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댕동-)

드디어 7교시가 끝났다.

하지만 교실 안엔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는 애들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나도 교실에 남아 방과후 시간에 풀 문제집이나 꺼내고 있고.

'잠깐 바람이나 쐬러 가자'

그렇게 생각하며 교실을 나갔을 때 얀순이가 말을 걸어왔다.

"얀붕아 너도 바람쐬러 나왔어?"

"어. 공부하기 전에 잠깐만 있으려고"

주변엔 우리처럼 대화하는 학생들이 없다.

공부하느라 바쁘기도 하겠지만 서로를 친구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니까.

우리 외에는 대화하는 애들이 없는 것도 이해가 간다.

중학교 동창이라곤 해도 얀순이와 내가 이렇게 친하게 지낸다는 것은

이 학교에선 특이한 일이다.

사실 이 점에 대해선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얀순이와 친하게

지내라고 밀어주던 엄마의 영향도 꽤 크지.

"얀붕아"

"어? 어.. 왜?"

"괜찮아? 많이 피곤해보이는데?"

"아.. 괜찮아 평소랑 비슷해"

"얀붕이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만..."

괜찮아.

중학교 때도 몇번인가 피곤할 때는 있었으니까.

"얀순아. 슬슬 종 치겠다. 들어가자."

"응, 너무 무리하지는 마."

"응."

저 녀석은 이럴 때도 나부터 걱정한다.

(딩동댕동-)

저번 모의고사는 성적이 잘 안 나왔지만 다음 시험을 잘 보면 돼..

그래. 아직 괜찮아.


"휴- 드디어 끝났네, 어? 얀붕아!"

얀순이가 멀리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온다.

"얀순아. 지금 집 가는거야?"

"응! 얀붕이 네 집도 우리 집 방향이지? 같이 타고 가자."

얀순이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가 타고 갈 차를 가리켰다.

제네시스에 전속 운전기사라니, 고등학생 등하교에 써주는

지원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호화롭다.

"아.. 난 괜찮아. 학원 가야 해서."

"학원?"

얀순이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진다.

"그게 무슨 소리야? 수요일은 학원 없지 않았어?"

"그게.. 저번 모의고사 성적이 잘 안나와서 엄마가 새로 끊어줬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응. 내일 봐."

나는 얀순이에게 짧게 인사하고 학원으로 갔다.


얀붕이가 수요일에도 학원을 가게 되었다?

주말 빼고 유일하게 학교에서 나와서 

얀붕이와 둘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얀붕이가 공부하는 걸 방해하고 싶진 않은데..."

이대로 둘이 함께하는 시간이 적어지는 건 싫어.


학원은 새벽 2시가 넘어서야 끝났고 

나를 포함한 학원의 학생들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나왔다.

집에 돌아가면 곧바로 씻고 잘 계획이었는데...

"얀붕아. 여기 잠깐 앉아봐라."

엄마가 완전히 다운된 목소리로 부른다.

"학원은 어땠어? 거기 강사가 잘 가르친다고 해서 보내봤는데."

"아.. 응 그럭저럭"

"그럭저럭? 수업, 제대로 들은 거 맞아?"
너무 졸려서 나도 모르게 실언을 했나 보다.

그런 건 상관없어. 어쨌든 지금은..

자고 싶어...

"저번 모의고사도 망쳐놓고 왜 그렇게 위기감이 없어!?

엄마는 너 모의고사 성적 받고부터 네 걱정 하느라

한숨도 못 잤는데..! 왜 너는 그렇게 태평한 거야!"

그 뒤로도 엄마의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새벽.. 몇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의 잔소리가 끝나자

나는 침대에 뻗어버렸다.


"얀붕아~ 일어나! 학교 가야지."

아.. 벌써 아침인가?

"뭔 잠을 그렇게 오래 자? 얼른 아침 먹어.

공부하려면 배가 든든 해야지."

"응."

