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잡하게 지은 야영지에서 조금 벗어나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잠시라도 머리를 식히고 싶었던 것이 이유였다.


걸음마다 베짱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고, 또, 나에겐 과분할 정도로 고요했다.



한바탕의 산책을 끝내고 돌아왔을 때, 다름 아닌 그녀가 모닥불 앞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성녀님, 벌써 날이 어둡습니다. 주무시지요."


내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의 존재를 인식한 것일까, 그녀가 모닥불을 향해 기울였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나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아, 오셨나요, 용사님.

걱정은 감사합니다만, 크게 신경 안 써 주셔도 됩니다. 

오늘따라 잠이 잘 안 오네요."



어떤 수모를 당해도 항상 눈웃음을 지어 보이던 그녀가 유난히 우울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아마 지난밤 있었던 일 때문일 것이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별 탈 없이 여행 해온 궁수와 힐러, 그 둘이 나란히 사망한 바로 그 일을, 나는 얘기하는 것이다.


어제, 그들은 여느 때처럼 야영지 주변을 정찰하던 도중, 마왕의 측근에게 기습당했다.


나는 상황을 굳이 파악할 것도 없이 그들에게 달려갔지만, 그 둘의 목은 더 이상 지탱할 것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아니 우리는, 순식간에 동료 둘을 잃고 말았다.


누구를 책망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죽은 것은 유감스럽게도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었음을.

나는, 적어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나는 작열하는 모닥불 앞에 잠시 멈춰 서 쓸모도, 보잘 것도 없는 회상에 마침표를 찍고, 그녀에게 가벼운 밤 인사를 건넨 뒤 잠자리에 들었다.





의도와는 달리, 나는 곧잘 잠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이다 제풀에 지치기를 반복했다.


천막 모서리 어딘가에서 울리는 그 둘의 절규에, 애써 들리지 않는 척하며 발버둥 쳤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심란해 단 한 순간이라도 제대로 잠에 들었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땐, 천막 밖에서 지저귐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나지막이 원인 모를 한숨을 내쉬고, 몸을 일으켰다.



천막을 빠져나와 향한 곳은 어젯밤 모닥불을 피웠던 곳이었다.


나만큼, 혹은 나 이상으로 충격이 컸을 그녀를 위해, 아침 식사를 만들어주고자 했다.


그건 평소 눈치가 없다고,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그녀에게 핀잔을 받던 내 나름의 배려였다.



다만 그 계획에 무언가 차질이 있었다면, 모닥불 앞자리는 이미 그녀가 차지하고 있단 것이었다.


그것도, 내가 자기 전 보았을 때와 완전히 같은 자세였다.


생각해 본다면 이건 썩 기묘한 구석이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밤을 지새우신 건가요?"하고 물었지만, 그녀는 내 질문을 듣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한참을 땅만 바라보며 무어라 중얼대다가, 얼마 후 고개만 들어 나를 바라본 채 생기를 잃은 목소리로, 태연하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 용사님 잘 주무셨나요?

아침 식사도 전에 무례하게 죄송하지만, 잠시 어울려 주실 수 있으실까요?


드리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나는 그녀의 말에 이끌리듯, 통나무에 살포시 앉곤 잠시나마 그녀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왠지 그러는 편이 나에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어 내게 차라도 한 잔 들라며, 금방 끓인 듯한 차가 든 잔을 내밀었다.


"용사님께선 괜찮으신가요?"


"성녀님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두 분 얘기예요, 용사님께선 두 분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시고도 괜찮으신 건가요?"


아주 잠시, 불쾌한 적막함이 나를 질식시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그녀와 나눌 대화가 하루를 시작할 이 새벽녘에 나눌 법한 활기찬 대화는 결코 아님을, 나는 은연중에 확신하고 있었다.


"...괜찮을 리가 없습니다.


저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새벽까지만 해도 잠에 들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으니깐요.

심지어는, 귀에 그들의 비명이 들리기까지 했습니다.


솔직해지자면, 저는 아직 두 녀석의 죽음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실없는 농담이나 주고받던 녀석들이 하루아침에 죽어버렸다는 게, 잘 믿기지 않습니다."


나는 가빠진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이대로 멈춰 설 순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용사 파티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건, 성녀님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그녀는 잠깐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시각 불을 쬐지 못한 나의 등은 새벽바람에 감각이 무뎌지려던 참이었고, 어젯밤부터 불사른 장작은 하얗게 바래고 있었고, 컵을 부여잡은 내 두 손은 무섭게 떨리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다시 반쯤 떨궜다.


"다음엔 저나, 용사님께서 죽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가야 합니다."


"고향에 있는 가족을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모두가 저희의 존재를 잊게 될지도 몰라요.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들이 수포가 될지도 모른다고요."


