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https://arca.live/b/yandere/71433076



"알았으니.... 좀 놔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세 시간은 이래 있으니 아파서..."


"싫다.... 이대로, 잠시 있어다오. 그리고 세 시간이 아니라 두 시간 반이다."


지금 옆으로 기울인 내 품 속에는 수줍게 누운 한 여자가 있다. 그 여자는 어깨까지 오는 빨간 머리를 찰랑이고, 엣된 하얀 얼굴을 위로 치켜들며 노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정말로 이 여자가 방금 전까지 미친듯이 괴언을 내지르며 내 허리를 부러질 듯 조여오고, 한 줌의 빛도 존재치 않던 노란 눈으로 날 노려보던 드래곤이라고?


겉만 본다면, 그렇지는 않아보인다.


"흐으으... 좋다... 좋아..."


이 드래곤은 침대에 누운 날 껴안은 채, 가르릉 거리는 고양이처럼 옆으로 몸을 기울인 내 품 속에서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며 편히 누워있었다. 


한껏 누그러진 얼굴은 방긋방긋 웃으면서,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 아래의 노란 눈으로 날 사랑스럽게 보고 있었다.


"이대로 평생 같이... 흐흐흐..."


그리고 그녀의 몸은 더욱 내게 배배꼬여든다.


꼬르륵.


그리고 이런 진풍경은, 내 배에서 밥달라는 소리에 얼렁뚱땅 멈춰버렸다.


"아, 생각해보니. 그대는 나흘 동안 기절하여 밥을 먹지 못했군."


나흘? 그렇게 오랫동안 실신했다고? 


그리고 솔로메가 잠시 손을 모아 어떤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에서 환한 빛이 사방을 가렸다. 그리고 눈을 뜨자, 


"이, 여긴 대체?"


웅장한 방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방금 전까지는 황금빛이 나던 침실에 있었지만, 지금은 오로지 구름같은 하얀색의 돌로만 만든 거대한 공간에 있었다.


원기둥들이 떠받치고 있는 천장은 그 끝이 하늘에 닿을 듯 했고, 바닥은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것처럼 끝이 보이질 않았다.


바닥이나 기둥들에는 검고누런 때가 단 하나도 없이 하얗고 깨끗했다.


"알론. 우리가 살 신혼집의 거실은 맘에 드는가?"


왼쪽 귀에서 소리와 함께 숨이 들어오자, 후다닥 놀라며 옆을 보니 솔로메가 서있었다. 뿔과 노란 색의 뱀의 눈이 뚜렸히 드러나 있었다. 숨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가까웠건만, 아무런 느낌도 안 들었다.

그리고... 솔로메의 옷차림은 매우 특이했다. 


그녀는 나와 처음 만날 때부터 입고 다니던 빛바랜 치마에 셔츠를 입은 모습이이 아닌, 

광택이 나는 보라색 드레스를 입고, 가장자리에는 각양각색의 보석이 박힌 금색의 천을 허리와 어깨에 두르고 있었다.


어깨가 탁 트인 드레스의 허전함은 화려한 금빛의 목걸이가 매워줬고, 산발같던 핓빛의 기다란 머리카락은 녹색 끈에 묶인 채, 둥그런 모양으로 우아하게 말려있었다.


"어떤가?"


난 솔로메와 만나기 이전에, 여러곳을 다니면서 몇몇 귀족들과 만나보기도 했다. 


이곳 신성 제국은 내 고향보다 신앙에 열렬해서 그런지, 비단으로 만든 밋밋한 드레스에 보석 몇 점 박힌 귀걸이와 목걸이만 걸치는 게 치장의 전부였는데,


솔로메의 옷차림은 마치 여신같았다.


"예, 진짜로... 아름답습니다."


그건 그렇고, 우리는 여기에 밥을 먹으러 온게 아니였나? 죽 한그릇은 커녕 식탁보조차도 보이지 않네.


"근데... 우리... 식사하러 온 거 아니었습니까?"


내가 식사의 부재를 묻자, 솔로메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아앗!' 하는 감탄사를 내지르더니 허둥지둥 거렸다.


"아... 그렇지! 잠깐만 기다리게!!!"


다급하게 손을 내저어 마법진을 그린 후, 사라지는 모습이 꽤나 애같았다.