아..! 엄마의 밥은 언제나 맛있어.

"얘가, 천천히 먹어. 체할라."

밥을 거의 다먹으니 엄마가 말을 걸었다.

"엄마는 우리 아들 믿고 있으니까 공부 열심히 해~ 알았지?"

"응.. 알겠어."

"잘 다녀와~ 사랑해~"

엄마가 배웅해 줄 때는 가끔씩 창피할 정도다.

"응. 다녀올게."


학교에 가자 얀순이가 말을 걸어왔다.

"얀붕아 주말에 혹시 시간 있어?"

이건 설마 데이트인가??

"응 이번 주말엔 딱히 아무 일정 없어."

"잘 됐다! 우리 집에서 스터디 할래?"

"아... 스터디? 그, 그래"

"?뭔가 예상을 못했다는 반응인데~?

혹시 무슨 딴 생각 한 거 아니야~?"

"아니야!"

"치이. 그럼 말고."

가끔씩 이 녀석이 나한테 장난칠 땐 기분이 묘하다.

"그럼 토요일에 1시까지 우리 집에서 봐~"

"응. 그래."


(딩동댕동-)

드디어 7교시가 끝났다.

하지만 교실 안엔 책가방을 메고 집으로 가는 애들이 보이지 않는다.

당연히 나도 교실에 남아 방과후 시간에 풀 문제집이나 꺼내고 있고.

'분명히 얀붕이는 오늘도 복도에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복도로 나갔을 때 

얀붕이가 책가방을 메고 가는 뒷모습.. 이 보였다?

"얀붕아! 어디 가?"

"아.. 얀순아. 엄마가 지금 내려오래. 급한 일이 있다고. 

선생님들에게 말씀드리고 가는 중이야."

"그렇구나.. 그, 급한 일인가 본데 잡아서 미안..!"

"아냐 괜찮아. 내일 보자. 안녕."

"그래.. 안녕."

그렇게 말하고 얀붕이는 떠났다.


대체 무슨 일일까?

얼굴을 보면 얀붕이도 짐작이 안 가는 눈치던데.

내일 물어볼까.


"어? 정말이야 엄마?"

"그래, 너 목요일에는 방과후 하지 말고 바로 집으로 와."

"근데.. 왜?"

엄마가 갑자기 말한 얘기는.. 충격적이었다.

"김ㅇㅇ선생님 알아? 서울대 출신에 애들한테 공부도

잘 가르쳐서 이 동네 대입 준비하는 엄마라면 다 알고 있어.

오늘 아침에 얀돌이 엄마하고 얘기해보니까 그 선생님이랑

아는 사이더라? 그래서 내가 정말 사정사정을 해서 네 과외

선생님으로 불렀지. 앞으로 목, 토, 일 이렇게 3일은 과외 할거니까

목요일엔 7교시 끝나고 바로 집으로 와. 다행히 학원차 오기 전까지로

시간 조정해 주셨으니까 학원은 그대로 갈 수 있겠어."

주말에도.. 과외를

"생각해보면 엄마가 너~무 무신경했던거 같아.

요즘 주말에 과외나 학원 하나 못보내는 엄마가 어디 있다고. 하하."

"엄마, 나 주말에는 얀순이랑..."

"응? 얀순이가 왜?"

지금 엄마한테 이걸 말하면.. 어떻게 될까.

분명.. 엄청 화를 내겠지. 핸드폰도 뺏길거야.

"아, 아니야 엄마."

"얀순이랑 싸웠니? 친하게 지내라니까~ 전교 1등인 애를

친구로 둬야 네 성적도 오르지. 중학교 때 얀순이 전학오고

같이 공부하면서 성적도 많이 늘었잖아."

"응..."

오늘은 뭔가.. 정신이 어지럽다.


금요일 아침, 얀붕이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다.

머리가 어지러워보인다.

나는 얀붕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얀붕아 무슨 안 좋은 일 있는거야?"

