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모음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여러분들께선 안전선에서 한 걸음 물러서주시기 바랍니다.”


“The train is now approaching. Please wait behind the yellow line.”


-끼이이익…


독일과 프랑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역의 텅빈 플랫폼으로 두 열차가 천천히 진입하여 멈춰선다.


쇠가 마찰하는 소리가 멎자 정적이 찾아온다. 콘크리트 바닥 위, 생명체라곤 하나도 없었음에도 안내방송은 제 할일을 꿋꿋이 다 했지만, 그 다음 일은 당분간 못할 예정이다.


-뚜벅, 뚜벅, 뚜벅…


-쿵!


두 무리의 군인들이 플랫폼으로 우루루 들어와 총의 개머리판을 동시에 찍는다.


-삐ㅡ! 삐ㅡ! 삐ㅡ!


-철컥!


그와 동시에 열리는 두 열차의 출입문. 먼저 정복을 빼입은 장성들이 내려 길을 만들었고


-또각, 또각.


그들이 호위하는 두 여인이 각 열차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우렁찬 목소리로 예를 갖춘다.


검은 열차 앞 군인들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해 이마에 붙이고, 빨간 열차 앞 군인들은 팔을 쭉 뻗어 각국 특유의 거수경례를 자랑했다.


여인들도 그에 화답하듯 각자의 지팡이를 살짝 올렸다가 다시 내려놓았고, 짧은 찰나의 경례 대결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독일 연방군의 카라비너 98 쿠르츠, 리슐리외한테 결례를 범했다지?”


“클레망소 씨, 뭔가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언니분께선 저희 열차에서 편히 쉬고 계신답니다.”


“장 바르는 리슐리외가 출혈이 심하다고 말하던데.”


“생명에 지장은 전혀 없을거에요. 칸센이 겨우 그 정도 출혈로 죽는다면, 프랑스의 미래가 그리 밝진 않겠네요.”


“외국인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 기분이 썩 좋진 않네.”


“진심을 다한 걱정이었는데…”


“안타깝지만 우린 그런 거 사절이야. 그래서 리슐리외는 어디에 있지?”


“성격도 급하셔라, 제 말이 그렇게 믿기 힘든가요?”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게 최선이니까.”


Kar98k가 클레망소의 말을 듣고 옆의 부하에게 고개를 까닥이자, 대여섯명의 군인들이 열차의 수하물칸으로 사라진다.


“왜 저 칸으로 가는걸까? 내가 소포를 주문하진 않았을텐데.”


“프랑스 국민들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사양할게.”


“보고 판단하신다면서요?”


“재미없는 선물일 것 같아서 말이야.”


복도에서 무언가가 직직 끌리면서 나는 소음이 클레망소의 신경을 건드린다.


군인들이 거대한 박스를 끌고 와 문 밖으로 던지자, 안에 무게가 꽤 있는 물건이 담긴 듯 둔탁한 소리와 먼지를 일으킨다.


“그래도 성의를 봐서 받아주세요.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에 지대한 기여를 할 수 있는 선물이랍니다.”


“......”


-.....!


클레망소도, 그녀의 뒤에 있는 군인들도, 모두가 예상하긴 했지만, 결과는 훨씬 참혹했다.


“...리슐리외, 언니.”


“언니분의 활약 덕분에, 지휘관께서 794를 떠났어요. 숨이 끊어질 수도 있었던 걸 제가 가까스로 막았답니다.”


“...보지… ㅁ, 세… 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장 바르는.”


“...ㅈ, 바르ㄴ… 갠, ㅊ…”


“...아냐, 됐어. 우선 쉬어.”


밧줄이 손발목을 파고 들었고, 


입엔 재갈이 물렸으며, 


그 휘황찬란한 금발과 제복, 뽀얀 피부는 피로 얼룩진 채로 박스에 담겨진 리슐리외가, 남은 힘을 짜내어 동생과 부하들에게 말했다.


한 국가의 해군을 이끄는 총기함이 이런 끔찍한 몰골로 나타났으니, 모두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이에 반항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클레망소는 착잡한 표정으로 망토를 벗어 언니에게 덮어주고, 부하들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병원으로 데려가.”


“예, 옙! 빨리! 추기경님께서 중상을 입었다! 제일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시켜!”


“후후, 우스워라. 저건 반창고도 아까운 수준인데, 추기경답게 상당히 호화로운 혜택이네요?”


