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누군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

아직 잠이 덜 깬 몸을 이끌고 거실로 나갔다. 남자가 냄비와 팬을 이용해 무언가 만들고 있었다.

자취만 4 년 차인 남자가 간단하게 아침을 차린다. 외국인인 여자의 입맛을 고려한 맵지 않은 맑은 국과 반찬이 보인다.

여자가 남자에게 감사를 표하려 휴대폰을 찾지만 보이지 않고, 잠시 망설이더니 어색한 한국말로 대신한다.

"고...고마워요"

남자가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한다.

식사를 마친 남자가 베란다로 가 여자의 옷을 가져온다.

여자는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남자는 화장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는다.

대충 머리만 감고 나온 남자도 외출 준비를 마치고 여자에게 말한다.

"일단 경찰서부터 가보자"



신고를 위해 경찰서에 와 프론트에 앉아있는 경찰들 중 한 명에게 말을 건다.

남자가 여자의 사정을 경찰에게 설명하자 경찰이 동료 경찰을 부른다.

"야 어제 들어온 가방 가져 와 봐"

경찰이 들고 온 가방을 여자가 감탄사를 내며 가리킨다.

"본인 소지품 맞으세요?"

경찰의 말을 남자가 번역하여 여자에게 보여준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가방 안에는 여자의 여권이나 휴대폰이 들어있었기에 여자의 말은 금방 입증되었다.

다른 소지품들은 그대로였지만 현금이 보이지 않아 남자가 경찰에게 묻는다.

"여기 있던 돈은 혹시..."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분실물 신고 하러 가져오신 분은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오셨다고 하셨거든요.

아마 소매치기범이 돈만 빼고 바닥에 버린 게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혹시 모르니 경위서 작성하고 가시고 소식 있으면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다소 아쉬운 마음을 안고 둘은 경찰서를 나온다.

이렇게 된 이상 더 이상의 관광은 물 건너간 셈, 남자는 괜히 여자에게 미안하다.

시간은 벌써 12시를 가리키지만 밖에 서있기엔 추운 날씨였기에 둘은 근처 카페로 들어간다.

남자는 아메리카노를, 여자는 홍차를 주문한다.

나온 메뉴를 받아 자리에 앉은 뒤 남자의 집에서 챙겨온 충전기를 여자의 휴대폰에 꼽는다.

몇 분 뒤 어느 정도 충전이 된 휴대폰으로 여자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남자는 아마 부모님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 짐작은 맞았다.

여자가 잠시 망설이다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휴대폰 너머에서 기차 화통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스피커폰을 키지 않았는데도 반대편의 남자에게 까지 들린다.

남자는 알아듣지 못하지만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이제 어디 혼자 여행 가긴 그르셨구만'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여자의 말투와 표정이 웃겨서 피식 웃는다.

여자가 그런 남자를 괜히 노려본다. 남자는 커피가 달다.

그렇게 몇 분간의 실랑이가 끝난 뒤 여자가 번역기로 말한다.

"당장 집에 가야 한다. 아버지 화났다"

"설마 내 얘기도 한 건 아니지?"

"아직 안 했다. 돌아가서 할 거다"

남자는 영국 암살자에게 쫓기는 상상을 한다.

"바로 공항으로 가야 되는 거지? 같이 가자"

"괜찮다. 혼자 갈 수 있다"

"또 혼자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이렇게 된 거 끝까지 책임지고 도와줄게"

남자의 말을 읽고 여자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고..."



둘은 택시로 약 한 시간을 달려 공항에 도착했다. 

여자의 부모님이 끊어준 비행기 표를 발권 하고도 아직 시간은 2시간이나 남았다.

남은 시간 동안 둘은 끝이 아쉬워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2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슬슬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지는 것을 눈치 챈 여자가 마지막 말을 건넨다.

"정말 고마웠다. 나 금방 돌아올 테니까 나 잊으면 안된다.

