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이 꽃 나 닮은 것 같지 않아?"

"글쎄, 전혀 아닌 것 같은데."

"왜?"

"당연히, 네가 더 예쁘니까."

"정말~"


날씨가 풀리고 봄이 오니,

커플들도 덩달아서 신이 난 모양이었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나들이 나온 연인들 투성이었다.


"나참."


나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저런 닭살돋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니.

바보도 아니고.

내게 커플들은 쓸데없는 짓만 해대는 바보천치들일 뿐이었다.

영원하지도 못하고 언제 바뀔 지도 모르는 마음 따위에.

영원할 거라고 거짓말을 하고. 그걸 믿고.

서로 멋대로 기대하고, 실망하고.

논리적이지 않은 바보들 뿐이었다.


"도둑이야!"


내 뒤에서 한 여성의 비명소리와 함께 후드를 덮어쓴 그림자 하나가 나를 지나쳤다.

이런 벌건 대낮에 소매치기라니, 간도 참 크네.

지금 제지하려면 어렵잖게 할 수 있긴 하지만 어차피 남의 일, 

나는 신경 끄고 갈 길을 가려 했다.

지갑 간수는 나처럼 철저히 해놔야...어?


없다. 내 지갑이. 

남을 비웃었지만, 나도 보기좋게 당해 버렸다.

방금 전에 지나칠 때 당한 게 분명했다.


"이 자식이...잘도 저질러주셨겠다..."


피가 끓어올랐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라 신경쓰지 않으려 했건만,

이렇게 당한다면 갚아주지 않고서는 분이 풀리지 않는다.

도적이 지갑을 도둑맞는다니, 성문 어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골렘조차 웃을 일이었다.


나는 아까 그 그림자가 지나쳐 간 방향으로 뛰며 추적마법을 발동시켰다.

혹여라도 이런 일이 있을까봐, 내가 아끼는 몇몇 물건에는 마법을 걸어두었다.

길어야 하루면 꼬리를 잡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나는 인생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으로 지갑을 하나만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예비 지갑 4개에 함정용 지갑 2개까지 가지고 다녔다.

사실, 그래서 훔쳐진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내 것에 손을 댄 게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너 임자 만난 거다."


나는 이를 살짝 갈며 흔적을 따라갔다.

흔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고,

교외의 뒷골목으로 이어졌다.

구석진 곳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보아 2인조인 듯 했다.


"이런다고 진짜 올까?"

"내가 그 사람 성격을 잘 아는데, 무조건이야.

무조건 찾아와."

"그 사람이 찾아와서 너를 송장으로 만들면 어쩌려고?"

"에이, 그 정도의 사람은 아니야."


일반적인 도둑들의 대화내용이라기엔 지나치게 이상했다.

나를 말하는 건가?

처음엔 손 좀 봐줄 생각이었지만,

이렇게까지 되자 훔쳐간 사람이 누군지가 더욱 궁금해졌다.

나는 기척을 숨긴 채 그들을 덮쳤다.


"!"


그들이 이미 내 기척을 눈치챘을 때에는

그들 중 한 명의 목에 서슬퍼런 단검의 날이 닿아있었다.


"뭐하는 놈이냐."

"히익...!"


잡히지 않은 한 명은 동료를 내버려두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갔다.


"이제 진짜 혼자가 되어버렸네.

동료애도 없나 보지?"


나는 그들을 비웃으며 칼날을 그의 목에 더 바싹 들이댔다.


"자, 그럼 정체를 말해주실까. 

아, 그 전에 내 지갑도 돌려받고 말이지.

허튼 짓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툭!


그는 주머니에서 내 지갑을 꺼내 앞에 던졌다.

하지만 이상한 것이, 이쯤 되면 보통 손이라도 떠는 게 보통인데,

이 자는 별로 긴장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뭐지?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굳이 왜 던졌지?"

"그, 그야 이 상태에서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가까이서 들으니 생각보다 앳된 소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다.


나는 계속 그에게 단검을 겨누며 천천히 거리를 두었고,

지갑을 집어들었다.

내용물을 확인하려는 그 때,


번쩍-


"얄팍해!"