"아.. 얀순아. 그게 사실은..."

이런 때라도 얀붕이의 힘이 돼주고 싶어.

"응, 무슨 일이야?"
"우리.. 토요일 약속 취소 해야 할 것 같아."

"뭐?"

"과외 선생님 한 분이 새로 오셨는데, 목요일, 토요일, 일요일

이렇게 세 날은 과외를 받아야 해서 시간이 안 나서. 미안해."

"그, 그래도 하루 종일 과외를 받는 건 아닐거 아냐?! 시간을 

바꿔도 안 되는 거야?"

"응.. 주말에 과외 받고 남는 시간에는 어디 나가지 말고

집 안에서 운동 좀 하라고 하셔서.."

"그거라면 우리 아파트 안에 있는 헬스장 이용해도 되지 않아?"

"엄마가 이동시간도 아깝다고 하셔서 필요한 건 다 사줄 테니깐

무조건 집 안에서 하래."
그럴수가...

난 주말에 얀붕이를 만나기만을 기다려 왔는데...

게다가 앞으로는 아예 만날 시간이 없어지는 거잖아?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나는 밖으로 나와 전화를 걸었다.

"저, 아버지? 말씀드릴 게..."


지긋지긋한 야자가 끝나고 나오자 교문에서 얀순이를 만났다.

"얀붕아.. 학원 가는 거지?"

"응."

"내가 태워다 줄게."

"뭐? 태워다 주겠다니?"

"금요일 학원차는 꽤 늦게 오지 않아?"

얘는 가끔 보면 나에 대한 사실을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아.. 응. 맞아. 좀 멀리 있다 보니까."

"금요일에는 나랑 같이 타고 가는 게 더 빠를거야."

"그치만..."

여기선 고맙게 받자.

"음.. 고마워."

"뭘 이런걸로. 어서 타."

얀순이가 활짝 웃는다.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얀순이와 차를 타고 가던 도중 평소 가던 길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랑 얀순이가 나왔던 중학교...

나도 모르게 '그 얘기'를 꺼내 버렸다.

"여기서 시내 쪽으로 30분만 걸으면 나무도서관 나왔는데..."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중학교 때 일은 서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별거 아니야. 나무도서관에서 몇 번 만났던 여자애가 생각나서."

얀순이가 있는데 다른 여자 얘기라니. 나도 참.

"뭐야~ 나랑 같이 있는데 다른 여자 생각을 한거야~?"

"에이, 진짜 별거 아니야. 몇 번 보지도 못했고

만났을 때에도 별 관심 없었다고."

"아."

?

얀순이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래.. 그렇구나."

내 변명이 먹히지 않은 건지 얀순이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태워다줘서 고마워. 얀순아."

"아니야.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학원에 도착하자 인사말을 던졌지만

얀순이의 태도는 여전히 쌀쌀맞았다.

"그, 그럼 난 이만 들어가볼게?"

나는 급히 학원으로 들어갔다.

내가 들어간 후 바로 수많은 학생들이 들이닥쳤다.

뭐야. 빙 둘러서 오는 바람에 도착 시간은 비슷하잖아.


금요일 학원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너무 피곤해서 핸드폰에서 울리는 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일.. 아니 새벽이니까 오늘도 과외 받아야 해...

자자...


"후아암~"

토요일 아침.

누군가 밤 사이 안마라도 해주고 간 것처럼 몸이 개운하다.

하지만 주말에 과외를 받고 운동을 하면서 

그 기분은 곧장 날아갔다.

'원래대로였다면 지금쯤 얀순이와 대화하고 있을 시간인데.'

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쉬는 시간에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읽지 않은 메세지 170건이 있습니다.>

170건?

대체 누구한테서?

확인해보니 모두 얀순이에게서 였다.

내용도 모두

"나무도서관에서 만났다는 여자.. 기억이 안난다는 건 거짓말이지?!"

"분명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 했을 거잖아?!"

