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라이브

1편) https://arca.live/b/yandere/20272627

2편) https://arca.live/b/yandere/20278579

3편) https://arca.live/b/yandere/20292314

4편) https://arca.live/b/yandere/20308780

5편) https://arca.live/b/yandere/20332296

6편) https://arca.live/b/yandere/20346540

7편) https://arca.live/b/yandere/20370355

8편) https://arca.live/b/yandere/20462819




9. <물망초>



  소유의 잔.


  황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의 컬렉션 중 하나인 그 물건은 만물萬物이 있다는 라티느 제국의 황가에서도 구하기 힘들 정도로 희귀한 물건이면서, 동시에 지고至高한 마력이 깃든 고대의 아티팩트.


  그 잔에 두 명의 피를 섞어 서로 나눠 마시면 두 명 사이의 관계에 따라 '주종'이 형성되고, 한 번 '소유'된 '종'은 '주'에게 모든 것이 종속되어버리고 만다.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죽음 이후까지도.


"…라더구나."


  베로니카가 말했다.


"죽음까지도…, 넌 내 것이라고 분명 그 때 선언했었지."


"…그랬었, 지…, 요…."


  불타는 황궁.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복면인들을 뒤로 한 채.


  무기력하게 바닥에 쓰러진 셰인의 얼굴 반쪽은 검게 불타 형체가 없었다.


  모든 복면인을 쓰러트리고 베로니카에게 복귀하려던 셰인의 뒤에서 복면인들의 최후의 수단이었던 마법 폭탄이 터지고.


  셰인은, 말 그대로 몸을 바쳐서 베로니카와 폭발 사이를 온몸으로 가로막았다.


  그 결과는 신체 절반의 손상.


  더 이상 이목구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타버리고 만 셰인의 반쪽 몸뚱어리였다.


  베로니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왜, 왜 그랬느냐…."


"…무엇을요."


"…내가, 네게 나 대신 죽어달라고 명령이라도 했더냐?"


"…주인을 지키는 방패, 가…, 주인이 지켜달, 라…, 명령한다고, 주인을 지키는 일은…, 없지요."


"…너는 사람이지 않느냐."


  베로니카가 소리쳤다.


"너는 물건 따위가 아니다! 나의 유일한, 나를 바라봐줄 수 있는, 나의 유일한 이해자였다! 너를! 단 한 번도! 물건으로 생각한 적 없다!"


"…후훗."


"나는! 널! 너를…, 물건 따위로, 생각한 적 없다고…."


"…후후, 후…, 그거, 분에 넘치는 영광이군요…."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 우리 둘이서 이 황궁이란 바다에 붉은색 흉터 한 줄을 남겨보자고, 네가 그러지 않았더냐."


"…맞지…, 요…."


"왜…, 약속을 지키지 않고 떠나가느냐."


  베로니카는 셰인을 붙잡고 얼굴로 그의 배를 감쌌다.


"왜…, 약속을 어기고 떠나려 한단 말이냐…."


  잿더미가 된 그의 몸이, 물방울 모양으로 더욱 색이 진해졌다.


"…원래 오늘 너와의 혼약을 발표하려 했지."


"…그것도, 분에 넘치는 소리군요…."


"너를 내 평생의 반려로 삼아, 남은 평생 동안 내가 앗아간 생명들에게 속죄하며 살아가려 했다."


  아비규환의 황도.


"내가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대피 행렬을 따르지 않고 맨 마지막까지 황궁에 남아있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속죄.


"내 업보에 대한 속죄."


  그녀가 죽인 생명들을 추모하기 위해 들고 일어난 민중들.


"나는 그들을 위해 죽어줄 수는 없지만, 최소한 내가 빌미를 준 이 참사에 대해서 눈을 돌리지 않고자 했어."


  내가 저지른 죄를 나는 회피하지 않고자 했어.


"…내 행동이 불러온 그들의 분노를, 직접 두 눈에 담으려고 했어."


