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2화 3화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서 소중한 시간을 같이 보낸다는 무슨 참전 용사나 분단의 고통을 가진 가족 같은 대사와는 다르게 무리엘의 그 말은 더욱 무거웠다.


“오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아, 네…”


“아침 식사는 제가 준비했어요. 인간은… 아니 아침 식사는 제대로 챙겨 먹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해서요!”


“감사합니다…”


 앞에 놓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음식들… 파릇파릇한 무침부터 꽤 오래 걸리는 갈비찜까지…


“아침 일찍부터 힘드셨겠어요.”


“오빠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


“음…”


 물론 이걸 누군가 본다면 부럽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생각해보면 나는 뮤리엘과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는데 함께 동거생활을 하고 있다. 뮤리엘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굉장히 어색하다는 말이다.


“와… 맛있다!”


“후후, 다행이에요.”


 하지만 그것보다도 놀라운 것은 뮤리엘은 나와 만난 첫날에는 스마트폰의 사용법도, 밥솥의 사용법도, 음식을 만드는 방법도 하나도 몰랐지만 하루 만에 대부분을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배웠다는 것이었다. 한국어도 처음 만났을 때도 꽤 괜찮았지만, 지금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뮤리엘씨는 정말 배우는 게 빠르시네요.”


“오빠에게 비하면 하잘 것 없죠.”


“아니,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도 그렇고, 요리도 그렇고… 저라면 뮤리엘씨 정도로는…”


탁.


“오빠가 저보다 못할 리가 없어요.”


 앞에 앉아있던 뮤리엘이 식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려 퍼진다. 순간적으로 놀라서 무리엘을 쳐다보니 무언가를 죽일듯한 무표정에서 내 시선이 느껴지자 싱긋하고 웃어 보였다.


“...”


 그 말에 부정도 긍정도 못할 것 같아서 다시 조용히 식사했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한 기분으로 있으니 맛있는 음식도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오빠?”


“아, 네.”


“한국에서는 아랫사람에게는 반말한다고 들었는데, 오빠는 왜 저에게 존댓말을 하시나요?”


“아무리 뮤리엘씨가 제 여동생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아직은 그렇게까지 익숙하질 않아서… 하하.”


 멋쩍은 웃음을 흘리자 뮤리엘은 살짝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가 했더니.


“오빠는… 제가 많이 불편하신가요?”


“그… 솔직히 만난 지 얼마도 안 됐고… 갑자기 여동생이라고 말씀하셔도… 그렇게까지…”


 물론 뮤리엘이 해주는 모든 것은 고맙고, 헌신적인 행동도 대부분은 도움이 되지만… 오히려 대가 없는 호의가 나에게는 조금 불편했다. 


“그리고, 그… 거리가 아주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같이 주무시는 것도 그렇고… 제가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무상의 행복을 주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굉장히 미안했다. 이런 말을 우물쭈물 말하는 동안 미안해서 고개가 자연히 내려갔다.


“흐음…”


 그녀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화를 내거나 슬퍼할 줄 알았는데, 고민에 잠긴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는 살짝 갸우뚱한 표정으로 턱에 손을 대고 고민하고 있었다.


“오빠가 나를 불편해한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기억이 없어도… 오빠는 나를…”


 그녀의 혼잣말이 조금씩 들려왔다. 섬뜩했다.


“아니, 그… 뮤리엘, 이렇게 부르면 될까?”


“... 후후, 좋네요. 오빠. 이리 와주세요.”


“응.”


 무리엘은 팔을 벌린 채 나를 불렀다. 안아달라는 표시. 그날 이후로 남매의 접촉을 하자는 말에 이렇게 가끔 안아주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하게 안던 그녀도, 


“후…”


 자연스럽게 안긴다. 항상 머리를 가슴에 묻고 고개를 좌우로 돌릴 때마다 엄청나게 달콤한 향기가 머릿속으로 들어온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것저것 많이 닿아버려서… 


“이제 됐지? 아침 맛있었어.”