"얀붕아 그 여자 정말로 기억 안나?"

이런 내용이었다.

...대체 뭐지?

대체 왜 그 여자애 얘기를 궁금해 하는거야?

얀순이의 질투가 이렇게 심한 줄은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심하면 무섭잖아...

결국 그 날 동안 얀순이의 문자들은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토요일 날 밤 모든 일과가 끝나고 잠에 들려 침대에 눕자

문득 나무도서관에서 만난 그 아이의 일이 생각났다.


중학교 2학년 봄에 아주 잠깐 만났던 여자애일 뿐이다.

나이는.. 아마 내 또래 정도일 거고, 머리는 노랗게 물들였었지만 

그 외엔 딱히 눈에 띄는 부분도 없었다.

굳이 따지면 늘 마스크를 쓰고 와서 

얼굴은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다는 정도였다.

그에 비해 그 당시에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꾸미고 다녔다.

키는 평균을 밑도는 주제에 커보이고 싶어서 키높이 깔창을 사용하고

유행을 따라하겠다고 부모님한테 무리할 정도로 명품을 사달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하면서 살아왔으니까, 그 정도는 당연히

요구해도 괜찮은 줄 알았었지.

주말마다 도서관에 들른 것도 분명 그런 비슷한 이유에서 였을거다.

당연히 멋 부리려고 가는 거니까 내가 읽기 쉬운 책보다는

그냥 어려워보이는 책 좀 골라보다가 도저히 이해가 안되서

바람 좀 쐰다는 명목으로 밖에서 시간 때우고 집에 가는 그런 생활.

그런 생활을 하던 중에 나처럼 매주 도서관에 오는 애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침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내려는데 팔이 안 닿는 걸

보고 책을 꺼내준 게 첫 만남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분명 착각이겠지만 얀순이와 목소리가 꽤 닮았던 것 같았다.

그 이후로도 우린 많은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주말마다

도서관에서 만나 늘 옆자리에서 책을 읽었다. 서로 딱히 나눌 얘기도

없었고 그냥 조용히 옆에 앉아 있는 그 느낌만으로 좋았다.

가끔씩 내가 초코우유를 사다주면 고맙다고 말하는 게 대화의 전부.

그 때는 엄마가 잠깐 공부에서 풀어준 시기라 내게도 마음의 여유가 있었다.

만날 때마다 노랗게 염색한 부분이 적어지고 있었다.


그 애와 만나고서 두세 달 정도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김얀붕. 이리 와봐."

엄마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너 기말 성적 나왔지? 줘봐."

"아, 맞다. 응."

이때까지는 별로 화나지 않은 건 줄 알았다.

그 이전엔 엄마가 성적 갖고 화낸 적은 없으니까...

"얀붕아."

"응?"

"성적이 이게 뭐야. 어? 중간고사 때보다 더 떨어졌네?"

"아.. 그거, 으응."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 이번주부터 주말에 학원다녀."

"어? 지, 지금 다니는 걸로 충분한데..."

"충분해서 성적이 떨어졌어? 잔말 말고 다녀, 성적 오르면

주말엔 학원 빼줄테니깐."

"아, 주말 말고 평일에! 평일에 차라리 하나 더 다니면 안돼?"

"평일엔 이미 시간 꽉 찼잖아. 평일에 다른 시간 학원은 못 찾아.

그리고! 잠 잘 시간은 줘야 네가 키가 커지지?"

참 나. 그걸 알면서 학원을 그렇게 보내나?

"아 그래도,"

"엄마 말 듣기 싫으면 엄마가 너한테 사준 옷들 다 내놔!"

이변은 없었다.

결국 난 주말에 그애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서

몰래 학원을 빠지고 나무도서관에 찾아갔다.


그 애를 보고 옆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도저히 말을 꺼낼

자신이 없었다.

내가 갑자기 그런 말 해도 되나?

