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괜찮은 20대를 살았다. 여자친구도 사귀고, 작지만 좋은 회사에도 취업했다.

더 바랄 것 없는 삶이었지만, 무언가 가슴 속 공허함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친구들의 성공 소식이 하나 둘 들려왔다.

누구는 내가 10년을 일해도 벌기 힘든 돈을 앉아서 주식으로 벌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티만 내지 않았을 뿐. 늘 나에겐 진하고 흉한 열등감이 들끓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20대 후반, 아는 형을 통해 전재산을 투자했다.



-



"이제 B동만 돌면 퇴근이네."

"이따 끝나고 술이나 한잔?"


"됐다.. 오늘은 일찍 자야겠어."

"쩝, 어쩔 수 없지 뭐."


투자의 결과는. 예상했겠지만 결국 비극이었다.

직업, 연인, 재산까지 몽땅 잃고 친구와 택배 일을 거듭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야옹-"

"뭐야, 새끼 고양이네? 버림받았나 보네?"

"..."


여기까지 와서 후회하지 않는 다는 말은 못한다.


".. 나 먼저 간다."


.. 하지만 나는 어미에게 버림 받은 새끼 고양이 따위가 아니다.



딩동-


1226호.

늘 마지막은 이 집이다.


"네~! 잠시만요!!"


여자 혼자 사는 집이지만, 뭔가 기분이 나쁜 집이다.

문을 열어주는 그녀의 뒤로 창문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벽이 대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 여자는..


"힘드시지 않아요? 커피라도 한잔 드시고 가실래요?"


나보다 어리게 생긴 주제에 매번 들러붙는다.

하지만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정말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것은..


"..."


고개를 기울이며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녀의 눈이었다.

사람의 눈이 아닌 것처럼 붉고 무서운 눈.


마치.. 살기만 빠진 호랑이의 눈과 같았다.


".. 아뇨, 괜찮습니다. 그럼.."

"아, 잠깐만요!"


"..?"

"저기, 저.. 조금 무거운 것 같아서 옮겨주셨으면 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가 이번에 시킨 택배는 좀 특이했다.

주소지를 스티커가 아닌 매직으로 써 놓은 상자.


언제부터 저런 물품이 있었지?


"아, 네. 그럼.."


그녀의 집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하지만 소름 돋게도 방 안에는 창문 하나 붙어있지 않았다.


크고 무거운 짐을 방으로 옮기고, 어서 빨리 이 소름 돋는 집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후우.. 다 됐습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


그녀의 무응답으로 조용해진 방 안.


"..?"


현관문은 어느새 닫혀 있었다.

이상하긴 했지만 아직 멀쩡히 달려있는 손으로 문을 열었다.




".. 이게 무슨.."


벽이었다. 거친 콘크리트로 구성된.

손으로 만져봐도, 두드려봐도 벽이었다.

딱 만져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아, 오늘은 주무시고 가셔야겠네요."

"뭐예요..? 이거.. 그리고 당신.."


".. 벽이네요."

"지금 장난하는 게 아니잖아!! 당신 누구야!"


그녀는 대답 대신 평소의 표정으로 응할 뿐이었다.


드디어 알 것 같았다. 저 표정을..

그녀는 나를.. 귀여워하고 있었다. 마치 애완동물처럼 보고 있었다.


"여기서 주무시면 돼요."

"..."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최대한 머리를 굴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을 뿐이었다.


싸운다? ..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미 그녀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존재인 것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지금으로썬.. 그녀의 장단에 놀아나는 수 밖에 없었다.


"내일이면.. 나갈 수 있는 거 맞지?"

".. 글쎄요. 저도 모르죠."

"..."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요? 푸핫.. 누가 보면 내가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네."

"..."


".. 그냥 잡아먹을까."

"무, 뭐라고..!?"


"꺄하하! 장난이에요 장난. 진짜 겁 많이 먹으셨나 보네."

".. 크윽.."


"먹을 거 가져올게요. 배 고프실 테니."

".. 됐으니까 불이나 꺼. 잘 테니까."

"..."


잠은 오지 않았다. 뜬 눈으로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잠자리에서 2시간 정도를 보내고 나서야 수잠이라도 잘 수 있었다.



-



"오빠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 그 위로 햇빛에 눈이 부셨다.


".. 어..?"

"언제까지 잘려구..? 집에 가자 이제."


"아.. 응. 그래야지."

"안색이 안 좋네.. 무서운 꿈이라도 꿨어?"


".. 아니. 모르겠어. 기억 안나."

"나 먼저 씻는다?"


얼마 후 그녀와 나는 호텔을 나와 택시를 잡았다.

아침 노을에 차 유리에 노란 빛이 비췄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녀가 운전기사에게 인사하고 내게 총총 걸음으로 뒤따라왔다.


"오빠는 인사도 안 해? 정말.. 예의 없-"

"..?"


"꺄아아! 고양이다..!"

"고양이..?"


잠시만 이 상황..


"오빠, 얘 부모한테 버림 받았나 봐! 더러운 거 봐.. 가여워라.."

"..."



"얘.. 우리가 데려가서 키울까..?"


어디서 본 기억이..


"어제가 크리스마스였으니까.. 이름은.. 이브?"

".. 바보야. 이브는 크리스마스 전 날이지.."