다시 한국 오면 또 노래 들려주고 맛있는 것도 사줘라. 나 잊지 마라"

"이런 일을 어떻게 까먹냐. 이러고 자기가 잊어먹는 거 아니야?"

"나 절대 안 잊는다. 절대로"

그렇게 말하고는 여자가 남자를 향해 팔을 벌린다.

남자도 이해하고 여자를 끌어 안는다. 남자의 가슴팍이 좀 축축해진 것 같지만 모른척한다.

둘은 서로 연락처와 sns아이디를 교환한다. 이걸 마지막에서야 한다니 특이하다고 남자는 생각한다.

기다렸다는 듯이 여자가 타야 하는 비행기의 출항을 알리는 방송이 공항에 퍼진다.

남자는 여자가 시야에서 사라져 여자의 비행기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공항을 떠난다.

그렇게 공항을 나오는 남자는 무언가 결심한 듯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인터넷에서 곧 열리는 큰 오디션 프로그램 지원 서류를 작성한다.

자신의 통장 잔고를 보고 머릿속으로 대충 계산을 때린 뒤 아르바이트 처의 사장에게 전화를 한다.

"어 김군 웬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아 사장님 저 알바 그만둬야 할 것 같아요. 급작스럽게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우리 김군이 지금까지 얼마나 잘해줬는데.

혹시 왜 그만두는지 물어봐도 되나?"

"...이번에 오디션 프로그램 나가려는데 기왕 하는 거 제대로 준비 해 보려고요"

"그래 우리 김군이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번 달 일한 거 하고 퇴직금 좀 넣어서 입금해줄게"

"...감사합니다 사장님"

"지금까지 내가 더 감사했지 뭘, 오디션 응원할게! 화이팅이다 김기성이!"

전화를 마치고 조금은 여유가 생긴 잔고를 보며 다시 한번 속으로 감사를 표한다.

오디션 영상을 찍고 서류와 함께 방송국으로 보낸다.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남자는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평소에 하던 버스킹을 두 배는 더 늘린다.

버스킹이 끝나고 집에 와선 작곡과 작사를 한다. 

그렇게 만든 노래를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린다. 

조회수가 100도 나오지 않지만 매일같이 촬영하고 업로드한다.

여자는 종종 연락을 보낸다. 영국으로 돌아가 부모님에게 엄청나게 혼났다고 한다.

요즘은 한글을 배운다는 둥, 한국에서 먹은 닭 요리가 그립다는 둥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남자는 예선 합격이라는 문자를 받는다.

남자는 뛸 듯이 기쁘지만 여자에겐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다.

녹화 당일, 남자는 자신과 처음부터 함께 한 기타와 함께 오디션장에 도착한다.

남자의 순서는 17번, 적당한 숫자를 받은 것 같아 마음이 조금은 놓인다.

그렇게 오디션장에 들어가니 방송국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3명 앉아있다.

남자도 맞은편에 앉아 준비한 곡을 부른다.

방송국 직원들 간의 오간 뒤 남자에게 합격을 준다. 2주 뒤 본방에서 보자고.

2주 동안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컨디션 관리에도 힘쓴다.

여자는 이제 한국어를 제법 하게 되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칭찬해준다.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때가 되었고, 남자는 공연장으로 들어간다. 

족히 천 명은 되어 보이는 관객, 이름만 대면 아는 음악계의 대부 3명, 열 대가 넘는 카메라.

남자는 긴장했다. 하지만 자신의 호흡대로 공연을 풀어나간다.

3명 중 2명의 불합격, 선곡 미스였을까, 너무 긴장한 탓인가. 남자는 단념한다.

그때 기적처럼 한 명이 금색의 팻말을 들어 올린다. 

그 뜻을 아는 관객들과 남자가 환호한다. 앞으로 한걸음이다.

결승 무대에 나가게 된 남자는 자신의 일상도 촬영팀과 함께하게 된다.