“...리슐리외만 데려가라고 날 부른 건 아니겠지?”


“당연히 아니죠.”


“그러면?”


“협력을 제안하러 왔습니다.”


“우리 기함을 저렇게 만들어놓고 협력하러 왔다라… 이걸 선전포고라고 봐야할까, 아니면 네 말대로 제안이라고 봐야할까?”


“원하시는대로요.”


“지휘관이 이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리슐리외 씨를 보고 기절하시지나 않으면 다행이겠죠.”


“네 모습을 보라고 말한거야.”


“저요? 후후, 아, 지휘관께서 하루에 꼭 한 번은 하시던 말씀, 기억하세요? ‘나쁜 녀석들에겐 일말의 자비도 주지 마라’였나...”


“후후후, 누가 나쁜 녀석인지 모르겠네?”


“전 너무 잘 알겠는데요?”


“나라고 다르진 않아.”


웃는 얼굴로 상대를 쉴새없이 디스하는 두 여인의 기싸움에 군인들은 쩔쩔 매면서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중 검은 열차 측의 분위기가 리슐리외의 영향으로 미세하게 더 웅성웅성한 기색이다. Kar98k는 상대측이 흔들리는 걸 눈치채고 본색을 드러냈다.


“쓸데없는 소리는 잠시 접어두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번 협약이 성공하면 당신이 리슐리외 씨를 대신…”


“사탕 발린 말로 날 유혹할 생각인가 본데, 확실한 보장이 없으면 내가 지금의 리슐리외처럼 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흐음, 아까 제안이라고 했나요?”


“음?”


“말을 잘못했군요.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에요.


“어머, 협박이라고?”


-철컥!


클레망소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빨간 열차 앞 군인들이 일제히 총을 꺼내들어 상대를 위협했다.


당황한 검은 열차 앞 군인들 중 한명이 맞대응으로 자신의 총을 꺼내 들려고 하자


-타타탕!


“아악!”


“...어리석은 것. 그거 아세요? 무모한 행동의 끝은 보통 좋지 못해요. 그래서 저것도 리슐리외 씨처럼 피를 보고 말았네요.”


“무모함은 사기를 올리는 좋은 수단이지, 그렇지 않아?”


순식간에 손잡이의 손을 향해 세발의 탄환이 날아와 그를 무력화시킨다.


군인이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지자, Kar98k는 비웃음과 함께 부무장인 권총을 장전하며 그에게 다가갔다.


“아아악… 크윽…”


“걱정마세요. 친히 고통에서 해방시켜드리죠.”


-타앙!


“...지금이 그 전쟁 때인 줄 아나봐?”


“후후, 그때와는 달리 리슐리외 씨가 직접 승인하셨다는 점이 다르달까요?”


“뭐?”


옆에 있던 부하가 미간에 구멍이 났음에도 침착함을 유지하던 클레망소의 표정이, 저 터무니 없는 말에 처음으로 일그러진다.


그녀의 머리에서 정황상 언니는 자신과 똑같이 협박을 당해서 OK를 했을거라는 결과가 도출됐다.


“리슐리외가… 직접…”


“네, 직접 본인의 입으로 말씀하셨답니다.”


“...너와 리슐리외의 말을 거부하면, 우리는, 프랑스는, 어떻게 되는거지?”


“하, 어떻게 되냐고요? 당신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지 않을까요?”


“...그럼 내 대답은.”


Kar98k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간다. 자신이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으니 뭔 대답이 나오던 그렇게 거슬리지는 않을 것이다.


클레망소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이따가 둘만 있을 때 들려줄게. 우선 외국의 귀빈이 왔으니 대접부터 해야겠지.”


“대접은 대답 후에 받아도 될 것 같은데요?”


“나도 고민할 시간은 있어야 하니까.”


“흠, 길어야 1시간 후에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갈 예정이었는데… 뭐, 좋아요. 여러분들, 다음 일정은 취소해주세요.”


“프랑스에 온 걸 환영해, 카라비너 98…”


“편하게 카라비너라고 해주세요.”


“그래, 카라비너. 차량은 5분 내로 준비될거야. 그리고 저 병사는…”


클레망소는 Kar98k의 권총에 숨이 끊어진 병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한쪽 무릎을 굽히고 눈을 감겨주며 명복을 빌었다.


“내 권한으로 최대한 예우를 갖춰서 가족 곁으로 보내. 외세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전해주고.”


