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그래서, 지갑이 없어졌다고?”


“응…”


“멍청한 년들.”


“리비… 다시 찾으러 가는 건 안 될까…?”


“그러든, 말든. 아, 만약 오빠가 주워갔다면, 어떻게 될까…”


“...지휘관이 가져갔으면…”


“미사일…”


“잘 아네? 맞아, 하필이면 오빠가 가져갔더라고. 근데 오빠 근처로 접근하는 순간 너희 머리에 구멍이 뚫릴텐데… 난 두 번 봐주는 건 너무나도 싫거든.”


“아니, 이건 봐줘야지…! 지갑만 찾고 바로 가면 ㄷ”


“두번은 봐주기 싫다고 방금 얘기했는데.”


“아, 그게 아니, 으… 미, 안…”


“됐고, 너희들끼리 알아서 찾아. 결과도 너희가 책임지고. 이제 꺼져.”


얀순의 싸늘한 반응에, 세 칸센들은 착잡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방을 나선다.


잠시 그이와 만났던 식당을 끝으로 보이지 않는 지갑, 사회에서의 마지막 자유를 만끽할 여비와 함께 그녀들의 정신줄도 저멀리 사라졌다. 


우선 셋이서 머릴 맞대고 이 상황을 뚫고나갈 방법을 생각해본다. 하지만 마땅한 묘수는 보이지 않는다.


“어떡해…?”


“만나야지.”


“자기를?! 안 돼…! 그러면 리비가 우리한테…”


마침내 나온 답안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목숨이냐, 아니면 남은 시간을 가난하게 살 것이냐, 그것이 문제였다.


“지휘관군이 바로 옆에 있는데 미사일을 쏠까? 저 여자 성격상 절대 그럴리 없다구.”


“독일의 공군대장도 그 미사일로 죽였대… 정확히 팔만 잘랐다는데…”


“흥, 독일 애들이 다 한 거에 숟가락만 얹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그리고 변수라는 게 있잖아? 만약 우리한테 미사일을 쐈는데 지휘관군이 유탄을 맞거나 하면, 후후, 여러모로 볼만 하겠네.”


“자기가 다치는 건 죽어도 싫어! 당장 어제 엄청 크게 다쳤단 말이야…”


“지휘관군이 다친 걸 보고 싶다는 게 아니라, 저 여자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래. 어쨌든, 전략은 히트 앤 런, 빠르게 받고, 빠르게 벗어나자구.”


“근데, 지휘관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잖아…”


“발견할 때까지 찾으면 돼. 여긴 우리의 홈그라운드, 호놀룰루인 걸? 그치, 호놀룰루?”


“놀리는 거야…?”


“그럴리가~🎶


아무런 단서도 정황도 없이 일단 길을 걷는 세 여인들. 


빼어난 외모 덕분에 중간중간 껄렁한 남자들이 치근덕대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양복을 입은 장성들이 나타나 남자들에게 이런 저런 말을 하고 쫓아내면서 안전하게 거리를 누빈다.


“저 남자들… 그때 봤던 것 같은데…”


“여동생양께서 약속을 지키시는거지.”


“이 날씨에 양복 입으면 안 덥나…?”


“고지식한 아가씨라서 부하들 배려는 하나도 없네. 참 안타까워.”


“그런 말 하지마! 괜히 저 사람들이 일러바쳤다가는…”


“후후, 지휘관군이 준 옷에 온 정신이 팔려있을터라 상관없어.”


세인트루이스가 잔잔하고 여유롭게 얀순의 뒷담을 까면, 뉴저지와 호놀룰루는 그만큼 심장을 졸인다.


하도 얀순에게 시달린 나머지 이젠 제트엔진의 소리가 하늘에 울릴 때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그녀들의 심정을, 세인트루이스는 전혀 몰랐고 알려고 할 의지도 없었다.


“빨리 찾고 돌아가자. 또 한 소리 듣긴 싫어…”


“지휘관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되는데…”


“다 왔어.”


“어딜?”


“지휘관군이 있는 곳.”


“여긴지 어떻게 확신해…?”


