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나는 도나엘. 최근에 부모님께서 모두 돌아가시고 최근에 유산을 상속받게 된 나는 어머니의 고향인 대한민국에 이민을 오게 되었다. 원래 부모님과 살 때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어 회화도 공부하여 자연스럽게 할 정도여서 다행히도 적응하는 데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하아, 이걸로 끝인가.”


 어머니가 한국에 남겨두신 단독주택. 여기는 시내에서는 훨씬 멀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시골은 아니다. 신도시의 외곽에 있는 사람이 한적한 도시. 외할머니가 살아계실 적에는 이곳에서 어머니가 지냈다고 들었다.


“아이고, 허리야.”


 꽤 많은 짐을 옮기고 허리를 펴니 우득우득 소리가 나는 것이 지금 5시간째 정리 중이니 그럴만하긴 하다.


“후, 한국에는 처음 와보지만, 앞으로의 생활이 정말 기대된다.”


 앞으로 이 마을에서 지내게 되는 건가. 부모님 앞으로 남겨진 유산은 내가 아껴쓰지 않아도 될 정도의 현금과 부동산. 외국에서 더 긴 시간을 지냈었지만, 한국에 이렇게 많은 재산을 남겨두고 부모님께서 외국에서 지낸 게 이해가 안 갈 정도이다.


“일단 저녁부터 먹을까.”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사용할까하다가  앞으로 지낼 마을에서 익숙해지기 위해서 오늘 저녁은 나가서 먹어보기로 했다. 밖으로 나오자 상쾌한 바람이 앞으로의 생활을 축하해주는 것 같아서 기뻤다.


“오?”


 너무나도 좋은 냄새. 매콤한 느낌의 향신료 냄새와 함께… 이게 무슨 향기일까? 어머니가 한국분이셨다고 해도 한국 음식을 접해보지는 못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좀 자주 봤지만…


“영식당?”


 겉으로 보기에는 특이한 점이 없어 보이는 식당이었다.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는 나의 말초신경을 자극했고… 당장 들어가자는 생각이 들기에는 충분했다.


“어서 오세… 앗!”


 안에 들어가 보니 키가 꽤 큰 여자가 앞치마와 머리 두건을 두르고 분주하게 요리를 하는 중이었다.


“외, 외국인 손님은… 아…. 헤, 헬로?”


“아, 저 한국말 할 줄 알아요.”


“앗, 진짜 잘하시네. 영어로 말해야 하나 하고 걱정했어요.”


 휙휙 바뀌는 그녀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이쪽도 덩달아 재밌어졌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그녀가 건네주는 메뉴판을 보았다. 제육덮밥, 연어덮밥, 오므라이스… 덮밥과 분식집인가?


“어… 제육덮밥으로 부탁할게요.”


“네에~”


 그녀는 내 주문을 듣고 메뉴판을 가져가고는 물을 따라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참깨가 뿌려진 제육덮밥이 나왔다. 하얀 쌀 위로 붉은 제육에 고소한 참깨가 화룡점정으로 올라가 있었다. 너무나도 맛있어 보이는 모습에 한 숟갈 떠서 먹어보니, 이런 매운맛은 처음이지만 꽤 먹을만했고 달콤한 짭짤한 제육이 밥과 어우러져 나는 금세 한 그릇을 해치웠다.


“와, 진짜 잘 먹었습니다.”


 그야말로 감사가 나오는 맛이었다. 


“후후, 외국인분이 한국 음식도 잘 드시고, 한국말도 잘하시고. 부모님께서 한국분이셨나요?”


“네, 그렇지만 공부는 혼자서 한 거에요. 원래 관심이 많았거든요. 최근에 이민을 왔습니다.”


“그렇군요. 여기는 꽤 한적한 도시라 살기 좋을 거에요. 자주 오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그 말과 함께 가게를 나섰다. 봄이라 저녁에도 꽤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길가의 나무도 초록색 이파리를 틔우는 중이었다.