싸늘하게 식은 팔에 붙어있던 트리콜로 패치를 뜯어내 가슴팍에 올려두고 다시 일어난 그녀를, Kar98k는 한심하게 바라보며 부하들과 함께 플랫폼을 떠났다.


클레망소도 시신이 수습된 후 뒤를 따랐고, 열차들이 다시 썰렁해진 플랫폼을 떠나며 기차역은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 광경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여인. 모니터를 끄고 창문 밖으로 잿빛 항공기들이 쉴새없이 이착륙하는 걸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잘 봤지?”


“응…”


“멋지네.”


“난 너희가 어디서 뭘 하든, 이렇게 쉽게 볼 수 있어.”


“그런데, 이미 하나가 기어들어온 것만으로도 성질이 뻗치는데, 이번엔 두 마리가 손잡고 같이 들어왔네?”


“우후후, 손은 안 잡았는데♪”


“조용히 해…!”


“하아… 왜, 훨씬 전에 떠나간 버스를 잡으려고 그러는건지…”


“버스가 영원히 도망가진 못하니까.”


“제바알!!”


“혓바닥을 뽑아버릴까… 가뜩이나 죽여버리고 싶은데 계속 신경을 긁네? 아, 이래서 오빠가 총을 갈겼나보구나…”


소파 팔걸이와 손이 수갑으로 연결된 세인트루이스와 호놀룰루에게 조용하면서도 차가운 분노를 드러내는 얀순이었다.


사랑하는 오빠를 지키기 위해 경찰들까지 매수했음에도, 이런 일이 또 벌어진 것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듯 했다.


“리비, 나 왔… 어, 너희들…?”


“뉴, 저지…?”


“정말, 지휘관 군의 말이 맞았네.”


마침 그녀들의 전임자가 비키니와 투명한 재킷을 입은 자유로운 차림으로 얀순의 방에 들어오다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녀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얀순의 머리는 이런 보잘 것 없는 상황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다.


“앉아.”


“어, 응.”


“너.”


“응…?”


“내가 오빠 곁에 다가가지 말라고 몇 번 말했지?”


“오, 빠…? 오빠라니?”


“야, 너한테 물어봤어? 입 다물어.”


“아, 아니…! 난 억울해! 눈에도 안 띄려고 일부러 바위 뒤에서 누워있었는데 자기가 갑자기 위에서 떨어졌다구…!”


“그럼 피했어야지?”


“그게 뭔…”


“오빠가 너한테 갔으면, 네가 피해야지. 아니야?


“하지만 자기가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단 말이야아! 그걸 어떻게 무시해?! 피가 엄청 쏟아졌는데 응급처치는 해줘야지…!”


“그래서 지휘관 군이 붕대를 매고 있었구나…”


“쉬이잇…! 제발...”


“...백번 양보해서 응급처치가 끝나면 바로 자리를 비켜줘야지, 헤실헤실 웃으면서 보호자 노릇을 하더라고? 맞지?”


“그건…! 아니… 으… 응, 맞아…”


얀순이 뉴저지를 이용해 기선제압을 단단히 하자, 호놀룰루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지금까지 저런 괴물을 상대하고 있었구나… 항복한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짐승은 다른 개체가 자신보다 명백히 세다고 판단되면 꼬리를 내린다. 지금의 호놀룰루가 그러했다.


반대로 세인트루이스는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으로 얀순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루이스…”


“응?”


“안 무서워…?”


“전혀~”


호놀룰루는 상식 밖의 답을 하는 친구를 황당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포기하고 고개를 떨군다. 세인트루이스의 혀놀림에 얀순이 열받으면 필연적으로 자신에게도 불똥이 떨어지는데, 그 불똥이 말만 불똥이지 초거대 운석이나 다름없다.


한편 뉴저지는 갑자기 들어온 얀순의 카운터에 억울하면서도 할 말이 없어서 속이 터질 노릇이었다.


아까의 그 해프닝에서 자신의 잘못은 단 하나도 없고, 오히려 얀붕을 지극정성으로 도와줬음에도 이런 취급을 받아야 했다.


“후우우… 아니다, 그냥 넘어갈래.”


“정말…?!”


“저 년들 때문에 열을 너무 받아서, 너한테 뭐라 할 힘이 없어.”


“아아…! 정말 고마워 리비! 귀염둥이는 부럽네~ 이런 고모가 곁에 있다니…!”