“이 근방에서 제일 화려하고 고급진 호텔이니까. 지휘관군이 머무는 호텔이라면 최소 이 정도는 되야할 거 같거든.”


“...그래, 밑져야 본전이지…”


일단 들쑤셔보고, 없으면 나오고. 결국은 이것밖에 할 게 없는 그녀들. 호텔 직원들의 눈치에도 꿋꿋이 카운터로 향한다.


카운터의 호텔리어들은 벌써부터 수상한 느낌의 불청객에 긴장을 놓지 않는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손님?”


“누가 해…?”


“루이스…?”


“우후훗~ 호놀룰루, 부탁할게?”


“뭔…!? 네가 들어가자고 했으면서 왜 나한테…!”


“손님?”


“네넷…!? 에, 그, 저… 여기… 김얀붕이라는 분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친구에게 뒷통수를 제대로 맞은 호놀룰루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직원에게 묻는다.


옆에 있던 뉴저지는 글렀다는 걸 깨닫고 그녀를 따라 고개를 푹 숙인다. 세인트루이스는 재밌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흘린다.


반대로 직원들은 이 여자들이 뭔가 잘못먹었나 싶어서 경비 호출 버튼을 누르기 직전이다. 


세상 어느 호텔에서 투숙객의 호실을 옛다 하고 알려줄까. 게다가 나름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의 숙박 정보를 수상해 보이는 자들에게 알려줄 이유는 더더욱 없다.


“죄송하지만 손님, 저희 호텔은 투숙객의 정보를 외부인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있을 것 같은데…”


“하아… 창피하게 이게 뭔 짓이야…”


“흠, 안 되겠네. 럭키 루라는 별명을 어떻게 얻었는지 보여줄게.”


“적당히 좀 해…! 어제부터 계속 이상한 행동만 하고…!!”


“후후, 이 직원이 투숙객의 정보라고 했잖아. 그 뜻은, 지휘관군이 여기에 있긴 하다는 거 아냐?”


“...그런가?”


“어?! 듣고 보니 그렇네?”


-!


세인트루이스의 말을 듣고 흠칫한 직원들이 애써 태연한 척을 해본다.


거절을 한참 잘못된 방향으로 하고 말았다. 얼떨결에 얀붕이 숙박하고 있다는 걸 인정해버렸으니, 윗사람에게 한 소리 들을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 난다.


상황 파악을 끝마친 세인트루이스는 호놀룰루를 제치고 여유로운 자세로 직원을 천천히 휘어감았다.


“이 호텔의 제일 좋은 객실이 몇 층이죠?”


“...최상층입니다.”


“몇 개 남았나요?”


“1개 남았습니다.”


“후후후, 하룻밤만 머물고 갈게요. 계산은 올라가서 금방 해드릴테니 걱정 마시구, 안내 부탁드려요?”


“네, 여기 카드키입니다. 따라오십시오... 어라…?”


이 여자, 혀놀림이 예사롭지 않다. 호텔의 고참 컨시어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타까운 희생양이 된 햇병아리 직원은 자신이 함정에 걸린 것도 모르고 정보를 술술 내준다. 옆에 있던 동료들 중 몇몇은 뭐가 잘못됐는지 알지만, 규칙에 위배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그저 바라만 본다.


시가지가 다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향하는 그녀들, 하지만 호놀룰루와 뉴저지는 아직 안심하기에 이르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잘 봤지? 지갑만 받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자고 가야겠네~🎶 이렇게 우릴 도와줬는데 그냥 가긴 미안하잖아.”


“근데 우리가 자기 옆방에서 자면 리비가 가만히 안 있을거야…”


“변수, 지휘관군이 바로 옆에서 아이들, 그리고 아내… 후후, 상점의 그녀와 놀고 있는데 미사일을 쏘기엔 위험성이 크지 않겠어?”


“반대로 그만큼 확실한 안전도 없잖아… 말하는 거 들어보면 백발백중이던데…”


“이만큼이나 두꺼운 콘크리트 벽이 사람 하나 겨우 죽이는 조그만 미사일에 뚫릴리 없지. 정 뚫고 싶으면 아예 한 층을 날려버릴 화력이 필요할걸?”


