새벽이 되어서도 과제 하나를 못 끝내고 낑낑대는 이 돌처럼 굳은 머리를 자탄하며 좁은 자취방 밖을 돌아봤을 때 밖에는 옅은 빗소리가 잔잔했다.


 너무 오래 짱구를 굴렸나 보다 싶었다. 머리를 식힐 거리를 찾고 있을 때 '어차피 뇌는 수랭식 아니냐' 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작은 우산 하나만 손에 쥔 채 집 밖으로 나가 새벽의 빗속을 거닐었다.


 돈없는 사람들의 특권인 공공임대주택은 집값이 싼 대신 대학가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새벽 길을 아무렇게나 걸어다니면서도 다리는 익숙한 통학로로 몸을 안내했고 몇 블록을 넘어가니 저녁 때마다 회식 무리로 그득한 회사 주변 식당가가 보안등 아래서 이상하게 조용했다.


 밤 늦게까지 휘황하게 빛나던 거리가 새벽 는개에 덮여 침묵하고 있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새벽 감성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느끼며 나는 혼자 걸어가고 있었다.


 술집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쳐 모텔 건물들이 가득 찬 대로로 나가려 하던 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씨..이..발…"


 거리의 침묵 덕에 그 누군가가 내는 욕지거리도 같이 들려오고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쓰레기 봉투를 베개 삼고 자던 정장 차림의 여자가 간신히 몸을 가누고 있었다. 길이 어두운 탓에 쓰레기 더미인 줄 알고 그냥 지나친 곳이었다.


"개..같네.. 씨..양..!"


 한눈에 봐도 술에 꼴아서 길가에 대충 엎어져 자다 이제서야 깬 눈치였다.

 어두운 옷에 어두운 우산을 쓰고 있는 나를 보지는 못했는지 그녀는 계속 눈가에 모인 빗물을 손으로 비비며 한탄했다.


"내가..내..가 씨발...최팀장..개같은샊..끼.. 죽이고그만둘꺼야!! 저까, 뜨끅, 저까튼새끼들 다주기꺼야아악!!!"


 하고 악에 받쳐서 혼자 회사원들 욕을 끝없이 읊어대는데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몇 개 주워들어보니 아마도 은행원 같았고 평소에 당한 게 많은지 동료 직원들에게 맺힌 한을 모조리 풀어내고 있었다.

 되알지게 욕을 내뱉으면서도 눈물인지 빗물인지 얼굴에 계속 모이는 물이 짜증나 두손으로 얼굴을 비비고 닦는 게 꼭 세수하는 고양이 같아서 불쌍하면서도 뭔가 귀여웠다.


 계속 구경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대로 그냥 뒀다간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당하든가 아니면 추운 날씨에 병이라도 날까 싶어 나는 우산도 접어놓고 그녀를 일으켜세워 부축했다. 군 전역 후 뇌는 굳었지만 그래도 얻은 게 체력이라 그녀를 부축해 걸어갈 정도의 힘은 충분히 있었다.


 그 뒤에 아마 그녀 입에서 잠꼬대처럼 나오는 집주소를 주워듣고 택시를 태워 돌려보낸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연락처 하나 남겨두지 않고 그대로 돌려보냈으므로 다음날 따로 만나본 적도 없고 그 여자의 얼굴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뭔가 앙칼지면서도 특이하게 매력적이었던 그 목소리는 그날 이후에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시간이 지나며 차츰 다른 기억들 아래에 덮여가던 중 몇 주쯤 지나 만기된 군 적금을 출금하러 은행에 갈 때가 되어서야 다시 그날 생각이 났다.

 사는 곳이 교외 외딴 곳 공공임대주택이라 적금이 든 농협은행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통장과 인감을 들고 농협 지점을 찾아들어가 문을 열어보니 번호 부르는 소리가 맑게 들려온다.


"172번 고객님, 3번 창구로 모시겠습니다~"


 정확히 그 목소리였다.


 나는 내 차례도 아니면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확 들어 3번 창구 쪽을 돌아보았다.


 은행원의 친절한 목소리라면 누구나 당연하고 익숙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육두문자를 내뱉던 그 앙칼진 목소리를 먼저 들었던 나는 그녀의 그 영업용으로 다듬어진 목소리가 오히려 더 감정 없게 들려왔다.


 그녀에게 흥미가 생긴 나는 페이스북이나 보고 있던 휴대폰도 집어넣고 창구 쪽을 보았다.

 물을 마시러 가는 척 정수기로 가서 3번 창구 쪽을 돌아보니 그 앞에는 근처 달동네 어딘가에 살 법한 노인네 하나가 앉았고 반대쪽에는 정장 재킷 없이 흰색 블라우스만 입은 여자 은행원이 고객을 응대하고 있었다.

 노인은 뭔가 만족스럽지 않은 듯 어째 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여기 농협아냐 농협!! 농협이 다 그게 그거지 뭔 말이 많아, 빨리 내돈 내놓으라고!!"


"저, 고, 고객님, 주택청약은 여기서 처리가 안 되신다고 말씀을--"


"어린년이 따박따박 말대꾸야, 빨리 내 돈 안 가져와?!"