“앞으로의 생활이… 기대되네…”


 지금부터의 생활은 혼자이다. 부모님도 없고 아무런 연도 없는 이곳에서 홀로 신생활. 기대와 불안이 나무의 잎처럼 솟아나는 봄이었다.



 푹신한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익숙한 캐노피가 보였다. 몸의 감각이 이상하게 예민했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온몸에서 느껴졌다.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고개를 돌려보니 집사장이 서 있었다. 내가 왜 침대 위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는가. 점점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한 나는 당연한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도련님께서는… 타계하셨습니다.”


“오빠가… 죽었다고?”


“그것이 진조의 계승. 두 피를 하나로 합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오빠를 죽인 거야?”


“...”


 집사장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는 의미겠지.


“도련님께서 남기신 유서입니다.”


 집사장은 품 안에서 고급스러운 종이봉투를 꺼냈다. 밀랍봉인이 되어있는 그 편지봉투의 겉에는 분명 오빠의 필체로 ‘뮤리엘에게' 라고 적혀있었다.


 그 편지를 열어야 하는데, 오빠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길 말들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편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덜덜 떨려서 도저히 열 수가 없다.


“집, 집사장. 열어줘.”


 집사장이 나에게 편지를 대신 받고 협착의 나이프로 인장을 뜯어낸다. 안에서는 한 장의 편지와 사진이 담겨있었다.


[소중한 여동생 뮤리엘에게.


 네가 이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네가 계승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것이겠지.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에게 미리 계승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하지만 내가 계승에 대해서 너에게 미리 말한들, 무엇이 바뀌었을까. 너에게 계승에 대해서 말하고 나 대신에 네가 희생해서 내가 가주가, 진조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아니, 나는 진조의 피에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나약한 녀석이야. 네 말이나 아버지의 말대로 나는 위대한 핏줄을 잇고도 그 혈통에 정진하는 것보다도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더 둔 쓸모없는 녀석이지.


 그래서 나는 네가 진조의 피를 계승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네가 진조의 피에 걸맞은 자격을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어. 내가 수업에 들어가지 않았을 때도, 훈련을 게을리 했을 때도 너는 항상 노력했잖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나의 죽음에 그렇게까지 연연하지 마. 아마도 죽었을 나를 그리워하지도 말고. 혈통에 어울리지 않는 자에게 걸맞은 결말이었으니까. 하지만 가끔 오빠라는 존재가 그리워진다면 내 방에 그 사진 말고도 사진첩이 있으니 가끔 보렴. 네게 흐르는 고귀한 피가 너를 고독하게 만들지 않기를.


 나엘 알라드가.]


 흡혈귀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눈물이라는 것은 길고 긴 혈통 속에서 말라 없어져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나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격류가 온몸을 지배했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며 머리에는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것처럼 고개가 올라가지 않는다. 편지를 꾹 안았다가 그 뒤의 이질감에 뒤쪽의 사진을 보니,,


“앗…”


 저번에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뒤에 카페에서 찍은 사진이 붙어있었다. 팝콘을 꼭 안고 주변을 둘러보는 자신의 앞으로 오빠가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사진. 나는 그저 항상 그렇듯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고있었다. 어차피 앞으로 영원을 살아가고 함께할 것이라 의심치 않았었다. 사진같이 얄팍한 것을 찍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 했었다. 흐르지 않을 거라 생각한 눈에서 한줄기 물이 흘렀다. 하지만 눈물과는 다르게 흐르는 액체는 눈앞이 붉게 물들였다.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액체는 눈물이 아니라 한줄기의 핏물이었다.


“흑… 흑…”


 이렇게 허무하게 오빠와 헤어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렇게 오빠가 죽어버릴 바에는 내가 처음의 기습을 맞고 죽어버리는 쪽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빠는 자신이 낙오자이고, 혈통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처음의 기습도 손대중에 가까운 공격이었음을 지금에 와서 깨달을 수 있었다. 마지막의 최면은 더욱 그렇다. 인간과 흡혈귀라면 그것은 최면에 가깝겠지만 흡혈귀 간의 최면은 높은 격의 존재가 낮은 격에 명령하는 것. 그렇다면 오히려 진조의 피에 어울리는 것은 오빠가 아닌가?