“유리창을 깨뜨리고 들어올 수도 있는데…”


“여기 위치를 봐봐. 도심 한복판이잖아? 민간인들이 머무는 호텔에 미사일을 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구?”


“...난 모르겠어… 무서워서 못 잘 것 같아…”


-띵! 


-25층입니다.


“자, 어디, 얼마나 고급진지 보러 갈…”


의기양양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세인트루이스가 갑자기 멈춰선다.


우려한대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에 호놀룰루와 뉴저지는 선뜻 발이 나가질 않는다.


“루, 루이스…?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 무, 섭잖아…”


“후후, 이건 언럭키네.”


“언럭키라니…?”


“직접 봐봐.”


“...아, 그, ㅇ, 어, 어떻게…”


“리, 리비…!?”


“살 맛 나나봐? 이런 고급진 호텔도 예약하고.”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떡하니 복도에 서있는 얀순, 그 모습은 가히 귀신과 다름없었다.


팔짱낀 손에 들린 권총 한 자루는 위압감을 더욱 증폭시켰고, 그녀들이 전의를 상실하는데 크게 일조했다.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줄까? 여기가 오빠 방이고, 오른쪽이 내 방이야. 그리고 너흰 여기, 오빠의 왼쪽이지.”


“오빠가 모르게 하려고 스케줄까지 조정하느라 머리가 많이 아팠는데, 거기에 너희가 뭣도 모르고 들어와버렸네?”


“너라면 그럴 것 같았어. 이걸 왜 깜빡했을까.”


-철컥!


“히잇…! 루이스, 어떡해…?”


얀순이 권총의 슬라이드를 당기고 그녀들에게 겨눈다.


당장 전날에 총의 무서움을 실감한 세인트루이스가 그 트라우마 때문인지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왜, 또 맞는 건 싫지?”


“당연한 소리를. 많이 아프더라구.”


“너희 방으로 들어가. 애들 자고 있으니까 깨우지 말고.”


“저, 저저, 손님…”


“아, 죄송해요. 이제부터 저희가 알아서 할테니 내려가셔도 돼요.”


“예… 실례했습니다…!”


난데없는 대치에 깜짝 놀란 햇병아리 직원은 벌벌 떨다가, 얀순의 말에 카드키를 넘겨준 뒤 재빠르게 엘리베이터에 탑승하여 도망쳤다.


얀순이 비즈니스 미소를 풀고 차가운 표정으로 문에 카드를 대자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어락 소리가 복도에 울린다.


“들어가라니까?”


“으… 응…”


총을 까딱거리며 그녀들을 방에 집어넣는 얀순.


그 안은 세 명이 쓰기엔 너무나도 크고, 벽 전체에 세계의 유명 주류가 빼곡히 전시되어 있으며, 인테리어는 사소한 것까지 매우 고급진 사치의 극치였지만, 그것들을 누릴 기쁨은 한참 이르다.


“저 침대 있지? 일렬로 앉아.”


-......


“안 들려?”


저 차가운 세마디에 그녀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거대한 라지킹 사이즈 침대에 다소곳이 앉는다.


얀순은 침대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녀들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전날처럼 머리를 짚으며 나지막하게 말한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우린 친구들인데 서로 이렇게 싸우면 안 되겠지?”


“응…”


“근데, 아무리 친구 사이여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는 법이거든. 그 선이 오빠고, 그치?”


얀순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진열대에 있는 독한 럼 한병과 네개의 글래스를 가져왔다.


-따다닥!


-쪼르르륵…


술병이 따지고, 글래스 잔이 잔잔하게 채워진다.


그 소리가 끝을 맺었을 땐 모든 글래스에 절반 정도 찬 황금 액체가 햇빛을 받고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너희를 한 번 시험해보고 싶어. 알딸딸한 꼴로 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참 궁금하네.”


“여기 쓰여진 151이… 내가 알기로는 도수로 환산하면 75.5도라는데… 너네 나라, 음, 우리나라라고 해야 하나? 뭐 어쨌든 출신지가 같으니까 잘 알 거 아냐?”