 노인이 마스크가 흔들거리도록 소리를 지르자 다른 손님들도 창구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갑질하는 노인네였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냐마는 이 외딴 지역농협이라면 하루에도 셀 수 없을 만큼 시달릴 게 안 봐도 뻔하다.

 그 새벽날에도 늙은이 어쩌고 하는 욕이 섞여 있었던가, 그 이유를 알 만하다.


 직원들도 노인네의 그 꼴을 보다못했는지 ''팀장 최현철" 명패가 붙은 자리의 남자가 일어서서 창구에 다가와 노인을 타일렀지만 노인도 막무가내였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자는 이제 울기 직전이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상한 동정심이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다는 그 당연한 감정 외에 다른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그 비오는 새벽날 술김에 욕지거리를 하며 드러냈던 그녀의 한을 조금이라도 대신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라든가.

 아니면 지난날 여자아이 같다며 놀림을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던 아픈 기억이 싫어 군에서 운동만 하던 나 자신의 사정에서 느껴진 공감이라든가.


 다짜고짜 노인네의 목에 팔을 걸고 강제로 자리에서 일으켜세웠다. 60대쯤 되어보이는 노인은 여직원에게 내뱉던 말이 꺽 하고 갑자기 삼켜진 채 문 바깥으로 끌려나왔다.


"꺼져!"


 혹시나 욕을 하며 내치면 또 달려들까봐 그 짧은 한마디만 남기고 나는 노인을 주차장 쪽으로 내던졌다. 바닥에 나뒹군 노인은 다시 일어서서 이쪽을 잠깐 흘겨보지만 다시 올 용기는 없는 듯 이내 단념하고 걸어가버린다.


 박수갈채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다들 아무 일도 안 일어난 척을 하려는지 은행 안 분위기가 꽤나 어색했다. 나도 그 분위기에 섞여들어 자리에 다시 앉았고 잠깐 뒤 띵동 하는 차임이 침묵을 겨우 깼다.

 내 차례가 온 건 거기서 서너 명 정도 더 지나간 뒤였다. 


"176번 고객님, 3번 창구로 모시겠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바로 그 여자였다.


 도와주기는 했어도 그걸 스스로 뽐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눈도 마주치지 않고 인감과 적금통장을 꺼냈다.


"그, 적금 만기 돼서 출금하려고--"


"......."


"....저기..저기요..?"


 말이 없는 것이 이상해 고개를 올려 그녀를 보았다.






 눈동자가 흐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 속에서 뭔가가 또렷했다. 꼭 하트가 눈에 박혀있는 것처럼.


"저기...?"


"아, 아, 네네, 적금이..요?"


 하며 이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허둥지둥거리는 것이 나보다 나이가 많아보이는 여자임에도 뭔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제서야 손에 쥐고 있던 적금통장과 인감을 그녀에게 건네주려는데 내가 접시에 통장을 올려놓기도 전에 그녀의 손이 다가와 내 손등을 감쌌다.


"이름이 뭐예요?♡"


 인감이 아니고 바로 내 손등을 꼭 쥐고 있었다.



 그게 공식적인 첫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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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 자리에서 예금 개설에다가 웬 보험 계약서에 서명까지 한 걸 동정심과 의협심의 연장선상이라고 하면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아마 나를 바라보던 그 눈빛, 꼭 하트가 눈동자에 새겨져 있기라도 한 것 같은 그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녀의 행동 때문일지도 모른다. 보험 상담을 하면서 그녀는 가슴팍에 "대리 강세린"이라는 이름이 붙은 자기 명찰을 계속 만지작거리는데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알아달라는 것 외에 또다른 의도가 녹아있는 것 같았고 뒤에서 최 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이 눈치를 주든 말든 개의치도 않고 그녀는 계속 보험 상담을 이어나가면서 내 손에 자꾸 자기 손을 겹쳤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이제 막 전역한 남자라 세상 모든 여자가 다 예쁘게 보이고 눈만 깜빡여도 나한테 관심있나 하고 착각이 드는 시기라 내가 그저 망상을 하는 것 같았다. "이름이 뭐예요?"라고 내게 물어본 것도 이상하게 들렸을지 모르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적금 해지할 때 어느 은행원이나 처음 꺼내는 말이 아닌가.


 올해 복학한 20대인 내가 스스로 보험을 드는 건 당연히 이것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보험 제안부터 계약 서명까지 혼자서 주르륵 설명해줄 때도 그냥 고개만 끄덕거리며 대충 알아들은 척만 할 뿐 일방적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마지막에 보험증서와 함께 자신의 명함을 건네주며 "앞으로도 계속 상담해야 할 게 많아서, 나중에도 연락드릴 수 있으니까 그때마다 꼭 여기로 오셔야 돼요?" 하는 얘기도 나는 정말 보험 때문인 줄로 알았다.


 바로 그날 저녁 내 카톡에는 '행복100세종합보험 가입을 축하드립니다!' 하는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메시지가 농협 플러스친구나 SMS 문자메시지도 아닌 '강세린'이라는 이름으로 보내진 카톡 메시지인 게 조금 이상했지만 그녀의 그 명찰 어필 덕분에 이름을 기억해낼 수 있었고 아무 망설임 없이 친구 추가 버튼을 눌렀다.