 재빨리 이 상황을 끝내고 싶었기에 빠르게 그녀와의 포옹을 풀려고 했지만, 뮤리엘은 엄청난 힘으로 나를 안고 있었다.


“으음…”


 영 풀릴 기미가 안 보여서 어떻게든 포옹을 풀고 나갈 방법을 찾고 싶었다.


“그… 지금 밖에 좀 나갔다 와야 하는데…”


“어딜 가시려고요?”


 원래도 집 밖으로 나갈 일이 많지는 않다. 가끔 장을 보러 나가는 정도? 내 기억은 제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기억 상으로는 부모님의 유산이라고 알고 있는 돈이 있기 때문에 따로 일하지 않아서 그렇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떻게든 집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소파에 앉으면 내 옆으로 붙고, 침대에 누우면 옆에 같이 눕는 뮤리엘이 있는 이 상황에서는 말이다.


“그… 나는 CD사는 걸 좋아해서. CD 좀 사러 갔다 오려고.”


“그렇군요… 그랬죠.”


“그… 뮤리엘 이제 놔줄래?”


“네, 그럼요.”


 뮤리엘은 선뜻 나를 놔주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싶었지만 그걸 뮤리엘이 들으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모르니 잠시 숨을 멈췄다가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어, 그럼 갔다 올게.”


“네. 같이 가시죠.”


 옷을 다 입고 자연스럽게 나가려고 한 나는 바로 옆에 신발을 신는 뮤리엘의 모습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그… 뮤리엘. 아침도 준비했고 피곤할 텐데, 집에 있어. 혼자서 금방 갔다 올게.”


“아니요, 저는 한시도 오빠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요.”


 아… 그러시구나.



 바깥의 날씨는 화창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양산을 펼치고 내 옆을 걸었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는 이 밝은 햇빛 아래에서는 거의 반짝이듯 보였다. 내 시선을 눈치챈 그녀는 싱긋 웃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굉장히 침울해했는데… 이제는 거의 여우 같다는 느낌이다.


“뮤리엘은 밥을 그 정도만 먹어도 괜찮은 거야?”


“저는… 소식을 하는 편이니까요.”


 항상 보는 모습으로는 소식이라기보다는 거의 다이어트 식단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안 그래도 말랐는데… 많이 먹어야지.”


“오빠…”


 그렇게 말한 그녀의 눈에는 감동이 느껴졌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 말밖에 못 해줘서 오히려 미안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먹어서는 네 몸이 상할까 봐.”


“...옛날 같아서…”


“응?”


“옛날 같아서 아주 좋아요.”


 아주 잔소리 같았나 하고 걱정했지만, 옆에서 어느 때보다도 방긋 웃는 뮤리엘의 표정을 보니 기우였던 모양인가 보다.


“옛날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데? 지금과는 다르지 않아?”


“다르지 않아요.”


 그녀의 표정은 이윽고 향수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저는 친절한 오빠에게 기대기만 해서… 오빠가 저한테 큰 나무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걸 생각도 못 하고… 건방진 말만 해서요.”


“오빠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는… 오빠의 유언으로 어떻게든 버텨나갔지만, 그렇게 시간을 보낼 걸 생각한다면, 차라리 다 내려놓고 죽고 싶었어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라. 그녀의 진지한 말을 듣고 있자니 죽고 싶었다는 말은 하면 안 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정말로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왜 기억을 잃은 거야?”


“...”


 하지만 내가 그 질문을 했을 때… 그녀의 표정은 굉장히 어둡게 변했다.


“죄송해요, 오빠. 그건 말할 수 없어요.”


“... 그렇구나.”


“하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제가 오빠에게 평생을 걸쳐 속죄할 거라는 거에요. 오빠가 저에게 해준 만큼.”


“평생이라니… 너도 나중에는 결혼도 하고, 다른 가족을 꾸리겠지.”


“아뇨.”


 넌지시 던진 말에 돌아온 대답은 아주나도 단호했다.


“평생. 오빠가 죽을 때까지.”


“... 내가 결혼한다면?”


“오빠가… 결혼?”


 그녀의 표정은 정말 순수한 의문이었다. 마치 그런 것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처럼.