“저거, 엄청 독한데…”


“불도 붙을 정도지…”


“아, 그래? 몰랐네. 하지만 이미 따라졌는 걸.”


75도나 되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능청을 떠는 얀순의 말을, 세 장난감들은 무력하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얀순이 글래스 3개를 들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들에게 건낸다. 


하지만 사악한 도수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이 무서워서인지 그녀들이 시선을 피하고 머뭇거리는 등 받기 꺼려하자, 그냥 바닥에 두고 자리로 돌아와 자신의 잔을 든다.


“건배, 하기 싫어?”


“...임신 중 음주는 아기에게 안 좋다구?”


“참나, 너흰 인간이 아니라 칸센이야. 인간의 탈을 쓴 배라고. 어떤 원리로 오빠의 아이를 뱄는진 모르겠지만, 그 대단하신 몸이 이깟 알코올을 못버틸까?”


얀순이 세인트루이스의 완곡한 거절에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핑계를 대도 저런 어처구니 없는 걸 대냐면서.


어차피 나머지 둘도 안 마실 게 뻔하니, 결국 먼저 한모금 하며 달콤한 향에 반항하는 독하고 쌉싸름한 알코올의 풍미를 잔뜩 음미했다.


“윽, 진짜네. 소주 따위는 범접도 못 하겠어...”


“뭐… 그래. 내가 잘못한거야. 안경잡이들도 칸센이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겠지.”


“후후, 설마가 사람 잡는다구.”


“쉿…!”


“안 마실거면 그냥 버리던가 해. 재밌는 구경 좀 하려 했더니 안 따라주네.”


-쿵!


-쪼르르르…


얀순이 겨우 한 모금 마신 글래스와 절반 정도 남은 술병을 손가락으로 밀어 넘어뜨린다.


곧 그녀의 곁에 있던 라운드 테이블과 바닥이 황금빛으로 듬뿍 적셔지고, 뉴저지의 호놀룰루는 저 얄미운 행동과 뒷처리를 할 생각에 치를 떨며 울상을 짓는다.


“어머, 미안. 실수로 흘려버렸네. 근데 내가 시간이 없어서 치우지는 못할 것 같아. 부탁할게?”


“아… 아으…”


“왜, 짜증나? 개같아? 죽여버리고 싶어?”


“흐…”


“나도 너희 셋 다 죽여버리고 싶은데 일부러 참는거야. 오빠와 정리할 일이 있으니까.”


“너희가 어떻게 행동하냐에 따라, 나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장난감, 샌드백, 쓰레기통 등이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잘 따라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얀순은 상하관계를 확실히 새겨주면서 추노당한 그녀들을 살벌하게 조롱했다.


뉴저지와 호놀룰루가 이제 공포감을 못이겨 온몸을 떨자, 강아지를 다루는 것처럼 그녀들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쓰다듬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인트루이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 순간, 


-탁!


“하, 참.”


“후후, 미안하지만 터치는 사양할게.”


세인트루이스가 그녀의 손을 살짝 세게 막아세우며 분위기를 경직시켰다.


잠시 얼타던 얀순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뉴저지와 호놀룰루는 저것이 기뻐서 나오는 게 아닌, 분노가 극도로 달해 흘리는 미소인 걸 깨닫고 패닉에 빠진다.


“아…? 뭐, 뭔 짓을…”


“리, 리비! 내가 대신 사과할게…! 이건 우리가 치울테니까 제발 용서해줘…!!”


“됐어.”


“제발… 치우게 해주세요…”


“됐다니까? 그리고 너, 계속 그렇게 개겨봐. 794에서 제일 먼저 죽을 년이 누가 될까 궁금하지 않아?”


“우리가 호의를 거절해서 많이 화났구나. 이렇게 하면 좀 누그러지겠어?”


세인트루이스가 바닥에 있던 글래스를 들어올린다.


그러고는 얀순의 눈을 정확히 주시하면서, 한번에 독한 럼을 모두 들이키며 자신이 아까 한 말을 스스로 반박했다.


얀순은 그녀로부터 비워진 글래스를 받아들어 잠시 바라보더니, 곧 광기에 찬 웃음을 터뜨리며 방금전의 소동으로 럼에 적셔진 권총을 집어들었다.