나는 씨익 웃으며 잽싸게 반사 마법을 사용했다.

함정이라기엔 너무 뻔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자의 일그러진 표정을 감상하려는데,

웃고 있었다. 어째서...?


팡!


작은 폭발음이 일어나더니,

매캐하고 구린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이건 마법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었다.

재빨리 호흡기를 막아보지만, 소용 없었다.

유독가스인가 싶어 정신이 순간 아찔했지만,

그것과는 결이 전혀 달랐다....전혀.


"구웨에엑-"


구역질이 올라올만큼의 심각한 구린내.

이것도 독가스라 부를 수 있을 만한 정도의 악취가 내 후각을 엄습했다.


"푸하하! 드디어 한 방 먹였네요."


후드를 뒤집어 쓴 도둑은 배를 잡으며 크게 웃었다.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악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콜록! 콜록! 너...진짜 뭐하는 놈이야..."

"제 목소리도 잊으신 거에요? 서운하네요~"


그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전혀 예상 외의 얼굴의 등장에,

나는 기침을 하면서도 혀를 찼다.


"오랜만에 뵙네요. 스승님."

"그러게...정말..정말...반갑구나?"


생글거리며 짐짓 폼을 잡고 인사하는 그의 모습에

좀 전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울화가 치밀어,

나는 이를 갈면서 대답했다.


그래, 나는 이 녀석을 알고 있다.

꽤 성장하긴 했지만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청년.

눈에 띄지 않는 검은 머리에 특징적인 갈색 앞머리 몇 가닥.

무엇보다 사람 낚기 딱 좋은 저 웃음까지.

그는 내가 8년 전 거둬 기른 제자였다.


"일단 같이 가시죠. 

회포도 풀고 싶고, 듣고 싶은 얘기도 많으니까요."


그는 눈물 콧물로 엉망인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의 손을 뿌리치며 일어섰다.


"됐어. 혼자서도 걸을 수 있다."

"고집은 여전하시네요...

뭐 정 그러시다면야."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그와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어찌보면 지금이랑 비슷했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고아는 매우 흔했다.

이전에는 마왕과의 전쟁으로 인한 고아도 꽤 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고아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전쟁 이후, 일자리를 잃은 용병들이 대거 유입되어 도시의 치안은 개판이 되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저곳에서 쌈박질이 일어났으며,

아예 이런 싸움판만 돌아다니며 즉석 내기를 거는 도박꾼들이 생겨났고,

한술 더 떠서 지하 투기장까지 생겨나는 도시도 있었다.


투기장에서 한 몫 챙긴 용병들은 두 가지 유흥을 주로 즐겼다.

술과 성.

사창가는 유례없는 대 호황을 맞았고,

도시의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심심찮게 겁탈당하는 여인들이 생겨났고, 

그보다 더 많은 불륜이, 그리고 이들의 결과로 사생아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보다 더더 많은, 사창가의 행위에서 비롯된 연고 없는 자식들이 생겨났다.


이런 아이들에게 선택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태어난 사창가에서 심부름을 하며 크다가,

결국 본인도 그 곳의 일부가 되던가.

노예로 팔려나가던가.

거리의 부랑자로서 도시의 어둠 속에 동화되어 살던가.


나는 세번째 경우였다.

엘프 용병과 사창가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혈통으로 인해 10살이 되면 노예로 팔려나갈 운명이었다.

내 처지를 일찍 깨달은 7살이 되던 날 밤, 몰래 탈출했다.

노예 상인에게 한몫 챙길 생각으로 나를 꽤 아끼며 기르던 포주는

당연히 대노하며 나를 찾으려 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숨어다녔다.


도망친날 밤, 제일 먼저 한 것은

내 혈통의 증거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엘프의 뾰족한 귀 일부를 짧게 잘라내는 것이었다.

하수도 속에서 신음을 죽이고 끔찍한 고통을 참으며, 

나는 각오를 다졌다.

땅에 구르고, 짓밟힐 지언정...나는 자유롭게 살겠노라고.


그렇게 나는 거리에 동화되었다.

