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순은 아주 예쁘고 배려심 넘치고 착한 여자친구였다.


부모님은 그녀를 보고 최고의 신부감이라고 말하곤 했다.


조금 질투심이 심하고, 집착이 있는걸 빼면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여자친구였다.



그렇게 좋은 날만 있을 줄 알았던 우리의 관계에 동요를 일으킨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신분이 드러난 날부터였다.



"...너, 그동안 왜 숨긴거야?"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속일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언젠가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 후, 알았어. 그러니까... 네가... 얀챈그룹의 차녀라는거지?"



얀챈그룹의 차녀.


대한민국에서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먹히는 다국적 기업의 딸이 내 여자친구였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고질적으로 갖던 부에 대한 열등감이 알게 모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였다.


문제가 겹치기 시작했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집착은 점점 심해졌다.


이전까지는 그나마 서로 배려해주던 시간의 개념도 완전히 망각한건지, 새벽이고 아침이고 거의 매일 전화를 걸어왔다.


"...여보세요."


"..왜 전화 안 받으셨어요?"


"...얀순아. 지금 시간이..."


"위치공유앱은 왜 지우셨는데요? 그것 때문에 오빠가 어디있는지 알수가 없잖아요."

"제가 말씀해드린대로만 하면 되는데, 왜 그것조차 안 하시는건데요?"


"...새벽이야. 왜 지금 이 시간부터 히스테린데."

"말싸움 하고 싶으면 아침에 전화해.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출근이요. 출근하니까 생각나는건데."

"오빠 옆 자리에 앉는 그 여우년이랑은 어떤 관계에요? 지가 뭔데 실실 쪼개면서 오빠한테 꼬리치는거에요?"


이상하다.


얀순이가 그걸 어떻게 알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왜요? 알면 안 되는건가요?"

"당연히 오빠의 여자친구로서, 그런 더러운 년들이 꼬리 못 치게 감시해야죠."

"그 년 이름이... 하얀진이였죠?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부터 인사이동이 시작될거에요."


어느 순간부터, 얀순이는 집착을 넘어선 내 삶을 관리하려고 들기 시작했다.


"....냐?"


"...네?"


"미쳤냐고."


"....아닌데.., 이게 아닌데..."


분노와 짜증보다 두려움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누구보다 사랑스러울 내 여자친구가 이제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 시간 좀 갖자."


"왜요? 잠깐만요. 끊지 마세요. 왜 그러시는건데요? 하얀진을 건드려서요? 그게 어쨌는데요? 말씀해보세요. 그게 뭐가 문제인데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나한테 가장 소중한 사람을 향해 침 흘리고 있는 년을 그럼, 멀쩡히 쳐다보고만 있으라고요?"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나가는 그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였다.



"..헤어지자."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회사에서 이유도 모를 부당해고를 당했다.


분노와 허망심이 느껴져 회사 밖으로 나오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얀순이❤]


받을까 말까 한 참을 고민하다가 끊긴 전화.


이제 그만 미련을 끊었으면 좋겠다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집의 문을 열었을때, 익숙한 인영이 내게 달려와 안겼다.


"다녀오셨어요, 오빠 ❤"


"....너, 어떻게 집에..."


"오빠의 일거수일투족도 감시할 수 있는데, 이 따위 고철문 여는건 문제도 아니죠 ❤"


이젠 나를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으려는 듯, 아니 오히려 과시하려는 듯 말하는 그녀에게서 그나마 남아있던 정도 떨어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에는 생기는 남아있었지만, 무언가 기이하고 질척거리는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피곤한데, 제발 가줄래?"


"헤에.. 피곤하시구나. 마사지라도 해드릴까요?"


"됐어. 됐으니까 제발 가."

"우리는 헤어졌잖아."


헤어졌다는 말에 힘 주어 말하자, 싱긋 웃고 있던 그녀의 눈에서 생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

"헤에... 아닌데."


"..뭐?"


"아닌데, 헤어진게 아닌데, 우린 지금도 사귀고 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시는걸까요?"


딱딱하고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위압감있게 집 안을 맴돌았다.


그러나, 그 분위기도 잠시.


얀순이는 다시금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제 옆에 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헤헤, 사실은요.."

"오늘, 여기 온 것은... 오빠랑 이걸 쓰려고 온거에요!"


그리고 얀순이가 기쁘다는 듯 꺼내든 무언가는 서류였다.


[혼인 신혼서]


나는 그 서류를 보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어섰다.


"너 도대체 뭐하자는거야! 우린 헤어졌다고, 아직도 모르겠어?"

"너도 이제 다른 남자 좀 찾아! 난 다른 여자를 찾을테니까!"

"언제까지 그 네 숨 막히는 집착을 참아.."


"누구 마음대로?"

"누구 마음대로 헤어져요?"


그 전의 냉기어린 목소리는 애교였다는 듯, 한번도 들은적 없는 얀순이의 살기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초점없는 눈은 아예 빛을 빨아들일 정도로 검게 물들었으며, 그 시선은 오롯이 내게만 꽃혀있었다.


"오빠가, 오늘 잘린거 우연 같아요?"


"뭐?"


"...히힛. 그거 제가 한 거에요."

"제가, 제가 한거라구요."

"오빠가 들어가겠다고 그렇게 발버둥치던 대기업도, 저희 회사에겐 안 되더라구요?"


날 비웃듯 차갑게 조롱하는 목소리에, 내 주먹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 오빠가 거기 들어가겠다고 몇 년을 노력했었죠?"

"그런데, 앞으로는 거기보다 잘난데도, 못난데도 들어갈 수 없을거에요."

"왜인지 궁금해요?"


"아.... 입... 그, 입.. 닥쳐.."


"아앙❤ 닥치라니요.. 말이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진심으로 상처 입었는데."

"뭐, 괜찮나요. 이젠 그 예쁜 입으로 제 칭찬만 쭈욱 해주실텐데."

"그렇죠?"


"......"


내게 천천히 다가오며 내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내가, 영원히 막을거거든."

"오빠는 내 옆에 있지 않으면 저기 놀이터에서 기어다니는 개미만도 못한 취급을 받을 것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기 전까지요."

"그러니까, 돌아와요.."

"응?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줘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이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어요.


라고, 그녀의 눈이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기만... 한다면.., 내가 모든 걸 다시 돌려줄게요."


지독할 정도로 서늘하게 웃는 얀순의 미소는,


광애와 집착, 고통과 쾌락, 슬픔과 기쁨이 모두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서류와 펜을 내밀었다.



나는 그리고, 그 펜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그녀는 이유를 알 수 없게,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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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거나 안 맞는 부분은 후에 수정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