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사랑해"

 

문이 닫힐 때 정하가 무어라 말을 한 거 같았지만 엘리베이터 소리 때문에 나는 들을 수 없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카톡

 

'집에 도착했어?'

'ㅇㅇ넌 어떻게 딱 맞춰서 톡하냐.'

'비밀~'

'... 근데 왜 톡했어?'

'아 오늘 엄빠가 할머니 댁 가서 그러는데 우리 집에서 같이 저녁 먹자.'

'그냥 혼자 먹지 날 왜 불러...?'

'왜냐면 나 맛있는 거 사먹으라고 10만원 줬거든!! 먹기 싫으면 말든가~'

'아이고그럼 바로 가야지~'

'그럼 빨리 우리집으로 와!!'

'알겠습니다~'

 

방에다 가방을 던져두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수아네 집에서 밥 먹고 할 수행평가를 위해 노트북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나 지금 가는 중'

'ㅇㅋ빨리와!!'

'근데 밥 뭐 먹게?'

'글쎄일단 너 오면 시킬려고'

'일단 ㅇㅋ'

 

수아네 집으로 가면서 난 뭐 먹을지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띵동~

 

"나가요~"

 

명랑한 목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리고 수아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럼 실례 안하겠습니다~"

"우씨..."

 

날 반기는 수아를 뒤로한 채 현관을 지나 거실로 간 나는 노트북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우리 뭐 먹어?"

 

소파에 앉은 나는 태평하게 수아를 향해 물었다.

 

"너는 먹을 거 생각밖에 없냐?"

"."

"우이씨..."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수아가 내 팔을 때리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에서 나오는 수아의 손에는 초록색 병이 하나 들려있었다.

 

"... 그거 설마... 소주냐..?"

"짜잔저번에 엄빠가 사둔 거 하나 숨겨놨지~"

"너 그거 마시게??"

"내일 주말이니까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난 안 먹으련다."

"뭐어그럼 밥만 먹고 가마라탕 시켰는데 괜찮지?"

"또라탕?? 넌 그거 질리지도 않냐..."

"왜에 먹어도 먹어도 맛있는걸~"

 

띵동

 

"아 왔나 보다내가 나갈게."

 

초인종이 울리자 나는 배달 음식을 받으러 나갔다배달 음식을 받고 거실로 간 나는 탁자 위에 수저 세팅하는 수아를 보았다.

 

"뭐야주방에서 안 먹어?"

"우리 넷플릭스 보면서 먹자내가 재밌는 거 찾아놨어!"

 

묘하게 흥분되어있는 수아를 보면서 난 손을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손을 씻고 나오니 수아가 소파 앞에 앉아서 마라탕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나는 수아 옆에 앉아서 포장지 뜯는 거를 도와주었다.

 

밥 먹을 준비를 끝마치고 수아는 텔레비전으로 넷플릭스를 틀었고 나는 먼저 마라탕을 먹기 시작했다.

 

"쓰읍... ... 오늘따라 더 매운 거 같은데?? 물 있어?"

"여기!"

 

수아가 나에게 물컵을 건네주었다.

 

'언제 따라놓은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물컵에 있는 물을 원샷했다.

 

"으악이거 뭐야!! 이거 왤케 써!!"

"꺄하하그거 소준데 바보같이 마셔버렸네!"

"너 진짜... "

 

처음 먹는 소주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은 탓일까내 말은 끝을 맺지 못하고 혀끝에서 맴돌았다.

 

"너 괜찮아내가 너무 많이 준 건가?"

 

수아가 그런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하지만 입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있었다.

 

"너 진짜 장난도 이런 장난을..."

 

난 화가 난다는 표정으로 수아를 쳐다보았다.

 

"아 알았어그럼 나도 마시면 되잖아 그치?"

 

수아는 알겠다는 듯이 내가 먹은 양과 비슷한 양의 소주를 컵에 따라 원샷했다.

 

"우웩이 맛없는 걸 어른들은 왜 먹는 거지?"

 

수아는 맛없는걸 먹었을 때 특유의 표정인 소름 돋는다는 표정으로 컵을 내려놓았다.

 

"아니;; 난 먹으라는 게 아니었는데..?"

 

그런 수아를 바라보며 나는 어이없어하면서 말했다.

 

"뭐야왜 자기만 먹게 하냐는 표정 아니었어?"

 

수아는 모르겠다는 듯이 나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왜 이런 거로 장난을 치냐는 거지!! 오늘 수행평가 도와주기로 했잖아!!"

"아 맞다내가 도와주기로 했었지~"

 

수아는 깜빡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 술먹고 수행평가는 어떻게 도와주려고..."

 

알딸딸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나는 수아를 다그쳤다.

 

"그치만 너랑은 술 마셔보고 싶었는걸?"

"..갑자기??"