살기 위해 도둑질을 배우고,

사냥과 약초학을 내 몸으로 익혔다.

끔찍하게 질색하는 내 혈통의 질긴 생명력과 자연의 친화력은

그나마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거래를 배우고, 사기를 당하면서,

나 또한 거짓말과 속임수에 능숙해졌다.

모든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가끔 겪는 실패는 몸에 여러 상흔을 남겼지만,

처음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참을 만했다.


어떤 때는 주점에서 한동안 허드렛일을 하면서,

용병들, 술 취한 사람들의 환심을 사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얻어냈다.

사창가에서 어깨 너머로 본 것들을...이렇게 활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정보는 때로는 마법, 때로는 싸움 기술,

때때로는 도둑질할 건수에 대한 정보였다.

정식으로 배우는 것들에는 한참 모자란 것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것보다는 몇 배는 나았다.


그렇게 10여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나는 꽤 이름난 도적이 되어 있었다.

현상수배까지 걸릴만큼.

하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

애초에 이름도 얼굴도, 바꾸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이 있었다.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었다.

도시를 어지럽히던 용병들은

군경의 세력 아래 진압되었고,

과도하게 발달한 지하 산업 역시

꼬리를 감추게 되었다.


무엇보다 길드 시스템이 확립되기 시작하면서,

용병들이 난동을 피울 원인도 없어졌다.

내가 몸 담고 자라온 도시의 어둠은 어느새

햇빛에 밀려 사라지고 있었다.

세상은 나에게 다시 한번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나는 오래 고민할 것 없이, 

시대에 순응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둠에 더 숨어있을 필요 없이,

합법적으로 내 능력을 인정해주고,

신분도 보증해준다는데, 나쁠게 없지 않은가?


"하아...."


하지만 생각과 달리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길드에 등록하는 것까지는 별 문제 없었지만,

사람들은 도적을 꺼려했다.

이전 경력을 묻는데, 초짜라고 말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용병 출신이 많다 보니, 눈치가 빨랐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전에 하던 짓이 사기, 도둑질, 뒷조사, 암살, 정보캐기...

따위의 음습한 일들 뿐이니.


파티 가입 자체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고,

받아준다 해도, 고용과 피고용인의 형태지,

동료라는 관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인간관계에 질려가는 와중에, 그를 만나게 되었다.

내 지갑을 훔친 그를.




그는 나를 주점에 이끌고 갔다.

대로변에 있는 큰 주점이 아닌,

단골 장사로만 먹고 살 듯한 허름한 주점이었다.


"여기, 익숙하지 않아요?"

"글쎄, 딱히 생각나는 게 없다만."


그는 다소 실망한 눈치였지만,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같이 지내던 시절에, 

어느 날에 이곳에 저를 데리고 와서는

혼자만 술을 드셨죠."

"아, 그랬지."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이 녀석을 제자로 두기로 한 지 얼마 안되어,

길드에서 바가지에 가까운 의뢰를 수행한 나는

머리를 식히려 이곳에 왔었다.

꼬마를 주점에 데려오는 사람은 없었으니,

다들 이상하게 생각했었지.


"제게도 한 잔 달라고 떼를 쓰니까, 꿀밤을 먹이며

나중에 한 사람 몫을 하게 될 때 한 잔 사주시겠다고 하셨었죠."

"아하. 그러니 약속을 지켜라?"

"그냥...그렇다고요.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죠."

"그래, 내가 사마. 그래도 어른이 되서 자기가 한 말은 지켜야지."


내 말에 그는 살짝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쳐다 봐? 나도 그 정도 상식선은 있는 사람이란다."

"아뇨...조금 의외라서요."

"도대체 네 머릿속에서 내 이미지는 어떻게 되어 있는 거니.."

"그거야 뻔하죠. 배배 꼬이다 못해 세계수 가지보다 더 꼬인 사람."

"이 녀석이 못하는 말이 없어."


나는 짐짓 화난 체를 하며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복잡하고 오묘한 기분이었다.

겁쟁이 꼬맹이였던, 남자아이가 어느 새 이렇게 청년이 되어서 돌아왔다.