"그래도, 가야만 합.."


"용사님은, 당신은 죽음이 두렵지도 않으신가요!?"


그녀는 이내, 비애로 가득 찬 목소리로, 내게 언성을 높였다.


역시, 그녀답지 않았다.


거칠고, 우악스러웠으며, 한편으론 가냘팠다.


"저는 지금 죽음이, 당신의 죽음이 너무나도 두려워요. 제 곁에 용사님마저, 당신마저 사라져 버린다는 게, 맨정신으론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요."


"차라리, 마왕 토벌이나 용사 파티 같은 건 다 잊고 도망쳐 저희 둘이서 살아요.


당신도 원해서 용사가 된 게 아니잖아요, 저희 그냥 여기서 깔끔하게 포기해요. 네?


사람 없는 시골로 떠나 조용히 살면 분명 아무도 저희를 못 찾을 거예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제게 소박한 미소를 보여주세요.

나약한 제게 그 손을 내밀어 주세요... 네?


부디.. 사라지지 말고 계속 제 곁에 있어 주세요."


나는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도 않고, 그저 하염없이 땅을 응시하고 있었다.

 

"제발, 비난이라도 좋으니 아무런 말씀이라도 해주세요. 부탁이에요..."


연고나 반창고 하나 붙이지 않은 그녀의 상처는 이미 충분히 곪아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문드러져 있었다.


생각해 본다면 그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건, 우리가 인류를 등에 진 용사 파티이기 이전에, 고작 19살 먹은, 세상 물정도 채 모르는 순박한 소년, 소녀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에게 건넬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던 나는, 괜스레 미적지근해진 차를 한숨에 들이켰다.

그리곤, 결의를 다시 벼렸다.


"저도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래도,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제가 사라진 뒤 언젠가 새로운 용사가 탄생한다고 할지라도, 그동안 마족에 의해 발생할 피해는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용사가 한순간이라도 마을을, 인류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지키겠습니까?


따라와 달라곤 구태여 말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막지 말아 주십시오. 그 둘의 죽음을 헛되이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마왕을 토벌하러 갈 겁니다."


나는 그녀에게 어쭙잖은 가식이나 위선으로 들어찬 위로를 보이려 하지 않았다.


"..용사님이라면, 진정한 용사의 그릇을 지닌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하실 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저의 얄팍한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을 것 정도는, 나약한 저를 배려해 혼자서 여행길에 오르려 하실 것 정도는, 예상했었어요. 


이런 결과가 될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당신을 설득해야 했어요.


그런 강한 당신을, 지켜야만 했으니까요.

누구보다도 강한 당신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하니까요..!


..용사란 존재는 원래 쓸쓸한 법이에요. 

사람들은 보호받는 용사를 원하지 않잖아요.

모두 용사에게 의지만 할 뿐, 용사님에 대한 걱정은 안중에도 없어요.


저라도 당신의 곁을 지키지 않으면, 당신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죽어버린 용사는 언젠가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게 될 거예요.


저는, 제가 죽는 것보다 그게 더 무서웠어요." 


나는 대화 도중 돌연히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짐을 느꼈다.


내가 칠칠하지 못하게 눈물이나 흘리고 있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분명 스스로는 정의 못할, 그녀에 대한 어떤 복잡한 감정이 원인이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땐, 내 판단력은 이미 인과관계의 시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뭉개져 가고 있었다.



내 정신은 확실히 무언가에 좀먹히고 있었다.


위화감을 인지한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서고자 했지만, 몸이 생각만큼 잘 따라주지 않았다.


삽시간에 두 다리에 힘이 빠져, 어느새 땅에 고꾸라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닥에 누워 한창 어지럼증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부디 이런 저를 용서해 주시길..."


하곤, 그녀가 자신의 눈물을 닦고 통나무에서 일어나는 것과 미처 끝맺지 못한 대화를 종점으로, 나는 의식을 잃었다.





몇 시간, 어쩌면 며칠이 지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절그럭대는 금속 마찰음에 눈이 뜨였다.


본래라면 보일 리 없는 천장과, 나름대로 고풍스러운 벽과, 나를 집어삼킨 적당한 크기의 방과, 방구석에 있던 침대와, 그리고 그 침대에 내 두 손을 결박한 수갑이, 찬찬히 눈에 들어왔다.


다음으로 눈이 향한 곳은 신체였다.


신체에 크게 달라진 점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나를 극진히 돌봐준 듯, 크고 작은 생채기들이 사라진 상태였다.


나는 두 손이 결박되어 있었음에도, 다리를 사용해 기괴한 자세를 취하며 공들여 옷을 들출 필요도 없이 내 상황을 진단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내가 속옷을 제외한 전라 상태로 침대에 속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영문을 잘 알 수 없었다.