"음…."


 추가된 그녀의 카톡 프로필을 보며 그녀의 프사를 보고 싶다는 궁금증이 갑자기 피어올랐다.


 위에 그림으로 고양이 귀가 얹힌 프사는 기차 안을 배경으로 찍은 듯한 셀피였고 배경 사진에는 침대 위를 돌아다니는 고양이가 담겨 있어 꽤나 평범했다.


 그러나 모든게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나도모르게 그녀의 프사를 계속 보고 있었다.


"...아으! 뭐 하는 거야 나."


 남의 프사를 들여다보는 게 뭔가 망측한 짓인 것 같아 이내 그만두고 휴대폰을 껐지만 오히려 그녀의 잔상이 더 머릿속에 떠오르고 있었다.


 단정한 매력이 있는 정장과 단발머리.

 날이 서 있으면서도 또 한순간에 애교있게 바뀌는 눈매.

 ……그리고 내 손을 자꾸 어루만지던 그 가늘고 부드러운 손가락…


"..내가 미쳤지 진짜. 어루만지긴 뭘 어루만져..!"


 한번 만난 것으로 벌써 난리를 치는 내가 싫었지만 뭔가 그녀의 얼굴에 계속 눈이 가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거의 일주일에 한번 꼴로 [권지민 고객님 보험 상담과 관련하여 OO농협에 내방하여 [강세린] 직원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카톡 메시지가 오면 의심보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들며 꼬박꼬박 농협지점을 찾아갔다.


 농협지점으로 들어가면 번호표도 뽑기 전에 그녀가 나를 알아보고 "고객님 이쪽으로 오세요~!" 하면서 나를 좁은 방으로 안내하는데 아마 보험/대출 상담실 같았고 사방에 벽이 쳐져 있어 소리가 새어들어오지도 않았다.


 외진 농협지점이라 이 방을 쓰는 사람도 없는 듯 보험 상담 건으로 지점에 와달라는 문자가 매주 오면 상담 장소는 항상 그곳이었고 주변의 눈치도 덜 보이는 곳이라 나와 그녀는 그 안에서 보험 외에도 온갖 이야기를 했다. 사실 젊고 건강한 사람이 보험 관련해서 이야기할 것도 거의 없었으니 사실상 서로 대화하는 공간이었다.


"진짜요? 호호호.."


"그래서 대학교도 여기 왔죠 뭐."


"지민 씨 학번이 어떻게 되세요?"


"17학번이죠, 복학해서 이제 2학년. 세린 씨도 대학교 여기 다니셨어요?"


"저요? 저는 농협대 나왔죠. 졸업하자마자 여기로 발령나서 일하고 있어요."


"농협대가 있어요?"


"네! 잘 모르는 사람 많더라구요."


 그런 식으로 서로 사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꼭 데이트 스팟 같았다. 중간고사가 지나고 그녀와 만남이 계속되자 그게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썸'이라고 하는 게 이런 느낌인가. 살면서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느끼며 나는 그녀와 '보험 상담'을 빙자한 데이트를 이어나갔다.


"그날 술에 꼴아서 있죠? 그대로 필름 확 끊겼거든요. 막 뭐라고 뭐라고 혼자 말한 기억이 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제 집 거실바닥에서 일어나더라구요, 호호호…"


 그러던 어느날 술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 새벽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하하.. 술 많이 드시나 봐요."


"저요? 회식 같은 건 싫은데 저 혼자서 펍 같은 데 가서 마시는 건 좋아해요. 근데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닌데.. 그날은 좀 많이 마셔가지고.. 헤헤."


"혹시.. 그게 언제죠?"


 나는 그녀였다는 것을 거의 확신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에게 물었다.


"음.. 올해 봄이었는데, 언제더라아..."


"..3월 20며칠 아닌가요?"


"어? 어떻게 아세요?"


 그녀 맞았다.


 그제서야 나는 그날 새벽의 일을 꺼냈다. 새벽날 산책을 나가다 길가에 엎어진 여자를 택시에 태워 보낸 적이 있다고. 그리고 아마도 그때 최팀장 욕을 바가지로 하던 그 여자가 혹시나 세린 씨가 아니었느냐고.


".......그게 지민 씨였어요?"


 목소리가 나직했다.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눈치인가 싶어 나는 바로 몸을 사렸다.


"괜히 얘길 꺼냈..나요? 죄송해요."


".........역시."


"저기..세린 씨..?"


"...........역시지민씨는나랑만날운명이었구나..내주변에는날싫어하고질투하는인간만있는줄알았는데..내가위험할때언제나도와주는사람이정말로있었어이건기적이야..지민씨는역시내연인내신랑내꺼야내꺼내꺼내꺼내꺼❤❤❤"





 ...다시 이쪽을 보는 세린 씨의 눈은 눈동자 속 무언가가 더 커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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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엄마, 잠깐만,"


[지민아. 엄마랑 약속했었지. 학점 3 못넘으면 용돈 안 받기로.]


"그러니까 과제가 너무 터무니없어서 점수가--"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잖아.]


"으..우.."


[다음 학기 때 다시 학점 3 넘기면 얘기하자, 알았지?]