반가운 것도 반가운 것이었지만,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그는 내 손을 거쳐간 제자였기에,

길거리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이라도 듣게 되었다면 꿈자리가 사나웠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용케 잘 살아남았다는 것에 다소 안도했다.

그러면서도, 그때와 변함없이 여전히 장난기 많고 능청스러운 그의 모습이

약간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그는 살짝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내 손길을 받아들여 가만히 있었다.


"그 때는 완전 꾀죄죄한 꼬맹이였는데."

"어쩔 수 없죠. 버려진 꼬마아이였잖아요?"

"딱히, 탓하는 건 아니다. 애초에 나도 그랬었고."


어떤 시대가 되었건, 아이가. 

그것도 버려진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한정되어 있다.


"여전하신 줄 알았더니, 꽤 변하셨네요.

사람이 좀 부드러워 지신 거 같기도 하고.."

"시간이 몇 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니.

오히려 네가 바뀐 게 적은 것 같다만."

"뭐...저도 이래저래 변한 게 있기 한데요..

사실 쓰다듬어주실 줄은 몰랐어요.

이제 애도 아닌데."

"아직 내 눈에는 그래도 꼬맹이로 보여서.

너는 몰랐겠지만, 네가 잘 때 가끔 쓰다듬곤 했다.

미우나 고우나 일단 내 제자였으니까."

"오...지금 살짝 감동할 뻔했는데요."

"얘는."


주문한 술이 상에 놓여,

나는 그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우리는 술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같이 지내던 시절의 얘기부터, 최근 주변상황에 대한 얘기까지.


"그래도, 굳이 이런 방식을 써야 했는지 모르겠구나.

이럴 정도면 굳이 내가 사는 데 찾아오면 될 것을..."

"뭐...그것도 그렇지만, 스승님은 워낙 의심도 많으시니까,

곧이곧대로 믿어주시지도 않았을 거 같고...

뭣보다, 첫만남이 생각나서 더 극적이지 않아요?"

"뭐, 그렇기야 하다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넘겼다.

알싸한 끝맛이 목에서 차올랐다..


"그 때랑 비교하면 많이 크긴 했지."

"그럼요, 예전의 제가 아니라니까요?

오늘도 한 방 먹으셨잖아요."

"그건..."


이유를 대보려 했지만,

무엇을 대도 같잖은 핑계처럼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후...예전엔 그냥 하찮은 꼬맹이였을 뿐인데...

언제 이렇게 못된 것만 배워먹어서는."

"업보라 생각하세요.

훈련이랍시고 허드렛일이란 허드렛일은 다 시켰었잖아요?"

"내가 널 거둬줬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진짜 못되먹으셨네요."

"그게 불만이었으면 진작 나갔어야지.

이 건방진 녀석아."

"그 스승에 그 제자란 거죠 뭐."

"한 마디를 안 져요 그냥."


나는 술잔에 남은 술을 다시 들이키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잔을 내려놓으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내가 분위기를 바꾸자, 그는 살짝 긴장한 듯 얼굴의 미소가 무너졌다.


"무슨 용건으로 나를 만나러 온 거냐?

돈이라도 빌리러 온 건 아닐 테고."

"그건 아니에요. 저도 제가 먹고 살 만큼 이상은 벌어요."

"아까처럼 소매치기해서?"

"아이, 그건 연출이었다니까요.

처음에 도둑맞은 사람도 다 제가 고용한 거에요."

"쓸데없이 공을 많이 들이는구나. 그래서?"


두 시간이 넘는 대화 동안 느낀 것은,

그가 본론의 이야기를 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추억 얘기를 하면서, 뭐랄까...나를 시험하는 느낌이었달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얘기가 나올 때마다

눈에 띄게 실망하는 표정을 지어놓고는,

얼른 표정을 바꾸곤 했다.


"본론은?"

"..........."


그가 침묵을 유지하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간다. 술값은 내가 계산하마."

"잠, 잠깐만요! 얘기할게요! 얘기하면 되잖아요!"


내가 강경책을 쓰고 나서야,

그는 마음을 정한 듯 한숨을 쉬었다.


