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이것 하나만큼은 기억해라.”

 

“우리는 ‘저들’과 섞일 수 없는 운명이야.”

 

“미안하구나, 아직 어린 네게 이런 말만 남기고 떠나서...”

 

아버지의 크고 거친 손이 내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리를 나서는 아버지의 등은 평소보다 무거워 보였다. 

 

어린 나이였지만, 직감적으로 이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만남이 되리라 느낄 수 있었다.

 

어두운 거리를 급히 나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역시나 아버지의 모습은 영영 볼 수 없었고,

 

대신 흉흉한 소문 하나만이 인간과 뱀파이어 사이를 배회했다. 

 

수백년간 군림한 장로 뱀파이어중 하나가, 죽음을 맞이했다고

 

그리고 시해자는 다름아닌, 인간이라는 소문이었다.

 

 

 

 

 

 

 

 

 

 

“으으...”

 

어깨와 허리가 뭉친 듯 찝찝한 통증이 몰려와, 잠에서 깬 나는 몸을 뒤척였다. 

 

‘우리 집 침대가 이렇게까지 싸구려였나?’

 

그다지 질이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아늑함이 있는 편이었는데, 느껴지는 감각이 평소와는 심히 이질적이었다.

 

없는 소재라도 채워 넣은 매트가 아니라, 꼭 돌바닥에 몸을 뉘인 것처럼 좀이 쑤시고 불편한 감각이라고나 할까?

 

피곤한 나머지 침실에 가지도 못 하고 바닥에서 잠이 든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말 그렇다기엔 머리에 밴 배개의 감촉이 뚜렷하게 느껴지기에 미묘했다.

 

노숙을 한것도 아니고, 배개를 챙길 여유는 있는데 침대에 누울 겨를은 없었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애초에 내가 노숙을 할 리도 없다. 잠든 사이에 입맛 다시는 뱀파이어 눈에 걸리기라도 하면 죽기 십상이니까. 그런건 자살행위와 별 다를게 없다. 

 

‘...그러고보니 배개도 원래 이런 감촉이었던가?’

 

온 몸이 뻐근한 데 반해, 머리맡 만큼은 평소보다도 편안해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의문스러움에 손을 가져다 대 쓸어 보았더니, 무언가 일반적이지 않은 독특한 소재인 듯 했다. 

 

부드러운데 면이랑은 좀 다르고, 쥐면 말랑거리는게, 이걸 뭐라 해야할까?

 

아 알 것 같다. 딱 사람의 살결 같은 감촉이다. 이거 계속 만지고 있으니 기분이 좋은...

 

‘음?’

 

기하급수적으로 몰려오는 궁금증에, 나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밤이었다. 그거야 당연하다. 원래 세상은 항상 밤이니까.

 

시야를 좀 더 옮기는게 좋을 것 같다. 슬적 눈동자를 굴려 배개를 쥐고 있는 손을 바라봤다. ‘아, 이거 확실히 살결인데?’ 탄력까지도 확실하다. 허벅지 살일까? 근데 난 왜 이런걸 배고 있지?

 

남아있던 잠결이 달아나고, 절로 눈이 부릅 떠졌다. 옆으로 돌아누운 자세였던 나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잘 잤어?”

 

나는 문자 그대로 ‘우왓!’ 하는 우스꽝스런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고, 참은 숨을 몰아쉬듯 호흡이 거칠었다. 

 

어제와 같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새하얀 소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자 뚜껑이 열린 관도 눈에 들어왔고, 동시에 그동안의 기억이 몰려오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정신없이 도망치다 여기까지 왔는데, 저기 보이는 관에서 눈 앞의 여자애가... 그리고 관에서 나왔다는 건...” 

 

어안이 벙벙한 채 서 있던 나는 바보같이 얼타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달았다. 품에서 리볼버를 꺼내 들어, 떨리는 손으로 소녀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총알이 이제 몇 발 남았지? 저 뱀파이어는 강할까? 역시 이 성은 함정이었나? 도망친다면 살 수 있을까?’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얗게 변하면서, 잠시 물러갔던 두려움과 긴장감이 다시 한 번 몸을 잠식해갔다. 

 

손의 떨림이 갈수록 심해져 방아쇠나 당길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반면에, 총구 앞에 선 괴물에게 공포의 기색 따윈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너, 누구?”

 

뱀파이어가 입을 움직였다. 차분한 것을 넘어, 무심함에 가까운 어조였다. 

 

그리고 물론, 지금의 나에게는 상대의 말에 대꾸할 여유 같은건 없었다. 공포가 말문을 틀어막았으니까.

 

시간이 지나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뱀파이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더니 “안 들려?” 라고 말하며 나를 향해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커져가는 인영을 직시하자, 시야가 종이처럼 구겨졌다. 눈의 초점이 고장난 것처럼 맞춰지지 않았다. 