"흐이잉.. 알았어…"


 정말로 멍청했다.

 농협지점에서 세린 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만큼 과제 시간이 날아가고 시험 준비 시간이 줄어든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성적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 자괴감은 곧이어 후회감으로 변해갔다. 다른 녀석들은 눈 몇 번 마주치고 사귄 여자친구와 함께 공부도 하고 여행도 가고 하며 행복해하는데, 나는 한 학기가 지나도록 진전도 없는 여자 은행원 한 명을 붙잡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던 것이다.


"붙잡기는 무슨.."


 다 내 착각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그녀의 호의, 나의 시간 투자 모두 다 강세린 씨가 자신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 내게 듣기 좋은 말을 해 주고 이야기를 받아주고 있는 거라면.


 만약 그렇다면 나는 공부도 연애도 인생도 아무것도 잡지 못하는 멍텅구리에 불과했다.


"......"


*카톡*


[권지민 고객님 보험 상담과 관련하여 OO농협에 내방하여 [강세린] 직원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빨리 찾아주세요~]


 언제부터인가 친근한 말투의 메시지를 같이 보내는 그녀의 그 '내방' 메시지가 다시 떴다.


 글쎄, 진짜로 날 친근하게 생각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고. 계약한 거래처한테 친근하게 다가와가며 술 한잔 올리고서 '형님으로 모시겠씀다~' 하고 싹싹대는 모습은 굳이 드라마 속 장면이 아니어도 많이 봤다.


'....술이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나를 이용하는 것은 아닌지 그녀의 속마음을 떠봐야 하지 않을까 하고.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되세요?"


 하고 물어본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네..?"


"아니, 아까부터 계속 술 땡긴다고 하셔서.. 괜찮으시면 맥주나 한잔 같이 하실까 하고요."


 내가 들어도 어설픈 대사였지만 다행히도 그녀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눈동자에 박힌 그 무언가와 함께.


 농협 영업시간은 4시에 끝난다. 그러나 처음으로 같이 술 마시는 사이에 낮술을 들이킬 수는 없어 6시에 만나기로 서로 약속을 했으니 그녀는 아마 집에서 조금 쉬다가 밖으로 나올 것이다.


 10분 일찍 약속장소에 나타난 나는 숙취해소제나 미리 사러 술집 근처 편의점에 들렀다.


 그리고 공교롭게 그녀도 거기 있었다.


".....!!!"


 카운터에서 물건을 계산하던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당황하며 산 물건을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


"지지지, 지민 씨..?"


"세린 씨, 먼저 기다리고 계셨어요?"


"아, 네네, 네! 뭐 얼마 안 기다렸어요…"


 하면서 편의점 봉지를 가방 안에 욱여넣는데 안에 뭐가 들었는지 이쪽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밀크캐러멜 크기만한 상자 하나가 지나간 것 같은데….


 '뭐 샀어요?'라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더 묻지 않고 같이 술집으로 들어갔다.

 사실 안에 뭐가 들었든 내 상관할 것은 아니었다.

 내가 상관할 것은 술을 마시면서 할 그녀와의 이야기였으니까.




 ...그렇게 생각은 했는데.


"우리 지민 씨이이, 그때 지이인짜 머시썼어요오~!"


 그녀가 나한테 술이 약하다는 얘기를 했었던가.


 기억이 없다. 그러나 회식 대신 혼술을 자주 한다는 말을 생각하면 누가 옆에서 얘기를 안 해준 게 아닐까.


"꺄하~! 그래, 맥주가 이래야지이이!"


 지금 저게 두 잔째다.


 그녀 혼자서 일찍 취해버리는 바람에 내가 이야기를 주도하기도 전에 분위기가 확 풀려버렸고 그녀는 그동안 쌓여왔던 자기 얘기들을 나에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니이, 그래서 지민 씨 완전 귀엽게 생겼는데 그 힘은 어디서 나왔는지 몰라. 아, 저기 말 놔도 되지이? 지민 씨 보면 완전 애기 같애서 말야, 우리 지민 씨 몇 짤?"


 선후관계가 잘못된 거 아닌가..


"..스물셋입니다."


"헤에, 완전 애기네~ 누나는 스물여덟!"


"진짜요? 저랑 그렇게 차이 안 나 보이는데."


"헤헤, 사실 만으로 스물여덟이지롱~"


"아, 그러면 세는나이로--"


"그만! 거까지! 굳이 말 안해도 뉴나 다아~ 알아요~"


"죄송해요."


"아냐아냐, 죄송할 게 뭐 이써! 그래애! 나 서른이야 서른! 씨, 친척들은 만나면 얼른 결혼하라고 난리고, 우씨.."


"하하.."


"그래도 우리 지민이는 누나한테 그런 얘기 안 꺼내줘서 너어어~무 이뻐요! 착해, 우리 애기!"


"저, 군대도 갔다 왔는데.. 애기라고 불리기에는 이제.."


"에에이~ 누나한테는 애기야! 저기, 지민 씨, '누나아~' 한번만 해줘. 응?"


"...예??"


"나 지민이한테 '뉴나~'하는 말 꼭 듣고시픈데? 안되까?"