“나도 언젠가 누군가와 결혼하지 않을까?”


“...”


 그녀의 표정이 점차 굳어갔다. 무리엘은 그 자리에 잠시 서 있다가 내 손을 꽉 붙잡았다. 그녀가 잡고 있던 양산은 땅바닥을 굴렀다.


“오빠, 결혼… 하실 상대가 있으신 거에요?”


“아, 아파.”


“설마… 반년도 안돼서 오빠가…”


“무리엘!”


 내가 소리치는 것에 놀랐는지 뮤리엘은 손을 뗐다. 손등에는 아까의 자국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손톱이 누른 곳에서는 긁혀서 그런지 살짝 피도 났다.


“아야…”


“죄, 죄송해요. 오빠. 진짜…”


 아까까지는 죽일 것처럼 말하더니 지금은 굉장히 침울해해서는 내 손을 보고 있었다.


“아냐, 이 정도는.”


 그녀는 내 손을 그녀의 손으로 한번 만져주었다. 그녀의 손이 지나간 자리의 상처는 얕은 상처였는지 피가 멎어있었다.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애써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니 그녀도 살짝 괜찮아진 것 같았다.


“...오빠, 죄송해요.”


“아니, 얕은 상처여서 괜찮아.”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오빠가 원하는 거면 뭐든지 해드리고 싶고, 해드릴 건데… 오빠가 다른 여성과 결혼하는 것만큼은, 아니 연애도 절대로 허락해 드릴 수 없어요.”


“... 내가 그걸 허락받아야 하는 거야?”


“네.”


아, 그러시구나…



 오빠의 손에 깊게 상처를 남겨버린 건 정말 불찰이었다. 다시 한번 오빠의 몸에 내 손으로 상처를 내는 일이 있을 바에는, 이 손을 잘라버리는 쪽이 차라리 낫다.


“후…”


 CD를 고르는 오빠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두근거리는 느낌이다.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스읍…”


 하지만 그때, 예상치 못한 향기를 맡았다. 피 냄새. 내 손에 아까 오빠의 상처를 낫게 하면서 묻은 피가 아직 끈적하게 남아있었다. 살짝 손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입에 넣은 피의 맛은… 아주나도 달콤했다. 우리에게 식사는 여흥이다. 흡혈은 많아 봐야 한 달에 한 번 정도면 괜찮고, 그나마도 나에게는 거의 불필요하다.


“...달아.”


 저번에 오빠가 쓰러졌을 때, 오빠의 피를 닦은 손수건도, 아직 갖고 있다. 가끔 향기를 맡고 싶은 충동이 들었었지만, 오빠를 상처입힌 기억이 들 것 같아서 참고 있었는데…


“와, 다 샀다. 뮤리엘… 왜 그러고 있어?”


“으, 으응? 아니에요. 돌아갈까요?”


“그러자.”


 양산을 펼치고 오빠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것은 나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오빠의 목덜미 흡혈 자국, 그리고 손에 난 상처 자국이 그저 못 박힌 듯이 눈에 선명했다.


‘한 번만…’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금 깨닫고 고개를 휙휙 돌려서 제정신을 찾았다.



 “와, 나엘씨, 그 뒤로 전혀 뵙질 못했네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와, 영미씨! 그러고 보니 저번에는 결제도 안 하고 갔네요… 그 뒤로 정신이 없어서.”


“그게 문제에요? 몸은 좀 어떠세요?”


“아, 괜찮습니다.”


“...”


 그리고 이 모습을 불만스럽게 지켜보는 뮤리엘의 모습을 눈치챘다. 살짝 아랫입술을 씹고 양산을 잡은 손에는 살짝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뒤에 계신 분은?”


“아, 제 여동생 뮤리엘입니다.”


“와~ 여동생이 계셨구나, 머리카락색도 같고 선남선녀네요. 안녕하세요?”


 무리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꾸벅하고 고개를 숙이고 무표정하게 영미씨를 쳐다봤다. 그 모습에 오히려 내 쪽이 부끄러워져서 영미씨에게 사과했다.