말을 많이 섞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 애가 잠시 나간 사이 나는 혼자서 끝없이 고민했다.

말할까? 말하지 말까?

고민하던 도중 그 애가 손에 뭘 들고 왔다.

"저.. 이거 드세요."

내가 가끔씩 그 애에게 사다준 초코우유였다.

"고마워. 이, 있잖아."

"?"

나는 그 애한테 상황을 설명했다.

성적이 안 좋아서 주말에 학원을 가게 되서

여기서 더는 못 만날 지도 모른다고.

급한 마음에 횡설수설하며 설명이 잘 되지 않았다.

그 애는 조용히 내 말을 듣더니 내가 말을 마치자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만날 수 있어서 좋았어요. 혹시

괜찮다면 어느 학굔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카중학교에 다니고 있어."

그 말을 마치자 바로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너 지금 어딨어! 학원을 첫 날부터 빠져?

당장 학원으로 튀어가!"

나는 결국 그 애한테 마지막 인사를 하고

학원으로 곧바로 달려갔다.


그 뒤로는 학원에 치여 살았다.

3학년이 될 때까지 성적이 오르질 않아서

학원에서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그리고 3학년때에 얀순이를 만나면서 극적으로

주말 학원을 탈출했다.

외모가 워낙 뛰어나서 인기가 많은 얀순이였지만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수준으로 나를 챙겨주는

일이 많았다.

얀순이의 요구로 같이 스터디를 한적도 있었는데

학년 초에 전학 온 애가 그렇게 공부를 잘할 줄은 몰랐다.

덕분에 엄마도 고등학교 들어갈때까지는 날 풀어주기로

하셨다.

그 인연이 고등학교까지 이어질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문자들을 보기 전까진 얀순이에게

그런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했다.


월요일 아침.

얀순이가 하루 종일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토요일 이후론 문자 한 통 안 온다.

어쩌면 그렇게 서먹서먹해지는 수준에서 끝...

날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지.


얀순이가 말을 걸지 않은 지 5일째.

야자가 끝나고 집으로 가자 새 과외 선생님이 계셨다.

엄마, 그리고 얀순이와 함께.

"엄마? 오늘 과외 하는 날 아니야? 왜 얀순이가 여깄어?

과외 선생님은 어디계시고?"

"그게.. 김 선생님이 오늘 갑자기 더 이상 못하겠다고

연락하셨거든.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엄마도

당황했는데 마침 얀순이가 과외를 같이 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면서 소개해주신분이 워~낙

뛰어난 분이시더라고."

엄마의 말이 끝나자 새 선생님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과찬이십니다. 저는 그냥 학생들이 자기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한 것 뿐입니다."

"어머, 겸손도 하셔라~"

엄마와 새 선생님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지금껏 저분 과외 받고 sky못 간 애들이 없대.

너도 열심히 해, 응?"

"제가 좀 전에 말씀드린 조건 말인데, 혹시

생각해보시고 괜찮으신지..."

"아유, 물론 괜찮죠."

"조건이라니요?"

반사적으로 나온 내 말에 엄마가 대답했다.

"과외 장소는 바꾸기가 어렵다 하셔서 얀순이

집에서 진행될거야. 주말에 운동도 얀순이네에서

하기로 했어."

엄마의 말을 보충하듯 얀순이가 말을 이었다.

"이동은 우리 쪽 기사님이 해주실거고.

시간은 반드시 지킬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으실 거에요."

"우선 오늘은 잠깐 소개만 받고 오는거야. 알겠지?"

엄마가 답을 재촉하듯 묻는다.

"응."


나와 얀순이, 새 선생님은 함께 얀순이 집으로 향했다.

가는 도중엔 우리 셋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얀순이의 집에 도착하고서 나는 새 선생님에게 잠시

공부 계획을 전해듣고 짧게 수업을 받았다.

확실히, 실력은 굉장히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수업이 끝난 뒤 얀순이는 새 선생님을 배웅해주고

나와 함께 다시 내 집으로 가기로 했다.