남자의 좁은 자취방과 바쁜 일상이 카메라에 담긴다. 

마지막 무대, 결승에서는 참가자의 자작곡을 불러야 한다.

남자는 여자를 떠올리며 노래를 만든다.

그렇게 다가온 결승 무대, 남자는 3명 중 첫 순번으로 나간다. 좋지 않다.

보통 두 번째나 세 번째가 더 좋은 호응을 얻기 마련이다.

하지만 떨어질 뻔한 남자였기에 불만은 갖지 않는다. 

남자는 저번보다 더 많은 관객, 카메라가 보는 무대의 한 가운데에 선다.

하지만 긴장하지 않는다. 이미 한번 죽은 목숨, 눈에 뵈는게 없는 몸이다.

남자는 여자를 생각하며 쓴 노래, '스테파니'를 부른다.

노래에 담긴 남자의 절절하고 아름다운 고백에 관객과 심사위원들이 빠져든다.

첫 순서라는 불이익을 안고도 어마어마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다른 참가자들도 좋은 무대를 펼쳤지만 남자의 아성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게 남자는 어마어마한 우승 상금에 맞먹는 인기를 얻게 되었다.

 남자는 유명 아이돌과 가수, 배우를 배출해내는 대한민국 최고의 엔터에 들어갔다.

조회수가 100도 나오지 않던 유튜브는 벌써 구독자 50만을 돌파, 100만을 향해 무섭게 성장 중이다.

특히 마지막 무대의 영상의 조회수는 천 만을 넘었다.

지인 위주였던 팔로워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0만을 바라본다.

각종 방송부터 광고, 예능, TV에서 남자가 나오지 않는 방송을 찾는 게 더 힘들다.

자신의 본업인 음악도 잊지 않는다. 각종 대학 공연, 지역 축제 등 남자에게 러브콜이 쏟아진다.

이 모든 게 두 달 만에 이뤄진 일 이라는 게 자신도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에 파묻혀 사는 것에 남자의 마음은 기쁠지언정 몸은 그렇지 못했다.

두 달간의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딘 남자가 회사 대표에게 휴가를 요구한다.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싶은 대표는 남자의 요구가 고깝지만 남자의 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허락해준다.

그렇게 집으로 향하는 차에서 남자는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연락 못한지 두 달이 넘었네. 걱정하고 있으려나. 이번 기회에 연락이나 해봐야겠다'

여자를 생각하니 벌써 집 앞까지 왔다. 여자에게 연락할 생각에 벌써 들뜬 남자다.

두 달 동안 우편함에 쌓인 편지를 갈무리 하여 챙긴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이 주인을 맞이한다. 사람 냄새는 이미 날아간지 오래다.

차가운 거실 바닥에 누워 남자는 생각한다. '역시 집이 좋구나' 하고

그런 남자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편지로 돌아간다. 예상했던 대로 팬레터다.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편지만이 주는 느낌은 변하지 않는 걸까. 평소와 조금 다른 감동이 몰려온다.

팬들의 마음이 고마웠지만 너무 피곤한 남자였기에 하나하나 읽어보진 못하고 겉 표지만 확인한다.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지나간다.

그렇게 거의 마지막 편지에 다가가던 남자의 손이 멈춘다. 

스테파니, 여자의 이름이 적힌 편지가 세 장 있다.

자신의 노래 제목이기도 했기에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인지 본인이 쓴 편지인지는 보기 전에 알 수 없다.

남자는 그렇게 제일 밑에 깔린, 그러니까 제일 먼저 온 편지를 조금 긴장한 채 읽기 시작한다.


 




이제 빌드업은 끝났고 다음편부터 얀데레 시작이라 보시면 될것같습니다.(아마도?)

빌드업이 이렇게 길고 힘들줄 몰랐는데 이럴줄알았으면 이야기를 좀 줄일걸 그랬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