  밖으론 욕하고 폄하하는 가면을 쓰면서도.


  멍청하다며 그들을 비하하고 욕하면서도.


  베로니카는 자신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를 피하고 싶지 않았다.


  셰인이 그러길 바랬으니까.


  그녀의 유일한 이해자가, 그러길 바랬으니까.


  베로니카는 오열하고 있었다.


"…흐흑. 이럴 줄 알았다면 그러지 말 걸 그랬어."


  분노하고, 슬퍼하며, 절망하고, 그리고….


  후회.


  자신의 죄에 대한 후회.


  자신의 과오에 대한 후회.


  셰인을 데리고 제일 먼저 대피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후회.


  하지만 후회는 고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는 것이다.


"…살아날 것 같긴 하느냐."


"…아무래, 도…, 힘들 것, 같군요."


  완전히 소산된 팔 한쪽과 숯처럼 검게 타버린 몸의 한 쪽.


  가망은 없었다. 치료 사제가 아닌 대신관 열 명이 달라붙더라도, 지금의 셰인을 살리는 것은 요원하리라.


"후후후, 내 인생도 정말로…."


  베로니카는 웃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눈에선 눈물이 쉬지 않고 흘러 내리고 있었다.


"…너도 떠나가려나?"


  어머니처럼.


"너도 내 어머니처럼 내 로켓 속에, 내 기억 속에만 남아서 다시 나를 이 무섭고 냉혹한 황궁에 홀로 남겨두려냐."


  싫구나.


"네가 없는 세상은 생각하기 싫구나."


  밉구나.


"이렇게 떠나가려는 네가 밉구나."


  슬퍼서.


"나를 두고 떠나가려는 너를 보면, 이렇게나 슬퍼서…."


  …….


  …차라리.


"저들이 원하는 대로 너와 함께 이곳에서 죽으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아니면.


"같잖은 참회 따위는 집어치우고, 너를 이렇게 만든 저 모든 악마들에게, 나의 고통을 백분지 일이나마 알게 해주면, 지금 이렇게 떠나가는 너의 마음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나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말해다오."


  나는.


  나는 네가 없는 세상에서 나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왜냐하면,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 따윈, 널 만난 이후의 내겐 없었으니까…."


  베로니카는 울었다.


  서럽게 울었다.


"…황녀님."


  베로니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황녀님."


"……."


"……베로니카."


"…셰인."


"미안해."


  셰인은 남은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렸다.


"너를 두고 가서 미안해."


  그의 주인을 두고 먼저 부서지는 모자란 물건으로서.


"너에게 좀 더 충성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가 충성하는 사람을 두고 가는 모자란 신하로서.


"너에게 좀 더 사랑을 주지 못해서 미안해."


  사랑하는 사람을 마지막까지 지키지 못하는 모자란 사람으로서.


  그리고….


"…너만의 셰인이 너를 두고 떠나가게 되어서, 정말 미안해."


"…흐흐흑, 흐흐흐흑…."


  가장 찬란한 황도의 가장 비천한 아이.


  모두에게 버림받아 눈 속에서 죽어가는 어린 아이였던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준 널 두고 가서.


  미안.


"나 없이도 베로니카는 해낼 수 있을 거야."


  이런 나라서 미안.


"저 황궁이란, 제국이란, 대륙이란 바다에…, 너만의 색채를 남기는 걸."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


"나는 믿을게."


  네가 가는 길에 마지막까지 함께 하지 못해서 미안.


  아직 난 네게 다 보답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떠나가는 나를 용서하지 말아줘."


"…잘 가."


  황궁의 이단아.


  황궁에서 가장 비천한 자.


  황녀의 물건.


  황녀의 호위기사.


  그리고…,


"나의 셰인."


  셰인의 핏방울이 번졌다.


  마치 물망초 꽃의 꽃잎처럼.


"베로니카."


  사랑했어.