"얀붕아 괜찮지? 데려다주는 정도는."

"그래. 별 문제 없지."

집에 돌아가자 엄마는 수업의 감상을 물어봤다.

"그래서, 새 선생님은 어땠어?"

"엄청 잘 가르쳐주시더라. 최고였어."

"어머, 그 정도야? 잘 됐네! 다음 모의고사는 

잘 볼 수 있겠는걸?"


오랜만에 푹 잔 것 같다.

금요일 아침이 너무 상쾌하다.

학교에 가자 얀순이가 서 있었다.

그랬지. 원래 이게 일상인데.

"얀붕아~같이 올라가자."

"그래, 뭔가 오랜만이네."

나와 얀순이는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같이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던 중 얀순이가 말을 꺼냈다.

"그런데 얀붕아. 나무도서관에서,"

"그 얘기를 왜 해?"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나도 별 관심없는.."

"얀붕아."

내 말을 얀순이가 끊었다.

"그 여자애도 널 잊었을까?"

? 날 잊었을 것 같냐고?

"그, 그게 무슨소리야 얀순아..."

"어쩌면 너랑 달리 그 여자애는 아직

널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소리야."

얀순이의 이해할 수 없는 말은 

학교 종소리에 끊어졌다.

(딩동댕동-)

"이런, 늦었다 빨리 가자 얀붕아."

"응.."


토요일 과외를 받기위해 얀순이

집에 간 나는 얀순이에게 금요일의

말에 대하여 물어봤다.

"얀순아. 그 여자애는 아직 날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의 의미야."

"그애에 대해서 뭔가 아는거야?"

"너랑 같은 중학교 출신이라는거?"

우리 중학교에 그 애가 있었나?

"모르겠다면 됐어. 너도 그 애랑

별 사이 아니랬잖아."

"응.. 그렇지."

그렇게 대화하던 중 새 선생님이 들어왔다.

"과외를 시작해볼까?"


얀순이와 같이 과외를 받으며

느낀 것들은 우선 얀순이와 나의

지식이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차이난다는 것이었고 두번째로

얀순이가 최근엔 스트레스가 좀

생겼다는 것이다.

첫번째의 경우는 과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두번째는 가끔 얀순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하는 행동을 보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얀순이와 두 달 넘게 같이

과외를 받고 있는 상황에도

스트레스의 근원은 찾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내 성적은 계속

올라 다시 중학교 시절 만큼

상승했고 덕분에 엄마와

합의를 봐서 학원을 빠지게 되어

과외를 하지 않는 날에는 

야자만 하고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얀순이는 점점 나에 대한

집착이 심해졌다.

학교에서도, 과외를 받을 때도 같이

있는데도 아직 부족하다는 듯이

하루에만 몇십 번씩이나 전화와 문자를 해온다.

가끔씩 피곤한 기색을 조금이라도 내보이면

"얀붕아 나랑 대화하는게 피곤해?"

라고 말하곤 한다.

확실히 나도 얀순이가 좋고

여러 도움을 받긴 했지만 이건 좀

심한거 아닌가?


잠시 밥을 먹는 사이에 얀순이에게서

문자 40통이 와있는 것을 보자 나는

결국 얀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얀순아 이건 아닌거 같아..."

나는 이 일에 대해 얀순이에게

말하기로 했다.

"얀붕아 나랑 같이 과외받으면서

성적도 오르고 그것 덕분에 학원도

안 나가도 되잖아. 근데 문자 몇 통도

답장을 못해주겠다는 거야?"

"미안해.. 그래도 가끔씩

피곤할 때에도 답장을 못하면,"

"피곤?"

얀순이가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넌, 나랑 얘기하는 게 피곤해?"

"아니, 내 말은 그럴 때도 있다는 거지..

예전엔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잖아."

내 말을 듣고 얀순이의 분위기가 바뀐다.

