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저 조용한 소년이었지.
반에서 아무런 말도 소리도 없이, 핸드폰이나 책이나 들여보고 있는. 어쩌면 고지식하게 느껴지는 남자.
창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스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책에 몰두하고 있는 널 나는 처음엔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했어.
우리가 처음 대화한 날을 기억해?
원치 않게 같은 조가 됐고. 다른 아이들과 떨어졌던 난 궁시렁거리며 너와 대화했었어.
그래도 넌 그 어려운 일들을 곧장 해나가며 나를 가르쳐 주었지.
그때, 나는 너를 멋진 사람이라 생각했어.
물론 그 때까지만 해도. 그냥 공부 좀 잘하는 범생이라 생각했었지만.
그 이후로 너와 접점이 늘었지.
나는 너에게 부쩍 질문이 늘었어.
모르는 일이 있으면 너에게 갔지. 시시콜콜한 대화도 나누고.
너는 그런 나에게 싫은 티 하나 내지 않고 답해줬고, 그런 네가 참 좋았어.
너와 대화를 할 수록. 분명 관심이 없던 너였는데. 너는 내 한 구석에 조금씩 색을 물들이고 있었어.
마치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처럼, 기분 좋게.
크리스마스가 됐을 무렵엔, 이미 내가 널 보는 시선이 달라져 있었어.
너의 모든 것이 멋있어 보였고, 잠깐 안경을 벗은 그 맨 얼굴조차 멋있었지.
그리고 난 네게 고백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어. 케이크를 연습하고 있었고, 어떻게 너에게 편지를 전할까 고민하고 있었지.
애들은 내게 '왜 그런 놈을 좋아하냐며' 말했지만. 내 마음은 변치 않았어, 아니 확고해졌지.
크리스마스 이브. 난 너에게 갔어, 실패한 끝에 어렵사리 만든 컵케이크를 들고.
너는……, 다른 여자에게 고백을 받고 있었지.
그 여자 애. 그래 맞아, 너에게 질문을 할 때면 가끔 보이는 애였어.
언제부터 널 좋아했는진 모르겠지만. 딱히 눈에 띄지도 않는 애였으니까 신경도 안 썼는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처음엔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어.
네가 그 여자의 마음을 받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넌 아무 생각 없이 그 여자의 손을 잡았지.
그러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내가 조금만 빨랐다면.'.
근데 세상은 네가 즐겨 읽는 판타지 소설이 아니니까.
되돌릴 수 없으니까, 신비한 힘이 있는 게 아니니까. 내가 너를 갖기 위해 납치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고작 말 없이 조용히 네 뒤를 따라가는 게 전부였어.
그 여자와는 헤어져선, 넌 혼자 집으로 가고 있었지.
그리고 갑작스러웠어. 골목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널 친 것은.
너는 그대로 튕겨나가 벽에 부딪쳤지.
그리고 벽에 기대어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어.
신음 소리를 내며, 자신이 사람을 쳤다는 것에 놀란 트럭 기사는 허둥대고 있었고.
나 역시 그 상황에 무척 당황하고 있었지.
그래도, 네가 죽으면 모든 게 의미가 없으니까.
너는 병원으로 나와 향했고, 곧 의사는 너의 부모님께 말했어.
"일시적인 기억 상실입니다. 다시 떠오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장담을 하지 못한다는 듯 말한 의사의 말.
나는 네가 어떤 기억을 잃었는지, 그게 너무 궁금했어.
그리고 병실로 향한 나에게 너는 말했지.
"오늘은 며칠이야?"
이미 크리스마스가 지나선, 3주나 흐른 상황.
눈 내리던 1월의 병실에서, 넌 나와 대화를 나눈 순간 밖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했어.
그리고 이브의 기억은 없다고 했지.
그 여자를 떨어트리는 건 어렵지 않았어.
친구들도 날 도와주었지, 딱히 반기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소설과 같아. 기적이 일어난 거야.
'너만의 시간이 되돌아간 거지.'
…이번에는 늦지 않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