솔로메가 사라진 후, 난 기다릴 겸 해서 바닥에 앉아 있으ㄹ-


"미안하네!!! 내가 너무 늦었네!"


했지만, 솔로메는 10초 만에 다시 나타났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다채롭게 차려진 음식들과 함께. 


모두 하나같이 비싸보이고 윤기며 냄새며, 

빠질 게 없었다. 


특히 양쪽에 놓인 두툼한 스테이크에서는 코가 매울 정도로 후추향이 났고,  하얀색 항아리에서는 깊은 포도향이 풍겨왔다.


그리고 다른 접시들에서는 처음보지만, 한 눈에 봐도 매우 귀해보이는 요리들이 잔뜩 있었다. 그냥 화려하게 장식되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자, 여기 앉게나."


솔로메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나간 다음, 의자를 빼면서 나에게 앉기를 권했다. 자리에 앉으니 방석이나 그런게 없었음에도 무척 편안했다.


"예.... 정말 감사합니다. 솔로메님."


"별 걸. 그대가 내게 준 것과 줄 것들을 헤아리면, 이정도 만찬은 약소한 것이거늘." 


내가 해준 거라곤 겨우 이야기도 나누고, 간식도 먹여주고, 같이 다닌게 전부이다. 하지만 그걸 말해준다고, 뭐 알아들을지가 미지수다.


"자, 식기 전에 들지."


내가 자리에 앉자, 솔로메도 자리에 앉으며 날 지긋이 바라보며 식사를 시작했다.




**




"으어... 진짜 맛있었네요."


그렇게 차근차근 음미하면서 먹은 음식들의 맛은 정말이지.... 말이 안나오게 맛있었다. 


고기들은 그냥 끓이거나 구워먹는 서민의 방식도, 맛을 고려안하고 향신료로 절임을 해쳐먹는 귀족의 방식도 아닌 적절한 양을 뿌려서 그맛이 부드러움과 조화를 이루었다.


곁들여지거나 요리에 주재료로 쓰인 채소와 과일전부 식감이 아삭했고 싱싱했다. 


내 우둔한 머리로 그 맛들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지가 갈팡질팡했다.


그나마 입맛에 안 맞아 많이 먹지 않은 건 포도주였지만 먹을 만 했다.


하지만 계속 신경쓰이는 게 있다. 밥을 먹다가도, 내 오른발목에 채워진 게 자꾸 신경쓰였다.


발목에는 백색의 반짝이는 발찌. 내가 죄수는 아니지만, 왜 이런 걸 차야되지?


"흐흐... 그래도오... 알론이 해준 게 더 마씼어... 흐윽..!"


앞을 보자 포도주의 색처럼 붉게 물든 채 헤벌레 하고 있는 솔로메가 보였다. 솔로메의 양 옆으로는 본래 포도주가 담겨있을 하얀색 유리병들이 수두룩하게 서있었다.


난 조심스럽게 이 발찌가 뭔 물건인지를 물었다.


"그거!? 아, 그건 말이지... 마법이 걸려있는 발쮜야..!"


뭔 마법?

당혹감이 넘쳐흐르는 내 머릿속과는 다르게, 솔로메는 꼬인 혀를 움직이며 말한다.


"계쏙 우리 알론한테 이상한 것들이 꼬여드니까.... 내가 걱정데서... 직접 만드러서 채웠어. 특별이... 마법도 새겨놨지이이이!"


그녀는 술기운에 처진 팔을 허공에 흐느적대면서도 절도있는 손짓으로 어떤 모양을 그려냈다. 그러자, 식탁 위에 내가 찬 발찌와 똑같은 문양이 있는 원들이 나타났다.


"이건 어디에 있든 내가 알론의 위치를 알게 해주는 마법이고, 요건 어떤 병이나 독도 치유하는 마법... 알론을 내쪽으로, 내게 알론을 순간이동시켜주는 마법이고-"


암튼, 술에 취해 말하는 솔로메의 말이 맞다면. 이 발찌는 사용자에게 치유 마법, 위치 추적 마법, 순간이동 마법, 시야공유 마법, 보호 마법, 신체 구속 마법, 신체 강화 마법을 주는 발찌라는 거다.


