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여동생이 많이 아팠다.

거기다가 따돌림까지 당했으니 한 살 위인 오빠인 내가 여동생을 보호하다시피 챙겨줬다.

따돌림 시키는 놈들은 쥐어패고 친구가 없던 여동생을 위해 매일 같이 곁에 있어줬다.

그랬기 때문일까?

 

"오빠… 어디 가?"

 

적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고등학생이 날 부둥켜 끌어 앉는다.

샴푸향이 은은하게 난다.

키가 훌쩍 커 내 목까지 닿을 뿐 아니라 두 둔덕도 팔에 부드럽게 먼저 닿는다.

 

'이제 다 컸고 슬슬 부담스러운데….'

 

가족이기에 내색하진 않지만 사랑스러운 여동생이 슬슬 내게서 독립했으면 하는 마음도 드는 건 사실이다.

 

"잠깐 슈퍼 가려고."

"응! 나랑 같이 가!"

 

팔을 더욱 끌어앉는다. 남이 보면 영락없이 연인인 것 같은 행색.

 

"뭐 살거 있어?"

"음. 같이 가면서 생각하려고?"

"그래. 너 마음대로 해라."

"히히히."

 

그렇게 남매는 사이좋게 밖으로 나갔다.

이 평화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 일말의 불안감이 내게 스며들었다.

 

 

 

*******

 

 

 

이유리가 내 청명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 안은 온통 내 여동생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찼다.

중학생 떄부터 이미 모델로도 활동하고 있었고 여러 이름 있는 기획사에까지 데뷔를 약속받을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와 진짜 이쁘다…."

"우리랑 다른 종족인 듯."

"남친 있겠지?"

 

3층 창문에서 다른 반 2학년 남학생 무리들이 떠드는 걸 발견했다.

그틈에 살짝 끼어 밖을 바라보니 체육시간인 듯 배구중이었다.

그 순간. 흔들흔들.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내게 고개를 돌리며 손을 흔드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팔린 이유리에게 상대편 공이 넘어와 가슴팍에 정면으로 맞는다.

아웃됐지만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며 환한 미소를 내게 보냈다.

 

"와 방금 우리보고 손 흔든거 아님?"

"우리중에 이유리랑 아는 애 있냐?"

"그러게. 누구지?"

 

나는 잽싸게 몸을 내빼 반으로 돌아갔다.

섬뜩함.

이유 모를 긴장감이 두근두근거리며 전신을 지배하려했다.

1반에 들어가 내 자리에 앉자 앞에 있던 안경 쓴 범생이인 정수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혁아 괜찮아? 식은땀 흘리는데?"

"어? 응.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네. 후우."

 

몇 번 심호흡을 하자 맥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정수아가 걱정되는지 덧붙였다.

 

"혹시 고민 있으면 내게 말해. 들어 줄테니깐."

"고민?"

 

고민이라… 그런 건 없는데.

 

"없으면 됐고. 아니 다행이네."

"언제부터 내 걱정을 그리 했다고 짜식이."

"……."

 

정수아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본다.

참 신기한 인연이다.

어떻게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같은 반에 걸리는지.

누가 보면 컴퓨터를 조작한 줄 알겠네.

 

 

 

********

 

 

 

이유리에게는 간곡한 부탁으로 학교에선 아는 척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이런 평범할 뿐인 오빠에게 눈에 넣어도 안아플 눈부신 여동생이 있다면 벌써부터 주변에서 소개 시켜달라고 난리일 것이다.

이유리는 한숨을 푹 쉬며 말했었다.

 

"대학생 때까지만 참을 거야. 참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참아준다니 참 착하고 고마운 여동생이다.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후후"

 

이상한 말까지 덧붙이진 말고. 괜히 불안하잖아.

아무튼 장안의 화제였던 여동생이 입학하고 난 후 누가 고백했네란 소문이 계속해서 퍼졌다.

그 중에서는 나도 깜짝 놀랄만한 인물이 있었다.

생각이 동시에 일치했는지 다른 학생들 입에서 그 애기가 나왔다.

 

"오늘 임현석 고백 한다던데?"

"재벌집 막내아들이 이번엔 단단히 꽂혔대."

"아무리 이유리라도 개 고백을 못 거절할걸."

 

'임현석이 우리 여동생한테?'

 

재벌집 집안에 키도 크고 얼굴도 잘생겨서 인근 여학교에서는 팬클럽까지 있는 모양이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참 부러운 인생이다 라고 생각했다.

근데 그런 녀석이 우리 여동생한테 고백한다고?

 

'갑자기 재벌집 사위가 생긴 느낌인데.'

 

여동생의 연애사까지 내가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었다.

이유리도 다 컸고 누가 누굴 사귈지는 순전히 본인의 선택이니깐.

하지만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현관문에서 이유리를 기다렸다.

방과 후 고백한다고 하니 조금 늦을 거라고 생각……

 

"다녀왔습니다~! 어? 오빠! 나 기다렸어!?"

 

이유리는 가방도 내리지 않고 폴짝 뛰어올라 내게 안겨들었다.