눈을 감기 전과는 달라진 환경에, 흘러넘치는 정보를 채 처리해 내지 못하였다.


꽤나 혼란에 빠져있을 때였다.

방문 너머로부터, 미묘한 구두 소리가 울렸다.


그 불길한 진동은 이윽고 문 앞에서 멈췄고, 뒤이어 얼마간의 정적이 지난 뒤 그 문을 열어젖혀 내게 다가왔다.



그 발걸음의 주인은 한껏 멋을 부린 '그녀'였다.

멋들어진 프릴 드레스를 입는 법도, 은은히 달콤한 향을 자랑하는 향수를 뿌리는 법도, 귀족 영애만의 우아한 걸음걸이를 행사하는 법도 모르던 그 수수한 그녀 말이다.


"벌써 눈 뜨셨나요?

좀 더 주무실 줄 알았는데, 역시 용사의 몸은 강하네요. 그만한 마비 독을 금세 해독해버리시다니."


자신의 눈물을 호소하던, 그날 밤의 그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아, 참고로 그 수갑은 평범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에요. 힘을 쓰실 수록 점점 단단해질 거예요." 


"괜한 수고는 하실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나는 두 손을 바짝 묶은 수갑을 부딪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다소 투정 섞인 목소리를 냈다.


"성녀님,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 일을 나라가 알면 설령 성녀님이시더라도 쉽게는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그녀는 꿋꿋이 다가와 나를 누인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대화를 이어나갔다.


"상관없어요, 그런 건.

말씀드렸잖아요.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서 같이 살자고요.

그래서 나라에서 최대한 먼 곳으로 당신을 데려왔어요.


아마 용사와 성녀가 실종됐다는 소식이 국왕에게 닿는 데만 해도 2년은 족히 걸릴 거예요."


"미련하게 혼자 떠난다고 한 제가 못마땅하셔서 그러신 겁니까?"


"아뇨, 그럴 리가요.

저는 당신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보여요.

그렇기에 이런 짓도 서슴지 않고 벌인 거고요."


그녀는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그건 분명히 예전과 같은 눈웃음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몸을 어루어 만지기 시작했다.


"항상... 이렇게 당신의 살결을 만지고, 서로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었어요.

여행 내내 내심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여행 중에는 성녀의 신분이었던 터라 할 수 없었지만, 성녀가 아닌 지금이라면, 뭐 마음껏 해도 괜찮겠죠. 후후.


음.. 역시 투박하고 울퉁불퉁하지만, 왠지 고양되네요.

당신만의 강함과 상냥함이 느껴져요."



나는 그때, 그 여자의 터무니 없는 횡포에 수치심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

느끼지 못했다.


그녀와 같은 외모로 미소를 보이며 그녀와 같은 나긋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다.


그녀를 행세하는 그 여자에게, 나는 괴리감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다.

내가 줄곧 그려왔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 여자는 이어 자세를 바꿔 저의 몸을 뉘어 내 위에 포개기 시작했다.


그 여자의 체온은 드레스를 넘어 내게 닿았다.


여전히, 그 심장은 뜨거웠다.

그것은 틀림없이 그녀의 것이었다.


내가 그 여자를 부정할수록, 내게 반박의 여지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그 심장은 가슴이 아릴 정도로 뜨거운 그녀의 피를 뿜어댔다.

그 여자는 그녀임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당당히 본인의 얼굴을 보이고 있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당신에게 울상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당신은 해맑은 웃음이 가장 잘 어울려요, 어서 그 얼굴을 제게 보여주세요.

저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에게 성녀일 적의 얼굴은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나는 그제야 확신했다.



그녀는 나를 감싸 안고 관능적인 목소리로 귀에 속삭이기 시작했다.


"이제 둘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어요.

다른 이를 위해 검을 들 필요도, 상처 입을 필요도 없어요.


제가 당신을 평생 돌봐 드릴게요.

식사도, 목욕도, 독서도 제가 직접 시켜드릴게요.


원하신다면 제 몸을 사용하셔도 좋아요.

당신을 위해 일평생 지켜온 거니까요."


"오직 당신만의 것이 되어드릴게요.

그러니 당신도, 제 곁에서 오직 저만의 당신이 되어주세요."


그곳엔, 고혹적인 목소리를 내는 그녀에게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내가 있었다.

그저 침대에서 무의미하게 여생을 보내게 될 인생에, 목숨을 바쳐 이루어야만 하는 것을 내팽겨 치고 도망칠 그러한 인생에, 나는 가슴 한 켠에서 긍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나로 인해 심한 수치심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