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붕이가 고민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먼 지방에서 홀로 올라와 혼자서 살아가는 녀석이라 힘든 점이 있기는 할 테지만 지금까지는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친구다.


이 만큼 대놓고 힘든 기색 보여줬던 적은 없었는데 말이다.


이럴 때일수록 소꿉친구인 내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겠는가.


나는 얀붕이가 좋아하는 포도 맛 사탕을 들고 얀붕이에게 다가갔다.


“야, 김얀붕”


“얀진아?”


얀붕이는 내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듯 나를 올려다봤다.


나는 얀붕이 앞에 사탕을 올려다 놓고 근처의 의자 하나를 끌어다가 얀붕이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여자애가 치마 입고 함부로 다리 꼬는 거 아니다.”


“신경 끄셔. 그나저나 뭔 일 있냐?”


“...티났어?”


얀붕이는 작게 웃어 보이며 내가 건넨 사탕을 입에 넣었다.


“그게 숨긴다고 숨긴 거였냐? 대놓고 나 걱정 있다고 자랑을 하고 있더만.”


얀붕이는 몸을 뒤로 젖혀 등받이에 몸을 기대더니 말을 이어나갔다.


“누가 날 따라다니는 거 같아.”


“너 너무 자의식 과잉인 거 아니야?”


나는 얀붕이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하지만 얀붕이의 얼굴은 전혀 장난스럽지 않았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얀붕이는 혀로 사탕을 굴려 가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좀 예민한 편이잖냐. 며칠 전 부터 누군가가 내 뒤를 따라다니는 느낌이 들더라고. 등교할 때나 하교할 때나 어디 갈 때나. 무서워서 확인은 못했지만.”


“기분탓 아니야?”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야. 언제는 한 번 잠깐 어디 나갔다 왔는데, 돌아와 보니까 방 안에 물건이 조금 흐트러져 있는 거 같더라고.”


“친구라도 찾아왔다던가?”


“내 자취방 도어락 비밀번호 아는 건 내 부모님하고 얀석이하고 너밖에 없어. 얀석이는 물어보니까 아니란다… 설마 넌 아니지?”


“아니거든.”


내 단호한 대답에 얀붕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만히 냅두자니 무섭고, 경찰에 신고하자니 과민반응 인 거 같아서.”


“그럼 내가 도와줄까?”


“응?”


얀붕이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쳐다봤다.


“하교할 때도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했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


“그런데 어떻게?”


“너가 하교하는 동안 내가 네 뒤를 쫓으면서 너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야. 평소보다 좀 더 멀리 돌아서 가고 어디 들르고 그러면 너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있는지 확실해지지 않겠어?”


얀붕이는 잠깐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래, 그거 괜찮겠네.”


“집 가는 중에는 나랑 계속 통화하고 있자. 내가 실시간으로 알려줄게. 뭔가 첩보 영화 같아서 재밌겠는데?”


“누군 진지하게 힘들어하는데 재밌어하다니… 그래도 고맙다.”


“내 친구가 힘들어하는데 이 정도는 기본이지. 대신 나중에 매점 쏘는 거다?”


“알았어, 알았어.”


얀붕이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오자 그제서야 나도 안심이 되었다.


그리고 긴 수업이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얀붕이는 나 보다 몇 미터 앞에서 먼저 교문을 나섰고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여보세요? 잘 들려?”


스마트폰으로부터 얀붕이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아아, 잘 들린다 오바.”


“오바하지 마라… 오바.”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어때? 수상한 사람은 있는 거 같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길거리는 한창 하교 중인 학생들과 지나가던 사람들이 겹쳐 붐비고 있었다.


“모르겠어, 사람이 너무 많아.”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수상한 사람은커녕 얀붕이 한 명 제대로 따라가기도 힘들 것 같다.


“일단 사람들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음… 그래?”


내 말을 들은 얀붕이가 사람들 사이에서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럼 저기 횡단보도 건너편에 있는 서점 보여?”


“저기 빨간 간판?”


“응, 저기에 들어갈 테니까 밖에서 너가 좀 봐줘.”


확실히 건너편 길에는 오고가는 사람들이 적어 보였다.


이 정도라면 수색하기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자 얀붕이는 천천히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얀붕이를 따라 횡단보도를 건넌 뒤 서점 밖에서 들어가는 사람을 확인했다.


“그래서 어떤 거 같아?”