"... 성인되면 우리도 바빠질 거 아니야.. 그래서 그 전에 마셔보려고 했지.."

"그렇다고 이런 짓은..."

 

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서려는 순간 눈앞이 핑 돌더니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소파에 털썩 앉아버리고 말았다.

 

"괜찮아너 술 너무 약한 거 아니야??"

"괜찮으니까… 찬물 좀... 어지러워..."

"알겠어내가 가져다줄게!"

 

힘들어하는 나를 보면서 수아가 부엌에 들어가더니 오렌지 주스가 담겨있는 컵을 나에게 주었다.

 

"집에 물이 다 떨어져서 오렌지 주스라도 먹어."

 

난 수아에게서 컵을 받아들고 단숨에 마셨다.

 

"근데 이거 주스치고는 좀 쓰다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소주를 좀 섞었지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니야좀 괜찮아졌어?"

 

희미하게 미소를 띈 채 수아가 내게 물었다.

 

"좀 정신이 드는 거 같기도 하고... 나 화장ㅅ.."

 

소파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다시 주저앉아 버렸다분명히 주스를 마셨는데 아까보다 더 어지러워서 난 수아를 불렀다.

 

"수아야 미안한데 나 소파에 좀 누워있어도 될까..? 지금 너무 어지럽다..."

"그래편하게 있어!! 갈아입을 옷도 가져다줄까??"

"아니 그거까지는 괜찮아.."

 

왠지 모르게 들떠있는 수아를 보면서 나는 소파에 누웠다.

 

'얘는 술을 먹으면 더 신나는 건가...'

 

눈을 뜨고 있으니 세상이 빙빙 도는 거 같아눈을 감고 있으니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쭈압... 쭈압... 날름... 날름...

 

5분 정도 지났을까손가락에서 따뜻한 느낌이 든 나는 눈을 살짝 떴다무엇인가 내 손가락을 핥고 있는 거 같아 눈을 손가락 쪽으로 돌려보니.

 

수아가 내 손가락을 핥고 있었다.

 

"하압..! 너무 맛있어..!"

 

마치 아이스크림을 먹는 꼬마 아이같이 수아는 행복해하는 표정으로 내 손가락을 입에 넣고서는 혀로 내 손가락을 핥았다.

 

"... 지금 뭐하는...."

 

사람이 당황하면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몸까지 굳어버릴 줄은 몰랐기에 난 내 손가락을 핥고 있는 수아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뭐야벌써 일어난 거야난 더 잘 줄 알았는데~"

 

손가락을 입에서 뺀 수아가 입맛을 다시며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의 수아라고 보기엔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듯한 행동수아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그저 하나의 먹잇감에 불과했다.

 

"너 지금 뭐한하는 거야??"

"보면 몰라지금 맛보고 있잖아?"

"그게 지금 무슨 말..."

 

 

내가 말하던 중 수아가 갑자기 내 입술에 뽀뽀했다.

 

본인의 입술을 핥는 수아를 보면서 나는 당혹스러운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 취한 거 같아내가 얼른 집에 갈게"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잠깐...! 기다려봐!!"

 

수아가 내 팔을 잡으며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무슨 힘이 이렇게...!'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수아가 내 품에 안겼다.

 

".. 너 좋아해..! 좋아한다고!!"

 

내 품에 안겨서 울부짖듯이 토한 고백은 집안을 메아리치다가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에 부딪혀 금방 사라졌다.

 

잠깐의 정적

 

나는 날 붙잡은 수아의 팔을 잡고 부드럽게 내 몸에서 때어놓았다수아는 반쯤 글썽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나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입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수천 번 생각을 해보았지만답은 하나였다.

 

"조금만 시간을 주라..."

 

나름대로 거절도 긍정도 아닌 답을 내뱉었지만막상 뱉고 보니 거절의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 답해줄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서 그래!!"

 

어떻게든 중립적인 의견을 표하기 위해 말을 덧붙이며 횡설수설했다그런 나를 보던 수아는 희미한 미소를 올린 채 대답했다.

 

"... 그럼 월요일에 꼭 답해줘야 해??"

 

다시 수아가 입맞춤을 하기 위해 다가왔지만 난 살짝 뒤로 빠지며 도망치듯 수아네 집을 빠져나왔다.

 

"귀여워..."

 

나를 향해 뱉은 수아의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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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워...”

 

도망치듯 나가는 시후를 보며 나는 손가락으로 입술을 쓰다듬었다. 소파에서 눈을 떴을 때 당혹스러워하는 눈빛, 소주를 원샷하고 비틀거리며 소파에 털썩 주저앉던 모습, 도망치듯 우리 집을 뛰쳐나가는 뒷모습마저 너무 사랑스러워.

