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https://arca.live/b/yandere/46417806?target=all&keyword=%EC%9D%BC%EC%A7%84%EB%85%80&p=1 

1편: https://arca.live/b/yandere/46733446?p=1

2편: https://arca.live/b/yandere/47125901?p=1

3편: https://arca.live/b/yandere/47569521?target=all&keyword=%EC%9D%BC%EC%A7%84%EB%85%80&p=1

4편: https://arca.live/b/yandere/47683499?target=all&keyword=%EC%9D%BC%EC%A7%84%EB%85%80&p=1



"......."


예일이가 고개를 들어, 수증기가 낀 반투명한 유리문 쪽을 바라본다.


심장이 망나니처럼 두근거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이 되지 않은 머리가, 제멋대로 핑핑거리며 마구잡이로 돌아간다.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쉬고, 이윽고 다시 내뱉는 행위를 반복하며 간신히 뇌를 진정시키려 애쓴다.


따뜻한 목욕물의 감촉이, 유난히 불쾌할 정도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예일이를 더 세게 끌어안으며 가슴을 밀착시킨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떠나가 버릴 것 같았으니까.


대체 누가 데리러 온 거지?



"....누구야? 누가 데리러 왔는데?"


"손님의 여동생 분이십니다. 어떻게 응대할까요?"


"........."


뜨겁게 달궈졌던 피가, 드라이아이스처럼 차갑게 얼어붙는다.


멍한 정신 속에서, 힘을 잃고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이 보인다.


나는 어느새 예일이를 포옹하는 것조차 잊고, 욕실 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거짓말. 거짓말이다.


전부 거짓말.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이다.


그야, 예일이의 가족은....예일이의 가족은.......



"에스더."


"....왜, 왜?"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예일이의 목소리는,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평소의 부드러운 기색과 소심함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형언할 수 없이 이질적인 냉정함에, 쓰라린 통증이 등줄기를 타고 심장까지 단숨에 내달린다.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다시 서투른 추파를 던지려고 하는 순간, 예일이가 나를 향해 몸을 돌린다.


그 모습을 본 나의 얼굴에서, 한순간에 미소가 달아난다.


예일이의 얼굴은, 살아있는 사람의 얼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뜨거운 물 속에 있었음에도, 그 얼굴은 마치 죽은 지 한참이 지난 시체처럼 생명이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표면에 떠오른 감정은 방금 전까지의 흥분과는 거리가 멀었고, 감정이 희박한 것과는 더욱 거리가 멀었다.



긴장인가. 아니면 발작적인 극한의 두려움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감정인가.


광기에 가까운 감정의 혼합물이, 그 얼굴 위에 떠올라 있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만은 확실하다.



그의 눈 속에 나 따위는 이미 담겨 있지 않다.


마치 내가 길바닥에 던져진 쓰레기만도 못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예일이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일어나 욕조를 빠져나간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나는, 예일이의 모습이 욕실 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미치광이처럼 허우적거리며 욕조를 박차고 튀어나온다.



"자, 잠깐만!! 다, 당장 갈 필요는 없잖아?!"


수건 한 장을 몸에 대충 두르고, 욕실 문을 활짝 열고 온 힘을 다해 소리친다.



예일이는 이미 회색의 정장 바지를 입은 후, 날카롭게 각이 선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걸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젠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빠의 것.


아빠가 내 곁을 떠나간 이후로도, 그웬은 마치 당장이라도 아빠가 돌아올 것처럼 옷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왔다.



안경을 끼지 않은 정장 와이셔츠 차림의 예일이는 놀랍도록 날카로우면서도 남성적으로 보여서,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가야 해."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한 마디.


그 한 마디를 대충 내던진 예일이는, 기막혀하는 나의 시선조차도 무시하고 검은 넥타이를 무미건조한 손길로 맨다.



"야, 약속했잖아?! 나와 함께 옛날처럼 목욕해 주겠다고!!"


"........."


무시당하고 있다.


완전히 바닥에 떨어진 껌보다 못한 것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자, 피가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나를 안아주지 않는 거야?


어째서 나를 엉망진창으로 범하지 않는 거야? 어째서 내게 인생을 저당 잡혀 주지 않는 거야?



이렇게나 사랑하는데, 이렇게나 갈망했는데, 이렇게나.....열심히 노력했는데.......



꽈악-


꽉 쥔 양 주먹의 살갗이 패여, 손가락 사이로 피가 약간씩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런 내 마음을 외면하듯이, 예일이는 탈의실의 문을 연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거실로 나가버린다.



"........."


"아가씨. 찾아오신 손님을 위해 차를 준비할까요?"


그 뒤를 이어, 탈의실로 들어온 그웬이 담담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진다.



대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어 보지만, 마치 무언가로 목구멍을 꽉 막아 놓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마음이 부서질 것만 같다. 마치 여린 도자기 인형을, 무거운 망치로 철저하게 박살내고 짓이긴 것처럼.



"..........."


시야가 흐릿해진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인해 심장이 발광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한다.