“집, 집사장. 빨리 오빠에 대한 걸 모두 말해. 오빠는 왜 수업도 훈련도 제대로 듣지 않은 거야?”


 지금까지는 정말로 오빠가 인간에게 감화되어서, 그저 하찮은 관심사 때문에 공부를 그르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보여준 능력의 일면은… 


“... 아가씨가 태어나기 전에도, 도련님께서는 진정으로 총명하신 분이셨습니다. 진조의 혈통에 걸맞은 분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씀하셨었죠.”


“그, 그런데?”


“두 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의미도 아가씨가 태어나고 금방 깨달으셨습니다. 계승에 관해서 공부하시고, 금방 서재의 고서를 찾아보시더니 저에게 여쭤보시더군요. 저는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나한테 말했어야지!”


“도련님께서는… 아가씨가 계승하실 때까지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말라는 첨언도 하셨습니다. 저는 도련님의 선택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아가씨가 수업을 듣기 시작할 때 즈음에는… 훈련도, 수업도, 더 참가하지 않으셨죠.”


“그런…”


 지금까지 제대로 훈련도 수업도 하지 않는다고 항상 얕보듯이 말하고, 내가 진조가 돼버린다고 항상 오빠를 무시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건 오히려 나였는데…


“아가씨의 슬픔을 헤아릴 수는 없겠으나, 분명 도련님도 아가씨가 슬픔에 빠진 것을 바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가씨, 아니 진조님, 흡혈귀를 이끄는 가문의 수장은 이제 아가씨십니다. 깨어나시고 바로 죄송하지만, 아가씨가 처리해주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집사장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다고 한들, 오빠가 그것을 바라고 있었지는 않았겠지. 그것을 깨닫자 눈에서 흐르는 핏물은 멎었다. 애초에 눈에서 흐르던 핏물은 몸에서 떨어지면서 사라져버렸다. 


“응…”



 그 이후로의 나날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무료했다. 올라오는 안건들을 해결하고, 처리하며 지냈다. 대부분 이미 결정사항으로 올라온 안건들뿐.


“하아…”


 그렇다면 남은 영겁 같은 시간 동안에는 무엇을 할까. 오빠가 살아있을 적의 방으로 가서 오빠의 잔흔에 몸을 맡길 뿐이다. 하루는 사진첩의 사진들을 보며 온종일 과거를 떠올리기도 했고, 다른 날에는 오빠가 방에 두었던 CD라는 것으로 오빠가 예전에 말했던 것들을 보거나 들었다.


“...오빠…”


 cd같은 것들을 봐도 딱히 인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그저 오빠가 좋아했던 것이니까 보았다. 가끔은 나한테도 한번은 보라고 했던 것이지만 내가 항상 그런 하잘것없는 것보다도 다른 것에 집중하라고 건방진 소리를 한 기억이 나서. 오빠가 죽은 뒤라도 부탁을 듣고 싶어서 보았다.


 인간의 전쟁, 역사… 그런 것들은 모두 별로였다. 인간의 하잘것없는 삶이 고통스러워 봤자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말인가. 하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에 끌리는 것들은 있었다. 두 남녀의 사랑과 이별, 그것들을 다룬 영상이나 노래는… 마음에 들었다.


“...앗.”


 지금 보던 영상도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저런 게 뭐가 좋은 걸까 싶다가도… 어느샌가 이런 영화의 남자주인공에게 오빠를 투영하게 되었다. 항상 나를 안아주고, 아껴주었던…


“흑…” 


 눈물도 피눈물도 눈에서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가끔 오빠를 생각하면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고 호흡이 흐트러질 뿐이었다. 이제는 없는 오빠를 생각하며 어두운 방안에서 다시 오빠의 침대에 누웠다. 더는 주인이 없는 침대에서는 처음에 느꼈던 감촉도 향기도 무엇도 옅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싫어, 싫다고…”


 오빠가 없어지고 반년밖에 안 지났는데 벌써 오빠의 목소리도, 안아주던 느낌도 기억이 나지 않아버릴 것 같아서… 언젠가는 오빠의 얼굴 말고는 무엇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서. 내가 기억하는 오빠에 관한 모든 것이 제대로 기억했는지 의심스러워져서. 