몇 분 뒤 다시 핸드폰 너머로 얀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뒤로 여학생 둘이 들어갔고, 아저씨 한 명, 여자 명, 그 외에 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나 근처에서 서성이는 사람은 없어.” 한


“알았어. 이제 나갈 테니까 뒤 따라 나오는 사람 좀 봐줘.”


얀붕이가 말을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점 문이 열리고 얀붕이가 걸어 나왔다.


얀붕이는 나에게 눈길을 힐끗 주더니 내가 서 있는 곳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래서, 어때?”


얀붕이가 나와 조금 거리를 벌리자 말을 걸어왔다.


“글쎄, 딱히 수상해 보이는 사람은…”


내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서점 문이 열리고 여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하얀색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은근히 신경 쓰이는 왼손에 찬 파란 비즈 팔찌.


내 기억이 맞다면 얀붕이의 뒤를 따라 들어갔던 사람 중 한 명이다.


“한 명, 아까 너 뒤로 들어갔던 여자 한 명이 나왔어.”


그 여자는 얀붕이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너가 걸어간 방향으로 가는데?”


“정말?”


“응.” 


멀리서 얀붕이가 뒤를 슬쩍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여자가 한두 명이 아닌데 어떤 여자야?”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치마 입은 여자. 왼쪽 손목엔 파란 비즈 팔찌도 차고 있었어.”


내가 말을 마치자 멀리서 얀붕이가 다시 한번 뒤를 슬쩍 돌아봤다.


“뭐야 씨… 나 그 사람이랑 눈 마주친 거 같아. 나 쳐다보는 거 같던데 기분 탓이겠지?”


“기분 탓인지 어떤지는 모르지. 그냥 우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나는 지금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결론을 얀붕이에게 전해주었다.


“그, 그래 우연이겠지. 일단 나 골목길로 들어갈 테니까 한 번 봐줘.”


그렇게 말한 얀붕이는 철물점과 약국 사이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갔다.


저 길은 차 하나 들어가기도 힘든 데다가 관리도 안 되어 있어서 사람들도 많이 안 다니는 길이다.


만약 저 여자가 저 골목길까지 따라 들어간다면 이건 확실히…


어, 따라 들어갔다.


“그 여자 따라 들어갔는데?”


“뭐어?”


얀붕이로부터 재밌는 반응이 넘어왔다.


“아,아니 우연일 수도 있잖아. 그렇지? 단정하는 건 나쁘다고.”


얀붕이는 애써 침착하려고 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사그라들지를 못했다.


“근데 솔직히 저기로 다니는 사람 많이 없잖아. 나도 더러워서 저 길은 많이 피하는데.”


“제발, 좀 긍정적으로 말해주면 안 되냐?”


하지만 얀붕이의 바램과 다르게 상황은 그닥 긍정적으로 흘러가지 못했다.


얀붕이가 아무리 골목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든 다시 사람 많은 대로로 나오든 그 여자는 하염없이 얀붕이의 뒤를 밟고 있었다. 


“아직도 따라오고 있어?”


“응. 이 정도면 노골적인 거 아니야?”


“설마… 그냥 가는 길이 겹치는 걸지도 모르잖아?”


“...그냥 좀 받아들이지 그러냐.”


“너 같으면 이상한 여자가 날 따라다니는데 쉽게 받아들여지겠냐?”


얀붕이는 진심으로 저 여자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떡하지… 집 다 와 가는데.”


한참 걷다 보니 우리는 어느새 얀붕이의 집 앞까지 와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여전히 우리들 사이에서 동행하며 불안한 기운을 내고 있었다.


“설마 집까지 따라오는 건 아니겠지?”


얀붕이는 집까지 가는 것이 두려워졌는지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저번에 너네 집에 누구 들어온 거 같았다면서. 너네 도어락 번호도 알고 있는 거 아니야?”


“진짜 무서운 소리 하지마.”


“그때는 진짜로 신고하면 되지.”


그렇게 얀붕이와 나 사이에서 무서운 말들이 오가고 있을 때였다.


얀붕이를 따라다니던 그 여자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근처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야, 저 여자 편의점으로 갔는데?”


“뭐? 진짜?”


얀붕이는 뒤를 돌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정말로 여자가 없어졌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한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통화를 끊고 얀붕이에게 다가갔고


얀붕이도 내 쪽으로 달려왔다.


“뭐야 저 여자 도대체 왜 따라다닌 거야.”


나에게 달려온 얀붕이는 여자가 들어간 편의점을 바라보며 불평을 내뱉었다.


 “그래서, 신고 안 해?”