 ....이거 대체 어디까지 나가는 거지?


"ㄴ..누...누..나..?"


"꺄아아~~!♡ 말해줬어 말해줬어!! 그래그래, 우리 지민이, 말도 잘 듣네~"


 그렇게 그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잇는 동안 내가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 다만 반대로 그 때문에 그녀의 속마음이 끝없이 드러나고 있기는 한데….


'차라리 아부떠는 짓은 안 해서 다행인가.'


 나는 일단 그녀가 솔직히 털어놓는 모습 그대로 맞춰주기로 했다.


"--정말??"


"사실 그래서 운동했던 거죠. 여자애처럼 보이기 싫어서."


"오구오구, 그랬쪄여~"


"그런 게 싫었던.. 건데.."


"아이, 괜찮아! 꼭 남동생 보는 것 같아서 그래 누나가."


"동생이 있으세요?"


"아니? 없는데?"


"....???"


"뭐 다 그런 거 아냐? '내 딸 같아서 그래애~!' 하는 거?"


"..........설마 그런 거 당해보신 건가요..?"


"왜 없게써, 사람도 안 오는 지역농협에 널린 게 늙은이들이구.. 그새끼들 보면 나이처먹고도 여자 밝힌다니까. 누나가 왜 회식 싫어한다고 생각해?"


"......."


"왜 그래애, 뉴나 걱정해주는고야? 아이구, 기특해 우리 지민이이~! 하지만 괜찮아요, 이제는 안 그래! 괜차나 괜차나!"


"게다가 이제는 누나를 지켜줄 우리 지민이가 있는데? 그치? 우리 애기가 누나 지켜줄꺼지이?"


 잠깐 침묵했다.

 속마음을 알아보는 자리가 그녀와의 약속을 하는 자리가 되어버리는 건가...


"......ㄴ...네."


"그치? 약속했어? 누나는 우리 지민이 보험 설계하고 인생 설계 여얼씸히 해줄테니까, 지민이는 매일매일 농협 와서 누나 지켜주기! 자 손가락!"


 얼떨결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저번처럼 필름이 끊기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자 그럼 약속 기념으로 짜안~~"


"짠..."


 맥주잔이 달그락거리며 부딪쳤다.


"크으으으…!"


"술 많이 드시는 거 아녜요?"


"이 정도쯤은 괜차나! 지금 누나 무시하는 거야?"


"아뇨, 그건 아닌데, 많이 드시는 편은 아니라고 저번에.."


"아이 뭐 어때! 그러는 지민이는, 맥주 마시는 척만 하면서 지금 아직도 두 잔째지?"


 ...윽, 눈치 못 챌 줄 알았는데.


"죄송해요, 속이려는 건 아니었는데.."


"괜찮아 괜찮아! 이 뉴나는 다~ 이해해줄 수 이써요! 지민이는 아직 애기라서 주량이 소주 한 병 정도밖에 안 되지? 그래서 적게 마시려는 거자나! 그래도 돼, 뭐라는 사람 아~무도 업써!"


"그..걸 어떻게 아세요?"


"으응? 어떻게 알기는? 누나니까 알지!"


 분위기가 이상해진 것이 여기서부터였다.


"아까 그랬짜나? 누나는 우리 지민이 보험 설계하고 인생 설계 열씸히 해주겠다구. 그러려면 우리 지민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다 알아야 되는 거 아냐?"


"보험 설계가..거기까지 해당되는 거였나요?"


"처음에는 그냥 울 지민이 카톡 프사나 좀 볼까아~ 로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그렇게 됐어! 아, 근데 고등학교 졸업식 때 지민이 너어어~~무 귀엽더라~♡ 혹시 중학교 때 사진은 없어? 초등학교 때는?? 꺄아아, 상상돼 완전!"


"아...하..하..."


"글고 주량 같은 거는 지민이 페북! 하고 인스타 보면서 알았지! 페북 보니까 막 남자다워보이려고 관심분야에 막 자동차 넣고 UFC 같은 거 넣고 한 거 너무 귀여웠다니까? 히힛, 사진은 완전 애긴데!! 꺄하하하하!"


 취기가 확 올라오는지 그녀가 말을 빠르게 이었다.


"근데 인스타 보니까 자꾸 같은 과? 여자애 둘이랑 자주 어울리던데, 야아, 걔네들 얼굴 상이 딱 봐두 완~전 간사해보이지 않아? 걔들은 어떻게 만났어? 동기? 후배야? 뭐하는 애들인지는 모르겠는데 가깝게 지내면 안 될 것 같드라. 누나가 여자를 잘 아는데, 저런 애들은 지들한테 안 넘어올 것 같으면 딱! 하고 칼같이 버리는 애들이야~ 누나 말 믿어!"


"......."


 그 뒤로 하는 자기 대학 시절 한탄은 귀에 제대로 들려오지 않았다.


"...저 가봐야겠어요."


"어?? 벌써? 왜애, 갑자기~ 방학이자나, 수업도 없는데."


"약속..있어요."


 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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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100세보험 말씀이십니까 고객님~?"


"........"


 영업용으로 다듬어진 은행원의 목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간다.


"..고객님, 고객님? 보험이…."


"...네? 뭐라구요?"