"그걸 계속 차고 있으먄.... 오크 수백 마리가 덤벼도 이길 수 있다...! 물론 내가 나서면 그깟 오크들이 몇십만이나 와도 다 쓰러버리지만!"


결론은 이 발찌는 착용자를 말 그대로 최강으로 만들어주는 대가로 제작자에게 자유를 박탈당하는 팔찌다.


망할, 이거 미쳐도 진짜 헤까닥 돌아버렸네. 이러다가 평생 여기있게 생겼다. 어린애 수준으로 노망이 든 드래곤 곁에 있다가는 평생을 살더라도 곱게 살지는 못할 거다.


"으흐흐흡....."


그래도 지금 날 여기 묶어둔 그 무시무시한 자는, 지금 술에 취해 식탁에 대가릴 박은 채로 골아빠져 있었다. 


몸에 두른 금색 천과 보랏빛의 드레스가 검은 포도주에 젖어가는데도 곤히 잠들어있다. 도망가려면 지금밖에 없다. 발찌는.... 어디 도망가면 풀 방도가 있겠지.


그래서 난 살금살금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


"알론," 


"........"


그녀의 머리는 여전히 식탁에 있었다.


"거기는... 안댄다... 흐흐흐으...!"


술꼬대였나. 암튼 난 다시 식탁이 조그마한 점이 될 때 까지 달팽이와 비스무리한 속도로 걷고, 또 걸었다.


계속 팔다리가 서늘해지면서 덜덜 떨리자, 내 살떨리는 소리를 듣고 깰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에 앞으로 가는 걸음이 더욱 무거워 졌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솔로메가 아예 안보일 정도로 오고 나서야, 내 떨리던 몸은 겨우 진정됐다. 


잠시 바닥에 눕자, 저 어두운 천장이 눈앞에 보였다. 도대체 얼마나 크길래 천장이 어두운 걸까, 그리고 횃불이나 랜턴도 없는데 어찌 이리도 넓은 곳이 낮처럼 잘 보이는 거지.


"아오, 자리 진짜 편하네."


바닥에 앉으니 차갑지도, 뜨겁지, 딱딱하지 않다. 풀밭에 누운 것처럼 폭신해서 오히려 누워버리고 싶을 정도다. 이것도 뭔 마법을 써서 그런 걸까?


"하. 빨리 나가자. 그분-아니. 걔 깨기 전에."


그렇게 난 이곳을 나가길 희망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


"시ㅂ-, 시바아알....!"


도대체 얼마나 걸은 거지? 한 시간? 두 시간? 왜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는 거지? 온 세상을 담아놓을 정도로 크기라도 한 건가?


"으에에... 신이시어, 제발. 저 좀 여기서 꺼내주십쇼...."


바닥에 쓰러져 헥헥거릴 만큼 바닥을 걷다보니, 그다지 신실하지 않았던 내 신앙이 점차 꿈틀댔다.


"앞으로 예배도.... 안 빠져먹고... 점심 기도도 잘 올릴테니까.... 제바아알...! 으어."


아 진짜, 누가 여기서 좀 꺼내주라. 도무지 끝이 보이질 않는다! 


"살.... 려..."


뭐야, 방금 무슨 말소리가 들린 거 같았는데, 대체 뭐지? 


"제바알.... 살려줘..."


이건 목소리다. 여자의 목소리. 어디서 나는 거지?


"저, 저기요? 누구 있나요?"


"사.... 살려줘..."


목소리는 왼쪽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왼쪽을 보니, 저 천장까지 솟은 기둥이 서 있었다. 


좀 멀리서 봐도 그 기둥의 두께가 다른 기둥들의 세 배 정도는 더 굵어보였고, 주변의 바닥은 전부 깊디깊은 검붉은색으로 칠해있었다.


"사려.... 살려줘어어...."


계속 누군가 숨이 넘어 갈듯한 목소리는, 내가 그곳에 다가가게 만들었다.


끈덕한 걸음으로 검은 바닥과 가까이 가니, 코를 찌르는 비린내가 코에 풍겨왔다.


철퍽.


검게 칠해진 바닥을 밟을 수록, 끈적한 느낌이 신발 너머로 전해져왔다.


