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뭐 하는데?"


그 말에 반사적으로 거짓말이 나올 뻔 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베드엔딩이 되어버린 것을 기억하고

말을 신중히 고른다.


"내일... 일정 어...없지! 하하...."


뭐가 어떻게 되가고 있는지 알지를 못해 마땅히 좋은 말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시간만이라도 벌어놔야했다.

다시 찔리는 것은 사절이다.


"그래?"


너무나 밝게 웃는 표정.

차마 그 모습을 앞에 두고 심각한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다.


"그럼 내일 같이 놀러가자~ 새로 알아낸 디저트 가게가 있어."


"으...응... 알았어...."


그녀가 천사같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 속 사정을 알아버린 나에게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수면을 보는 것 같다.

이렇게 넘어간다면 무사한 나날이 되어도, 과연 그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아니, 우선 왜 그 때의 기억부터 다시 여기로 돌아온 것인가.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보니 자연스레 표정이 굳어진다.


"얀붕아? 무슨 일 있어?"


심각한 내 표정을 읽고 그녀가 걱정해준다.

순수한 눈길로 나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 가지고 걱정해주는 사람.

처음에는 그런점이 좋아서 서로 알콩달콩 지냈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나는 그녀의 포로가 되었을까.


"미안. 잠깐 고민할게 있어서 말이야."


"고민? 어떤건데? 나한테도 말해줄 수 있어?"


"아니, 이건 내 개인적인 거라서, 딱히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


"우~ 그러지 말고. 나한테 숨기고 싶은 고민인거야?"


씀씀이가 좋은 그녀의 보살핌처럼 보여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점이 조금 버겁다.


"괜찮겠어? 그... 남자만이... 가지는 고민인데...."


그녀는 성욕이 강하기 보다는 매우 약하다.

만약 내가 침대 위에서 넘어뜨린다면 붉어진 얼굴로 기절할 것이다.


"에...? 에엣?"


놀란 얼굴로 머리에 김을 뿜듯이 빠르게 붉어진다.

예상대로의 반응이기에 내가 생각해도 좋은 말돌리기인 것 같다.


"미안 미안.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 친구한테 잠깐 물어보면 될 것 같아."


내가 마무리하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계속 굳어있을 것이여서

그녀를 구슬리며 되돌려보낸다.


그렇게 일단락되고 나만의 시간이 잠깐 생겼다.

상황을 정리하고 나름 깊은 고민에 빠져본다.

왜 나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가.

이 문제 자체로 머리가 아파온다.

무슨 게임 속 이야기냐고.

저런 이야기에는 횟수에 제한이 있다던지 제약 조건이 있다던지 해서

나름의 룰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나는 룰이 뭔지도 모른다.

설령 가벼운 마음으로 잘못 선택했다가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며 인생오버를 선언받는다면 너무나 억울하다.

나는 단지 그녀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져서

친구와 함께 청춘의 한 때를 보내고 싶은 거였는데.


신이라는 작자는 너무하다.

이렇게 자연친화적이고 무해한 사람에게 터무니없는 것을 들이밀다니.

답을 찾지도 못하고 한숨만 푹푹쉬던 나는

결국 그대로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탁한 느낌이 들어서

숙제라던가 내일의 수업이라던가 모든 것을 저버리고 일찍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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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어두운 공간.

나는 의자에 앉아 화장대를 마주보고 있다.


'거기 너. 내말 들리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운 주변과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모습.

그런데 어디에서 들리는지 모를 소리가 자꾸 말을건다.


'무서워하지 않아도 되. 나는 너의 편.'


그말을 듣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기울인다.


'미안 미안, 지금 뭐가 뭔지 모르는게 더 많겠지.'


못 마땅한 눈으로 거울을 지긋이 바라본다.

내가봐도 정말 불만스러워 보인다.


'이렇게 되서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해'


입 밖으로 말을 받아치는 것은 아니지만, 내 속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믿어줘. 나는 너를 진심으로 돕고싶어.'


"우우...."


'그래, 많이 불안하겠지... 그래도 나를 믿어줘.'


"알겠어...."


'고마워. 처음 해주는 대답에 기뻐지네.'


"별말씀을."


성별, 나이를 예상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편안해지는 목소리다.


'오늘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많은 말은 못해주겠네.'


"바쁘네."


'미안해. 하지만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테니까.

아, 그래도 내일의 일에 대해서 말해줄게.'


"내일? 뭐가 있었더라...."


'여친과 시내로 나가서 데이트를 할 예정이야.'


"아 맞다... 그랬었지."


'그 때, 디저트 가게에만 따라들어가지 마. 이것만 기억해줘.'


"따라가지 말라고? 그럼 어떻게 말해야하는데?"


'오늘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네. 남은건 너한테 맡길게. 

힘내. 다음에 또 만나자.'


"잠깐! 할 말은 다 하고 가야지!"


목소리는 멀어지는 것 처럼 점점 작아지더니

이제 대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거야.

그렇게 헤매다가 정면의 거울을 다시 바라보니 알람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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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빅 삐빅 삐빅 삐빅


휴대폰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날짜를 보니 어제 누운 이후로 문제없이 잔 것 같다.

그런데, 그 때 꾸었던 꿈이 이상하게도 잊혀지지 않는다.

종이가 불에 타들어가듯이 기억이 조각조각 잊혀지고 있는데,

그 한마디 만은 뚜렷하게 기억한다.


'디저트 가게에만 따라들어가지 마.'


오늘 그녀와 함께 다닐 일정과 꿈에서 들은 그 한마디를 떠올리니

겉잡을 수 없는 엄청난 혼란이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