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운워드 스파이럴


1.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하나 해보자.


한 3차원 원뿔이 있다. 이 원뿔의 꼭짓점에서 밑면까지


겉면을 타고 올라가는 사선을 하나 그을 것이다.


직선을 계속계속 그리면 종전에 이르러선


밑면의 테두리에 닿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엣지에 가장 가까운 순간이


엣지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엣지할만큼 가까운 상황이라고 혼동하기 가장 쉽다.


사실 그때가 가장 먼 상황인데.


가깝다고 가까운게 아니고, 멀다고 먼게 아니다. 


그러면 반대로, 사실 나와 너의 거리가 꼭짓점에서의 사선과 점의 관계라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2.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니지.


모든 인류의 역사가 가치를 판단하면서 살아왔다.


자본주의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 단순히 종이쪼가리, 데이터


(우리는 통화, 지폐라고 이것들을 부른다)를 조금 체계적으로


약속해서 그렇지 누군가의 쓸모, 가치 따위를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지금처럼 생존을


덜 신경쓰던 때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없었던 거 같다.


그런데 왜 나는 피식자로서 위협을 느껴야 하는지


누군가는 답을 줘야 맞는 게 아니냐고


무언의 함성을 질러보지만


그에 대한 리스폰스는 말랑한 혀.


3. 


나는 자본주의의 수혜를 가장 잘 받고 태어났다.


엄마는 헷지펀드매니저 출신이시고,


아빠는 전업주부겸 리스크매니지먼트 관련 일 했다나 뭐라나.


아무래도 매니저가 돈을 잘 버니 아빠가 나를 돌보기로 하고


엄만 나가서 일을 하셨다.


아빤 술, 담배, 도박, 폭력 등을 제외하시곤 


나에게 전혀 간섭하지 않으셨다.


RR 비율을 맨날 들먹이시던데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가긴 했다.


그래서.


편했다.


너무 편했다.


그리고 나는 알아버리고 말았다.


나같은 글러먹은 인간은 편할 자격이 없다고.


4. 


처음으로 아빠가 무서워졌다.


직선이 두 개가 그어진 순간을,


그저 직선이 평행하다고만 느낄 줄은 몰랐으니.


엄마는 무서웠지만 더 무서워졌다.


가치를 판단하는 그 냉혈하던 모습이


내 뱃 속 고동치는 심장소리를 


지출의 카운트다운으로만 여길 줄은 몰랐으니.


5.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관심과 무책임.


나는 내몰렸고, 가장 기뻐야 할 순간에


울고 말았지만, 그것이 기쁨의 눈물임이


아니었음은 나빼고 다 아는 사실이었다.


두 명의 자리에는 나 혼자만이 앉아있었고,


빈 자리 사유는 도망.


사유의 사유는 책임으로부터의 도피.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차라리 너를 누군가 죽여주어


내가 그를 미워할 수 있도록 해주길.


6. 


자본주의는 그를 아름다운


트로피라고 낙인찍었다.


나는 그저 트로피를 들고 싶었다.


단지 그 뿐. 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패럴림픽 트로피.


머뭇거림은 나에게로 날아온 선물.


너는 가장 성공한 실패이다.


7. 


돈은, 현대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자유의 수단이다.


자유를 부여할 수 있다면, 구속 또한 부여할 수 있겠지.


가장 자유로웠던 조랑말이었던 나 자신은 


이제부턴 나이트. 짝은 비숍.


끼리끼리 만난걸까?


8. 


오늘따라 표정이 굳은 사장님은


굳이 평소에는 출입을 엄금하던 개인룸으로


나를 부르셨다.


그러곤,


"여자친구 있나요?" 라 물으시던데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했다.


남의 연애사는 왠 참견이란 말인가,


억울했다.


그래도 대답은 해야 했기에...


"아니요 없습니다."


"밥 좀 같이 먹죠"


"네?"

('내가 왜 시발련아'라고 외치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나 닮은 딸이 하나 있는데..."


"한 번 얼굴만 봐봐요"


그 뒤로는 들리지 않았다.


9. 


