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지로 파머의 트레이너에게는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다. 사실 소문이라 하기에도 뭣하다. 거의 기정사실 수준으로 다뤄지고 있다.



한창 뜨거울 나이의 트레센 학생들이 가십거리에 미쳐 있고, 연애 이야기에 환장하니 소문이 와전돼고, 부풀어 오르는 것도 물론 당연하긴 하지만, 결국 근거가 있으니 그런 법이다. 



파머 트레이너의 외투에는 항상 갈색 털들이 조금씩 붙어 있었다. 물론 우마무스메들이 넘쳐나는 트레센에서 우연히 묻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항상 갈색 털이라는 점에서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거의 비슷한 머리카락 향, 아마 똑같은 샴푸를 쓴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우마무스메는 엄청난 신진대사를 보유한 이상, 몸의 분비물들도 더 많을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보통 샴푸를 사용한다면 정말 심혈을 기울여서 머리를 감아야만 한다. 



물론 그렇기에 우마무스메용 샴푸가 나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사용한다면 손이 조금씩 벗겨지는 아주 귀찮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즉 트레센 학생들에게는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한 것이다. 얼마나 사이가 가까우면 트레이너가 손 벗겨지는 걸 감수하고 말딸용 샴푸로 머리를 감는 것인지, 또는 두세 번 빡빡 감아야 하는 걸 감수하면서 파머가 보통 샴푸로 머리를 감는 것인지! 



즉 둘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말이다. 아직 올해 첫 g1 경기가 치러지지도 않았는데!



물론 이런 소문들은 트레이너 본인에게 물어보면 해결될 매우 간단한 문제다. 




"저기, 메지로 파머 트레이너 씨. 그... 파머 씨랑 연인 관계라는게 사... 잠만, 어디 가세요!?"




이러한 소문들의 종착점은, 바로 본인한테 물어봐도 대답을 회피하기만 한다는 점에 있다.



물론 이런 질문에 대답해주는 거 자체도 좀 어이가 없긴 한 일이다. 하지만,




"아니, 파머 트레이너 씨! 여기 계셨네요.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메지로 파머 씨랑 사귄다는 거 정말 사실인가요?"




용기와 무모함은 한끝 차이인 법이다.



소문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는, 그리고 그걸 알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볼 수 있는 무모한 우마무스메가 집요하게 캐물으러 사무실의 문을 열어 재꼈다. 



....그리고, 무모한 우마무스메의 가느다란 목을,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쥐어짜듯 붙잡았다.




"허...억! 컥!"




우마무스메는 보통 인간보다 신진대사가 매우 빠르다. 그게 무슨 뜻일까? 정상적으로 혈류가 흐르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몸은 힘을 잃어버리고, 쓰러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다만 조건이 갖춰진 상태에 한하는 일이다. 히토미미가 우마무스메를 힘껏 붙잡아 봤자, 마사지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점에서 무모한 우마무스메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 그녀의 목을 잡아 비틀고 있는 손은 우마무스메의 손이었다. 




"어이쿠, 눈이 풀리려고 하네? 말해도 잘 듣지는 못하려나?"




힘껏 붙잡은 손이, 조금 느슨해졌다.




" 내가 네 트레이너와 계약하면 어떨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해?"




아직 무모한 우마무스메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는다. 그렇지만 있는 힘껏 목을 좌우로 열심히 흔들어 본다.




"그런가? 내가 네 트레이너랑 계약하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내가 네 트레이너한테 우승도 몇 배는 더 시켜 줄 수 있어. 중상 트로피도 줄 수 있을 것이고, 어쩌면 더비를 이기게 해 줄 수도 있을 거야."




아직도 말은 입 밖으로 도저히 나오질 않는다. 그래도 필사적으로 신음을 내질렀다. 




"싫...어...요."




"왜 그럴까? 내가 더 잘 달리는 우마무스메 아닌가? 내가 트레이너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더 낫지 않을까?"




이번에는 정말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느낌이 들었다. 




"제...트레이너....에요..! 컥!"




"잘 알고 있네, 근데 잘 알면서 왜 그랬던 거야?"




"죄송...합...니다.!"




"똑똑하네. 앞으로는?"




"남의 물건에 손대지 않겠습니다."




"그래, 배우는 게 빠르네, 이제 네 트레이너한테 가 봐."




무모한 우마무스메는 발에 불이 나라 도망쳐 나왔다. 분명 저 속도면 뛰어난 스프린터 유망주겠지. 하고 진상을 모르던 우마무스메들은 생각했으리라.




"파머,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심하다니, 반대 상황이었으면 걔가 내 목을 졸랐어도 할 말 없어. 쟤도 그렇게 하면서 배웠겠지."




".... 알았어, 내가 너 앞에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끝났겠지. 앞으로는 제발 폭력 좀 쓰지 마."