 

누군가와 처음 겹치면 우연두 번 겹치면 인연세 번 겹치면 필연이라는 말을 알아

 

정확히 나와 시후와의 운명을 얘기하는 문장이야시후는 처음 초등학교에서 보았을 때는 딱히 눈길이 가지 않는 아이였지연극을 하면 행인 1’을 연기했고 운동회나 학예회에서도 딱히 두드러지게 잘하는 것도 없는 아이였어.

 

그런 아이가 나의 눈에 띈 것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지.

 

나는 시후와 3년 동안 같은 반이 되면서 조금은 눈길이 가기 시작했어어떤 사람이라도 3년 동안 같은 사람을 보게 된다면 그 사람에 대해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마치 보이지 않는 실로 나와 저 친구가 연결되어있다는 생각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지

 

그러다가 나와 시후의 접점이 생기는데 바로 미술 시간이었어.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부터 바쁘셔서 준비물은 항상 내가 혼자 준비했어.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깜빡하고 미술 시간에 사용할 물감이랑 붓을 가져오지 않은 거야. 어른들한테서 항상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라고 불리던 나에겐 치명적인 실수였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돼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선생님께 말하면 지금까지 있었던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라는 내 전부가 없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지그래서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나는 사물함이랑 가방을 뒤져가면서 있지도 않은 물감과 붓이 나타나길 바랐지

 

결과는 당연히 나타나지 않았고. 나는 망연자실하면서 자리로 돌아왔는데 내 자리에 물감이랑 붓이 놓여 있는 거야. 내가 이거 누구꺼야?”라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 수업 시작 종이치고 선생님이 들어오셨지. 선생님은 들어오셔서 준비물을 챙기지 않은 학생들을 불러냈고 그때 내 짝꿍이었던 시후도 앞에 불려 나갔지.

 

근데 이상하더라? 내가 등교할 때부터 쉬는 시간 전까지 시후 가방에 물감과 붓이 들어있는 걸 봤었거든? 근데 이상하게 준비물을 챙기지 못했다는 거야? 나는 의아해하면서 물감 상자의 뚜껑을 열었지. 그런데 내가 뭘 봤는지 알아? 물감 튜브 하나하나에 쓰여있는 강시후라는 이름. 시후가 나에게 물감과 붓을 주고 자기는 준비물을 못 가져왔다고 거짓말을 한 거야!! 시후는 당연히 선생님께 혼나고 나는 혼자서도 잘하는 아이라는 '내 전부'를 지킬 수 있었지.

 

난 이때 느낀 거야!! 

시후라면 나의 부족한 모습을 보여줘도 되겠구나!!

내 부족한 모습을 시후가 봐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나는 시후에게 좋아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고등학생인 지금까지 이 감정을 품었지근데 시후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니까 키가 나보다 커지더니 점점 남자다워지는 거야... 우리는 남녀공학인데!!!

 

나는 더러운 년들이 내 시후에게 다가가는 것을 용서할 수가 없었어. ‘시후는 나를 바줘야 하는데, 나는 시후만 바라보고 있는데!!

 

자꾸 같잖은 것들이 우리 사이를 방해하는 모기처럼 '내 시후근처에서 앵앵대는 것만 봐도 욕이 차오르더라고 물론 시후가 착해서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지만 난 알아... 시후는 나에게만 '특별한 친절'을 베푼다는 것을... 그렇지 않으면 왜 옆자리 짝꿍에게 물감을 빌려줬겠어??

 

시후도 평상시에 나를 보고 있던 거야..! 앞에서 말했던 보이지 않는 실덕분에 시후가 나를 보고 물감을 빌려준 거라고. 아무튼 중학생이 된 시후 근처에는 어쭙잖은 년들이 꼬이기 시작했어. 난 그년들이 하는 여우 같은 행동을 도저히 지켜볼 수는 없었지만, '내 시후'가 고통받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시후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안 가게 그년들을 모두 처리했지.

 

처리라고 죽이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사물함에다 길고양이 피로 쓴 협박 편지 놔주고, 그년들 집에 가는 길에 머리 위에 벽돌을 떨어뜨린 것뿐? 직접적으로 죽이거나 그런 적은 없어~ 근데 벽돌에 맞았으면 좋았을걸...’하는 생각은 몇 번 했어. 그럼 시후랑 완전히 끊어지는 거니까. 근데 생각보다 잘 안 맞더라고~ 어쨌든 효과는 좋았어! 시후근처에 여자는 나 혼자 남고 나머지는 다 남자들로 채워졌거든. 어쩌다 오는 여자들은 내 기세에 눌려서 알아서 꼬리를 내리고 도망가더라고~ 시후도 딱히 여자들이 오지 않는다고 실망하는 않는 눈치고. 그럼~ 내가 있는데 누구한테 한눈을 팔겠어~ 내가 시후만 보는 것처럼 시후도 만 봐야 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