맨날 문자로만 말을 나눴던


리스크매니지먼트 최고 담당자가 알고 보니


사장님 남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의외로 남자치곤, 아니 사람치곤,


체구가 작으셨고, 눈에 총명함이 깃들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는 식사준비를 돕는


나의 눈동자로 향하는 법이 없었다.


"미안합니다."


"네?"


"가끔 얀희는 제 의견을 무시하고 직감만을 믿었어요"


"분명히 안되는 거라고,


성공해도 볼라틸리티 관리에 실패한 거라고,


실패하면 다 죽는 거라고 해도 말을 안 들었죠"


"사장님이요? 저희 아시겠지만 리스크 관리 실패하면


그날은 죽었다고 봐야되는 거 잘 알지 않으신가요..."


"그거 본인이 잔뜩 깨졌어서 그래요, 


서로 가까워진 계기도 누가 봐도 위험한 포지션 들고 있을 때마다


가서 싸웠죠. 정신 놨냐고...


미안합니다. 괜히 불러놓고 이런 소리나 해서..."



10.


방에서 고함이 들리고, 남편분과의 대화는 멋쩍은 웃음이


마침표가 되었다.


방에서 사장님의 복제품이 나왔는데?


왜 방에서 사장님의 복제품의 복제품이 나오는 걸까?


어색한 5인.


"내가 좋아하는 갈비찜이네, 잘 먹을께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아버지?


내가 잘못들었나?


침묵은 가장 위대한 조미료이다. 그렇고 말고.


"얀붕씨."


그리고 그 조미료는 쉽게 사라진다.


"딱 10년 고생만 하면 경제적 자유를 이루어드릴께요.


학창시절 전부 검고출신에 대학조졸이라 지금 26인가?"


"아니 저 입사하고 안 짤렸습니다.


솔직히 돈 때문에 하고 있는 건 아닌거 알지 않습니까?


짤릴 때까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탁, 젓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일순간 침묵을 불러왔다.


언제봐도 저 째려보는 눈빛은 사람을 긴장케한다.


"저기 우물쭈물하는 애가 내 딸 얀설이야.


외모를 날 닮았는데, 성격은 남편을 닮았어.


뭐 진작에 눈치챘겠지만 미혼모 맞아.


갈비찜 좋아하는 쟤가 얀순이고.


얀순이 아빠노릇 해줄 사람이 얀붕씨 밖에


없어."


"아니 제가 왜..."


"끝까지 말 들어봐요."


"엄마 내 의견은!"


"열일곱에 임신한 사람 의견은 듣고 싶지 않은데?"


가장 맛있는 조미료가 흠뻑 내 밥 위에 뿌려진다.


"얀설아 암만 봐도 넌 부모가 될 자격이 없다."


"너도 솔직히 얀순이 키우기 싫잖니?


키우고 싶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던 소설가의


꿈은 왜 접지 않았니? 네 아빠만 힘들었어.


그러면 성공이라도 해야지. 네가 한 게 뭐니?"


"기회를 줄께, 5억 받고 양육권을 포기할 지,


아님 월세 보증금만 들고 얀순이랑 나가 살아."


얀순이의 국이 점점 짜진다.


얀순이의 할아버지도 짠 국을 먹는다.


당장이라도 이 곳을 떠나고 싶다.


그리고, 얀순이는 아마도


그 날보다 짠 식사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11. 


"얀순아."


"네"


"17 더하기 18는?"


"..."


"27 빼기 18는?"


"9야 9라고..."


"누가 누굴 키워..."


"거기서 할머니말고 왜 날 고른거니...?"


"내가 어떻게 할 줄 알고 그런거냐고!!"


"아빠는 나 버리지마요..."


"누가 네 아빠인데? 싸지르고 도망간 그 새끼가


니 애비겠지? 안 그래?"


실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얀순아 미안해... 그려던게 아니라...


변명의 여지가 없네..."


"미안하면 내 소원 들어주세요"


"그래"


"저랑 한 번 해요."


"?"


"아빠 성격 상 하면 나 안 버릴 꺼잖아요..."


"누가 니 아빠냐고... 그리고 너랑은


절대 못하는 거 알잖니..."