“고모는 지ㄹ… 휴우…”


그래도 구사일생이라고, 신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눈치 없는 뉴저지가 배를 쓰다듬으면서 (악의는 없었지만)역린을 건들자, 얀순의 미간이 일그러지다가 곧 힘없이 풀린다.


골치가 더욱 아파진 얀순은 한숨과 신음을 푹푹 쉬며 이마를 문지르면서 펜을 부여잡았다.


“아…”


-뿌드드득…!


-!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진 볼펜이 힘없이 찌그러지고 깨지면서 섬찟한 소음을 일으킨다.


얼어붙은 분위기가 해동되나 안도하던 세 칸센이 단체로 놀라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를 바라본다.


“...너희 둘, 나랑 비밀친구 할래?”


-....?


직후 의자 너머에서 들려오는 의미심장한 제안, 세인트루이스와 호놀룰루는 머리에 연신 물음표를 띄운다.


그러다 호놀룰루가 용기를 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얀순에게 물었다.


“그… 게, 뭔데…?”


“뭐냐고? 얘처럼 되는 거지.”


“나처럼…? 나도 리비랑 비밀친구였어?”


“비밀친구니까 널 감옥에 안 쳐넣고 이렇게 데려다니는 거 아니야?”


“...그런가?”


물음표증후군은 뉴저지에게도 손을 뻗쳤다. 


그 원흉인 얀순은 별 반응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다가간다.


“비밀친구가 뭐냐면, 너희들이 내 말에 절대복종하는 대신 제한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야.”


“지휘관이 말한대로…”


“오빠가 뭘 말했는데?”


“...아니, 잠깐, 지휘관이… 정말 당신의 오빠야…?”


“...응. 오빠가 날 여동생으로 여기니, 나도 오빠로 대해야지.”


“뉘앙스가 친남매는 아닌 것 같은데?”


“머리색이랑 성 빼곤 다 달라. 어쨌든, 제한적인 자유도 뭔지 알고 싶어?”


“응.”


“오빠의 반경 100m 외의 지역을 나의 승인 하에 돌아다닐 수 있고, 너희들 명의의 계좌도 압류해제하여 원활한 경제활동을 보장할게.”


“대신 족쇄 같은 걸 달아두겠지.”


“당연하지. 통제에서 이탈할 경우를 대비해 전자발찌를 채울거고, 24시간 내내 대함 미사일이 너흴 겨누고 있으니 머리는 안 굴리는 게 좋을거야.”


“으…… 내가 아는 자유와는 너무 다른데…”


“제한적인, 못들었어?”


“우선, 우리 둘이서 상의 좀 해도 될까?”


“맘껏 해.”


세인트루이스와 호놀룰루가 머리를 맞대고 이 제안의 합리적인가 꼼꼼히 따진다.


얀순은 그런 그녀들을 보며


“줘도 못 받아먹을 거면 그냥 안 한다 하던가, 직접 집으로 보내줄 수도 있, 에휴… 말을 말아야지.”


라고 말하며 이마를 마저 문지른다.



.



.



.



.



.



.



“야. 적당히 하지?”


그녀들의 대화는 얀순의 예상과 달리 꽤 길게 이어졌다.


“그러니까… 엔터프라이즈가 이걸 알면…”


“저 여자의 제안을 수락하면 우린 해군에서 공군으로 이관될 거고, 공군의 보호도 받을 수 있겠지. 그러면서 지휘관 군도 겸사겸사 보는거야.”


“뭐? 참나, 내가 너흴 왜 지켜줘? 웃긴 년들이네, 이거.”


“으… 어떻게 해야될지 모르겠어…”


“그러면, 역제안을 해도 될까?”


“미쳤어?! 우리 처지가 처지인데…!”


“하, 정신이 제대로 나갔구나, 진짜.”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결론은 얀순의 뒷목을 더욱 당기게 만들었다.


호놀룰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세인트루이스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얀순을 향해 말했다.


“만약 우리가 그대로 794에 돌아간다면, 엔터프라이즈한테 정보를 버젓이 넘기겠지?”


“정보? 하와이에 오빠가 있다, 끝. 이게 다잖아. 추적해보니까 정보수집으로 보이는 활동은 전혀 안 하던데, 그새 머릴 굴려?”


“...안 되네. 음, 럭키 루에 걸맞지 않는 하루야.”


“아니! 아까부터 왜 그러는거야?! 오늘 뭐 잘못 먹었지!?”