파머는 상당해 보이는 소질에도 불구하고, 나를 먼저 골라서 계약해준, 어쩌고 보면 특이한 사례다. OP까지 바닥이 보이지 않는 강함. 어쩌면 클래식에서도 연승가도를 달릴지도 모른다. 



심지어 성격도 나한테 굉장히 많이 배려해주고, 뭐라도 더 해주려고 한다. 진작에 느꼈다. 나한테 이성적인 호감이 있다고. 



솔직히 나도 싫지는 않다. 



하지만 문제는 저거다. 무시무시한 독점력. 보통 우마무스메의 격한 애정은 서로 인연이 깊어진 시니어 시즌까지는 들어가서야 문제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파머는 이제 막 클래식 시즌에 들어왔는데도 이 정도다. 작년에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도대체 뭐가 기폭제였을까?



....이번 레이스는 트라이얼 레이스라 더욱 중요하니까, 이번 레이스를 끝마치고 한번 대화를 나눠 봐야겠어.













"사츠키상의 우선 출주권이 부여되는 트라이얼. 스프링 스테이크스 드디어 팡파레입니다!"




음악대의 힘찬 트럼펫 소리가 울려 퍼지며, 관중의 박수 소리가 함께 섞여 들어왔다.




"모두 게이트인 완료, 스타트!"




"역시 오늘도 앞으로 나옵니다. 메지로 파머 빠르게 선두! 선행 그룹들도 빠르게 쫓으려고 합니다!"




이때까지 하이 페이스 대도주를 따라잡지 못해서 전부 패배했으니, 다들 진작에 붙잡아 놓겠다는 마음가짐인가. 




"아, 메지로 파머 조금 흥분한 걸까요. 2코너에서 백 스트레치에서 기어를 넣기 시작했습니다. 선행 그룹들도 가속하기 시작합니다! 벌써 레이스가 움직이나요!"




"전반 1000미터 통과는... 55초 2?! 터무니없는 페이스입니다! 이러면 후방 대기 중인 우마무스메들한테 기회가 오게 되는 걸까요!"




"이제 최종 코너 후 직선 승부! 도주 중인 메지로 파머 리드가 거의 붙잡혔나요! 간신히 반마신차의 리드!"




"이제 언덕을 오른다! 나카야마의 마지막에는 언덕이 있다! 아, 선행 그룹들 이미 체력이 바닥났나요! 좀처럼 올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방 대기 중이었던 두 명은 마군에 갇힌 모양새! 인코스에서! 메지로 파머! 다시 뻗어나온다! 메지로 파머 1착!"




"메지로 파머, 데뷔 후 파죽의 3연승! 클래식으로의 길에는 더할 나위 없는 청신호인가요!"




"아, 마리넬레다 무슨 일인가요? 6번 마리넬레다가, 골 직후 쓰러졌습니다! 지금 의료진이 터프 위로 들어갑니다!"












"자 트레이너, 오늘의 레이스는 어땠어? 아니, 중상 트레이너가 된 소감부터 물어야 할까?"




"....파머, 오늘 너답지 않았어. 백 스트레치에서는 체력을 아끼는 편이 맞지 않았을까? 아무리 그래도 55초 초반의 페이스는 너무 실책이었어."




"설마, 분풀이로 아무렇게나 뛴 거 아니지?"




"......"




"도대체 뭐에 그렇게 짜증이 나 있었던 거야. 파머, 네가 예전에 했던 말처럼 나는 네가 최대한 침착하게 뛸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여 돕고 싶어."




"아, 지금 스프링S 9착이었던 마리넬레다는 과호흡 증세가 보고됐습니다. 골 후 잠시 쓰러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는 무사히 호흡이 돌아왔지만,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모양입니다."




"마리넬레다면.... 파머야, 너 설마 쟤 담그려고 그랬던 거니?"




기억이 맞았다면, 분명 파머에게 목이 비틀어진 그 우마무스메일 것이다. 




"무슨 소리야 트레이너, 나는 계속 뛴다고 정신 하나도 없었다고. 오늘은 시간 감각이 좀 고장 났었나 봐."




"아무리 그래도 55초짜리 시간을 못 느꼈다는 게 말이나 되냐? 내 생각에는 분명 다른 이유도 있다고 보이는데."




"트레이너, 걔랑 원한은 청산한 거야. 정말 맹세하건대, 이번 것은 걔랑 아무런  관계없어. 물론 내가 깔끔하지 못한 레이스를 한 것도 인정할게."




"정말 청산한 게 맞긴 해? 그게 아니라면, 전반에 왜 그렇게 흥분해 있었던 건데?"