"마스터, 여기 한 잔 더 주세요. 독한 놈으로."


나는 웃기는 놈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얘기하기 전에 하나만 약속해주세요."

"무슨 얘기길래 이렇게 요란을 떠는 건지 원...

그래, 말해봐라."

"웃지 않겠다고....장난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세요."


그의 말을 듣고나니 더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그래, 약속하마. 그러니 이제는 말해줄 수 있겠지?"


타이밍 좋게 가지고온 술을 한모금 들이키고는,

그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내가 그를 제자로 받아들이고 5년 후,

나는 그를 독립시켰다.

내가 가르칠 수 있을만한 것은 다 가르쳤으니,

나머지 앞길은 그에게 맡겨진 셈이었다.


그리고 그는 도적으로서 활동하다가,

길드 시스템 도입의 소식을 듣고 그 누구보다 발빠르게

변화에 편승했다.

그가 얻은 지식과 경험은 던전을 안전하게 탐험하는데

꽤나 큰 도움이 되었고, 

이내 이름이 모험자들 사이에서 꽤 오르내릴 만큼의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의 이름은 타국의 귀족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 이름을 들은 그는 그를 당장 자신의 장원에 초청하게 된다.

이유는 다름아닌 상속 문제.

귀족 가문의 상속 문제에 왠 타지인이 개입하냐 싶지만,

그는 놀랍게도 이 가문의 적자였다.

가문 내의 권력 암투의 희생양으로 사생아와 바꿔치기 당해,

타국에까지 보내진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지만 들으면 좋은 거 아닌가?"

"뭐...그렇긴 하죠. 저도 나쁠 건 없다 싶어서 그냥 수락하기도 했고..."


하지만 상류층의 격식과 생활은 이미 야생의 생활에 익숙해진 그에게는

너무도 답답하고 머리 아픈 것들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계속 그곳에 남으려고 한 것은,


"돈."

"그렇죠. 많을수록 나쁠 거 없잖아요.

이래저래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고..."


그에게는 꿈이 있었다.

다시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거리에 나돌아다니지 않기 위해,

고아들을 위한 보육원을 건립하고 싶어했다.


그 귀족은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사후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쓰든,

가문의 경영에 크게 관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모험자인 그의 성향을 배려한 조건이었다.

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하나 있었으니.


결혼.

그 귀족은 자신의 대를 이을 손자를 원했다.

그의 성장 배경과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가문의 경영에 소홀해질 것은 불보듯 뻔했기에.

다른 가문의 배우자와 결혼해 대신 경영을 맡고 이어나갈 씨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혼 까짓 거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몰랐네요.

저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랑만큼은 자유로워야 된다는 주의라서요."

".....아하."


나는 이제야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결혼에 대한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는 결국 야반도주를 택했고,

다시 지금에 와 있다...라는 건데.


"그럼,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거 아니냐?"

"그렇죠."

"그게 누군데?"


내 물음에 그는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스승님...이런 쪽에는 눈치 진짜 없으시네요."

"?"


나는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고 있는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스승님, 처음 만났을 그 때부터 쭉...연모해왔습니다.

제 청혼을 받아주세요."


어느새 꺼낸 건지 반지까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사고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그대로 굳어있다가,

그제서야 상황을 이해하고는 소리쳤다.


"뭐????"


이미 술집 안의 사람들은 이 보기 힘든 진귀한 장면에

전부 주목하고 있었다.


"일, 일단 여길 벗어나자."


나는 황급히 술값을 치뤘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고 싶어

거스름돈도 받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게냐.

나에게 청혼이라니."

"저는 진심이라구요.

예전에 약속하셨잖아요.

자신을 한 번이라도 이기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고.."


나는 이마를 짚었다.

완전 상상 외의 상황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때 가볍게 뱉은 그 말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안 된다. 돌아가거라."

"하지만 약속은..."

"다른 거라면 뭐든지 들어주마.

하지만 그건 안 된다."

"......."


침울해져 있는 그를 내버려 둔 채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충격이 심했는지, 그는 길바닥에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이러다가 다음 날에 시체로 발견될 것만 같아서,

나는 그의 몸을 부축했다.