 

‘제길, 가까이 오지마... 오지...’

 

떨림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키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쏴야 한다. 더 가까이 오기 전에...

 

타앙-

 

그것이 나의 의지였는지, 위기감에 경도된 내 몸이 멋대로 움직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윽고 나는 쏘았다. 

 

공이가 뇌관을 치며, 연소되는 화약의 추진력을 타고, 총알이 직선 궤도를 그리며 나아갔다.

 

인간이 기술력이 집약된 그 속도는 무엇이든 꿰뚫을 수 있을 것처럼 기세등등했다.

 

어디까지나 거대한 석벽을 뚫지 못하고, 요란한 소음과 먼지를 동반한 채 정지할 때까지의 이야기지만.

 

그렇게 내 비장의 발악은, 꼴사납게도 목표물을 지나쳐 성의 벽면을 적중시키는데 그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뺨을 스치며 지나가기는 했지만, 흘러내리던 피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상처 부위로 다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부위가 봉합되며 눈 깜짝할 새 상흔이 지워졌다. 

 

다시 한 번 급히 방아쇠를 당겨 보았지만, 위용찬 격발음이 아닌 짤깍거리는 초라한 소리가 대신 울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되새겨줄 뿐이었다. 

 

“하, 하하...” 

 

몸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아까 입술을 너무 꽉 깨물었는지, 입술 틈으로 피가 새어나왔다. 혀에 닿은 피의 맛이 씁쓸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를 향해 다가오던 뱀파이어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결국 어찌되던 죽을 운명이었던 건가?

 

모든 저항의지를 잃어버린 나는 눈을 감은채, 그저 고통없이 죽기만을 바랐다. 

 

잠시 후 머리 위에 무언가 올라간 것이 느껴졌다. 그대로 들어올려져 온 몸의 피를 빨리게 될까?

 

“...?”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내가 우려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머리 위에 올라간 무언가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헝클어뜨렷다. 낯설지만, 언젠가 경험해 본 적 있는 감각이다. 

 

나는 괴물에게 쓰다듬어 지고 있었다.

 

잠시 후 쭈그려 앉은 괴물이 내 얼굴을 마주보았다. 회색 눈동자를 통해 나의 얼빠진 얼굴이 비춰 보였다.

 

“이거... 아까워.”

 

괴물은 피가 흐르고 있는 나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더듬더니, 머리를 기울여 혀로 내 피를 햝아 먹었다. 잠시 후 고개를 떼자, 입술에 난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상처...?’ 그리고 정말 뒤늦게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그동안 도주하면서 얻은 온 몸의 상처가 아무런 흔적 없이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뭐가 어떻해 된 거지? 저 뱀파이어가 치료해 준 건가? 왜?’ 

 

마주앉은 소녀에게서 날 해칠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나의 혼란스러움은 점점 심화되어만 갔다. 

 

아까까지의 나였다면 무슨 미친 생각이냐고 책망을 할 판단이겠지만, 도저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던 나는, 잠깐의 고민끝에 눈 앞의 뱀파이어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너... 무슨 수작이야? 상처 없이 넘겨야 한다거나, 그런 명령이 있었던 거야?.” 

 

나의 말에, 소녀는 그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명령...? 무슨 뜻?”

 

“시치미 떼지 마, 이대로 적당히 붙잡아 뒀다가 가문의 추적자들에게 넘길 생각이잖아?”

 

“추적자..?”

 

대화는 계속해서 평행선을 달렸고, 상황에 대한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못 하고 있었다.

 

“날 쫓아오던 녀석들 말이야. 의상이 워낙 화려해서 한 눈에 알텐데...”

 

“...”

 

나의 말에 소녀는 ‘흐응?’ 하며 무언가에 집중한 듯 무릎을 끌어 안은 채 눈을 감았다.

 

“아...” 

 

그러고는 이내 무언가 알아낸 것처럼 감았던 눈을 다시 떳다. 

 

“바깥의 불청객들을 말 하는 거라면... 여기까지 못 올거야.”

 

“못 온다고?”

 

“마법, 걸려 있어. 외부인은 성을 볼 수도, 들어올 수도 없어.”

 

단정적인 어조로, 소녀는 그리 말했다.

 

“그런 마법이 걸려 있다면, 내가 성에 들어온건? 나만 들여보내 주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건... 모르겠어.”

 

말이 통하질 않았다. 나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이건 꿈이고, 현실의 나는 집 안 침대에 누워 있다고 보는게 그나마 현실성이 있지 않을까? 

 

알쏭달쏭 하기만 한 내 심경을 뒤로하고, 다시 소녀가 나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넌 누구야? 이름은?”