“하, 하하. 얘가 좀 낯을 가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다음에 다 같이 밥 한번 먹어요.”


“네, 저번 식사 값은 통장으로 부쳐 드릴게요.”


“아니에요. 나엘씨가 괜찮은 모습을 봤으니 그걸로 됐어요. 다음에 봐요!”


“아, 안녕히 가세요!”


 영미씨가 멀리 떠나갈 때까지도 뮤리엘은 무표정하게 그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랫입술을 깨물다 못 해서 질근질근 씹고 있는 모습만이 그녀가 무슨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증거였다.


“... 괜찮아?”


 뭐가 불만일지 물었다가는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아서 일단 괜찮으냐고 물어보았다.


“빨리. 집에 가죠.”


“으, 응.”


 말의 악센트가 없는 게 아주 무섭다. 항상 뮤리엘이 뭔가 강하게 주장하면 거기서 부정할 수 없는 박력이 느껴지는데… 지금은 특히나 강한 박력이 느껴져서 나는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최대한 빠르게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이 그렇게 불만인지 무언으로 일관하는 뮤리엘이 불편해서 방으로 들어왔다.


“휴… 으악!”


 뒤를 돌아보니 뮤리엘이 있었다. 적어도 옷을 갈아입을 때나 화장실에 있을 때는 들어오지 않았는데, 소리소문없이 어느샌가 다가와 있었다.


“뮤, 뮤리엘. 옷을 갈아입는 중이니까 나가줄래?”


“... 오빠.”


“응?”


“아까 그 인간 여자. 누구야.”


“아, 영미씨라고 내 친…”


“꽤, 친근해 보이네?”


“어? 응. 한국에서는 유일한 친구… 악!”


 뮤리엘의 체구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힘으로 밀쳐졌다. 뮤리엘의 말투가 변한 것도 지적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는 기분이 들었다.


“오빠, 나를 떠나지 마. 다시는.”


“...”


 그 말에서는 나는 모르는 슬픔이 느껴졌다. 침대로 밀쳐진 내 위로 올라온 뮤리엘은 내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짓, 안 하려고 했는데. 오빠가 나한테서 멀어질 것 같아서. 오빠를 내 몸에 남기고 싶어. 나도 오빠의 몸에 흔적을 남기고 싶고…”


“뮤리엘? 우리는 남매…”


 그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무리엘이 나의 목덜미에 이빨을 박았기 때문이다. 꽤 큰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뒤의 일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뮤리엘은 내 목덜미를 빨기 시작했다. 고통은 어느새 가시고 살짝 야릇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으악..! 뮤리엘!”


“푸하…”


 내 목덜미에서 얼굴을 뗀 뮤리엘은 나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은 어느새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너…”


“오빠가… 오빠가 그런 하찮은 인간하고 대화해서 내 마음을… 갖고 노니까.”


“너, 도대체 뭐야?”


“그런 게 중요한가? 오빠. 내 눈을 똑바로 봐.”


 그녀의 눈을 보았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눈, 그녀의 입가에 살짝 묻은 내 피와 함께 보이는 것은 마치 흑백의 세상에서 유일하게 붉은색으로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지금부터 오빠는 나 이외에 다른 여성과 대화할 수 없어.]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분명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그 의미가 명확하게 떠올랐다.


[오빠는 내가 없으면 바깥으로 나갈 수 없어.]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내 뇌수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입으로 나와 귀에 들리는 언어는 분명 내가 알 수 없는 언어인데, 그 말을 들으면 머리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윙윙 울리는 것 같다.


[오빠는 나에게 흡혈을 당할 때마다 점점 기뻐져.]


“그만해!”


“어라?”


 나는 순간의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가 내 팔에 주던 힘이 약해진 틈을 타서 나는 그녀를 밀치고 방 바깥으로 넘어지듯이 달려나갔다.


“흐아!”


 현관문까지 달려나가서 문을 박차고 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문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가려는 순간, 내 온몸은 굳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대로 앞으로 넘어지는 때까지, 손가락 하나 꿈쩍할 수 없었다.