짐승과도 같은 거친 숨을 망나니처럼 내쉬며, 피가 뚝 뚝 흘러내리는 양 손을 펼친다.



두 손바닥은 이미 검붉은 선혈을 머금고 있다.


엉망진창이다. 완전히 엉망진창이다.


노력했는데. 예일이를 구하고 싶어서 노력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야만 하는 거야.



....나는.....나는.........



"아가씨."


산산조각 난 마음 속을,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든다.



고개를 들자, 시선을 맞춘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그웬의 모습이 보인다.


그녀는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모를 붕대를, 세심한 손길로 나의 손에 감아주고 있었다.


꼼꼼하면서도 능숙한 솜씨로 빠르게 처치를 완료한 그웬은, 이윽고 뒤로 물러가 우아하게 고개를 숙이며 양 팔을 내민다.



그녀의 양 손에는, 어느새 나에게 어울리는 사복 복장이 들려 있었다.



"스스로의 신체를 해치는 일은, 부디 자중해 주십시오."


차분하면서 상냥한 목소리가, 은은한 울림을 자아내며 귀 속에 울려퍼진다.


격해진 호흡이 가라앉는다. 들쑥날쑥하던 가슴이 다시금 안정감 있는 움직임으로 바뀌고, 발적적인 손떨림이 조금씩 잦아든다.



".....알았어. 그러니까 쓸데없는 잔소리는 하지 마."


"잔소리가 아니라, 조언입니다."


반사적으로, 쓴웃음이 얼굴 위에 떠오른다.


약간의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그녀의 손에서 옷을 받아 입기 시작한다.



"차 대접을 하겠다고 전해."


"지금 당장 가겠다고 하시는......."


"그렇다면 붙잡아. 대체 얼마나 걸레처럼 천박한 여자길래 차 한잔 마실 여유조차 없는 거야?"


신경질적인 말을 내뱉으며, 레이스가 달린 흰색 사이 하이 삭스를 잡아당긴다.


흑단색의 주름진 미니스커트를 다듬자, 고혹적으로 굴곡진 다리 라인이 완벽하게 드러난다.



순백색의 코르셋을 상반신에 걸치자, 그웬이 다가와 능숙하게 리본을 매듭짓는다.


가슴이 낀다.


아무리 큰 사이즈로 주문해도, 감당을 못하는 건가? 가뜩이나 불안정한 정신 상태가 더욱 심란해진다.



"그웬. 다음 번에는 다른 브랜드로 주문해. 이건 쪼그만 년들 전용처럼 느껴지니까."


"예. 알겠습니다. 아가씨."


"그리고 이제 도움은 필요없으니까 빨리 쫒아가서 차나 한 잔 하고 가자고 말해 줘."


내가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눈치가 빠른 그녀는 탈의실의 문을 열고 거실 쪽으로 사라졌다.



면도날처럼 날이 선 신경을 기울이며, 와이셔츠를 걸치고 꼼꼼하게 단추를 채운다.


검은색 멜빵을 낑낑거리며 채워 치마를 고정시키자, 세로로 몸을 가로지르는 끈이 명백하게 유방에 착 달라붙는다.


'조금만 작았으면, 자신감을 잃는 대신 인생이 훨씬 편했을 텐데...'


많은 부분에서 물리적 불편함을 낳는 체형에 대해 불평하며, 너무 음란하게 보이지 않도록 적절하게 끈을 조정한다.



일부러 물에 약간 젖은 채로 둔 금빛 머리카락을 몇 번 쓰다듬은 후, 서랍장에서 중요한 물건을 꺼낸다.


데오도란트.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중대한 물건이다. 꼼꼼하게 몸에 뿌려 혹시나 날 수 있는 체취를 감춘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응, 준비는 다 됐어."


문이 열리고, 익숙한 외모의 가정부가 들어온다.



"여동생님께서 수락하셨습니다."


짤막한 문장이었지만, 뜻은 알 수 있었다.


"그럼 당장 차를 준비해."


"종류는 뭘로 할까요?"


"몰라. 알아서 대충 적당한 것으로 골라."


내 어조가 유난히 날카롭다는 것을 느꼈는지, 그웬은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거실로 나갔다.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그 순간 의문점 하나가 머릿속에 부딪힌다.




".......예일이에게, 여동생이 있었어?"


"예? 무슨 말씀을....."


그것은 매우 사소하면서, 또한 가장 껄끄러운 의문.


예일이의 여동생에 대한 기록은, 명백히 나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방금 전까지, 그 존재하지 않는 여동생이 왔다는 말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고 있었다.




".....아. 어....어, 어라...?"


전신의 신경에, 서늘한 오한이 내달린다.


형언할 수 없이 공허한 이명이 귓가에 울려퍼지고, 눈앞이 금방이라도 핑핑 돌아버릴 것만 같다.


잔뜩 흘러나온 식은땀이 와이셔츠를 적시지만, 그것이 짙은 체취를 풍길 것이라는 우려의 감정조차 들지 않는다.



....어라? 이상하다?


나는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 인물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않았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