그리고 기둥 앞에 다다르자 나지막한 숨소리와, 구정내가 풍겨왔다. 난 손을 떨며, 오른쪽 방향으로 기둥의 반대편으로 서서히 걸어갔다.


철퍽.


처음에는 못에 꿰뚫려 대롱대롱 거리는 손바닥이 보였고,


철퍽.


그 다음에는 못에 박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매끈한 다리, 


철퍽.


조금 말랐지만, 그래도 돋보이는 구릿빛의 몸매와 축처진 동그란 얼굴에, 뾰족한 귀.


그리고 똑같이 못이 박힌 왼손. 

말뚝만한 못이 박힌 손과 다리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게 화살을 쏜 그 까만 엘프는, 뒤집힌 검처럼 손이 펴진 채로 기둥에 못이 박힌 채 매달려 있었다.


"으아으어... 아아악!!!"


결국 사람- 아니. 엘프가 산채로 못에 꿰어 대롱대롱 달린 채 핏물을 끝없이 흘리는 광경은, 결국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갑작스런 비명을 지른 내게, 엘프가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보았다.


"살려, 주세요... 제발...."


처음의 그 도도하고 살벌하면서 고품있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그 드센 눈동자는 갈대처럼 흔들리고 고품있게 말하던 입술은 고장난 문처럼 덜덜 떨렸다.


"제바.... 살려줘어어...."


맙소사.

고기가 아닌 살아있는 이의 몸에 못이 박힌 광경은 너무나 끔찍했다. 


얼마나 이곳에 박혀있던 거지?

어떻게 하지?

일단 저 못부터 빼야하나?

가까이 가서 못이 박힌 곳을 보니, 더 처참했다.


"노예라도 될테니까.... 살려줘요... 제발...."


내 동정심이 동한 건지, 미모가 아름다워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난 저 까만 엘프를 구하기 위해 못을 뽑기로 했다.


"저... 일단은 이걸 뽑을 건데, 좀 아파도 참아봐요?"


팔에 힘을 팍 준채로, 왼손에 박힌 못을 뽑아낸다.


"꺄아아악!!!"


박힌 못이 커서 그런가, 살짝만 흔들려도 그 고운 입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조금... 조금마-어어어!!"


힘을 줘 못을 계속 당기며 뒤로 당기던 내 몸은, 쏙하고 빠져나가는 가벼운 느낌과 함께 바닥으로 철푸덕 쓰러졌다.


땡그랑! 


거친 소리를 내며 핏바닥에 뒹구르르 굴러간 말뚝만한 못과 함께.


"아오 씨, 이게 뭔..."


진득한 핏바닥에서 일어나니 어안이 벙벙했다.

다 뽑힌 못은 분명 내 키만큼 길었는데, 어떻게 저걸 양털 뜯듯이 뽑아낸거지?


'그걸 계속 차고 있으먄.... 오크 수백 마리가 덤벼도 이길 수 있다...! 물론 내가 나서면-'


솔로메가 입을 꼬아대며 해댄 말이 갑자기 기억난다. 설마, 이 발찌가?


좀 과장일거라 생각했는데, 말뚝만한 쇠못이 바닥에 내뒹군 걸 보니 그게 허언은 아니었나보다.


난 다시 일어서서, 못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깡!


못의 끝부분을 주먹으로 탁치니 저 멀리 휘잉하고 날아가버렸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못도 끝부분만 부숴버리면, 


"흐으윽...."


"천천히, 그렇지."


못을 뽑는 것보다 쉽고 편하게 그냥 걸어서 나올 수 있다.  물론 옆에서 누가 부축해줘야 겠지만.


"...."


다리를 세울 힘조차 없는 건지, 계속 맨발이 흔들거리며 내 발 위로 밟힌다. 


"도망가야.... 해..."


하지만 그 상태로도 구릿빛의 다리는 한 걸음이라도 더 빨리가려 한다.


"알론,"


어?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말소리.


고개를 뒤로 돌리자,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여자가 노란 눈을 번뜩인 채, 검은 엘프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이년이랑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그 노란 눈동자는 들끓으면서도 생기가 없었다.


**


거의 1년만에 쓰는 거네 그동안 미루고 미루다가 반쯤 써놓은거 완성해서 올림 

현재 군대 입대중이지만 다음편은 빨리 올림 넘 늦어서 ㅈ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