"오늘은 내 집에서 머물고, 내일 돌아가거라.

윽, 왜 이리 무거운 게냐.."


어느 새 내 몸보다 커져 버린 그의 몸을 이끌고,

나는 안간힘을 쓰며 내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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짹짹-


아침이 밝았다.

평소와 다른 느낌에,

나는 흠칫하고 잠에서 깼다.


옆에 누가 있다는 것을 이내 깨닫고,

기억을 되짚어 그가 내 제자라는 것을 기억해낸다.

설마 술김에 실수를 했나 싶어 내 몸을 보니,

어제 입고 나간 옷에서 외투만 벗은 모습이었다.


"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많이 피곤했긴 한 듯했다.

대충 벗긴 그의 외투와 내 외투가 소파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이러고 있자니, 어제 그의 고백이 떠오른다.

내게는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었다.

나 자체가 그런 것에 관심도 없고, 헛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라고 그런 게 처음부터 싫었던 건 아니다.

사창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면 그러고 싶지도 않아도...

그럴 수 밖에 없다.


다시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그의 얼굴을 보았다.

왠지 헤어질 때 답지 않게 눈물을 보이더라니.

속에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나.


"..........."


그의 머리칼을 살짝 쓸어 넘겨본다.

꽤 잘생겼다. 그러면서도, 

아이같은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이 한켠에 남아있는 것만 같다.

아직도 내게 붙잡혀 눈물고인 눈으로 쳐다보던 첫만남 때의 그의 얼굴이 훤하다.


그 때의 나도 무슨 변덕이었을까,

원래라면 지갑을 돌려받고 꿀밤과 함께 놓아주곤 했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내 과거를 그에게 투영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있는 동안, 나는 여러가지를 잊을 수 있었다.

진절머리나는 인간 관계도,

손익도, 비즈니스도 잊을 수 있었다.

그와의 관계는 그런 게 아니었기에.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도 되고,

사람들 눈을 신경쓸 필요도 없는 편한 관계.

어쩌면 나는 평범한 인간관계가 고팠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섭다.

또다시 갑자기 변화하기엔,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손에 피를 묻힌 적도 있었고, 

살아남기 위해 차마 말로 하기 힘든 짓도 했다.

내가 그와 맺어지는 건....그를 더럽히는 일일 뿐이다.

내가 어제 그의 얼굴을 보고 느낀 복잡미묘한 감정은

어쩌면 동경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같은 불우한 과거들을 겪고도, 이상과 순수를 간직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동경.

나는 살기 위해 그런 것들을 다 내다버렸는데.


나는 소리없이 침대에서 빠져나와 나갈 채비를 했다.

옷을 갈아입지 않았기에, 겉옷만 입으면 되었다.

나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네가 이걸 읽을 때쯤이면, 나는 아마 이 지역에 없을 게다.

다른 의뢰가 있거든. 오랜만에 얼굴 봐서 반가웠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네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사과하마.

나는 너와 어울리지 않아.

세상의 절반이 여성이다.

나보다 좋은 사람은 차고도 넘쳐.

그러니 결점 많은 나 대신,

다른 사람들을 찾아보려무나.

부디 좋은 짝 찾고, 네 꿈도 이루길 바란다.

여기 네가 어제 훔친 내 지갑을 증표로 남겨두마.

다른 소원이 있거든, 이걸 가지고 오면 들어줄테니.

결혼하게 되면 꼭, 다시 찾아가 축하해주마.

그러니, 건강하게 잘 지내거라.

내 처음이자 마지막 제자야.

                                                 - 스승-



방을 나서기 전, 나는 뒤를 돌아보려다 그만두었다.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다.






저번 거에 이어서 도적 편 써오려고 했는데,

도저히 분량 조절을 못하겠어서 두 개로 나눔.

시간 되는 대로 또 올릴게.

또 1화빌런이 될지는 몰?루?

그리고 이거 시리즈 기능 어떻게 쓰는지 좀 알려주라.

이거 창작물에는 못 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