"그럼 곁에만 있어주시면 안될까요?


저 뭐든지 할께요. 다 드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그는 황홀한 연옥으로 들어간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와."


얀순은 재빠르게 갈아입는다.


체구가 워낙 작았기에 얀순은


얀붕에게 꼭 안기는 꼴이 된다.


얀순은 다시는 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가장 짠 음식을 만든다.


얀붕은 그저 먹기만 한다, 먹기만...


얀붕은 피를 만들지 않고 피를 만들었다.


피는 짠 맛보단 비린 거 같다.


입안은 절제의 웅덩이가 생겼다.


12.


"아빠~"


"야! 내가 아빠라 부르지 말랬잖아!"


"미안해 얀붕아 ㅋㅋ"


"그래 왜 불렀어"


"나 고등학교 졸업하면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그거 지금 소원 말할께"


"잠깐만"


"왜?"


"포지션만 확인하고 올께 벌써 2시 반이잖아?


4시에 다시 이야기 하면 안될까?"


"알았어"


나는 얀순이와의 시간을 늘리기 위해


회사에 나와서 개인투자를 시작했다.


사장님은 "그 사건" 이후로 이해하기 힘든


퇴직금을 주셨다. 그리고 편지 한 통이 왔는데


그렇게 얼룩진 편지는 난생처음 보았다.


13.


나에게 있어서 길잡이는 여럿이어도,


등대는 하나. 


오직 그만이 나의 등대.


14.


할머니가 싫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차가웠다.


안다. 원래도 그런 사람이란걸.


그래도 차가움이 지나간 피부는


열을 다시 낸다.


그래서 차가움 때문에 차갑진 않았다.


15.


가장 가까운 이들은 내게 너무 멀었다.


출발지점에서 뒤로 뛰는 사람.


뒤로 뛰는 사람을 보는 사람.


나는 기어갔다 걸어갔다. 뛰어갔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쟁취한다.


멀고도 먼 그대는 이제 내게 가장 가깝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유명한 작가의 메시지 말대로 xx이다.


16. 


"얀순아 어딨니?"


"여기요"


방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따라 들어간다


얀순이가 의자에 앉아있길래


침대에 눕는다.


"그래 소원이 뭐야?


돈으로 해결되는 거면 참 좋겠어"


"그래... 어떻게 보면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내 소원은 나와 xx하는 건데, 안 해도 상관없어.


어차피 안 해주면 xxx서 xx하고 xx당할지도 몰라...


그러면 어쩔 수 없이 xxx되지 않을까...


절망은 옮는다더니, 진짠가봐.


너는 그런 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을꺼야"


"그거 알아 엄마는 사실..."

"즐기고, 최근엔..."

"그리고.. 몰랐어?"

"자기가 시시포스의 주인공이 되길 바랬지만..."

"기프트는 항상 프레젠트하거나 프레젠트이지 않잖아?"

"그래서 나는 엄마를 ...해, 신의 주사위는 절대적이지 않아."

"추락한 이보다 힘든 건 영원히 추락하고 있는 이잖아?"

"나는 이제 막 굴러가는 돌이야."

"난 안 멈춰."



17.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허탈했다.


왜 이런 사람과 내 인생이란 영화의


필름에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지.


인정했다. 나는 촉매였다.


더 활발히 타오를 수 있게 하는 촉매...


18.


다른 사람과 xx한다는데 왜 그래!?


아니라고 하라고


아니라고 해야지


아니라고 해야되는거 아니냐고


아니라고 해줘


아니라고 해주세요...


19.


호텔방 문 앞에 섰다.


518호에 그녀가 있다.


벨을 누른다.


대답이 없다.


문을 연다.


저벅저벅.


그녀는 안대를 쓰고 있다.


외설적인 복장.


무방비한 상태.


오른쪽 멀리


그방으로 와라.


끄덕이는 고개.


돌아가는 고개.


흠뻑젖은 음부.


20.


"진짜 어쩌려고 그랬어?"


"이러려고 나랑 살자고 한거야?"


나는 그녀를 다그칠 수 밖에 없었다.