  먼저 떠나가는 날 부디 잊지 말아줘.


"응."


  잊지 않을게.


  내가 죽을 때까지, 죽고 나서라도 기필코 널 잊지 않을게.


  너를 다시 볼 때까지 날 기다려줘.


  그러니까.


  잠시, 아주 잠시 동안만….


  이별해있도록 하자.


  앞으론 절대 이별하지 않도록.


  다시 볼 그 날에 더욱 활짝 웃는 얼굴로 서로 마주 보기 위해서.


  그 때까지 잠시만.


  정말정말 잠시만….


"안녕."


  베로니카는 활짝 웃었다.


  셰인이 보는 그녀의 얼굴이 우는 얼굴이 아니었으면 해서.


  셰인도 웃었다.


  베로니카가 가져갈 마지막 그의 얼굴은 웃는 표정이었으면 했으니까.


  셰인은 죽었다.


  베로니카는 울었다. 세상이 떠나갈 것처럼.


  불타는 황도 속에서 그녀는 부모를 잃은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자신의 눈물로 세상의 모든 불을 꺼트릴 것처럼.


  뒤늦게 달려온 황궁수호기사단이 베로니카와 셰인의 시신을 추스른 것은, 얼마 뒤였다.





"그게 무슨 꽃이더냐, 셰인?"


  화창한 봄날.


  갑옷 사이에 낀 꽃을 보며 베로니카가 물었다.


"이 꽃 말씀이십니까?"


"그래. 푸른 빛이 아주 어여쁘구나."


  황녀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혹시 이름 알고 있느냐?"


"…평소 이미지와는 정말 다르시군요."


"너하고만 있을 때의 난, 조금 가면을 벗고 살고 싶거든. 그러는 너도 지금 다른 사람들이 볼 때와는 다르게 나와 말을 편하게 하고 있지 않더냐?"


"그것도 그렇지만요."


  황도 근처의 언덕.


  그곳을 오르는 두 명의 소녀와 소년은 해방감을 만끽했다.


"이 꽃 말씀이십니까? 글쎄요…."


  셰인은 골똘히 생각하는 듯 손을 턱에 짚고는 고개를 옆으로 기웃기웃거리며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이 꽃의 이름을 들었던 것은 같은데, 잘 기억은 나질 않습니다."


"피. 그런 게 어딨느냐.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하하, 그러게요. 알면 알고 모르면 모르는 건데."


  셰인은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 꽃이, 제 어머니께서 저와 아버지를 떠나가실 때 남겨두고 가신 꽃이시라더군요."


"…네 어미가?"


"네. 어느 날 갑자기 집에 온데간데 없고, 편지 한 장과 이 꽃만을 남겨두신 채 홀연히 사라지셨다고 하더군요."


  그는 웃으면서도 어딘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이 아이를 잘 부탁한다고…, 아이에겐 우리같은 이별을 겪게 하지 말자고, 그렇게 마지막 부탁을 남기시고요."


"…어미의 말을 잘 듣는 자식이 되어야지."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머니 얼굴도 뵙지 못한 천하에 둘도 없을 괘씸한 불효녀지만…, 물건까지 주인의 못난 점을 닮을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황녀님, 황녀님께서 못나신 점은 제가 알기론 단 하나도 없습니다."


"무, 무슨 말을! 부끄러운 소리나 하긴!"


"하하하."


  셰인을 두드리며 베로니카는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앞으론 그런 어수선한 얘기 같은 건 하지도 말거라!"


"하하, 예, 예."


  서로 투닥투닥거리며 선선한 바람을 타고 길을 걸으니.


  두 사람의 걸음은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어, 황녀님. 곧 정상인가 봅니다."


"그래?"


  바람을 타고 걸은 덕분일까?


  어느새 셰인과 베로니카는 언덕의 정상까지 마침내 다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정상의 그림자 너머로 펼쳐진 풍경은….


"와아."




  흐드러지게 핀 꽃밭.