여자친구랑.. 이런 일도 있었나?

크리스마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이제 그만하자. 나 다른 여자 생겼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


아.. 이건 다른 날인데..

아마.. 몇 개월 지나고 내 투자가 망해버렸을 때 즈음인가..


"미안.. 잘 살아라."

"..."


이 대사. 여자친구에게 한 대사가 아니다.

아마..


"다음엔 좋은 주인 만나고."

"..."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고양이를.. 버렸었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키울 여건이 되지 않았다.


무언가, 내 머리를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쓰다듬었다.


눈을 떠 보니, 1226호 여자가 보였다.


"일어났어요?"

"..."


우당탕탕!


"무, 뭐하고 있던 거야 당신..!"

"하하핫.. 놀라는 모습 귀여워라. 그냥 한번 쓰다듬었을 뿐이-"


짝!


"나, 나한테 손 대지 말라고 했지..!?"

"..."


물론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간 손을 변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을 뿐이다.


그녀는 맞은 뺨에 손을 얹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무서운 표정이었다.


".. 네가 자초한 거야.. 그러니까-"

"이건.. 벌을 조금 줘야겠네요.."

"뭐..?"



곧, 나는 그녀가 말한 '벌'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나타나지 않았다.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굶은 나는 그녀의 방문을 긁으며 음식을 빌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리고 3일차. 그녀가 나타났다.


"살려주세요.. 제발.."

나는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의 옷가락을 붙잡고 애원했다.


나가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30일이 더 지났다.



".. 주인님.."


나는 그녀를 '주인님'이라 칭하게 되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내 곁에서 나를 쓰다듬거나, 배를 만지며 귀여워했다.


"사랑해. 너도 그렇지?"

".. 네."



".. 발정기는 아직인가..?"


완전히 나를. 애완동물로 취급했다.

현관은 그 사건 이후로 쭉 벽으로 막혔다.


"..."


그녀가 없으면, 이 집에서 나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렇게, 60일이 더 지났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평생을 이 곳에 갇혀 그녀에게 재롱이나 부리며 살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작전'을 준비했다.


그녀가 잠든 틈에, 그녀를 제압하는 것.

간단하면서도 가장 확실한 작전이었다.


그녀는 늘 나와 함께 잠에 들었으므로 기회는 많았다.

가장 큰 변수는, 그녀의 힘이었다.


나보다 마르고 덩치도 작은 그녀를 제압하는 데에도 힘들었던 이유였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키는 그녀의 능력을 아직은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녀는 나와 함께 잠을 청했다.

나는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준비한 밧줄로 그녀를 꽁꽁 묶었다.


그리고, 무기를 찾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날카롭거나, 무거운.. 것이 필요했다.

.. 무거운 것?



"저기, 저.. 조금 무거운 것 같아서 옮겨주셨으면 하는데.."



나는 바로 상자를 찾아냈다.

그녀가 주문한 상자. 이 안에 무기가 있다.


이 안에..



"뭐해?"


그녀였다. 손에는 밧줄을 들고 있었다.



"이거.. 너무 저항이 심하면 너한테 쓰려고 한 밧줄이네. 나한테 쓰게 될 줄은 몰랐.. 어라?"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갔다. 닫힌 현관문을 지나고, 막다른 부엌을 지나, 화장실로 향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을 닫고, 변기 커버 위에 쭈그려 앉아 아이처럼 겁 먹고 있을 뿐.


잠시 동안의 정적 이후, 나는 눈을 떴다.


"안녕."


그리고 그녀와 마주쳤다.



"나가고 싶으면. 나가도 좋아."


그녀가 화장실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보며 문을 열었다.

문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벽에 부딪혔다.



"..."


하지만 나가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콘크리트로 구성된 벽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용히 뒤에서 나를 안았다.

저항하기엔 너무 강한 힘이었다.


내 몸을 돌려 벽에 붙이고, 강제로 입을 맞추어도 저항할 수 없었다.



"또, 나 버리고 어디 가려고?"

"..."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다시 입을 맞췄다.



"이젠 다신 못 도망가. 여기서, 아사하는 한이 있더라도."

"..."



이젠.. 끝이다.



-



"어라? 이 고양이는.."


".. 오빠랑 키우던 고양인데."


"분명 가족한테 분양 시켰다고.."


"..."


"너도, 나랑 똑같구나."


".. 정말.. 정말로 좋아했는데.."


"..."


"너도 그렇다고?"


"..."


"지금도.. 좋아한다고?"


"..."


"정말 나랑 같구나."


"..."


".. 정말이야?


오빠를.. 데려올 방법이 있다고?"



그녀는 고양이의 말을 듣고 자신의 육체를 버리고 새로운 육체를 만들었다.


혼자의 힘으로는 당연히 불가능했지만, 고양이에겐 조금 특별한 힘이 있었다.


두 생명을 대가로, 하나의 강한 생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조련할 생각이었다. 자신들을 주인으로 인식시키고, 지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지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이거라면 아무튼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

"..."



"이제 우릴 버릴 수도 없어."

"..."



나는 다시 입을 맞추는 그녀의 혀를 세게 물었다.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보다, 살고 싶은 마음 뿐이었기 때문이다.



"아.."


그녀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입을 계속 맞추다 얼마 후 쓰러졌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