“푸흡, 푸하하하하! 이거 생각보다 더 미친년이네? 아까 네가 뭐라고 했는지 그새 잊었니?”


“후후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지.”


“아, 그래? 그럼 이것도 기억하겠네?”


-타앙!


“히익…!”


“꺄악!”


“뭘 쫄아. 9mm의 수십배는 되는 포탄을 쏴대던 게 너희들이잖아?”


굉음과 함께 한 발의 탄환이 세인트루이스와 호놀룰루의 사이를 지나며 그 너머의 침대 헤드에 박혔다.


총구와 헤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증폭시킨다. 


“미사일은 너무 아까워. 이제 이 조그마한 총알로도 죽일 수 있는데 굳이 미사일을 써야할까?”


“아, 둘은 안 마실거야? 얘처럼 핑계 댈거면, 그냥 마시지 마.


“아냐! 마실게…!”


“으응! 리비, 걱정마…!”


아직 의무를 못다한 두 장난감이 벌벌 떠는 손으로 글라스를 집어들고, 눈을 질끈 감으며 원샷한다.


75도의 알코올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온몸에 쓰디쓴 불을 지피는 느낌이 들지만, 바로 앞의 여자에 비하면 애교나 다름없다.


“쿠, 쿠훅! 우엑…”


“끄윽… 딸꾹! 너무 써어…”


“그러니까, 거기에 조용히 있다가 편하게 폭격 맞고 죽으면 될 거를 왜 힘들게 가려고 그래.”


이게 과연 친구일까, 노예일까? 그녀들은 점차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갔다.


한때 바다를 수호하며 영웅으로 추앙받던 여인들은 오빠를 사모하는 여동생의 복수에 휘말려 가축보다 못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너희 뱃속에 있는 아이들을 조카라고 해야할지, 오빠와 나 사이의 입양아라고 해야할지… 음…”


“리, 비… 아이는 제발… 난 괜찮지만 아이만은 아빠랑, 살게 해줘…”


“당연한 소릴 하네. 애들은 잘못이 없어. 있다고 해도 쓰레기 같은 엄마를 둔 것 정도?”


“...에휴, 슬슬 이것도 질려. 오빠 올 때 됐으니까 이제 너희 마음대로 해. 물론 오빠를 건드는 순간, 알지?


“잘 알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


-쾅!


-.......


얀순이 떠나자 한참 동안 흐르는 정적, 얀붕의 곁을 얻은 대신 인권을 포기한 대가는 너무 처참했다.


취기 때문인지 눈물이 흐르지도 않는다. 비관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왜 이렇게 됐나 고민할 뿐이다.


“...참, 많이 예민하시네.”


“하아… 그냥 감옥에 가는 게… 더 나을 거 같아…”


“이제 못 참겠어… 왜…”


“저 술병처럼 엎질러진 물이야. 돌이킬 수 없지. 하지만, 한 방울씩 모아 담아서 원래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만들 순 있다구?”


“또 이상한 소리 할 거면…”


“우리의 본 목적이 뭔지 잊었어? 지갑을 되찾고, 최종적으로 지휘관군도 되찾는거야. 오늘이 그 첫 걸음이 되겠지.”


“빨리 찾자… 술 때문에 너무 어지러…”


“아니면 이 취기를 빌려서 오늘 지휘관군까지 탐해도 되는 거고…”


“에?! 그, 그거는…”


“저 여자가 자기 방으로 돌아갔으면 문을 여닫는 소리가 또 났어야 됐는데, 오히려 엘리베이터 소리가 났잖아. 그러면… 후후후, 어쩌면 이건 Lucky~한 기회 아닐까?”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세인트루이스는 얀순에게 굴복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알코올에 정신을 의탁한 상태로 뒷감당 따위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그를 탐하러 가고 싶었다.


“그러면 지휘관과 오랜만에에… 그거… 하아아알 수도… 있겠네…”


“어머,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았는데🎶


“으으, 몰라아…”


“그래서, 정말 가는거야…?”


“우리의 것을 찾아야지.”