“하하, 오빠, 또 나를 두고 가려고?”


“...”


 입조차도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 감각은 그녀에 대한 두려움을 키웠다.


“... 우리들의 집으로 가요. 오빠가 거기에 좋은 기억이 없다면 여기서 지내도 좋고요.”


 그녀는 나를 안아 들고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온몸에 걸린 쥐가 풀리듯이 굳은 몸은 갑작스럽게 힘이 빠졌고,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다시 나를 침대에 눕혀놓고 내 위로 덮쳐왔다.


“너, 넌 뭐야. 애초에 내 여동생이…”


“저는, 오빠의 여동생, 뮤리엘이에요. 나엘.”


“...”


“당신은 제 오빠 나엘 알라드. 제가 죽여버린, 저를 위해서 죽은 오빠.”


“나한테 이런 짓을 하고 그걸 믿으라고?”


“그것만큼은 사실이니까. 절대로 오빠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진조의 피에 걸고 맹세하죠.”


 진조… 흡혈귀…


“네가… 그 진조라는 거야?”


“예, 오빠가 저를 살려두고 희생하셔서 저는 진조가 됐죠. 하지만 그거 아세요? 진조로서 천 년을 살아갈 바에는, 오빠와 10년만 살아가는 쪽이 행복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멀리 떠나지 말아줘요. 제가 곁에서 제 모든 걸 드릴게요.”


“하지만… 분명 나는 네 오빠와 같은 사람이 아니야. 기억을 잃기 전의 나와 분명히 다른 사람이라고.”


“아니야!”


 갑작스럽게 신경질적으로 소리 지르는 그녀. 그녀의 얼굴은 슬픔에 겨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처음 그녀의 표정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눈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마치 인간이 눈물을 흘리듯이 그녀의 눈에 핏방울이 망울져서 내 얼굴로 떨어졌다.


“너는, 당신은, 분명히 나엘이야. 아닐 리가 없어.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알고 있어.”


 그녀의 피눈물이 내 뺨으로 떨어졌을 때, 그 눈물은 아무런 인과 관계없이 증발했다. 아니 증발을 한 게 맞을까. 애초부터 그 눈물이 떨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없어져 있었다.


“나엘, 제발… 나를 다시 사랑해줘… 다른 데로 가지 말고,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있어줘…”


 나를 덮치고 있던 그녀의 팔에서는 이미 힘은 빠져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뿌리칠 수 없었다. 이성은 그녀가 미쳤다고, 당장 도망쳐야 한다고 외치고 있지만, 그녀의 피눈물 맺힌 눈가를 보면…


“앗…”


 나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그녀를 그저 안아줬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저 그녀가 마치 가족을 잃어버린 어린아이 같아서. 길을 잃은 미아 같아서, 매정하게 그녀를 버려두고 갈 수 없었다.


“미안해.”


 무책임한 사과. 나는 분명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던 사람도 아닐 것이다.


“미안해…”


“...”


 무엇에 사과하는 것일까. 과거의 나를 대신해서 사과하는 걸까. 아니면 그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에 사과하는 것일까.


“...괜찮아요. 지금부터는 못 떠날 테니.”


 콰득.



 눈이 떠졌다. 누워있던 건가? 익숙한 천장에 익숙한 이불 위에서 깨어났다. 항상 일어나면 옆에 뮤리엘이 있었는데,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목, 말라.”


 갈증. 마치 수년간 잠이라도 자고 일어난 듯이 입이 바싹 말라있었다. 머리에서는 두통이 느껴졌다. 깨질 것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가까스로 일어나서 정수기의 물을 마셨다.


“...어?”


 분명 입은 젖었다. 하지만 갈증. 마치 사막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듯한 갈증은 없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물이 머리의 두통을 잠깐은 없애줬다. 떠오른 것은 어제 있었던 일. 그녀가 내 위에서 지었던 표정. 그리고.


“앗.”


 목 뒤쪽으로 난 상처. 분명 기억을 잃었을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뭔가 다르다. 그 부위가 뜨겁다. 머리가 아파진다. 다시 물을 마셔보아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의 문이 열리고 뮤리엘이 들어왔다.