"트레이너,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레이스에 사적인 감정을 가져올 만큼 치기 어린 꼬맹이로 보여? 이번 레이스는 내 실책이 맞지만, 걔와 관련된 건 정말 아니야."




"네가 뒤돌아보니까 아까 걔가 쓰러지던데? 너랑 정말 아무런 상관 없는 거 맞아?"




"우연이라고 그냥! 걔가 나한테 쫄아 있어서 내가 쳐다보니 겁에 질려 쓰러졌다.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알았어. 알았어, 믿어 줄게. 대신 나랑 약속 하나 하자. 걔 병문안은 같이 가는 거야."




"트레이너, 진짜 관련 없다니까! 나는 트레이너를 위해서 심장이 터지라 뛰었는데, 트레이너 손에 중상 트로피를 쥐여 주려고 쇠 빠져라 뛰었는데, 트레이너는 다른 여자 이름이나 계속 불러대고 너무한 거 아니야.....




갑자기 두 가지 눈물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훌쩍거리며 미친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정말 트레이너만을 위해서 뛰고 있는 거야."




"국화상이고 더비고 뭐고 간에 뭐 따면 좋기야 좋겠지. 솔직히 못 이겨도 난 1도 상관없어."



"하지만 메지로 파머의 트레이너, 트레이너의 담당 메지로 파머라면 그때부터 달라지는 거야. 우리 땀의 결실, 우리 노력의 결실로 말이야. 그렇게 된다면 꼭 이겨야 할 이유가 생기는 거지.



나는 트레이너를 위해서 뛰는 처지라면 뛰다가 다리 부러져서 평생을 걷지 못해도 괜찮아. 트레이너를 위해 달리다가 평생 휠체어나 타는 신세가 된다. 걷지도 못하고 말이지. 그래도 괜찮아. 난 트레이너한테 쓸모가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모든 걸 줘 버린다. 정말 낭만적이잖아. 난 흔쾌히 할 수 있어.



난 그 정도로 트레이너한테 진심이야. 그러니까 트레이너도 나한테 최소한의 진심을 좀 보여 줘. 아직 트레이너한테 나랑 같이 부서져 달라거나, 내가 부술 수 있게 해달라는 말까지는 기대도 안 해. 솔직히 그것까지는 좀 무리한 부탁이긴 하지. 평생 나한테 사랑만 보여 줘도 족해.



하지만 하다못해, 날 유일하게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나 하나만 바라보고, 나 하나만 휘두르란 말이야! 그거만 지켜 주면 되는 거라고!



난 트레이너를 위해서라면 다리 양 짝 정도는 잘려나가도 괜찮아. 팔이 잘려나가서 혼자서 승부복 입지도 못하는 비참한 몰골이 돼도 좋고. 그러니까 나는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아.... 제발... 나랑만 함께 있어 줘. 딱 소박하게 그 정도만 바라는 거야.



그러면 트레이너는 돈이고 뭐고 다 가질 수 있잖아. 나를 쓸모없게 만들지 말아 줘....."




......아무래도 파머의 무언가의 스위치를 건들어 버린 모양이다. 파머는 씩씩하고 사람 말도 잘 들어 주는 쾌활한 사람인 줄 알았었는데, 이런 자기 파괴적인 면이 있었을 줄은. 




"파머, 미안해. 다 제쳐놓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이루어 낸 우승인데, 나는 그것조차 신경 쓰지 않고 트집 잡아서 헐뜯기나 하고, 이건 확실히 내가 잘못했어."




"그리고 저번에 약속했잖아? 적어도 너랑 함께할 동안에는 담당 더 들일 일도 없을 거라고, 여자 꼬일 일도 없을 거고."




"그리고 나도 솔직히 네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 제법 있어. 나는 쾌활하고 유쾌한, 남의 말도 잘 들어주는 파머와는 앞으로도 계속 담당 관계였으면 좋겠단 말이야."




파머의 울쩍거림도 다행히 많이 잦아들었다. 




"그러니 너무 날이 선 행동은 좀 자제해 줘. 나도 파머가 거슬려할만한 행동은 조심할께."




"........"




"...... 트레이너, 잠시만 어깨 좀 빌려 줘."



파머는 나한테 안긴 상태에서 몇십 분은 더 울어서야, 분이 다 풀렸는지 홀연히 탈진하듯 잠들었다.




....물론 나카야마 경기장에서 눈이 퉁퉁 부은 여학생을 껴안고, 들어다 2km 걸어서 지하철 좌석에 앉힌 나는 분명 사회적 평판에 심대한 타격을 입었으리라.







어쩌다 보니까 한편이 너무 길어진 모양새라서 잘라서 먼저 올림


처음으로 써보는 건데 계속 따라와줘서 고맙다


결말까지 생각해둬서 연중은 절때 없을 꺼니까 계속 많이 봐 주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