“으아… 으윽…”


 머리에 손을 대고 혈류를 마구 돌려본다. 오빠에 관한 기억들을 불러일으켜 보는 것도 벌써 익숙해졌다. 괜찮아. 아직 제대로 기억하는 게 틀림없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억들… 목소리도… 감촉도… 더, 더 많이-


“--진조님, 아가씨!”


“앗…”


 너무 집중했던 탓이었을까 방문을 열고 들어온 집사장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다른 사람 앞에서 진조로서의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오빠가 나한테 바란 것이 바로 혈통에 맞는 행동거지였으니까. 누군가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곧바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 아가씨.”


 집사장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내 코를 만져보자 피가 흥건히 흐른 자국이 있었다. 손등으로 피를 닦으니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피는 사라졌다.


“... 괜찮아.”


“하아…”


“집사장, 내가 분명 무슨 일이 있다면 바깥에서 부르라고 했을 텐데?”


“죄송합니다.”


 분명 집사장이 죄송할 일은 아닐 것이다. 아마 내가 듣지 못해서 무례를 무릅쓰고 들어온 것이겠지. 내 신경이 예민해졌던 것 같아서, 곧바로 사과했다.


“아니야, 미안해, 집사장. 내가 좀 예민했나 봐…”


“아닙니다, 진조님께서 처리해주셔야 할 안건이 올라와서 말입니다.”


“금방 가도록 하지.”


 방금까지 침대에서 뒹굴어서 구겨진 옷을 갈아입고 저택의 한 방으로 갔다. 회의실로 사용되는 그 방에는 긴 테이블이 있었고, 한쪽 끝에는 왕좌가,양 옆으로는 의자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의자의 옆으로 한 남자가 서 있었고, 그 시종은 뒤에서 가방은 안은 채 서 있었다.


“고귀한 밤의 여왕을 뵙습니다.”


“음, 앉아라.”


 내가 자리에 가서 앉자, 그도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회의실에 미리 꽂혀있는 깃발의 모양으로는, 아시아 일대에서 가장 큰 흡혈귀 세력인 범진가의 일원인 듯싶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범진가는 동아시아 일대를 가장 크게 관리하는 흡혈귀 일가이다.


“범진가에서 이렇게 온 이유가 뭐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에게는 오히려 이 시간이 시간 낭비 같았다. 


“진조님께서 저희 가문에 대해 이렇게 기억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래.”


“새로운 진조님께 저희 가문에 대해서 기억해주십사 하여 이렇게 인사를 드리러 온 것입니다.”


“그렇군, 만나서 반가웠다. 그럼.”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차에 그는 말했다.


“그리고, 진조님께서 요즘 시름을 금치 못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호오.”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겠지.


“그래서, 범진가의 대표로 온 자가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무엇이지? 감히 진조에게 도전해보겠다는 것인가?”


“전혀 아닙니다, 저희는 항상 진조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몸. 그런 불경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진조님께서 괴로워하시는 이유는 나엘님, 크헉…”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이상, 제대로 된 이유를 말해야 할 것이다.”


 분노가 온몸을 지배한다. 머리의 피가 팽팽 돌아가는 기분… 이미 앞 남자의 머리는 내 손에서 만들어진 피의 촉수가 누르고 있다. 


“나, 나엘님께서는 살아계십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옆에서 가만히 있던 집사장이 불쾌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 이놈, 감히 그런 걸로 진조님을 현혹하려 한 것이냐?”


 하지만 나는 촉수를 해제했다. 대신에 손으로 그놈의 목덜미를 잡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놈의 피가 흐르는 경동맥에 손톱을 세워서 살짝 눌렀다.