  아름다운 파랑빛깔 꽃잎의 물결이, 들판의 바람을 타고 우수수 바람 소리를 내며 유려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평선 끝까지 뻗은 그 아름답고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저절로 셰인과 베로니카는 자리에 앉아 가만히 그 풍경을 감상했다.


  아름다웠다.


  그 단어 이외의 언어로 이 광경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


"……."


  시원한 바람을 등지고 셰인과 베로니카는 무릎을 모았다.


  하늘은 너무 높아서 아득했고 들판은 바람에 부딪힐 때면 물길이 흐르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문득, 셰인이 말했다.


"황녀님."


"왜?"


"기억났습니다."


"뭐가 말이냐."


"꽃. 제 갑옷에 있던 꽃의 이름 말입니다."


"무엇이더냐."


"물망초더랍니다."


"물망초?"


"예, 물망초."


  셰인이 베로니카를 돌아보았다.


"황녀님, 모든 꽃에는 꽃말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지나가는 말로 듣긴 하였다."


"먼 옛날,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꽃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준 시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꽃들이 상징하는 말을 하나하나씩 담아서요."


"그래서?"


"물망초에도, 꽃말이 하나 있다더군요."


"무엇이더냐."


"그건, 자아."


  셰인이 베로니카에게 물망초를 건넸다.


"그 말은 제가 건네드리는 이 꽃을 받아주시면, 그 때 말해드리도록 하지요."


"…귀찮게 하기는!"


  베로니카는 홱 가로채듯 물망초를 셰인의 손에서 낚아채 갔다.


"자, 이제 말해주겠느냐?"


"자아, 자아. 진정하시지요. 그리 성내지 않더라도 곧 말해 드릴테니."


  셰인은 옅게 웃었다.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잊지 말아요?"


"네. 그게 이 꽃의 꽃말이랍니다. 나를 잊지 말아요."


"…김빠지는구나."


"이 꽃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어느 지방에서 연인을 위해 꽃을 따주다가 크게 다쳐서 먼저 죽어간 연인이 이 물망초 꽃을 주며 이리 말했다더군요. '나를 잊지 말아요'. 그 연인은 평생 그 꽃을 간직하며 죽어간 연인의 유언을 지켰다고 하고요."


  휘이잉.


"……황녀님."


"왜."


"만일, 제가 황녀님의 곁을 먼저 떠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


"그 때가 온다면, 이 꽃을 보며 저와의 추억을 되새기면서, 부디 저를 잊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퍼억! 탱!


"아, 아악…, 아픕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기는!"


"쓰, 쓸데없다니요…. 서운합니다."


"…흥! 네 잘못이다. 이상한 말을 먼저 꺼낸 네 잘못. 네 죽음마저도 내 것이라고 분명 말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대답은요?"


  베로니카가 셰인에게 얼굴이 보이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잊지 않으마."


"뭐라고요?"


"잊지 않겠다고! 평생!"


"평생이요?"


"그래! 평생토록! 황녀의 말은 무겁다! 그러니 불길하게 이상한 말은 이제 제발 그만하거라!"


"하하, 약속하신 겁니다? 평생토록?"


"그래. 평생토록!"


"하하, 황녀의 말은 무거우니까요."


  셰인은 웃었다.


  베로니카도 웃었다.


  그래요.


  황녀의 말은 무거우니까요.


  이 꽃을 볼 때면 저를 떠올려주세요.


  이 꽃을 볼 때면 저와 함께 했던 기억에 잠겨, 다신 보지 못할 저를 추억해주세요.


  이 꽃을 볼 때면,


  이 꽃을 볼 때면….


"아아."


  맑구나.


  바람결에 흩날리는 이 푸른빛 물망초 꽃잎이 말해주던 것처럼….


  언젠가 도적같이 찾아올 그 날이 미처 대비하지 못한 우리를 파도처럼 덮치더라도.


  평생.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