“푸흐, 미친년, 웃기려는 거면 만점을 줄게.”


얀순은 저 어이없는 모습을 보고 생각했다.


얀붕에게도 그렇고 계속 턱도 없는 제안을 하다가 까이는 세인트루이스가, 어떤 속셈이 있어서 저러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겉으로 보기엔 어디 아픈건가 싶지만,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그 노력이 가상하여, 그녀는 불청객들에게 소정의 선물을 주었다.


“그래, 너희들이 다시 794로 가봤자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겠지. 그러면 뱃속에 있는 아이도 죽을거고, 오빠가 많이 속상할거야. 근데 난 오빠의 기분이 상하는 게 제일 싫거든.”


“너희 세명 모두, 내 권한으로 794로부터 보호해줄게. 대신, 비밀친구는 무조건 해야 돼.”


-......


“대답?”


“이러면, 지금 상황에서 제일 최선이니... 안 할 이유가 없지?”


“응… 안전이 확보됐으니까… 안전과 많은 걸 교환하긴 했지만...”


“난 훨씬 전부터 한다 했다구~”


“좋아, 잘 지내보자. 친구들아.”


얀순의 ‘비밀친구’는 학창시절부터 그녀가 여왕으로 군림하기 위해 사용하던 방법이다.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제일 많이 받아먹지만, 친구보다 노예에 훨씬 더 가깝고, 자유는 이름만 자유이며, 주로 그녀가 자존감을 높이거나 얀붕에게 잘 보이고 싶을 때 개처럼 구른다. 한마디로 ‘병 주고 약 주고’이다.


그리고 아주 당연하게도, 세 칸센, 세 희생양은 이러한 진실을 몰랐다.


“친구가 된 기념으로, 발찌부터 차볼까?”


“엣, 지금부터… 시작이야…?”


“괜찮아! 길어야 몇시간이면 적응돼.”


“그래도 썩 내키진 않아.”


“10초 내로 착용하지 않으면, 창문 밖에서 미사일이 날아올거야.


“잠깐만, 잠깐만! 바로 찰게! 바로 찰테니까 조금만 진정해봐아…!!”


“음, 생각보다 디자인이 괜찮은데?”


이미 ‘비밀친구’화가 상당히 진행된 뉴저지가 얀순의 명령을 거든다.


얀붕이 눈치채지 못한 뉴저지의 전자발찌엔 U.S. AIR FORCE라는 얀순의 유사 낙인이 음각으로 진하게 남겨져 있다.


미 해군에서 미 공군으로 압류당한 그녀들의 처지를 제일 잘 보여주는 증거이다.


“다 찼어?”


“어색해…”


“응.”


“그럼 당장 여기서 꺼져. 오빠가 뺏은 카드도 돌려줄테니까, 내가 호출할 때까진 얼굴 볼 생각하지 마.”


“뭣...! 에, 당신들 누구야?!”


“지휘관 군이 아닌 남자의 터치는 싫은데…”


얀순의 말이 끝나자 정장을 차려입은 거구들이 들어와 세인트루이스와 호놀룰루의 수갑을 풀어주고 밖으로 끌어냈다. 


“어라, 난 왜 안 데려가지? 리비, 혹시 일이 또 있어?”


뉴저지는 남겨두고.


“뭐야, 안 꺼져?”


“힉, 아, 아니었네…! 알겠어! 나중에 봐 리비…!”


말을 또 한 후에야 뉴저지도 부리나케 나갔고, 마침내 혼자 남게 된 얀순.


새로 탄 커피를 들고 다시 창문 앞 의자에 앉아, 바람을 쐬면서 한모금씩 홀짝인다.


-슈우우우웅!


-위이이이잉!


“하와이에 왔는데, 오빠랑 있진 못하고 귀 찢어지는 소리만 듣고 있네.”


“알파 폭스 호텔, 라이트닝! 언니! 장관 언니!”


“?”


그때 귀에 꽂힌 이어피스에 삼총사의 일원인 라이트닝의 해맑은 목소리가 재생된다.


아직 자신의 발명품들에겐 가면을 쓴 채로 활동하는 그녀인지라, 방금전의 일을 모두 넣어두고 침착한 말투로 수신한다.


“라이트닝, 알파 폭스 호텔, 용건이 뭐죠?”


“임무 끝났어! 랩터 언니가 그러는데 추가 임무 없으면 친구들이랑 놀아도 된다 했거든! 그래서 그런데…”


“흠… 그것 때문에 연락한거군요?”