 

이름이라, 생각해 보니 어제도 저 소녀는 내가 누구냐고 물어 봤었지. 그것까지 포함하면 이걸로 세번째 구하는 답변이 된다. 

 

애초에 내 목숨은 저 소녀의 기분에 달려 있는거나 마찬가지고, 그렇다면 비위에 맞춰 주는 편이 현명하다. 이름 정도야 별 문제는 없겠지. 

 

“윌, 내 이름이야”

 

원하던 답변을 들은 소녀는 기억하려는 듯 이름을 되뇌었다. ‘윌... 윌...’ 하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 왔다. 

 

“고마워.”

 

이름 하나 알려 줬다고 뱀파이어에게 감사를 받다니, 상당히 신선한 경험이었다. 

 

상대의 이름은 들었으니, 이번엔 내가 물음을 구해야겠지.

 

“별 것 아닌데 뭘, 네 이름은?”

 

‘이름’이라는 키워드에, 소녀는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숙였다. ‘이름... 나의...’ 하고 속삭이는 듯한 혼잣말이 얼핏 들려왔다. 

 

그녀의 작은 입이 움직일때 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들었다. 

 

“이름... 내 이름... 엘리.”

 

나는 그에 대한 간결한 감상을 전했다. 

 

“엘리... 좋은 이름이네.”

 

내 말이 전해지자, 소녀의, 엘리의 양 눈이 크게 떠 졌다. 별 것 아닌 변화였지만, 아까까지의 졸린 듯 무심한 눈과는 확실히 대비되었다. 

 

‘어... 괜한 말을 한건가?’ 나는 멎쩍어 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생각해 보면 낯선 사람에게, 그것도 인간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좀 그러려나? 실수였을지 모른다.

 

“응.”

 

그러나 엘리는 미소로, 아주 조금이지만 입가에 확실한 호선을 그린 채 나의 말에 화답해왔다. 

 

처음으로 보게 된, 새하얀 소녀의 웃음기 있는 얼굴이었다. 

 

 

 

 

 

 

 

 


“...”

 

서로간에 통성명을 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그 뒤로 나와 엘리의 사이에선 미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녀는 말수가 있는 편은 아닌 듯 했고, 나 역시 낯선 이와 담소를 나눌만한 정신은 아니었기에,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더 말을 트기엔 무리인 것 같았기에, 나는 정적의 틈에서 못다한 생각을 찬찬히 가다듬었다. 

 

일단 저 뱀파이어는 내가 도망쳐 온 영지에 속한 자는 아니다. 이 곳에서 깨어나는 걸 다름아닌 내가 직접 목격 했으니까.

 

그렇다고 나에게 따로 목적을 둔 것 같지도 않았다. 자신이 먹을 생각이었다면 기회는 차고 넘치게 있었고, 의도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합리적인 추측은, 내가 정말 우연히 이 뱀파이어에게 피를 먹여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 이라고 밖엔 생각할 길이 없다. 세상물정 모르는 것 같은 저 태도도 그렇고. 

 

‘일단은... 한 숨 돌렸다 봐도 되는건가?’

 

지금껏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채 도주만을 반복해왔다 보니, 간만에 찾아온 이 고요함이 굉장히 낯설었다. 

 

언제라도 마음만 고쳐먹으면 날 산 채로 삼켜벼릴 수 있는 상대를 목전에 두고 늘어져 있는건 또 어떤가 싶긴 하지만... 더 이상 경계심을 곧추세우고 있기에는 정신적인 피로가 한계치였다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나는 양 손깍지를 배게삼아 바닥에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이전에 누웠을 때 만큼 머리맡이 부드럽지는 않았다. 무심코 소녀를 슬쩍 바라보자, 아까까지 닿아 있었던 허벅지의 맨 살결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는 다급히 시선을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이제와 말하기 뭣하지만, 저건 좀...’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총성이 들릴 만큼 험악한 사태였던 터라(나 혼자 일방적으로 위기감을 느꼈을 뿐이겠지만) 의식할 틈이 없었지만, 저런 꼴인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두 남녀, 아무도 없는 방, 가까운 거리, 천조각 하나 걸치치 않은 소녀... 일괄적으로 요소들을 나열 했을 뿐인데도 상당히, 아니 몹시 위험한 현장이 아닌가.

 

“그... 저기 말야.”

 

나는 상대방쪽에서 적당히 알아들어 주길 바라며, 고개를 돌린 채 손가락으로 소녀의 몸을 가리켰다가, 방향을 옮겨 내 옷자락을 툭툭 건드렸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수신호였다. 

 

“...?”