“아, 오빠, 일어나셨어요?”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무리엘은 그런 나를 보며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이리 와요.”


 뮤리엘이 팔을 벌려 나를 불렀다. 나는 그 말에 저항하지 못하고 다가갔다. 그녀의 품에 안겨있으니 한결 두통이 덜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편안함에 오히려 위기감이 들었다. 마치 그녀에게 중독되는 것 같은 기분. 나는 어서 팔을 뻗어 그녀의 몸을 밀쳐냈다. 하지만 그녀를 밀침과 동시에 격한 두통이 밀려와서 나는 땅바닥을 구를 수밖에 없었다.


“으악!”


“저를 거부하시니 그런 거에요.”


“끄오…끄오윽…”


“자, 고집부리지 말고 이리로 와요.”


 나는 결국 기듯이 그녀의 발치로 갔다. 방금까지 내 머리를 찌르던 두통은 어느새 가셔있었다. 안도감에 온몸의 힘이 빠졌다.


“오빠, 이제부터는 제가 없으면 안 되겠네요?”


“뮤리엘, 왜, 왜 그런 거야?”


“... 오빠가 멋대로 저를 떠나고, 저를 살려두고, 멋대로 저를 잊어버리니까. 저도 제멋대로 한 것 뿐이에요.”


 분노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겨우, 겨우 다시 만났는데, 나를 또 버려두고 도망치려고 하고. 제가 싫었던 거죠? 사실은…”


 그녀는 쪼구려 앉아서 나를 내려다봤다. 자신의 손가락을 씹더니 그곳에서 피 한 방울이 망울져 흘러내렸다.


[마셔]


 또다. 그녀의 입에서는 아주 다른 말이 나오지만, 머릿속에서는 완벽히 의미가 전달된다. 나는 그녀의 말대로 입을 벌려 그녀의 피를 마셨다. 입으로는 단 한 방울의 피만 흘러들어 갔지만 마치 겨우 만난 오아시스처럼 나의 갈증을 없애줬다.


“나를… 어떻게 한 거야?”


“오빠도… 제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몸으로 만든 것뿐이에요. 저도 오빠가 없으면 살 수 없는데… 치사하잖아요?”


“뮤리엘, 나는…”


 애매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어린 뮤리엘이 나에게 응석을 부리는 모습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던 기억들. 아니, 나는 이런 적이 없어. 이건 누구의 기억인 거야?


“사실은, 제가 싫었던 거죠? 아무것도 모르면서 잔소리나 하고, 결국은 오빠도 저를 못 믿어서 그렇게 혼자 죽어버린 거잖아요. 사실은 복수였던 거죠? 모두다?”


“아니야, 나는 분명…”


 혼탁한 기억 속에서도 한가지 기억나는 것은 있다. 나는 뮤리엘이 살았으면 했을 뿐이다.


“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도, 모두 복수였던 거죠? 제가 항상 건방지게 구니까. 마지막으로 죄책감이라도 심어놓고 싶었던 건가요?”


“... 미안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너를 고독하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네가 고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바랐는데. 정작 내가 너를 고독하게 만들었구나. 땅바닥에 엎어져 있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가 떠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테니까요. 오빠의 소중함도, 사랑도, 제가 얼마나 제멋대로인지도.”


“그러니까, 이제는 못 떠나요. 다 알았으니까. 오빠가 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제가 오빠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도 모두 알았으니까. 제 곁에 묶어놓을 거에요. 영원히.”


“...”


 그녀는 이윽고 땅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쓰러진 나의 머리를 그녀의 무릎 위에 얹어놓은 그녀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나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만이 쏟아졌다. 그것은 분명 과거에는 쏟지 못했던 눈물일 것이다.


“사랑해요, 나엘. 지리멸렬한다고 생각해도 좋으니까 이제는 떠나지 마요. 나의 하나뿐인 오빠.”


 그녀의 무릎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그런 말을 들었다.



...


겨우 대회 끝나는 날에 맞춰서 끝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