나는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이유리가 내 볼에 얼굴을 부비부비거렸다.

 

"오빠가 날 기다려주다니! 무슨 일이야? 기분 너무 좋아!"

"자,잠깐만 유리야. 잠깐 떨어져봐."

 

가느다란 팔인데 힘이 얼마나 쌘지 안간힘을 써 겨우 떼어놓았다.

 

"응응. 왜?"

"사실 오빠가 궁금한 게 있어서 기다린건데…."

"궁금한 거?"

 

일단 거실 쇼파에 앉아 넌지시 물었다.

 

"오늘 고백 받았지?"

"고백? 늘상 받는건데 그건 왜?"

 

이유리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늘상 받는 것중에 말고 오늘 특별한 녀석이 있었을 거 아니야?"

"무슨 말이야? 진짜 모르겠는데."

 

답답해진 난 결국 꼭 집어 말했다.

 

"임현석. 키 크고 얼굴 잘생긴 놈. 오늘 방과후에 너한테 고백한다는데…."

"아, 그 사람 이름이 그거였어? 후후."

 

갑자기 의미심장하게 웃는 이유리.

 

"무슨 바람이야? 혹시 내가 누굴 사귈지 걱정돼고 불안하고 막 이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결과가 궁금해서."

"거절했어."

 

바로 단칼에 대답하는 이유리.

 

"그야 사귈 이유가 없으니깐."

"그렇구나…."

 

임현석도 거절당할 정도면 우리 여동생이 진짜 눈이 높긴 높구나.

이러다 평생 노처녀로 살다 죽는 건 아니겠지?

이유리가 날 째려봤다.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내 생각이 보였나?

 

"넵."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 이미 있으니깐 거절한 거야. 딴 이유는 없어."

 

이유리는 그 말을 하고 가방을 들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철컥.

 

"하하. 난 또 뭐라고.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거절…… 엥?"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어떤 씨발놈이 우리 여동생 마음을…… 아니지. 내가 관여할 건 아니지…."

 

간섭은 오지랖이기 때문에 정말 꼴불견스러운 행동인 건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놈 자식 얼굴 한 번 보고 싶네. 눈 진짜 높은 우리 여동생 마음을 어떻게 훔쳤대?"

 

대체 누굴까.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함 물어볼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포기하자.

그리고 여동생의 사랑이 이뤄지길 응원해주자. 라고.

 

 

 

******

 

 

 

처음엔 소문만 들었다.

모델 출신이야 발에 채이도록 봤었다.

여자친구로도 몇 번 사귀어 봤었고.

 

"진짜 상상 이상인데…."

 

이유리를 처음 본 순간 임현석은 시간이 멈춘 듯한 경험을 했다.

이쁘다를 넘어서 이유리만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듯 보였다.

 

"무조건 내꺼로 만든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치고 내 소문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 중에는 내가 고백하자 사귀고 있던 남친도 차버리고 내 밑으로 들어왔다.

 

"큼. 왜 이렇게 긴장이 돼지?"

 

여자 앞에서 긴장이라니.

임현석은 스스로 꼴갑을 떤다고 자조하며 학교 옥상으로 올라갔다.

옥상문을 열자 이유리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게 아닌가?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임현석은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5시였다.

 

"엥? 딱 맞춰서 왔는데…"

"빨리 가야 한다고요. 그리고 다음부턴 편지로 하지 말고 톡으로 해요. 답장을 못하니 시간 낭비잖아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임현석은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화가 난 여자라도 자신의 웃음을 보면 모두 화를 멈췄으니깐.

그런데.

 

"미안하지만 고백은 거절할게요."

"뭐,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미안해요."

 

이유리는 정말 바쁜지 자기 할말만 하고 옥상을 내려가려했다.

임현석은 순간 얼이 나갔다가 이유리를 다급히 멈추려고 외쳤다.

 

"조,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 진짜야? 누구야? 누군데 날 차고 그놈을 좋아하는 건데?"

"…그놈?"

 

이유리가 고개를 돌리자 정말로 무서운 얼굴로 임현석을 노려봤다.

 

"말 조심하세요. 당신."

"어,어… 미,미안해."

"당신보다 백 배, 천 배는 멋진 사람이니깐 그만 절 포기하세요. 알았어요?"

 

그리고 임현석은 이유리의 눈빛을 봤다.

어떤 형상을 그린 듯한 깊은 심연의 동공.

불그스레해진 볼.

그것은 사랑하는 여자의 표정이었다.

무섭도록 말이다.

 

"……."

"흥. 시간 낭비했네."

 

쾅!

옥상문이 닫히자 임현석은 실소를 했다.

 

"내가 차이다니. 이 내가……."

 

이유리가 한 말을 돌아보았다.

말하는 어투로 본건데 혼자 짝사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대는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상대일 것이다.

 

"어떤 새끼인지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찾아봐서 조져 놔야지. 크크."

 

임현석의 속이 불길로 타오르는 사이 옥상에 새로 설치된 작은 cctv 한 대가 임현석을 조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