 

... 역시나라면 역시나겠지만, 알아들은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아니, 그 이전에 본인의 문제를 전혀 깨닫지도 못한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수신호를 의아하게 여긴 엘리가 내게 몸을 기울여오는 바람에, 몸의 살결이 더욱 적나라하게 보여 와 더욱 곤란한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옷! 옷 말이야... 뭐라도 걸치는게 낫지 않겠어?”

 

정말로 부끄러웠지만, 이성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끊어지기 직전이었기에, 나는 결국 직언을 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이러는 편이 훨씬 나았을 거라는 뒤늦은 후회가 몰려왔지만, 별 수 없는 일이다. 숫기 없는 자신을 탓 할 수밖에.

 

“알았어.”

 

다행히도 이번엔 정말로 내 뜻을 알아준 엘리가, 내게서 거리를 벌려 주었다. 내가 왜 얼굴을 붉히고 있는지는 끝까지 이해하지 못 한 것 같지만. 

 

다만 말을 꺼낸건 좋은데, 이 성에 멀쩡한 옷가지가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외견만 보아도 이 장소는 상당히 오래된 것 같아보였고, 직접 본 바로도 올라오는 동안 멀쩡한 물품 같은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럼 이 낯간지러운 상황을 계속 감내해야 하는건가?’ 그렇게 여러가지 좋지 않은 상황을 상정하고 있던 차, 지근거리에서 탁- 하고 손가락을 튕구는 명쾌한 음이 들려왔다. 내가 낸 소리는 아니었다.

 

소리가 울리고 잠시 후, 바닥에서 연기와 같은 검은 기운들이 스멀스멀 올라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기현상에 놀란 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운은 점점 강해지더니, 머지않아 안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넓은 방 안이 흐릿한 어둠으로 메워져갔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피어오른 기운들이 한 점으로 빨려들어가며 뭉치기 시작했다. 그 중심지에는 엘리가 있었다.

 

무절제하게 어둠을 토하던 것들이 엘리를 기준으로 응축되고, 변형되어 가는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추상적으로 몸을 덮을 뿐이었지만, 서서히 한 벌의 의복으로서 형태를 빚어갔다. 

 

그 형상이 갈수록 섬세해지고, 점차 움직임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어두운 기운들이 눈 깜짝할 새 공간에서 자취를 감췄다. 대신 승화하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에게 이전까지는 없었던 한 벌의 드레스가 입혀져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질에, 장식이 절제되어 있는 흑색의 드레스였다. 

 

마법과도 같은, 그 기묘한 현상들을 지켜본 나는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존재를 깨운걸까?’ 


순식간에 단장을 마친 그녀를, 나는 호기심과 경애, 그리고 약간의 두려움을 담아 바라보았다.

 

의복에서 나오는 기품이나 중후함 때문일까? 순전한 직감에 불과하지만, 그녀에게서는 지금까지 얼핏 보아온 귀족 뱀파이어들 특유의, 아니 그보다 격이 높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밤의 지배자, 흔히 뱀파이어를 비유하는 그 표현에 담긴 의미를, 나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고스란히 깨달을 수 있었다. 어둑한 세상을 다소나마 비추는, 핏빛 달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창 너머로 새어들어와 그녀를 비추었다.

 

‘...’

 

단장을 마친 그녀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올려 어두운 하늘속 가장 밝은 존재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눈 조차 깜빡이지 않은 채, 적지 않은 시간동안 그녀는 달을 응시했다.

 

인간적인 감상으로는, 빈말로도 아름답다곤 할 수 없는 풍경이었지만, 확실히 저 붉은 달에는 저도모르게 멍하니 바라보게 만드는, 홀리는 듯 한 마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 역시 시선에 담긴 풍경이 주는 뭐라 못 할 인상에, 어떠한 의식의 흐름을 타고 휩쓸려 버린 걸지도. 

 

겸사 나도 함께 고개를 들어, 저 커다란 달과 별, 그것들이 자아내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서서히 움직이는 구름과, 그보다 더 느긋하지만 마찬가지로 움직고 있는 별과 달리, 어제도, 그저께도, 1년, 100년, 그보다 더 오랜 과거에도 같은 자리에 떠 있던 달은, 오늘도 완벽히 동일한 위치에서, 변함없이 음울한 핏빛을 일정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언제나 거기서 거기지, 하늘이란건.”

 

안타깝게도, 내가 저 광경에서 무언가 인상을 받기엔, 살아온 내내 같은 장면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감흥을 느끼지 못 한 나는, 원래대로 고개를 내렸다.

 

“처음 봐.”

 

그러나 나는 또다시 고개를 돌리게 되었다. 다만 이번엔 하늘이 아니라, 바로 곁에 있는 소녀에게로.

 

“달이 붉고... 아침도, 오지않았어...”

 

그 입에서 이어지는 단어들을, 나는 고스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리야...? 아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