“...까짓거 하면 되지! 가자고…!”


“지갑도 찾고… 자기도 찾는다고…? 히히히…♡”


술은 근거 없는 자신감과 용기의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알코올 바다 위 의식의 흐름대로 얀순에게 뺨을 맞고 화풀이 대상으로 얀붕을 택한 그녀들. 당당한 걸음으로 얀붕의 방문 앞에 선다.


“어때, 있는 것 같아?”


“시끌벅적해…”


-똑똑똑


제일 먼저 술을 마신 세인트루이스가 거리낌없이 노크하며 얀붕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린다. 뉴저지와 호놀룰루도 취기 덕분에 이번엔 잠시 흠칫하기만 할 뿐이다.


“ㅂ, 바로 해?! 마음의 준비는 하고…”


“우후후, 프리스타일도 나쁘지 않다구~🎶


“어, 갑자기 조용해졌어…”


“우리가 온 걸 알았나 봐…”


“발소리… 점점 가까워진다…”


-철컥!


“갖고 꺼ㅈ…”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는 두 목표물. 그녀들의 얼굴에 농염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얀붕이 지갑을 조준하고 던지려던 순간, 세인트루이스가 재빠르게 문틈 사이로 발을 집어넣었고


“어라.”


“지휘관군, 많이 짓궂어졌네? 하마터면 맞을 수도 있었다구.” 


“자기…”


“뭐야?! 이건 계획에 없던 거잖아…!”


“야이, 안 놔?”


곧이어 그 사이로 팔까지 넣으며 강제개방을 시도했다. 


뉴저지도 거기에 합세하여 문을 잡아당겼고, 얀붕은 잔뜩 당황하여 지갑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 그녀들을 최대한 밀어내려고 하였다.


“아오, 좀비같은 년들…! 안 꺼져?”


“자기이… 우리, 얘기 좀 하면 안 돼애…?”


“염병하네. 빨리 나가! 어우 술냄새 씨…”


“후후후, 여동생양께서 우리한테 엄청 독한 술을 먹였다구. 그래서 취기가 가시지 않네?”


“얘는 대체 뭘 먹였길래…”


“75도… 지금도 토할 거 같아…”


“토끼는… 외로우면 죽어버린대… 자기 앞에선 블랙 드래곤이 아니라 한 마리의 암토끼가 되고 싶다구…”


“불쇼 하려고 작정했냐? 그리고 토끼는 뭔 토끼야? 경찰 부르기 전에 가. 어떻게 알고 쫓아와서 씨…”


“그러지 말고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같이 있어주면 안 돼애…? 어제 아이스크림 대신하는 걸로…”


“뭐래. 안 받았으면 끝이지! 안 놔, 이거?”


“히잉… 그런 게 어디써어…”


“지휘관님…?”


“아, 카린, 들어가! 얼른 쫓아낼게!”


“어머, 귀여운 상점 아가씨, 또 보네?”


“아… 으으으으…!!! 너희들…!! 당장 안 나가!!!!”


결국 현관의 추태를 보다못한 카리나까지 합세하여 문을 사이에 두고 2대3의 기나긴 대치가 이어진다.


현관문이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금속이 마찰하고 충돌하는 소음과, 남자 하나를 두고 여자 4명이 치고박고 싸우는 소리에 한 층이 점령당할 정도이다.


-....!!!...!


“엄청 시끄러워…”


“밥 먹는데 갑자기 뭐야…”


한편 아이들은 굳게 닫힌 방문 밖에 대한 호기심과, 아빠와의 약속을 같이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가봐야 되는 거 아니야…?”


“소리 들어보니까 싸움난 거 같아요…”


“우… 아빠 싸우다가 또 다치면 어떡해…”


“조금만 열어서 보고 다시 닫는 건 어때…?”


“안 돼! 아빠가 이건 숨바꼭질이라고 했잖아!”


“맞아! 우리가 술래한테 들키면 아빠가 잡혀간댔어!”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어, 맞네…”


“보고 싶은데…”


“숨바꼭질은 들키면 잡히는 거지, 보는 걸로는 안 잡혀!”


“그럼 열어봐…?”