"해지하시려는 보험이 행복100세보험 맞으신가요?"


"아, 네."


 번갯불에 콩 볶듯 가입한 것처럼 해지할 때도 눈 깜짝할 사이였다.


 시내 한가운데에 있어 정장 차림의 회사원들만이 가득한 농협은행 속에 혼자 반팔 셔츠 차림인 나는 낯선 은행원 앞에서 지금까지 가입한 금융상품들을 짚어보고 있었다.


"더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고객님~?"


 여직원은 수천 번은 보여줬을 영업용 미소를 지어주며 나에게 해지된 예금과 보험에 든 돈을 접시에 담아 건네주었다.


 '이 사람들에게 인간적인 면모는 없을까?'하고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지.


"...저기."


"...?"


 그리고 어쩌면 차라리 인위적인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개인정보 같은 건 알아서 다 지워지나요?"



 그것이 끝이다.

 내가 은행 문을 나서는 것으로 이곳과 나 사이의 모든 연관은 끊어졌다. 농협, 농협은행 모두.



*다음 정거장은, 무현동 주민센터입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카톡*



 한 10분 정도까지는.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뭐야?"


 뭔가 농협이 보낸 카톡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폰을 꺼냈다.


[강세린: 권지민 고객님 전산상 오류로 보이는 해지 신청건이 있으니 금일 내로 내방하여 [강세린] 직원을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강세린: 권지민 고객님 금일 영업시간 내로 해지신청을 취소하지 않으면 해지가 확정되오니 즉시 내방하시기 바랍니다]


[강세린: 권지민 고객님 현재 예금 해지 신청이 드]


[강세린: 지민아]


[강세린: 지민아 왜갑자기 다끊었어]


[강세린: 혹시무슨일있는거야??]


[강세린: 애기야 갑자기 왜그래]


[강세린: 지민아 톡좀봐줘]


[강세린: 지금까지 톡 잘봐줬잖아 보내면1분만에 봐줬잖아]


[강세린: 지민아]


[강세린: 애기야]


[강세린: 혹시어제술마신것때문에그래??]


[강세린: 어제누나가뭐실수한거있어??]


[강세린: 미안해 누나가술취하면막이상한말하고]


[강세린: 아]


 정확히 그 마지막 카톡까지 읽자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등록이 안 된 번호였지만 누구인지는 뻔한 것이었다.


[종료]


 전화는 그러고도 4번을 더 울렸으나 모두 끊어버렸다.


 왜 전화를 거는지 안다. 어제 술에 취해 했던 말들이 이제서야 떠올랐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보고 들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꼈다.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카톡*



 ...그러나 그녀는 아닌 것 같다.



[강세린: 지민아]

[강세린: 지민아 카톡봐]

[강세린: 지민아]

[강세린: 누나가 잘못했어]

[강세린: 지금 어디야??]

[강세린: 누나가 갈게]

[강세린: 너혹시그년들한테말했어?]

[강세린: 말한거지???]

[강세린: 너누가그렇게함부로]

[강세린: 권지민 전화받아]

[강세린: 받으라고]


 휴대폰을 꺼버렸다.


 사실 오늘 농협은행을 찾아갔을 때만 해도 좀 심한 처사인가 생각하고 있었다. 겨우 내 사생활을 들여다본 것 하나 가지고 너무 섣불리 판단하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옳은 판단이었다는 걸 이 수십 개의 카톡이 증명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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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이제 끝났다고?"


[너 진짜 계절학기 안 듣는게 나아. 어우, 오전 오후 모조리 수업으로 채우니까 토 나올 것 같애.]


"그러니까 6학점을 왜 들어가지고.."


[아니, 이럴 줄 몰랐지이!]


 그로부터 며칠쯤 지난 어느날 저녁.

 나른한 오후가 지나고 저녁 시간대의 이상한 활기가 생긴 나는 자주 어울려 놀던 학과 친구 두 명과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암튼 수업도 끝났고, 내일 토요일이니까 우리랑 쏘맥 고?]

[야 너 오면 삼겹살 누나가 산다!!]


"우리? 방금 누구야?"


[아 방금 수진 언니. 나랑 사회학 같이 듣거든.]


"너네 둘이랑 가면 싫은데. 또 술 진탕 맥이려고 그러지?"


[나는 안 그래! 수진 언니가 그러지. 야, 우리 지금 어딘 줄 알아?]


"어디?"


[우리 지금 아카중학교 지나고있지롱~~]


"야 우리 집 오고있냐?!"


[우리가 안 가면 너 안 나올 것 같아서!]

[권지미이이인~! 안오면 누나가 문 확 열어버린다아아~!!]


"저 누나 진짜 하루 재워줬더니 번호는 어떻게 외워갖고…"


[아무튼 올 거야 말 거야?]


"근데, 나 아직 저번에 술마신 것 때문에 속 안좋아서 술은 좀."


[아, 저번에 그 농협? 작업걸다 잘 안 돼서 속터지는 건 아니고? 아이, 안 될 나무 쳐다보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나와! 그런 건 같이 마시면서 풀어야 돼.]

[누나가 다~ 잊게 해주께!!]