"그렇네. '그 때'는

서로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참 행복했는데. 늘 옆에 있었으니까."

얀순이가 거기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고선 나에게 물었다.

"얀붕아. 너가 중학교 때 나무도서관에서

만났다던 여자애 말이야. 늘 너가 초코우유를

사다 줬지만 마지막은 그 애가 사다 주지 않았어?"

이 말을 들었을 때 다음 말이 바로

예상이 갔다.

그래서, 내가 먼저 물었다.

"혹시 너, 너가 그 여자애야?"

"그래, 맞아. 네가 아직도 기억하고있는

그 여자애가 나야."

스스로가 한심했다.

왜 알아보지 못한거지?

내가 고민에 빠진 사이

얀순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불안하지 않았어.

너와 늘 같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조금만 눈을 돌려도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지고,

그래서 생각해봤어.

예전에 느낀 것처럼 네가 늘

내 곁에 있다면 해결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소리야? 얀순아..."

"내일부터, 우리집은 오지 않아도 돼.

내일부터 천천히 너는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걸 알려줄테니깐."

얀순이는 그렇게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다.


얀순이의 그 전화는 진심이었던 것 같다.

얀순이는 다시 나와 서먹한 사이로 돌아갔고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고

어머니에겐 새 선생님의 개인 사정으로 과외를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다시 내 학원을 찾아보러 다녔고

나는 다시 다른 학생들처럼 야자까지 남아서

공부하고 끝나고서도 학원에 가게 되었다.

더군다나 이전과는 달리 내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주말도 학원에 반납해야 했다.

그럼에도 성적은 잘 나오지 않았다.

분명 얀순이와 과외할때보다 빡센데...

머리는 그때보다 퇴화된 느낌이다.

다시 한 번 더 얀순이와 과외를 해본다면...

내게는 이런 생각에 저항할 의지도 없었다.


수요일 아침에 얀순이의 반을 찾아갔다.

얀순이를 포함한 몇 명이 자습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얀순이한테 뭘 말하기 힘든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결국 문을 두드렸다.

얀순이네 반 애들이 소리에 반응해 내 쪽을

쳐다봤지만 그것보다 빠르게 얀순이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열고 말했다.

"무슨 할 말 있어?"

나는 결심하고서 말했다.

"너랑 다시 한번 더 같이 과외하고 싶어."

"과외는 선생님 개인사정으로 취소된 걸

왜 나한테 말해?'

"과외가 아니라도 너랑 같이 공부할 수

있으면 상관없어. 나는.. 너랑 같이 공부하고

싶은거야."

"..."

된건가?

"그럼 앞으론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거지?"

"응"

"문자 보내면 답장도 제대로 하는거고?"

"응."

"내 말에 절대 거역하지 않을 거지?"

"그럴게."

얀순이는 나에게 원하는 것을 하나하나

말했고 나는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나는 얀순이가 곁에 있어야만

공부도, 마음도 여유가 생길테니까.

얀순이는 내 말을 듣고서 싱긋 웃고서

"좋아. 과외든 무엇이든 간에

늘.. 옆에서 같이 하는 거야."

라고 말했다.


그 날 야자를 끝내고 교문을 나서니

차에 탄 얀순이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랑은 얘기 잘 됐어. 내일부터는

7교시가 끝나면 바로 나랑 같이 

우리집으로 가면 될 거야. 그리고 주말도

나랑 같이 과외할거야."

"응, 고마워."

얀순이는 내 얼굴을 한번 살피더니 말했다.

"피곤하지? 얼른 타. 얀붕이 네 집도 

우리 집 방향이니까 같이 타고 가자."

"고마워."

그렇게 말하고선 얀순이의 옆에 앉았다.

내가 앉자마자 얀순이는 나에게 몸을 밀착해온다.

하지만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얀순이의 옆에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여유롭게 즐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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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글이라 부족한 점이 많네.

그래도 재밌게 봐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