옆 방에서 딩동- 벨소리가 들렸다.


내가 짠 식사를 할 줄은 몰랐는데.


그녀는 어떻게 이걸 먹고 괜찮았을까.


아니, 괜찮지 않았겠지.


21.


나는 그런 짓을 왜 했을까?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죽으려고?


안대는 왜 벗지 않았지?


스스로가 역겨웠다.


그런 시도로 시선을 이끄려는 나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운다.


나는 파우스트가 아니다.


4가지 형제들이 모두 온다.


그들은 입모아서 돌아가는 조건을


하나 제시한다.


22.


"얀부..."


"얀붕아..."


!!!!


다행이 손발이 묶이거나 그러진 않았다.


허리가 뻐근하지도 않았고.


"벨 있잖아..."


"비밀번호는 그대로네?"


"그래서 왜 왔어..."


갑자기 태도가 바뀐다.


"나진짜그러려던데아니라진짜관심한번끌려고아니

내가왜역겨운짓을너에게까지보여주려고..."


그녀를 조심스레 나와의 자리를 바꾸고,


명령한다, 나체가 되라고.


그녀는 말괄량이나 지을 법한 표정으로 


어기적거린다.


23.


짝! 짝! 짝!


나는 이 소리가 박수소리이길 간절히 바랬다.


혈관이 터져 붉어지는 걸까


흥분해서 붉어지는 걸까.


24.


1년 동안 숨을 1분 동안 헐떡이거나 참은 적이 있는가?


라고 스스로들에게 물어봅시다.


운동을 하지 않는 젊은 여성으로 집합을 한정합시다.


심지어 병약하다고 합시다.


참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왜 그리 기쁜 눈으로 나와 눈 마주치는 걸까요...


25.


키스를 하고 싶은데 내 입은 이미...


"미안해" 라고 말하는 그가 다가온다.


또 해주려나 생각하고 눈을 감는다.


"미안해"라고 연신 사과하는 그의 입에선


내 타액과 그의 타액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


미안했다. 그런데 너무 좋아서 떨어지기 싫었다.


쓰라린 곳을 어루만져지는 손이 너무 다정했다.


그는 나만의 것이어야만 한다.


26.


열심히 했다. 그거 외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성적인 행위-삽입이나 구강성교-등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녀도 알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라고.


27.


분명히 나는 포식자의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데


염소의 마음을 가지고 염소처럼 행동하는 나의 모습은


퍽이나 웃겼다.


그녀는 고통으로 어그러지는 나의 모습을


자신의 고통과 곁들여 음미하는 모습이었다.


인정하자. 피식자는 나였다.


그녀는 고고하게 육체를 내주고


가장 고귀한-돈으로도 살 수 없는-경험을 얻어내고 있었다.


28.


같이 욕조에 들어가 눈을 마주치자 혀를 섞고 웃는다.


입가가 벌겋다.


"얀붕아"


"왜?"


"고마워"


"너도 사실을 알면서 그래?"


괜히 그녀의 젖꼭지를 꼬집는다.


으흣하고 신음소리가 나온다.


"너의 가장 깊은 욕망이 나와 같을 때


나는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


봐봐 아직도 흘러나와!"


"진짜 같은 게 맞냐고..."


"김얀붕. 그래서 싫어?"


"아니 너무 좋아서 그런거지"


"사랑하면 키스 한 번 더 해줘"


29.


간단한 사고 실험을 해보자.


사선은 나이고 꼭짓점은 너이다.


사선은 너이고 꼭짓점은 나이다.


너는 나에게 다가오고


나는 너에게 다가간다.


얼마나 먼지, 가까운지는 중요하지 않다.


빛의 속도로 서로에게 가까워진다면-유명한 과학자의


말처럼-아마도 너와의 시간은 길어질 것이고


너와의 거리는 짧아질 것이다.


세상은 그대로 일지라도.


세상은 원뿔 위를 처량하게 올라가는 사선일지라도.


30.


"얀붕아, 우리 애야 우리애라고!"


"우리가 드디어 출발점에 섰네..."


"그것도 둘이서! 같이!"


분만실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또 다른 사선의 출발을 알린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