“헉, 응! 역시 장관 언니는 늘 한 수 앞을 내다보고 있구나!”


“후후, 해변에 착륙하는 걸 허가할게요, 라이트닝. 날씨는 기온 섭씨 25도, 구름 한 점 없고, 30도 방향에서 3노트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시야는 15마일, 활주로는 매우 깨끗하고, 트래픽은 칸센 1명과 전술인형 1명 뿐이에요.”


“정말?! 와아아아! 장관 언니 사랑해!!”


“재밌게 노세요. 물론 안전이 제일 우선인 거 아시죠?”


“당연하지! 고마워 언니~ 라이트닝 아웃!”


“...알파 폭스 호텔 아웃. 어쩌다가 이런 귀여운 애가 나왔을까? 의도하진 않았는데 말이야.”


“그런 김에, 나도 바다나 가볼까…”


아까의 짜증을 시원하게 날려주는 라이트닝에게, 얀순은 그녀가 제일 원하는 선물을 주었다.


그리고 희미한 웃음과 함께 오늘의 마지막 트래픽이 활주로를 박차오르는 걸 본 후, 라이트닝을 따라 바다로 나섰다.


얀붕에게 몸매를 어필하기 위한 수영복도 준비해왔지만, 이건 아직 입을 시간이 아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챙겨두고, 수수하지만 각선미를 잘 드러내는 원피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발을 시작으로 천천히 바다에 몸을 담군다.


잠시 수영을 하면서 몸을 바닷물에 적응시키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돌고래 튜브에 몸을 얹어 하와이의 강렬한 햇빛에 피부를 태운다.


“어! 장관 언니이이이이~!”


“어서 와요, 라이트닝.”


“언니도 바다 올 거였으면 말을 하지!”


“후후, 미안해요. 친구들은 어디 갔어요?”


“제트스키랑 보트 가지러 갔어! 그럼 나도… 꺄하하하! 완전 시원해!”


마침 프릴이 치렁치렁 달린 귀여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라이트닝이 나타나 그녀의 곁에 입수한다. 말 그대로 해변까지 비행한 후 착륙한 덕에 현장에서 빠르게 올 수 있었다.


잠시 후 그녀의 단짝들인 호넷과 SOPII도 제트스키와 바나나보트를 타고 환호를 지르며 모습을 드러낸다.


-앙!


“헉, 벌써 왔어?!”


“라이~ 트~ 닝! 얼른 타! 어, 올리비아도 있네?”


“이 튜브 귀엽다! 어디서 산 거야?”


“지휘관님이 사주신거에요.”


“뭐라고?! 지휘관이?!”


“오빠가 튜브를 사줬어?!”


“지휘관이 사줬다고?!”


마침내 완전체를 이뤄 신나하던 삼총사가 얀순의 말에 충격을 금치 못한다.


가면에 제대로 속고 있는 그녀들에게 이 사실은 믿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럼요.”


“어쩌다가?! 그나저나 지휘관 완전 나쁘다! 우리한텐 안 사주고!”


“맞아! 나도 튜브 갖고 싶은데!”


“그럼 지금 바로 오빠한테 가서 튜브 사주라고 하자!”


““오!””


“지휘관님은 숙소에 계실거에요. 한 번 가보세요.”


“응! 고마워 올리! 다들, 지휘관 혼내주러 가자!”


“출바알~!”


-부아아!


“...바보들.”


연적이라고 여기기엔 많이 부족한, 그이에겐 자신과 같은 여동생 취급일 삼총사이다.


사실 그녀도 당장의 얀붕이 어딨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럴싸한 곳으로 찍었는데, 삼총사는 철썩 같이 믿고 제트스키를 타며 사라졌다.


“올리인지, 리비인지, 뭔지, 내 이름은 얀순인데…”


“오빠 보고 싶다… 하, 왜 어제 피하고 다녀서 분위기 어색하게 만들고…!”


얼굴에 착 달라붙은 가면으로 인한 정체성 혼란, 사랑하는 그이를 향한 그리움과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 등등,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그녀.


당연히, 해변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수많은 수컷들의 눈에 띄어 많이 성가시게 되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랴, 양아치들이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여성을 지나가랴?


그녀답지 않게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얀순은 천하태평하게 물장구나 조금씩 치면서 얀붕을 만날 생각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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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매우매우 당연하지만 NTR 전개 그런거 없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