“당장 말해.”


“피, 피를 뺏긴 흡혈귀는 단순히 죽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퇴화하여 자신의 기억을 잃고 한낱 인간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지, 진조님께서 나엘님의 일로 수심이 깊으시다 들어 저희가 나엘님이였던 분을 찾아냈단 말입니다.”


“집사장.”


“... 사실입니다. 진조님.”


 그 녀석을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힌 놈은 얼마 안돼서 몸을 훌훌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표정은 역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진, 진조님. 저희 가문은 이걸 통해서 부탁하고 싶은 게 있…”


“당장 말해라.”


“저희 가문에 흡혈귀로 종속되고 싶어하는 인간 종복 몇몇을 들여도 되겠습니까? 신상 정보는 이 가방 안에 나엘님의 정보와 함께 있습니다.”


“그래. 이제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진조 님의 하해와 같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그 남자는 방금 땅에 던져졌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절제된 동작으로 인사를 하더니 뒤의 하인이 들고온 가방을 받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묵례를 하고는 방을 나섰다.


“집사장, 이걸 알고 있었나?”


“... 예. 하지만…”


“하지만은 없어. 진조를 속였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진조님, 그분은 나엘 알라드님이 아니십니다. 진조님의 피를 가진 나엘님이 아니시란 말입니다. 원래 피를 잃는다는 형벌은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 흡혈귀로서의 자신을 잃고 한낱 인간으로서 인간 사이를 떠도는 형벌. 그나마도 나엘님의 껍데기는 전대 진조 님의 자비로 인간사회에서의 자리를 받으신 것입니다.”


 “...껍데기라고?”


“피가 전부인 흡혈귀에게 피를 뺏겨 인간이 되었다면 그게 껍데기지 무엇이겠습니까. 오히려 지금은 방금 범진가에서 새로 흡혈귀로 들일 인간에 관한 판단이…”


“그 판단은.”


 나는 집사장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집사장의 머리가 터져나가고 바닥을 흥건한 피로 적셨다. 그대로 땅바닥에 집사장의 몸이 널브러진다.


“그게 껍데기인지, 나엘인지. 그 판단은 내가 할 일이다. 네가 아니라.”


“예, 죄송합니다. 진조 님.”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집사장은 벌떡 일어났다. 바닥에 튀었던 육편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의 정복에 묻은 핏자국만이 방금의 유혈사태를 증명하는 듯했다.


“당장, 준비해. 그를 만나러 간다.”


“예.”


 …


 한국에서 지낸 지도 반년이 넘어가다니, 시간이 참 빠르다. 외국에서만 살다 왔지만, 한국에 굉장히 빠르게 적응했다고 생각한다. 체질이 잘 맞는다고 해야하나?


“오늘 저녁은 된장찌개~”


 영미씨가 하시는 식당에 가는 것도 많이 줄었다. 이제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얼굴을 비추고 식사를 할 뿐이었다. 영미씨는 내가 식당에 자주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고 조금 아쉬워했지만, 가끔은 가게를 정리한 뒤에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다. 한국에서 친구라고 말할만한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기에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아, 맞다. 저녁 먹기 전에…”


 중고 게임 가게나 CD 가게에 먼저 갔다 올까. 지금 시각이 5시 정도. 두 가게 모두 9시까지는 하지만 미리 가서 사고 싶은 것을 사고 저녁 먹고 나서부터 취미생활을 즐기는 게 더 합리적이겠지.


“흥흥~”


 저번에 본 드라마의 OST를 흥얼거리며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늦여름의 저녁은 선선하기도, 덥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래도 시원한 편에 속하는 날씨였다. 날벌레가 울어대는 소리가 이제 저물기 시작한 저녁 놀에 어울렸다.


“응?”


 그리고 앞으로 보였던 것은 어느 소녀와 남자. 멋스러운 정장을 입은 남자가 양산을 들고, 그 옆으로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와 같은 밝은 회색빛의 머리카락에… 꽤 격식 없는 복장을 하고 있어서 옆의 남자와 심히 대비되어 보였다.