“안 해. 괜히 생사람 잡는 거일 수도 있고. 내일 또 저러면 그땐 진짜로 신고해야지. 아무튼 오늘은 고마웠어.”


“그래. 내일 꼭 매점 쏘는 거다?”


“알겠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난 먼저 들어가 볼게.”


그렇게 말을 마친 얀붕이는 나에게 손을 흔들며 자취방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손을 흔들어주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 때 옆에 있던 편의점에서 그 여자가 걸어 나왔다.


오른손에는 작은 보라색 사탕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편의점에서 사 온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여자는 그 사탕을 입에 넣더니










나를 보고 작게 손을 흔들며 웃었다


뭐야


나 저 사람 알았던가


왜 나를 보고 아는 척 하지


갑자기 두려워졌다


얀붕이가 저 여자를 두려워 했듯이 말이다









나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여자는 옅은 미소를 띠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곤 


얀붕이가 사는 건물로 들어간다?


저기 사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다급하게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얀붕이에게 걸었다.


수신음은 내 마음도 모른 채 여유롭게 흐르고 있었다.


“여보세요? 얀진이?”


아, 받았다.


“야, 김얀붕! 너 집이야? 괜찮아?”


“무섭게 왜그래?”


“방금전에 그 여자가 말이야…”


삑 삑 삑 삑 삑 삑


스마트폰 너머로 삑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분명 도어락 번호 눌리는 소리.


이어서 끼익하는 문 열리는 소리도 들린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누… 누구세요?”


“얀붕아… 다시 만나고 싶었어. 지금까지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지만, 나한텐 시간이 많이 없어서 말이야...”


그 여자의 영문모를 소리가 스마트폰을 통해 작게나마 넘어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에요?”


“넌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조차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신이 준 기적이라고 할까?”


“더, 더 이상 들어오지 마세요!”


“후훗, 이 때의 얀붕이도 귀엽네. 있잖아… 나 더 이상 못참을 것 같아...”


“얀진아! 빨리 신고우으읍읍…”


통화종료.


그렇게 통화가 끊겼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스마트폰의 키패드로 들어가 1, 1, 2를 눌렀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도착하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나는 밖에서 기다리다가 경찰들과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3층 301호.


내부에선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도어락에 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삑 삑 삑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얀붕이와 그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얀붕이는 상의가 다 벗겨진 채 바닥에 눕혀져 있었고


그 여자는 속옷 차림으로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그 여자는 나와 경찰들을 보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이 허락해준 시간도 여기까지 인 것 같네.”


그렇게 말한 여자는 식탁에 놓여있던 칼을 집어 들었다.


“그 칼 내려놔!”


좁은 현관에서 내 옆에 서 있던 경찰이 그 여자에게 소리 질렀다.


하지만 그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얀붕이를 내려다본 채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는 얀붕이와 헤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얀붕이를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전혀 무섭지 않아”


그 여자는 칼을 뒤집어 들고는 칼날을 자기 목에 대었다.


“사랑해.”


“안돼! 그만둬!”


순식간이었다. 


칼날이 그 여자의 목을 파고들었고


목에서 튀어나온 피가 얀붕이 위로 떨어졌다.


나는 함께 있던 경찰들의 배려덕분에 그 여자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여자 바로 옆에 있던 얀붕이는 그렇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얀붕이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 후에는 많은 일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경찰서로 가 진술을 했고


함께 상담을 받았다.


며칠간이나 말이다.


밤에 잘 때마다 그 광경이 떠올라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이 계속됐다.


나도 이 정도인데 직접 덮쳐지고 피까지 뒤집어쓴 얀붕이는 어느 정도일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노력했다.


그 일을 잊을 수 있도록


다시 밝게 웃을 수 있도록


그래서 예전의 밝았던 우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얀붕이는 다시 웃음을 되찾기 시작했고 우리는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날 얀붕이가 심심하게 앉아있던 나에게 다가왔다.


“야, 박얀진!”


“얀붕이?”


나는 얀붕이를 올려다봤다.


얀붕이는 내 책상 위에 무엇인가를 올려다 놓았다.


“너, 나 많이 도와줬잖아. 그러니까 이건 감사의 의미로… 뭐 이상한 뜻으로 받아들이지는 마라.”


내 책상 위에는 얀붕이의 마음이 담긴 소중한 선물이 올려져 있었다.


“여자애들은 어떤 거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예쁜거 골랐는데… 맘에 들어?”


신경 쓰일 정도로 예쁜 파란색 비즈 팔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