"아 그게 왜 나와! 그거 다 잊었으니까 상관없어 이제."


[그래애~? 야, 차라리 잘 됐다, 그냥 평범하게 CC를 좀 찾아 봐! 학교에는 여자가 없냐? 웬 은행원한테 작업을 걸고 그래. 멀리 보지 말고 좀 주변을 봐봐.]

[네년들이구나…?]


"방금 누구야?"


[방금 뭐?]


"아니 방금 누가.."


[어? 수진 언니 아냐?]

[아니..누구신데저한ㅌ..꺄아아아아아아악!!!!]


"야! 무슨일이야! 수진 누나?!"


[언니!? 언니!! 당 데--]


"소영아? 한소영! 여보세요?!"


[..................]


 그 뒤의 대화 소리는 휴대폰이 떨어지며 나는 달그락거리는 잡음들에 묻혀버렸다.




[...........]




 잡음이 사라진 뒤에도 이어지는 이상한 정적에 나는 그대로 휴대폰을 잡은 채 떨고 있었다.





[............*바스락*]






"........"






[.....잘 있었어?]






"...세린..씨..?"



[얼른 문 열어줘.]



"..아…"



[어서.]

"어서."



 그 목소리.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꼭 다른 사람 같은 목소리.


 인위적이지 않아 매력적이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인간적이지도 않은 냉혹한 목소리가 되어 있다.


 그 목소리가 현관문까지 울려 들어오고 있었다.


"........"


 나는 문구멍으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눈빛이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얼굴에 묻은 피는 분명…!



"........훔쳐보지 마."



"히이익…!"


 소스라치며 놀라 문구멍에서 떨어졌다.

 아무렇게나 손을 뻗어 문의 잠금장치를 찾아봐도 달린 건 도어락뿐이었고 그것마저도 구식이었다.


"1..112..!"


 남은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나...



 띡.



 도어락 덮개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수진인가..? 그년이 그래도 쓸모가 있더라고?"



띡.



"꼴에 살고는 싶었나 봐."



띡.



"그래서 살려두기로 했어."



띡.



"이 번호가 맞다면 말이지만."



띡.



덜컥.






"...찾았다, 우리 지민이."






"아...으..아…."


"우리 애기, 누나 너무 오랜만에 봐서 놀랐어? 미안해, 누나가 너무 늦게 왔지?"


 허무하게 열려버린 문이 다시 닫히며 띠리릭 소리가 났다.


"..근데 그게 누구 때문일까?"


 몸이 떨려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든 떼어진 발을 뒤로 끌며 조금씩 뒷걸음만 칠 뿐.


"누나가 지민이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되게 많거든? 근데 지민이 생각해서 딱 하나만 물어볼게."


"........"




"왜 약속 안 지켰어?"




"...네...?"


"누나랑 약속했잖아? 누나는 인생 설계 다 해줄테니까 우리 애기는 매일 와서 누나 지켜주기로."


".......그.. 그건 세린 씨가 마음대로--"


"헛소리 하지 마."


 이쪽으로 다가온다.


"누나랑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잖아."


"누나는 진심이었는데. 근데 우리 지민이는 누나가 그냥 마음대로 말하는 건 줄 알았어?"


"......."


"아, 알았다.. 누나를 시험해보고 싶었던 거지? 누나가 네 인생을 책임져줄 준비가 돼있는지 알아보려고? 그래서 고객정보 삭제요청까지 한 거야..?"


"그.. 그건."


"누나가 그래도 그 전에 미리 받아놓은 정보가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우리 착하고 순하고 젠틀하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운 우리 지민이를 영영 못 찾을 뻔 했잖아."


 강세린의 눈동자에 무언가가 점점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쓸어내린다….


"흐읏…"


"넌 내꺼야. 네가 그 보험 계약서에 서명한 순간부터, 너는 누나한테 인생을 맡긴 거잖아? 누나가 뭘 제안해도 다 좋다고 해준 건 누나한테 네 몸부터 마음까지 전부 맡긴 거 아니야?"


"넌 나만의 고객이고 나만의 것인데… 그런데… 너는 보험도 예금도 다 끊어놓고 저런.. 저급한 년들이랑 노닥거리고…."


 뺨을 쥔 그녀의 손에 손톱이 세워지며 힘이 들어갔다.


"아파..아파요...세린 씨…!"


"하지만 이젠 괜찮아. 다 괜찮아… 누나가 이렇게 찾아왔으니까…"


 하며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다정해졌다.

 그러나 다정한 목소리에 죽은 사람의 눈빛이었다.


 덜덜 떠는 나를 그녀가 와락 안았다.


"하아… 이제 앞으로.. 앞으로 누나가 우리 지민이 인생을 다 챙겨줄게. 재산도, 건강도, 식단도, 마음도, 성욕도 모두 다…… 이제는 오직 누나만 있으면 되는 거야."



 안은 걸 풀고 다시 나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지금부터 누나가 증명해 줄게...❤"


 그 순간 강세린이 나를 밀치며 확 하고 바닥에 넘어뜨렸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알약 비슷한 무언가를 꺼내더니 한 알을 자기 입에 넣고는,


"우웁!?"


