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저 멀리 보이는 센트리올의 본가, 세 개의 첨탑이 빛나는 유서 깊은 귀족의 성이다. 

 

“도착했나보구나.”

 

 센트리올 공작이 몸을 일으켰다. 

 

“조심하세요, 아버지.”

 

 세나가, 그리고 옆에서 그를 보좌하는 보좌관이 그의 몸을 부축했다. 공작은 손을 들어 그 두 사람을 만류했다.

 

“공작 씩이나 되는 자가 마차에서 내리는 일 하나 제대로 못한다면 세간에서 뭐라고 떠들겠느냐. 그냥 두어라.”

 

 엄연히 원정에서 돌아오는 입장이다. 그 총 책임자가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는 것은 통치자로서 용납할 수 없었다. 

 

 공작은 부축은커녕 지팡이도 없이, 마차의 문을 열게 했다.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그 다음에 펼쳐지는 것은 도열한 하인과 하녀들의 모습, 그리고 깔끔하게 갈아입은 집사 필립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그리고 공녀님.”

“오랜만일세, 필립.”

 

 그는 공작의 오른팔이자 공작가의 내정을 총괄하고 있는 자였다. 비슷한 연배의 두 사람은 곧 하인들의 사이를 뚫고 성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가시죠, 아가씨.”

 

 뒤따라 나온 보좌관의 말에 세나는 조용히 성을 올려다보았다.

 

‘나 혼자 돌아왔구나.’

 

 카를은 전쟁터에 남았다. 그 휘하의 병력은 고작해야 천오백, 그 이상을 남겨주는 것은 불가능했고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동부 출신의 지휘관들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 혼자.’

 

 주먹을 꼭 쥐었다. 전쟁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그를 돕지 못하는 자신이 무력하고, 또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가씨.”

 

 뒤에서 보좌관이 말했을 때 비로소 그녀는 감상에서 깨어났다. 고개 숙인 하인들과 하녀들의 사이로, 그녀는 홀로 걸어 성 안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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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센트리올 공작이 돌아왔다는 소식은 곧 영지 전역으로 퍼졌다. 그리고 그들이 초전에서 거둔 승리 또한 천 명 이상의 야만족을 척살한 대규모 승리로 둔갑되어 있었다. 

 

 곧 여러 지방 영주들이 찾아와 대규모 회의가 열렸고 그 자리에는 노공작은 물론이고 세나 역시 기사단의 단장의 직함을 가지고 참가해야 했다. 

 

 회의가 시작하기 무섭게 누군가가 말했다. 

 

“서쪽 변경에 지휘관을 파견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곳에는 이미 카를 경이 지휘관으로 가있습니다만.”

 

 그 발언에 대해 책상 가장자리에 앉은 남색 머리의 남자 하나가 말했다. 그는 가르프라는 자로 여기 모인 10여명의 영주들 중에서 유일한 서쪽 지방 영주였다. 몇 년 전에 죽은 아버지 대신 가르프 영지를 통치하게 된 그는 동부 영주들의 논조에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 자는 갓 스무살이 된 애송이가 아닙니까. 제 말은 경험 많고 충심이 깊은 제대로 된 지휘관을 파견하자는 말입니다.”

“그 말씀은 카를 경의 충정을 의심하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가르프 경, 말씀이 지나치시구려. 아무리 카를 경이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지만 서쪽 방어선 자체를 관리하기에는 그 관직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관직을 올려서 해결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겨우 스무 살 먹은 기사에게 천 명이 넘는 병사에 대한 지휘권을 준 사례는 없소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오!”

 

 가르프가 반박했지만, 거의 1대 9에 가까운 싸움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발언권을 계속해서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는 동부 영주들에 비해 경제력도 빈약하고 인구도 적은 서쪽 지방의 통치자였을 뿐이다. 

 

“그러는 가르프 경은 서쪽 방어선에 어느 정도의 병력을 파견하셨소이까. 듣기로는 채 80명이 안 된다고 하던데, 우리는 아무리 못해도 200명 가량을 차출했는데 이 회의에서 가르프 경은 마치 우리와 동등한 발언권을 얻은 것처럼 말씀하시는구려.”

“이민족들의 공격으로 입은 피해를 몰라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 영지에서 죽어나가는 영지민의 숫자가 어느 정도인 줄 알고 그런 망발을!”

 

 눈이 뒤집힌 가르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치자 회의장의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다. 그러자 보다 못한 노공작이 나섰다. 집사 필립이 공작의 수신호를 보고 영주들을 진정시켰고, 곧 그는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가 너무 과열되어 있구려. 안그래도 이제 막 약관에 든 카를 경에게 그런 막중한 임무를 맡길 수밖에 없는 현실에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소. 그럼에도 카를 경은 흔쾌히 그 일을 맡아 전장에 홀로 남았으니 그 명예를 드높여주어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이 일은 내 뜻을 존중해주길 바라오.”

 

 공작이 직접 나서니 동부 지방 영주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작이 직접 나서서 제지하는 방식은 회의에서 몇 번 사용할 수 없었다. 방금의 발언으로 노공작은 자신의 카드를 한 장 소모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여파는 다음 안건에서 크게 드러났다.

 

“공작 저하.”

“말씀하시오. 멜레오르 백작.”

“지금까지 미뤄져왔던 논제입니다만, 공작령 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세나 아가씨의 혼인 문제를 논의할 때가 아닌가 사료됩니다.”

 

 공작 옆에 앉아있던 세나의 입술이 떨렸다. 스무살이라는 나이는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왔다. 멜레오르 백작은 거침없이 말했다.

 

“세나 아가씨께서 충분히 그간 능력을 입증해오셨음은 잘 알고 있으나 혼사를 하지 않음은 가문의 대를 이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중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가씨가 혼기를 지났음에도 아직 소식이 없으니 공작령은 물론 저 동쪽의 수도에서도 걱정하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의 말에 다른 귀족들은 모두 동의하는 눈치였다. 센트리올 공작은 말했다.

 

“허나, 마땅한 인물이 없지 않소?”

 

 세나는 속으로 한 이름을 끝없이 외쳤지만,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 자리가 뒤집어질 것이 분명했다. 

 

“제가 추천할 만한 걸물이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멜레오르 백작이 나섰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종들에게 말했다.

 

“어서 들어오시게 하라.”

 

 세나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누가 들어오든 자기 선에서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텨볼 생각이었다. 그녀 자신이 결단코 거부하면, 완전히 막을 수는 없을 지라도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오랜만에 뵙습니다, 센트리올 공작님.”

 

 그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황갈색 피부에 건장한 키, 그리고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였다. 그를 알아본 노공작은 곧 눈을 크게 떴다.

 

“자네는...”

“예, 그렇습니다. 예전에 이 성에 잠시 몸을 의탁했던 메논입니다.”

 

 호쾌한 목소리로 두 손을 모아 인사한 그는 고개를 돌려 세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염치불구하고 다시 찾아뵈었습니다.”

 

 시선을 피하리라 마음 먹었던 그녀는 쉽사리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세나 자신과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10년 전, 한 귀족가의 내분으로 인해 쫓겨난 한 소년이 북쪽으로 도망쳐 센트리올 공작령에 몸을 숨겼다는 소식은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고 공작과 왕의 지지를 얻어낸 그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분열을 일소하고 다시 한 가문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사실 또한, 잘 알려져 있었다.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자, 앞으로 센트리올에 충성을 다할 사위가 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세나가 열 살이었을 때, 그녀는 저 메논이라는 남자와 친구 사이였다. 

 

“오랜만이야, 세나.”

 

 그래서 그녀는 그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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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 살아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