‘진짜 별난 조합이네. 어디 재벌 딸이라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나치려는 순간에 그녀가 갑자기 말을 했다. 


“bade..!”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언어이다. 영어는 아닌 것 같고… 애초에 나한테 하는 말인가?


“아… 네?”


“bade, gasite!”


“대체…”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처음 듣는 말이라는 느낌. 그녀는 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옆의 남자와 뭐라 뭐라 대화를 나누더니 남자가 나에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만… 나엘님 되십니까?”


“아, 네. 제가 도나엘입니다.”


 나엘이라는 이름이 한국에서 흔한 것은 아닐 테니… 분명 여기서 나엘을 찾는다면 나를 찾는 것이 맞을 것이다.


“반갑습니다. 저는 아가씨를 모시는 집사입니다. 아가씨께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십니다만…”


 굉장히 수상하다. 뒤에서는 조금 전의 여자가 굉장히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거 이야기가 입으로 하는 대화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대화를 일방적으로 당해서 장기가 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형식의 대화가 아닐까?


“아, 그, 제가 굉장히 바빠서요. 죄송합니다.”


“bade, bade!”


 바로 뒤를 돌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굉장히 당황스러운 만남이었다. 도대체 내 이름은 어떻게 안 것이고, 어디에 사는지는 어떻게 안 거지? 온몸에 돋는 소름을 쓸어내리며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피했다.



 반년만이다. 그때와 같은 모습. 얼굴도, 키도 내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이다. 그의 얼굴에는 소소한 행복이 넘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빠가 떠나고 한 번도 제대로 웃지 못했는데, 그 웃음이 가득한 얼굴을 보니 나도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오빠..!”


 바로 오빠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나의 안일한 생각이었을까? 오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며 뭐라고 말했다.


“ah… Ne?”


“오빠, 찾았어!”


 하지만 이 역시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본 오빠와 말이 통하지 않다니… 나는 당황해서 집사장에게 물어봤다.


“집사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나엘…님은 기억을 잃으시고 그 기억의 자리에 부자연스럽지 않은 기억을 갖도록 최면을 걸어두었기에… 아마도 원래 사용하시던 루만어를 잊어버리신 걸 겁니다.”


“그럼… 어떡해… 겨우 다시 만났는데…”


“제가 대화해보겠습니다.”


 그러고 집사장은 오빠에게 다가갔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던 오빠는 뒤돌아서는 급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오빠, 오빠!”


 하지만 오빠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히려 불쾌한 듯이 빠른 걸음으로 걸어나갔다. 아아… 이건 천벌인가? 지금까지 오빠에게 응석 부리기만 했으니까? 오빠를 소중히 대해주지 않았으니까?


“진조님… 죄송합니다. 인간과 접하는 것은 오랜만이었기에… 능숙하게 대응하지 못했나 봅니다…”


“오빠… 흑, 흐윽…”


 왜, 왜, 왜. 나를 봤는데도 그렇게 돌아서 떠나는 거야. 고작 기억이 없다고 나를 피하는 거야? 우리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사이였잖아. 근데 그게 이렇게 간단하게 사라질만한 거야?


“진조님, 송구하옵니다만 저분은 나엘님이…”


“닥쳐.”


 그 뒤로 나올 말이 무엇인지는 안다. 


“껍데기라고, 나엘이 아니라는 말을 할거라면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다. 내가 직접 대화를 하지도 못했는데 감히 나보다 먼저 결론을 내리겠다는 말이냐?”


“죄송합니다. 다시는 그 말을 꺼내지 않겠습니다.”


 오빠인지 아닌지는 나만이 알 수 있다. 누구보다도 짙은 인연이 우리에게는 있지 않았는가. 한마디 대화라도 제대로 나눈다면 분명히.


“오빠는, 나를 기억할 거야.”



왜 주말이 더 바쁜거같지
이거 맞춤법 검사기 돌렸는데 진조가 다 진보로 바뀌어서 엄청 웃었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