“어어, 안 돼…!”


“연다? 연다? 읏…! 차!”


-끼익…


결국 아빠와의 약속을 어기기로 결론이 나고, 클리블랜드의 아이가 몸을 쭉 뻗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문이 천천히 열리면서 어렴풋이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디펜스를 펼치는 아빠와 새엄마의 모습이 드러나자 흥미로운 눈빛으로 뚫어져라 쳐다본다.


“우와, 아빠랑 카린 씨가 밖에 있는 언니들이랑 싸우고 있어…!”


“저 언니들한테 들키면 아빠가 잡혀가시는거죠…?”


“봐봐! 하늘색 머리 언니가 엄청 무서워!”


“하늘색 언니…? 어, 이… 모…?”


“엥, 이모라고?”


“저 분, 내 이모야…!”


헬레나의 아이가 한달여만에 다시 본 이모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다.


어째서 아빠랑 카린 씨가 이모와 싸우고 있는 것일까? 어린 아이에게 가족끼리 싸우는 상황은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어, 안 돼! 나가면 들킨다고!!”


“이모!”


본능적으로 몸이 뛰쳐나가고, 세인트루이스와 얀붕의 사이에 끼어들어 그 쪼그마한 몸으로 용감하게 싸움을 말렸다.


헬레나의 아이가 난데없이 끼어들자 얀붕과 세인트루이스는 잠시 얼타며 아주 짧은 휴전에 돌입했다.


“아빠, 이모랑 싸우지 마…”


“어, 어떻게 나온…”


“후후후, 우리 깜찍한 조카 아니야? 오랜만이네?”


직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몸이 들어올려진다.  얀붕이 아닌, 세인트루이스였다. 먼저 선수를 쳐 찰나의 평화협정을 깨고 새로운 목표를 자연스럽게 탈취한 것이었다.


“이모, 엄마는 어딨어요…?”


“엄마라… 이모랑 같이 엄마 보러 갈까?”


“정말요…?!”


“그럼, 엄마도 우리 꼬마 아가씨가 그립다고 이모한테 계속 말했거든.”


“어어, 안 돼! 아빠한테 ㅇ…”


-쾅!


얀붕이 당황하여 아이를 지키기 위해 손을 뻗지만, 전황을 역전시킬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그녀는 그대로 발을 빼며 문을 닫아버렸다.


손잡이를 아무리 잡거나 밀어봐도, 밖에서 무언가 조치를 했는지 열리지 않는 문에 점점 불안감에 휩싸인다.


“안 돼!! 야이씨! 안 열어?! 뭣, 얘들아, 왜 문이 열려있어?!”


“아, 그… 궁금해서 보려고 했는데…”


“아빠아… 죄송해요…”


“아이고오…! 그렇게 말했건만…!! 아냐, 우리 공주님들 아무 잘못 없어. 내가 좀 더 신경 썼어야 됐는데…! 괜찮아, 아빠 금방 갔다올테니까 카린 씨랑 마저 밥 먹고 있어!”


“지휘관님, 저도 갈게요! 일이 너무 커져서 지휘관님 혼자서는 절대 안 될 거에요…”


“아냐! 괜찮으니까 애들 밥부터 먹여. 정 나올거면 밥 다 먹이고 나와, 알겠지? 갔다올게!”


이제 두달이 막 지난 아빠의 의무 복무 중, 유괴라는 최악의 위기에 봉착한 얀붕.


가까스로 문을 열고 뛰쳐나가 복도를 살피지만, 그녀들은 애진작에 사라진 듯 카펫에 낀 먼지만 애처롭게 날린다.


“이것들이 어디로 사라진거야…!”


“엘리베이터도 안 움직이면, 계단으로 갔나?”


비상구로 달려가 바깥을 샅샅이 뒤지지만, 마찬가지로 약올리는 것처럼 썰렁한 골목만 보이자,


“아오씨 진짜…!”


“어딨어… 얀순이… 얀순이…”


결국 한 번 더 전화기를 꺼내들고, 여동생이자 상관인 얀순에게 SOS를 치며 그저 아이가 무사하기만을 빌고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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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