 내 입술을 훔치며 알약을 강제로 내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음...우으음...쮸우웁...❤❤"


 내 양 볼을 움켜쥐고서 그녀는 내 입술을 음미했다.

 알약을 목구멍 안으로 들이민 그녀의 혀가 다음으로 내 입 속을 한껏 맛보고 있었다.


"으읍..읍..! 끄읍.."


 목구멍이 덜컥 움직이며 결국 알약을 삼켜버리자 그제서야 그녀는 내 입술을 놓아주었다.


"프아아..! 대, 콜록, 대체 뭘 먹인 거예요..!"


"...음… 누나의 사랑?❤"


 하며 그녀는 대답을 피했지만 그 약이 무엇인지 곧바로 몸이 알려오고 있었다.


 근육에 힘이 풀리기 시작한다.



"하아..흐아아..."



 그녀가 나에게서 손을 떼고 일어섰지만 나는 다시 일어설 수가 없다.


"끄으으.. 으윽..!"


 안간힘을 써도 몸을 일으키질 못하는 내가 귀여운지 그녀는 쿡쿡 웃으며 여유롭게 자기 옷 단추를 풀고 있었다.


 손목에 피가 묻은 흰색 블라우스, 엉덩이 윤곽이 드러나는 검정 스커트, 그리고 검정색 스타킹까지….


 이제 속옷만이 남겨진 그녀가 자신의 몸매를 과시하듯 다시 나에게 다가온다.


"지민이 인생 계획은 이제 누나가 다 챙겨줄게."


 이내 속옷마저 다 풀어버린 그녀가 다음으로 향한 건 내 바지였다.



"우선 자녀계획부터 짜 볼까?❤❤❤"





==========





".....여보."


"....."



"여보❤"



"흐이익!!"


"내가 이렇게 귀를 핥아줘야 대답할 거야?"


"미..미안해…"


"갑자기 왜 그렇게 멍때리고 있었어?"


"아냐, 아무것도.. 그, 오늘 내가 아침밥 하는 날이지..? 얼른 밥해줄게."


 두 아이를 기르는 맞벌이 가정은 이른 아침부터 부산하다.

 남편은 대기업 사원에, 아내는 지역농협 과장. 그리고 토끼같은 아이들과 멋진 집까지. 누구의 설계인지 정말 완벽한 가정이었다.


 남편 권지민이 안쳐놓은 쌀을 밥솥에 담는 동안 아내 강세린은 남편의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했어?"


"아니, 뭐 그냥..."


"그냥 뭐?"


 목소리가 똑 부러진다. 얼버무리고 거짓말을 해도 그녀는 속일 수 없다는 걸 권지민도 알고 있었다.


"...우리 첫경험 때가 갑자기 떠올랐어."


"그때? 갑자기? 아아~ 우리 애기,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무서웠쪄요?"


"......."


 남편은 부정하지 않는다.


 권지민 입장에서는 당연하다. 대학생 시절 그 첫경험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처음이니까 상냥하게 해줄게?" 라던 강세린의 약속은 그녀의 성욕에 묻혀버렸다. 근육이완제로 힘을 쓰지 못하는 권지민의 위에 올라탄 그녀는 자기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말을 타듯 허리를 흔들어댔고 쓰러져 잠든 뒤에도 권지민의 몸을 놓아주지 않았다.


 고통과 쾌감이 뒤섞여 몸도 마음도 망가져버릴 것 같던 그 하룻밤은 권지민에게 있어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첫 아이를 출산하고 몇 달 지나지 않아 다시 아이를 만드는 부부는 흔치 않다. 그러나 그것은 첫 아이를 만들 때의 기억이 생생해 관계를 거부하던 남편을 강세린이 최음제를 먹여 억지로 성욕을 이끌어내 다시 쥐어짜낸 결과였다.


 거기다 아이를 한 명 만들 때 한 번의 관계만을 맺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강세린의 배란 시기가 올 때마다 거기에 맞추어 권지민은 반강제로 자신의 몸을 아내에게 내어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배란기 강세린의 성욕은 자신의 남편에게 전혀 자비롭지 않았다.


"오늘 아침은 뭐야 여보?"


"어제 찌개 남은 거랑.."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우리 자기 말이야."


"......."


"...꺄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아유, 그 반응 때문에 못 끊는다니까 정말."


 하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내는 강세린이었지만 그녀를 등지고 있는 권지민의 표정은 풀어질 생각을 않는다.

 그에게는 그 말이 전혀 장난 같지가 않았다.


"...어제 장 본 거 어디 있어?"


 아직도 긴장된 몸을 다시 추스른 뒤 남편은 찬거리를 찾아 냉장고를 열어본다.






"......히익!!!!"






 냉장고 안에 든 무언가를 본 권지민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저앉았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마냥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아...으...흐아아.."





"...봤어?"





 그 뒤에 벌써 옷을 갈아입은 강세린이 남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자..자..장..어…"




"후훗, 맞았어."



 냉장고 안에 어제 사온 장어가 비닐백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건 단 하나.









"나 오늘부터 배란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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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더 못깎아내겠다

심지어 일상생활 취향 성욕까지 모두 강세린 입맛에 맞춰 개조하는 부분은 넣을 엄두도 못 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